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225)

다가닥다가닥!

덜컹덜컹!

히이힝!히이힝!

와아아!와아아!

"국왕전하 만세!"

내가 국왕 전용 마차를 타고 왕궁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서울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지만, 국왕 전용 마차가 거리에 진입하자 그 많은 사람들이 썰물처럼 거리 좌우로 흩어졌다. 서울 시민들은 국왕 전용 마차가 지나갈 때에는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여 인사하거나 소리치며 손을 들어 흔들었다.

'국왕전하 만세'라는 말에는 아직 익숙해지지 못했다.

처음에 괜히 창문열고 시민들과 소통한다는 이유로 손을 흔들었었다. 그랬더니 마차 주위로 시민들이 몰려들어 난리가 났었다. 몇몇 사람들이 인파에 밀려서 크게 다치기도 했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턴 국왕 전용 마차가 다닐 때에는 창문도 열지않고 그냥 지나갔다. 

나는 마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지난 일들을 떠올렸다.

내가 귀국한지 벌써 2주일이 지났다.

나는 가장 먼저 오랜 항해의 피로를 풀었다. 

간단한 귀국환영행사를 마친 이후엔 침실에 틀어박혀 내리 잠만 잤다. 그것도 거의 3일간 말이다. 아직 20대인데 오랜 항해의 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싶었다. 하긴 지난 2년간 조선에서의 생활은 무척 고단한 선택의 연속이었다. 단순히 항해의 피로만이 아니었다.

왕비에게는 왕궁 사용인들을 통해 왕궁의 생활에 익숙해지도록 조치했다. 왕궁 사용인들은 모두 조선의 궁인 출신이었다. 그렇기에 왕비가 왕궁생활에 적응하는 것에는 아무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왕비는 한국의 생활상에 크게 놀랐다.

조선에서 누리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생활이 낯설었던 것이다. 사람과 말이 같을 뿐, 의식주의 형태가 크게 달랐으니 그럴만도 했다. 의식주를 비롯한 생활 자체가 조선과 완전 딴판이니 말이다.

왕비가 작은 것 하나하나마다 놀라는 모습이 나를 즐겁게 해줬다. 그만큼 한국의 일상이 제대로 자리잡고 있다는 의미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왕비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판단되니 마음이 놓였다. 한국은 조선과 달리, 외척의 영향력이나 정치개입이 불가능한 나라였다. 게다가 나의 장인인 강석기(姜碩期)는 아예 조선에 남아 있었다. 왕비는 홀홀단신으로 한국에 와있었고.

나는 그렇게 왕비와의 자잘한 일상들을 떠올리며 혼자 피식거렸다.

그리고 내가 자리를 비운 지난 2년간, 한국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확인했던 기억들을 떠올렸다. 한국은 정말 급속도로 변하고 있었다. 내가 2년이 아니라 5년을 떠나 있었다면? 아마도 이 곳이 정말 한국인지 의심했을 지도 몰랐다.

가장 먼저, 서울과 인근지역은 거의 2배로 확장되었다. 현대로 따지면 수도권이 갈수록 확장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불과 2년만에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이 한양보다 더 커진 것이었다. 인근 곳곳이 온통 공사판이었다. 조선에서의 이주민이 급격히 늘고 있으니 당연한 변화였다. 조선합병 후에 늘어난 이주민을 대비해서, 수년간 정부에서 미리 계획하고 준비한 정착지는 1년만에 완전 포화되었다고 말했다. 

그런 수도권의 급격한 확장에 발맞춰서, 서울과 수도권을 지나는 강들에는 여러 개의 다리가 건설되고 있었다. 그 다리들은 유럽에서 건너온 기술자들과 우리 기술자들이 합작해서 짓고 있었다. 아직 우리 기술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었다. 이번 다리 건설로 축적된 기술과 경험을 통해 조선의 강에도 다리를 건설해야했다.

또한, 초기형 이긴해도 증기기관이 발명됐다.

초기 증기기관의 발명은 이미 수상의 보고가 있었지만, 나는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국에 오자마자 확인했다.

