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동아시아 해상의 패권을 가진 나를, 스페인이 공짜로 부려먹으려 한 것이다!
마리아나 히메네스란 골치아픈 미녀를 선심쓰듯 던져주고 말이다.
나는 날로 먹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스페인이 나를 날로 먹으려고 하다니!
내가 알고 있는 이 치트키(?)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나만 알고 있다.
이걸 이용하면 뭔가 제대로 된 '그림'이 나올 것 같았다.
이제 남은 것은, 추가적인 미확인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기존 정보를 교차검증할,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동안, 그들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겠다.
서울항(주 : 현대의 호주 시드니)은 천혜의 양항(良港 좋은 항구)이었다.
태평양을 앞에 두고, 천연의 제방이 항만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 천연의 제방 안쪽은 아주 복잡하게 이어진 지형들이 자리했다. 게다가 서울을 지나는 강줄기들이 항구까지 이어져 있어, 좋은 항구로서의 모든 조건이 완벽했다.
날씨도 완벽했다!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공기도 상쾌했다.
하늘 빛을 담은 때문인지, 에메랄드 빛 바다는 눈에 시리게 쳐들어왔다.
나는 모처럼 샌드위치와 커피를 싸들고 소풍을 나왔다.
왕비와 함께 소풍이라니!
저기 보이는 그녀의 저기압만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얼마전 환영만찬 이후로, 그녀의 뾰로통한 모습을 가끔 보았다.
그래서 막상 무슨 이유인지 물어보면, 금새 방긋 웃고 고개를 저었다.
그 환영만찬에서 있었던 일을 내가 어찌 모를까?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왕비는 어린 마음에 상처를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어차피 나의 결혼은 앞으로도 몇번 더 있을텐데!
계속 상처받으면 그녀만 손해다.
나는 마리아나와 관련된 '숨겨진 진의'를 말해주고, 왕비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국가의 기밀을 왕비에게 말한다? 그것은 내 원칙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국가의 존립을 위험하게 하는 어리석은 행위였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마리아나도 불쌍한 여자였다.
몰락한 왕족가문이고, 그저 가문 이름만 남았다. 거기에 왕궁 시녀에서 짤렸다. 왕궁 시녀로 있으면 유력귀족과 연결되기도 쉬웠을텐데 말이다. 마리아나도 그런 기대로 왕궁 시녀로 갔을 것이다. 혹시 왕과 잘 될 가능성을 염두에 뒀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는 거대한 세계사의 흐름에 있어 작은 티끌만도 못한 존재였다. 고국에서는 왕비때문에 쫓겨났고, 미끼 역할로 한국에 팔려왔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이 어찌될 지 잘 알고 있으리라! 그렇기에 필사적으로 나와 결혼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마리아나와 결혼할 생각이 없다.
내가 마리아나를 선택하고, 또 스페인의 장단에 놀아난다면?
어떤 소설에서는 운명적 사랑에 빠진 로맨티스트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역사의 냉엄한 현실에서는...
스페인의 미인계에 빠진 어리석은 왕!
세계사의 웃음거리로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하물며, 그런 음탕한 여자는 나도 사양이다.
같은 시각, 호주 서울 어느 고급주택가 한 집.
서울의 고급주택가는 주로 강이나 바다의 풍광을 누리기 좋은 곳에 모여있었다. 그 집도 바다가 훤히 보이는 고급주택가의 양지바른 언덕 위에 지어졌고, 그 창문을 열면 서울항이 한가득 눈에 들어왔다. 스페인 풍의 지중해 건축양식을 그대로 간직한 정원과 창문이 일품이었다.
이런 화창한 날씨엔 가벼운 점심을 먹고 난 후, 창문을 열어젖히고 기분좋은 낮잠에 빠지고 싶을 것이다.
그들이 스페인 사람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대낮인데도 그 집의 침소에선 창과 문을 닫아걸고 격렬한 정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후웁!"
"허어억!"
여체 위에 몸을 실은 남자의 등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밑에선 여체가 물결처럼 출렁이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남자는 다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후욱 뱉어내고는, 침상에 걸터앉으며 옷을 걸쳤다.
남자는 반쯤 흰머리가 섞인 금발이 귀를 덮고 있었다. 비록 장년이었지만 탄탄한 가슴근육은 물론이거니와, 어깨와 허리 모두 강인함이 넘실거렸다. 몇 군데 흉터는 그의 대단한 무용을 드러내는 훈장과도 같았다.
그때, 여자가 애처로운 손길로 반쯤 옷을 걸친 남자의 등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벌써 가려고?"
남자는 신발을 신으며 되물었다.
"그래서 그 멍청이는 언제 부른데?"
여자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낮게 웃곤 말했다.
