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4/225)

또 다른 붉은 화광이 그녀의 눈을 더욱 크고 빛나게 만들었고, 코와 입매는 음영으로 도드라지게 했다. 부드러운 음영으로 그려낸 듯한 얼굴과 턱선은 나의 갈증을 불러일으켰다. 나의 눈은 자신도 모르게 왕비의 얼굴에서 목덜미로, 다시 가슴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더 내려가려는 찰나...., 나는 간신히 낮게 헛기침하며 눈길을 거둘 수 있었다.

"크흠..."

왕비는 내 모습을 보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리고 소리 없이 웃었다.

나는 떤청을 부리며 툭 물었다.  

"무슨 책을 읽고 있었소?"

"이주민들을 위한 한글 소설입니다."

"아...그렇군요."

또 말이 끊겼다. 내가 지나치게 경박하게 행동한 것이 문제였을까? 나는 여자에게 말재주가 없었다. 내가 왕비를 집요하게 쳐다보면, 이내 고개를 돌리거나 푹 숙이고 말았다. 내가 배운 바로는 상대와 대화하는 기본은 눈을 마주치는 것인데...

그때, 왕비가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 보았다. 잠깐 우리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나는 친영례에서 눈을 살포시 뜨고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그 짧은 찰나에 수십수백차례나 달리 보이던, 그녀의 변화무쌍했던 얼굴 말이다. 우리 사이의 불꽃은 싸우려고 튀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 그녀는 고양이다.

나는 고양이의 목덜미를 쓰다듬듯 살며시 손을 올려 그녀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거 아시오? 현세의 가족은 전생에 원수였던 사람들이란 것을..."

나는 괜시리 왕비에게 쓸데없는 말을 하며, 천연덕스럽게 굴었다. 

왕비와 나를 이은 운명의 실타래는 누가 짠 것일까? 혹시 모른다. 내가 내뱉은 말대로 전생의 원수였을지도... 하지만 그것이 내 말처럼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냥 '그럴지도 모른다'가 맞는 말이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건 입증된다.

물론, 나만 알 수 있겠지. 아니, 그 귀신고래도 알 것이다.

내실의 불빛은 왕비를 아름다움으로 감싸버리듯이, 고요한 밤의 어둠을 불사르고 있었다. 그 감미로운 불빛이 왕비에게 물들수록, 나의 색정도 도를 더해갔다.

나는 왕비에게 더 할 말이 있었는데, 도저히 말을 잇지 못하겠다.

그래서 나는 왕비의 목덜미를 감싸쥔 두 손으로 그 턱을 당겨 올리며 내 머리를 내렸다. 그렇게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 엿보였다. 대체 뭐가 두려워서 그런지?  나는 짐짓 눈을 몇 차례 깜박이며 마음을 추슬렀다. 그리고 결심했다.

"흡!"

나의 기습적인 입맞춤에, 그녀의 놀란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원래 계획은 이랬다. 

첫째, 왕비에게 그 요녀를 스페인에 돌려보냈다는 이야기를 해서 위로하려고 했었다. 둘째, 왕비에게 줄 작은 손목시계를 주려고 했었다. 그 손목시계는 한국의 시계장인이 특별하게 제작한 것으로, 내 주머니에 들어있었다.

그런데 왕비만 보면 계획이 어그러졌다.

이런 걸 보면, 왕비가 요녀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억겁의 시간이 지나고, 나는 가만히 그녀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이만 자러 갑시다!"

잠시 후, 내실의 등은 모두 꺼지고 왕궁의 밤은 한없이 깊어졌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던가!

그 말은 사실인 듯 했다.

나는 그녀를 안아들고 침대로 향하며 굳게 다짐했다.

내일은 꼭 말하리라고...

화전양면(和戰兩面)

1626년 5월 어느 날.

조선의 북방 평안도 정주.

쾅!쾅!쾅!

탕!탕!탕!

히이힝! 

두두두!

와아아!

철컥!철컥!

조선의 북방인 평안도 정주는 수백년 전, 고려의 강감찬 장군이 거란을 대파한 귀주대첩으로 유명한 곳에서 인접한 지역이었다. 좌측으로는 서해안을 끼고 있는 좁은 해안평야가 있고, 우측으로는 산지가 연이어 있는 고을이었다. 

정주의 북쪽에는 압록강이 천연의 방어선이었고, 의주와 백마산성이 북녘을 바라보며 압록강을 파수하고 있었다. 정주의 아래로는 청천강이, 그 청천강을 방벽으로한 안주성이 있었다. 

조선의 북방은 기본적으로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 임진강을 자연의 방벽으로 설정해서 축성을 하고, 방어전략을 짰다. 제1선은 압록강과 의주, 백마산성이고, 제2선은 청천강과 안주성이었다. 모두 조선에서 매우 중시하던 북방 최우선 방어선이었다.

