소설리스트

75화 (75/225)

그 패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이 없었다.

명에 복수해야했다.

하지만 아버지 누르하치는 다른 선택을 했다.

그건 명에 대한 공격이 아닌 조선과의 화의에 기댄 것이었다. 

홍타이지가 입장에서, 아버지 누르하치는 과거와 달리 크게 약해진 것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몸이 예전같지 않았다. 

홍타이지는 생각했다.

곧 자신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심양의 밤은 깊어졌다.

1626년 6월 어느 날.

호주 서울, 내각 대회의실.

"국왕전하께서 말씀하신 정묘년의 환란은 다소 의아합니다. 어떤 근거가 있는지 정확히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으니까요. 그렇다고 외교부장인 제가 국왕전하께 불경한 뜻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흠흠."

수상을 비롯한 각료들은 외교부장의 말에 공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누르하치의 밀사가 한양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서울에 전달됐다. 국왕 우진은 후금이 영원성 전투에서 참패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몇가지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그 명령에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 있었다.

국왕 우진은 1627년 정묘년인 내년에, 조선의 북방에서 난리가 있을 것이라 예견했던 것이다. 조선 북방은 1624년에 이괄의 난으로 큰 곤욕을 치렀었다. 그런데 불과 3년만에 또 난리가 날지 모른다는 말이었다.

수상과 외교부장이 그 근거를 묻자, 국왕 우진은 다른 말로 대충 얼버무리고 넘겼다. 그럼에도 국왕 우진은 조선 부왕과 국방부장에게 기존 계획대로 하되, 북방의 경계에 만전을 기하란 서신을 보냈다.

이런 국왕의 행동에 수상과 각료들은 의아했던 것이다.

"자자..., 본 수상도 다소 의문이 있긴 합니다. 국왕전하의 말씀은 후금과 화친하되, 그들의 변심을 경계하란 뜻으로 받아들이면 될 듯 합니다. 정묘년에 무슨 변란이 있을 지는 알 수 없으나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정리하고 다음 안건으로 넘어갑시다."

수상의 발언에 각료들은 조용해졌다.

어차피 다른 안건들도 많이 남았고, 후금의 변심은 이미 철저하게 대비중 이었다. 

곧 각료들은 다른 안건을 토의하기 시작했다.

호주의 내각은 눈코뜰새없이 바빴다.

같은 날, 저녁.

호주 서울, 왕궁 집무실.

'역사는 변하지 않는 것일까?'

나는 후금이 영원성 전투에서 참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함했다. 

내가 그동안 바꿔놓은 수많은 역사들로 인해, 명과 후금의 역사도 바뀌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역시 '영원성 전투'란 역사적 대사건이 벌어졌고, 후금은 참패했다.

나는 가도의 모문룡을 멸했고, 명과의 관계도 결별 직전 수준으로 만들어놨다. 그저 형식적인 조공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와 반대로, 후금과는 화친을 기조로 활발하게 무역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동안의 보고에 따르면 후금과는 더 이상 좋을 수 없을만큼 친밀하게 지내고 있었다. 압록강 중류에는 공식적인 마시(馬市)가 열렸다. 이번에는 조선의 구식화포와 구식화약도 팔았다. 곡물 무역도 늘렸고 말이다.

그런데도 불안했다.

영원성 전투가 그대로 일어난 것을 보면, 홍타이지가 후금의 왕이 되고 정묘호란이 일어나는 것도 그대로일 것 같았다. 왠지 그랬다.

그래서 내각 보고를 받으면서 말한 것이었다.

차마 '정묘호란'이란 말은 못했다.

수상을 비롯해 누구든, 내가 '정묘호란'이라고 했으면 단번에 알아챘을 것이니까.

아마 국왕이 미쳤다고 할 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저,

"정묘년에는 큰 환란이 있을 수 있겠다." 는 식으로 에둘러 표현했다.

물론 근거는 없었다.

그 근거는 내 머릿속에만 있어서 문제였다.

나는 조선에 머무르고 있을 때부터, 부왕과 정충신을 필두로 새로운 북방군을 준비했다. 스페인의 테르시오는 물론이고, 후금에서 사온 말들을 대거 투입했다. 화포도 유럽의 캘버린을 개량해서 배치했고 화약은 인도에서 아주 싸게 대량으로 들여왔다. 

얼마 전 보고대로, 조선에는 해군을 포함한 5만 정예병이 준비되었다.

후금의 기습을 잘 경계하고 있으면 큰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었다.

만약 후금이 조선을 기습한다면, 원 역사의 정묘호란처럼 겨울철 압록강을 도하해서 올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래서 그에 맞는 전략전술을 마련해서 준비하라고 명령했었다. 그에 대한 준비보고도 이번에 함께 들어왔다. 이건 조금 안심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또, 지금은 왜 이리 불안한지 모르겠다.