증기기관 개발은 왓슨을 통해 대규모 자금과 인력을 동원한 국책사업이었다. 지난 8년간 들인 돈만 은으로 20만냥이 넘었고 수백명의 인력이 투입되어 밤새 노력했다. 그 결과 상업적인 운영이 가능한 증기기관이 발명됐다. 

추가적인 연구과제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지만, 광산에서 사용하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물론 철도의 증기기관열차에 사용하기엔 아주 많이 부족했다. 증기기관의 효율이 생각보다 많이 낮았고, 그 크기가 대단히 컸기 때문이었다. 

그렇더라도, 나는 왓슨과 기술진이 이룩한 이 위업에 크게 고무됐다. 

이는 원래의 역사보다 100년은 앞선 업적이었다. 

조금만 더 연구에 집중하면 원래의 역사보다 100년 앞서 산업혁명이 시작될지도 몰랐다. 그것도 한국에서 말이다. 괜히 헛물을 들이키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증기기관의 발명에 따른 변혁들은 역사를 잘 모르는 나에게도 뚜렷이 남아 있었다.

이것들 외에도 한국에서는 일일이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불과 2년만에 이렇게 변하고 있었다.

"국왕전하! 곧 왕궁에 도착합니다."

마부의 외침에 나는 생각을 멈췄다. 

그리고 잠시 쉬고 난 후에 다시 생각을 정리하리라 다짐했다.

오늘 저녁식사는 왕비를 위한 환영만찬이 계획되어 있었다. 수상을 비롯한 각료들과 의장, 법원장들이 환영만찬에 초대받았다. 왕비도 그들과의 만남을 고대하는 눈치였다. 나는 저녁메뉴로 어떤 근사한 것이 나올지 침을 삼키며 마차에서 내렸다.

나는 곧 있을 환영만찬이 맛있는 식사와 함께 즐겁게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왕궁에 들어갔다.

그날 저녁, 왕궁의 왕비 환영만찬장.

이건 시작부터 잘못됐다.

환영만찬 초대자 명단은 대체 누가 작성했을까?

여기에 왜 그녀가 있느냔 말이다.

나는 무척 난감했다.

환영만찬의 주인공인 왕비, 그리고 환영만찬에 잘못 초대된 그녀.

두 사람의 날선 눈빛에 나는 할 말을 잊어버렸다.

이걸 어찌 해결해야할까?

각자의 진의(眞意)

마리아나 히메네스!

그녀는 정말 '헉!'소리가 날 정도로 미인이었다. 

만약, 내가 전생에 45살 나이까지 살지 못했었다면, 월나라 미인 서시를 만난 오나라 왕 부차의 운명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아니, 초선을 만난 여포가 되었을라나? 나는 가까스로 흔들리는 마음을 부여잡았고, 간신히 환영만찬을 끝냈다.

그녀가 왕비의 환영만찬에 참석하게 된 이유는 외교부장의 실수가 원인이었다. 

마리아나를 데리고 온 스페인 필리핀 총독의 사절단은, 나의 답신을 받아가기 위해 서울에서 대기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외교부장이 그 사절들을 초대했던 것이다. 외교부장은 그동안 왕궁의 환영만찬에는 외국 사절단을 초대하는 것이 관례였기에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담을 순 없었다.

그래서 나는 스페인 필리핀 총독이 보낸 사절들을 정말 잘 대접해서 보냈다. 그렇게 대접하는 와중에 놀라운 정보도 얻었다. 나는 스페인어가 유창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대략적인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그들이 내뱉은 단편적인 정보만으로도 대강의 사정을 유추할 수 있었다. 

내가 확인한 정보는 우선 두 가지였다.

첫째, 마리아나 히메네스는 정말 아무것도 없이 '몸'만 왔다!

그녀에게는 오직 젊음과 미모 뿐이었다. 

마리아나는 스페인 왕비인 엘리자베트의 시녀로 있다가 쫓겨난 것이었다. 