그 다음으로 제3선 대동강과 평양성, 제4선 임진강은 제1선과 제2선이 적의 침입을 지연하고 있는 틈을 타서, 후방의 군세를 몰아 요격하기로 계획한 공세전환점이었다.

하지만, 국방부장 정충신이 참관하고 있는 조선군의 전투훈련을 살펴보니, 조선의 기존 방어전략은 완전히 바뀐 것으로 보였다.

그 조선의 정주에서는 대규모 전투훈련이 벌어지고 있었다. 

조선군은 동군(東軍)과 서군(西軍)으로 나뉘어 전투대형을 갖추고 각자의 군에 맞는 비표를 머리에 착용했다. 동군은 파란색, 서군은 붉은 색의 비표를 착용했다. 그 중에 동군은 기병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그 동군의 숫자는 무려 7천이었다. 7천의 기병이 부대별로 대형을 갖추고 돌진하자 우두두 소리가 지축을 울리고, 그 위로 흙먼지가 자욱하게 올랐다. 

동군 기병이 돌진하자, 서군은 바삐 움직였다. 서군은 주로 보병이었는데, 앞쪽은 장창병이 철갑옷을 입고 기병의 돌진을 방비했다. 그 장창병의 주위에는 간이 마방책이 있었다. 장창병과 마방책의 뒤에는 조총병들이 다섯 개의 오로 포진했다. 

동군 기병은 서군의 방어대형의 50보 앞까지 돌진했고, 서군 장창병은 기병의 돌격을 확인하며 방어훈련에 매진했다. 서군 장창병의 뒤에서는 조총병들이 각 오별로 사격을 준비했다. 동군 기병이 50보 앞에서 회군하고, 다시 대형을 갖춰 최초 위치로 이동했다.

탕탕탕!

그 사이에 조총병들의 집중사격훈련이 개시됐다. 조총병 대형의 각 오별로 집중해서 사격했고, 그 총소리는 마치 하나의 총기에서 나는 소리같았다. 동군 기병이 다른 곳에서 기동훈련을 지속하는 중에도 서군 장창병과 조총수는 쉼없이 방어대형을 갖추고 사격훈련까지 진행했다. 그들의 눈에는 불꽃이 일어나는 듯 했다. 그 불꽃은 끝없는 전투정신과 호승심이었다.

쾅!쾅!쾅!

정주의 다른 곳에선 대규모 사격훈련이 진행 중이었다. 이동식 바퀴가 달린 포가(砲架)에 올려진 대구경 화포였다. 화포의 사정거리는 최장 10여리(약4km)에 달했고, 유효사거리는 3리(약1km이상)에 조금 못 미쳤다. 대구경 화포 옆에는 다른 소구경 화포들도 있었는데, 하나 같이 이동이 간편하게 바퀴가 달려있었다. 화포는 말을 이용해 이동시켰고, 포탄과 화약 등은 마차를 이용해 운반했다. 화포의 포가는 포각을 조정하기 위한 눈금자가 있어, 사거리를 통제하기에 편리했다.

그런 화포들이 일제히 발사되자, 지축을 흔들며 굉음이 들렸다. 

화포 발사를 명령한 군관은 기다란 망원경을 눈에 갖다 붙이고 포탄의 탄착점을 확인했다. 그 탄착점은 예상한 곳과 일치했고, 군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화포 발사는 계속됐고, 그 사격훈련이 끝난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그날 저녁, 야전배식을 위한 막사.

와글와글.

“저녁 배식은 순서대로 받아라!”

여기저기에서 배식을 지휘, 통제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 따라 수많은 병사들이 식판을 들고 이동했다. 이미 배식을 받은 병사들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었다. 배식은 고기를 포함한 푸짐한 식사를 양껏 제공했다. 힘든 훈련을 마친 병사들은 즐겁게 식사했고, 포만감을 느끼며 각자의 막사로 이동해 쉬었다.

지난 일주일간 진행된 ‘종합전투훈련’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보병, 포병, 기병을 비롯한 모든 병과의 훈련성과가 제대로 확인되었다. 

보병은 장창병과 조총병을 중심으로, 궁병을 보조전력으로 사용하며 그 위력을 뽐냈다. 포병은 대구경 화포를 중심으로 다양한 화포들의 엄청난 화력을 재확인했다. 기병은 기존과 달리 1만에 달하는 대규모였다. 그 중에 7천이 이번 훈련에 참가했고, 그간의 훈련성과를 인정받았다. 기병은 단독으로 기동훈련을 하기도 했지만, 보병과 연합해서 측면을 호위하거나 적 후방을 기습하는 훈련도 병행했다.  

정주의 야전사령부 지휘 막사.

야전사령부 지휘 막사 안은 들떠 있었다.