나는 절대로 후금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과연 역사란 무엇일까?

그래, 역사의 복원력은 인간의 힘으론 어쩔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다 해야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다짐했다.

지도. 정묘호란 당시 후금의 침투경로

압록강 의주부터 정주, 청천강, 안주까지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후금의 진격로입니다. 감사합니다.

근대 시민권제도

1626년 6월 어느 날, 조선 의회.

의회 대회의장에는 의회 의장을 비롯한 모든 의원이 자리했다. 당연직 의원이었던 수상과 내각도 전원 참석했다. 대회의장 뒤쪽에는 신문기자들과 삽화가들이 있었다. 그들 모두는 흥분된 얼굴로 의장의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 1시간 전까지 계속된 토론이 끝나고, 방금 전 의원들의 무기명 비밀투표가 시작되었다. 투표함은 의장석 바로 아래에서 개봉되어 집계 중이었다. 그때, 의회 사무총장이 고개를 들며 개표결과가 담긴 종이를 의장에게 넘겼다. 드디어 투표결과가 발표될 모양이었다.

김희두 의장은 의회 사무총장에게서 넘겨받은 개표결과를 2명의 부의장과 함께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잠시 목을 가다듬고 의사봉을 3번 두드렸다.

땅!땅!땅!

"모두 자리에 착석해주시기 바랍니다!"

김희두 의장은 웅성거리는 의원들을 바라보며 착석을 권했다. 잠시 대회의장을 둘러보며 모든 의원들이 제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한 다음, 큰 목소리로 투표결과를 발표했다. 김희두 의장의 목소리는 몹시 떨렸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듯 들렸다. 

"그럼..., 투표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조선의 신분제 완전철폐와 한국-조선 시민권제도의 전면도입을 위한 조선 의회 제132호 법률안은 재적 150석에 찬성 142인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땅!땅!땅!  

와아아!

국왕전하 만세!

이건 아니야! 뭔가 잘못됐어!

흐흐흑!

김희두 의장이 법률안이 가결되었음을 선포함과 동시에 의사봉을 세번 두드르자, 대회의장 곳곳에서 다양한 반응이 표출됐다. 대부분의 의원들은 크게 기뻐하며 환호했다. 일부 의원들은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일부 의원들은 의장석을 향해 난입하며 소동을 피웠다. 그들은 '뭔가 잘못됐다'면서 재투표를 요구하거나 의장석으로 돌진하며 김희두 의장을 잡으려고 난동을 부렸다. 압도적 표차이를 믿지 못해 서로 멱살을 잡고 고성을 지르기도 했다.

그때, 의회 부의장 중 한명인 김자점 의원이 나섰다.

김자점 의원은 사대부 중에서도 한양 서인세력들을 규합해서 정당을 설립했고 그 정당의 대표를 맡았다. 김자점 의원을 포함해서 21명의 의원이 소속된 정당이었다. 이번 신분제 철폐를 위한 법률안은 김자점 의원이 주도한 일이었다.

"그동안 그렇게 많은 토론을 거쳐서 성안(成案)한 법률안 입니다. 이미 압도적인 다수결로 통과되었는데 어찌 이런 추태를 보이는 겁니까? 민의를 대표하는 우리 의회가 이런 것을 알면, 국민들이 어떤 말을 하겠습니까? 쯧쯧..."

김자점 의원이 선공에 나서자 반대표를 던진 의원들이 눈에 쌍심지를 돋우고 노려봤다. 반대의원들에게는 김자점이야말로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분명 사대부 출신으로써 자신들의 편이어야 할 사람이, 조정에 붙어 아양을 떠는 등 꼴불견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의 진짜 원수는 김자점으로 통했다.

김자점 의원은 반대의원들의 눈초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김자점 의원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의 태도는 자못 당당하면서도 알 수 없는 품격이 넘쳐흘렀다. 

"의회가 최초 개원한 이래, 사사건건 반대만을 위한 반대를 한 의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얼토당토않은 반대이유를 듣다가 자칫 실기할 뻔한 대사를 이제야 마무리지었습니다. 이 김자점은 아무 사리사욕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직 국왕전하, 한국, 조선의 국민들만을 바라보고 달려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법률안을 최초 발의한 의원으로 명기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의 당리당략으로 당쟁을 할 시간이 없습니다. 의원 모두는, 이 법률안이 빨리 자리잡을 수 있게 최선을 다해 내각을 도와야 합니다. 그 선두에는 이 김자점이 서겠습니다!"

짝짝짝!

우와아!