"며칠 있으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여자는 남자의 등에서 놀던 손을 앞쪽으로 가져갔다. 남자는 아무런 표정변화 없이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그의 남성은 격렬하게 반응했다. 그녀는 야릇한 승리감을 느꼈다. 남자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그 몸은 아주 달랐다.
여자도 곧 몸을 일으켰다. 잠시 머리를 매만지고 일어나 앉아 옷을 들어 입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과 자태만으로도 대단한 미녀였다. 그녀는 남자의 귀밑머리를 장난치듯 매만지며, 그의 어깨 너머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남자와 비밀스런 정사를 나눈 것은 벌써 1년 전부터였다.
그녀는 속으로 웃으며 생각했다.
'호호호, 남자들이란!'
그녀는 남자란 족속들을 잘 알았다. 그것도 높은 자리에 있는 남자들을 말이다. 그들이 가진 야심과 욕정은 너무도 뻔했다. 그것은 항상 높은 자리, 많은 재물과 대단한 미녀에게로 향했다.
남자들이 욕망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경쟁을 통해서 얻은 기념품과 같았다.
남자가 보는 미녀도 그 기념품, 트로피와 마찬가지일 뿐이었다.
결국, 그녀의 미모는 남자에겐 최고의 트로피, 우승 트로피였다.
고대의 철인(哲人)이 '너 자신을 알라'고 가르쳤던가!
그녀는 그녀 자신을 '아주 잘' 알았다.
남자는 침상에 걸터앉은 채로 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정말로 그를 좌지우지할 자신이 있나?"
여자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세상에 약점이 없는 남자는 없어. 안 그래? 스페인 국..."
짝!
털썩!
남자는 돌연 여자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여자는 침대 위에 힘없이 나동그라졌다. 남자는 여자를 잠시 노려보다 차갑게 말했다.
"함부로 그 입을 놀리다간..."
남자는 잠시 말을 끊고 자신의 옷매무새를 살폈다. 그는 웃옷 단추가 떨어진 것을 발견하곤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그래, 어디 해봐! 너에게 기회가 있을때 말이다."
여자는 침대 위에 누워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손을 치우니 왼쪽 뺨이 빨갛게 부풀어올랐고, 입 안쪽이 터졌는지 입술로 핏물이 조금 흘렀다. 여자는 잠시 상처를 어루만지곤 표독스럽게 대답했다.
"하아, 이번 뿐이야! 날 때리는 것도... 나는 꼭 성공할거야."
그 말을 마친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웃으며 남자의 옷매무새를 살펴주었다. 여자의 생글거리는 모습에 남자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여자에게 가볍게 입맞춤하곤 단호하게 말했다.
"이번 일에 대해서 나는 일체 모르는 것이다."
여자는 훗!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고 자신있게 말했다.
"그야 물론이지."
그리고 잠시 후, 그 자리엔 아무도 남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달 후 늦은 밤, 왕궁 집무실.
톡톡톡!
나는 검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유럽의 30년 전쟁은 한국과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1618년, 30년 전쟁의 시작부터 남의 집 불구경하듯 지켜보기만 했었다. 작년에 시작된 덴마크전쟁도 마찬가지였다.
유럽 전체가 끼어든 싸움!
30년 전쟁은 유럽 전체가 끼어든 국제전쟁이고, 유럽사의 대변혁을 몰고 온 거대한 사건이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끝난, 바로 그 전쟁이었다.
유럽의 한참 바깥에 있던 나를, 그들의 전쟁에 공짜로 부려먹고자 한 것은 스페인이었다. 내가 동아시아의 해상패권을 쥐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 이런 제안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30년 전쟁의 결과로 아는 것은 딱 3가지였다.
베스트팔렌 조약, 네덜란드 독립, 스페인의 몰락!
그동안 스페인과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관리해왔던 이유는 그들의 해상패권이 한국을 공격대상으로 삼을까봐 두려워서였다.
그리고 영국과의 동맹을 강화한 것도 스페인을 견제하고자 함이었다.
그래서 스페인의 잇권을 침탈하는 행위 자체를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스페인 점령지와 식민지는 알아서 비켜다녔고, 그들이 눈독들이는 지역도 마찬가지로 피해다녔다.
스페인이 테르시오 등 도움을 준 것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다.
불은 꺼지기 직전이 가장 밝다고 말했던가!
별도 그 생이 끝날때 초신성으로 폭발하며 가장 밝게 빛난다고 들었다.
지금 스페인은 누가봐도 가장 빛나는 시기였다.
이런 스페인의 패권을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계사의 도도한 흐름은 이미 결정된 것이 아닐까?
다름아닌 국가의 흥망성쇠!
이것이야말로 만고불변의 진리일지 모른다.
나의 이런 고심은 밤새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