조선 국방부장 정충신은 지상군 부사령관을 겸직하고 있었고, 이번 종합전투훈련의 최고지휘관이었다. 정충신은 이번 종합전투훈련을 통해 자신감을 얻었다. 정충신은 이전 왕이었던 능양군이 ‘요동을 치려면 군사가 얼마나 필요하냐?’는 질문에 ‘십만의 정병이 필요합니다’라고 답했었다. 

그런데, 이젠 아니었다.

지금 조선의 지상군 3만이면 충분했다. 다만, 지키고 공격하는 데에 충분한 것이지 만주 전체를 차지하기 위해선 많이 부족했다.

조선을 침략하는 후금의 입장에서는 가급적이면 조선 북방 해안평야의 좁은 회랑을 통해 진격해야했다. 그 길에는 압록강을 비롯한 여러 강이 있었고, 그 요소요소마다 성이 있었다. 후금은 그걸 알고 있으며, 그에 맞는 전략전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후금을 상대할 조선의 군대가 크게 바뀌었다. 

기병의 숫자도 이 정도면 충분했다. 보병은 스페인의 ‘테르시오’란 전투대형을 도입해서 배웠고, 화포도 환골탈태했다. 기존의 조선군으로 새로운 조선군과 싸우면 백전백패였다. 이젠 후금 기병도 자신있었다.

정충신의 생각에 조선군의 화력은 기존에 비해 5배 이상 늘었다. 예전처럼 성벽 뒤에 숨어서 후방의 증원군을 기다려야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조선의 왕이 또 바뀌었을 때는 그냥 심드렁했었다. 광해군에서 능양군으로, 능양군에서 국왕 우진으로... 결국 정충신 같은 무관들의 입장에선 차이가 없을 줄 알았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조선군은 이제 강력한 정예병이었다.

게다가, 정충신 개인적으로 가장 기꺼운 것은 충분한 보급이었다. 

아무리 강한 군대도 군량이 없으면 굶어죽거나 흩어졌다. 그런데 군량만이 아니라 모든 보급품이 충분했다. 화약은 아무리 써도 줄지 않을 지경이었다. ‘무굴’에서 들여온 초석으로 화약은 양껏 만들어 썼다. 군복도 식사도 최상급으로 준비됐다. 병사들의 월급은 꼬박꼬박 화폐로 지급됐다. 이러니 조선군의 사기는 하늘 끝까지 치솟을 정도로 높았다.

정충신은 폐주 광해군의 명령으로, 수년간 명과 후금을 오가며 정보를 모았었다. 그 결과, 명이 쇠퇴하고 후금이 발흥하는 것을 확인했었다. 그래서 정충신은 후금과의 전쟁을 피해야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후금과의 전쟁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아니, 후금이 덤빈다면 아예 깨부숴주겠다고 다짐했다.

이젠 후금과의 전쟁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정충신은 다시 기억을 떠올렸다.

얼마 전, 내각 회의에서 ‘조선의 북방정책은 변할 것이 없다’고 말했었다. 

조선은 대외적으로는 후금과 화친하고 있다. 

그러나, 대내적으로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국왕전하와 부왕전하는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었다.

‘평화로울 때 전쟁을 준비하고, 전쟁할 때는 평화를 대비해야한다’고 말이다.

정충신도 마찬가지로, 예전부터 후금과의 화친을 믿지 않았었다.

후금은 지금 명나라라는 대적을 눈 앞에 두고 있기에, 양면전쟁을 피하려고 할 뿐이라 생각했다. 정충신의 국방부는 외교부, 정보부와 합동으로 명과 후금의 정보를 계속 수집하고 있었다. 후금은 최근 영원성 전투로 그 기세가 크게 꺾였다. 

그런 후금이 이 위기상황을 벗어나려면 어떤 성과가 필요할까? 

정충신의 생각은 단 하나였다!

영원성 전투의 패전으로 인한 위기는, 또 다른 승전으로 벗어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후금의 목표는 만만한 조선이 될 것이라 예측했다.

정충신은 다시 생각했다. 

자신의 예상이 틀렸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1626년 6월 어느 날.

후금의 수도 심양, 홍타이지의 집무실.

홍타이지는 홀로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홍타이지는 아버지인 누르하치의 밀사가 조선에 다녀온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조선은 누르하치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로 인해 후금의 숨통은 어느 정도 트일 것이 분명했다. 

지금의 상황은 명과의 교역이 전면 금지된 후폭풍이었다.

후금이 명을 공격한 이상, 교역이 계속될 리는 없었다. 하지만, 명과의 조공무역과 밀무역으로 배를 불려왔던 후금이었다. 명과의 교역이 금지된 상황에서는 갈수록 세력이 쪼그라들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할 가장 좋은 방법은, 명과의 교역재개였다.

하지만 그 교역재개 조건이 문제였다.

명은 다시 완전한 복속을 요구할 것이 확실했다. 요동을 다시 토해내고, 신하의 예를 강조할 것이다. 거기에 다른 조건을 들어 왕자들을 인질로 요구할지도 몰랐다. 

영원성 전투는 처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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