김자점 의원이 발언이 끝나자마자, 김자점이 속한 정당 의원들이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김희두 의장과 다른 의원들도 함께 박수를 쳤다. 김자점 의원은 흐믓한 얼굴표정으로 박수를 들으며 의장석을 떠나 단상 아래 좌석으로내려갔다.

대회의장 뒤쪽에 있었던 기자들과 삽화가들은 잽싸게 자리를 떴다. 이번 법률안은 조선 전체를 뒤흔들 대사건이었다. 각 신문사가 발행할 긴급호외는 불티나게 팔릴 것이 분명했다. 기자들과 삽화가들은 바삐 뛰었다.

단상의 김희두 의장은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이원익 수상을 비롯한 각료들과 악수를 하며 환담을 나눴다. 대회의장은 웃음꽃이 피었고, 오래도록 그 열기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렇게 조선 대변혁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조선 한양의 광장과 대로 주위에서는 호외를 파는 소년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따끈따끈한 호외요! 호외! 오늘 의회에서 '조선의 신분제 완전철폐와 한국-조선 시민권제도의 전면도입 법률안'이 통과됐습니다. 호외요!"

소년들이 키만큼 쌓아놓고 팔던 호외는 불티나게 팔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팔렸다. 한양 광장의 곳곳에서는 호외를 보고 있는 사람, 호외를 함께 보려고 기웃대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조선의 여러 신문사들은 한국에서 들여온 방식대로, 한 주에 1번 신문을 발행했다. 그래서 돌발적인 사건사고, 재해, 중요정책발표 등 세간의 관심도가 높다고 판단되는 소식을 재빨리 전달하기 위해서 '긴급 호외'를 제작한 후, 거리에서 판매했다. 한양 시민들도 한국의 서울에서처럼, 간략하게 '호외'라고 불렀다.

이번 긴급호외에는 김자점 의원이 발언하는 장면이 삽화로 그려지고, 김자점 의원의 발언이 대서특필로 보도되었다. 조선 팔도에서 김자점 의원의 아름다운 명성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었다. 조선의 신분제 혁파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의 일편단심에 열렬한 지지를 보내는 국민들이 대다수였다. 

그런 김자점이 차기 의장으로 유력하다는 보도는 심심치 않게 나왔다.

같은 날 저녁, 한양 북촌 김자점의 집 내실. 

탁!

김자점은 방금 들어온 긴급호외를 살펴보고 피식 웃으며 탁자에 내려놓았다.

긴급호외에는 김자점의 삽화가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김자점의 의사발언이 대서특필로 보도되었다. 긴급호외의 대부분이 김자점의 이야기들로 가득찼다. 김자점은 크게 만족하고 찻잔을 들었다.

똑똑!

그때, 김자점의 방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김자점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어서 들어오게."

방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다음, 말없이 밀봉된 서찰을 내려놓고 나갔다. 김자점은 탁자 옆의 서탁에 놓인 돋보기를 꺼내들었다. 

김자점은 아무런 말없이 밀봉된 서찰을 들어 개봉했다. 놀랍게도 그 서찰은 완전한 백지였다. 그럼에도 김자점은 놀라지 않았다. 그 후에 서탁에 깊이 둔, 작은 책자를 꺼내더니 어떤 장을 열었다. 

그리고 밀지를 펴서 그 밀지의 오른쪽 아래 구석에 적혀있는 이상한 글자와 작은 책자의 어떤 장에 쓰여진 부분을 비교했다. 김자점은 비슷한 행동을 두어번 더 한 이후에 작은 책자를 다시 집어넣고 서찰을 탁자위에 반듯하게 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방문이 다시 열리더니 아까 전의 그 사람이 작은 대접을 탁자에 놓고 다시 사라졌다. 김자점은 작은 대접에 담긴 하얗고 탁한 액체를 서찰 위에 조심스럽게 뿌렸다. 그러자 오른쪽 아래 구석의 이상한 글자를 제외하곤 백지였던 밀지에 글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자점은 그 글자들을 돋보기를 대어 유심히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 말했다.

"역시 정보국 조선지부장님께 붙길 잘했어. 국왕전하께서는 신인(神人)이시고, 조선지부장은 곧 국왕전하의 총신이 될 것이다. 나 김자점은 자손만대 영화를 누릴 것이야! 크하핫...."

그렇게 혼자 미친듯이 웃던 김자점이, 갑자기 심각한 얼굴표정을 지었다.

김자점은 오른 손으로 턱을 괴고는, 왼 손가락으로 '톡톡!' 탁자를 두드렸다. 이런 행동은 김자점이 고심할 때 보이는 버릇이었다. 그렇게 일각이 넘는 시간을 고심했다. 그런 김자점이 갑자기 일어나 눈을 번쩍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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