스페인 왕비 엘리자베트는 프랑스 출신으로 루이 13세의 누이였다. 엘리자베트는 13세의 나이에 펠리페4세와 결혼했는데, 펠리페4세의 사생아가 많은 것을 항상 불만스럽게 생각했다고 했다. 엘리자베트의 아버지 앙리4세가 여성편력이 심했는데, 남편인 펠리페4세의 여성편력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마리아나는 그런 엘리자베트의 시녀로 선발되었다. 그럼 뻔하지 않은가? 펠리페4세가 마리아나에게 빠질 것 같으니 아주 멀리, 그것도 누에바에스파냐까지 쫓아낸 것이었다. 그녀는 단 1개월도 채우지 못했다고 했다. 누가 마리아나를 시녀로 뽑았든지, 고생 좀 할 것이다. 그 누군가는 왕비한테 제대로 찍혔지 않나!

하여간, 마리아나가 쫓겨나는 과정에는 스페인의 재상이자 펠리페4세의 총신 올리바레스 공작 '가스파르 데 구스만'이 손을 썼다. 올리바레스 공작의 명령을 받고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이 나름 머리를 써서 나에게 보낸 것이었다.

무척 선심을 쓰듯 보냈지만, 마리아나는 그 자체로 '독사과'였다.

'독사과'는 반드시 먹어야만 중독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가까이만 있어도 중독이 가능하다.

그것이 미인계의 무서움이었다. 

'경국지색'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남자는 여자의 미모에 경계심이 누그러지기 마련이다.

여포는 초선, 부차는 월미인.... 이 모두는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나는 제대로 된 정보를 확인하기 전까진 그녀를 멀리하기로 결심했다.

둘째, 누에바에스파냐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는 것이다.

로드리고 파 체코이 오소리오!

오늘 알게 된, 누에바에스파냐의 부왕 이름이었다.

휴! 이름 길다. 줄여서 '로드리고'다. 

로드리고는 1624년에 누에바에스파냐의 신임 부왕으로 임명됐다. 스페인령 필리핀은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의 통제를 받는 곳이었다. 결국 그동안 스페인 필리핀 총독이 보낸 편지로 생각했던 것이 잘못됐던 것이다. 

그 편지들과 마리아나 히메네스를 보낸 것은 누에바에스파냐 부왕, '로드리고'였다. 

누에바에스파냐는 코르테스가 아즈텍을 정복한 후에 아즈텍의 수도(주 : 아즈텍 제국 시대에 텍스코코 호수 위의 섬에 있는 테노치티틀란이라는 도시. 현대의 멕시코시티는 이 호수를 메워 만든 도시임.)인 멕시코시티에 터를 잡은 스페인 식민지 부왕령이었다. 

멕시코시티는 호수 위에 만들어진 도시가 가진 심각한 문제, 바로 홍수와 배수의 문제로 고통받고 있었다. 1607년에 발생한 대홍수로 인해, 멕시코 시티에서는 배수로와 배수터널을 만들어 도시에서 물을 배수하는 대규모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 공사는 엄청난 비용문제로 중단됐다가 1626년에서야 공사를 재개했다.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은 이 배수공사 비용과 공사의 어려움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 문제만이었다면 괜찮았을지도 몰랐다. 

펠리페4세가 1621년에 있었던 네덜란드와의 휴전협정을 바로 깨버렸다. 그래서 네덜란드와 다시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래서 네덜란드가 대규모 사략함대를 대서양은 물론이고 태평양까지 파견했던 것이다. 

네덜란드 사략함대의 사령관은 나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네덜란드가 공인한 해적이자 사략함대 사령관 '피트 헤인'이었다.

영국의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유명하다지만, 사략질에 대해서 만큼은 피트 헤인에 비하면 아주 많이 부족했다. 피트 헤인은 스무 살 때 스페인 선박에 잡혀 4년간 노예로 노를 저었던 네덜란드인으로, 스페인의 대규모 선단을 털어 네덜란드의 영웅이 된 사람이었다. 

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스페인은 한동안 네덜란드와의 전쟁을 중단했을 정도로 타격을 받았다. 피트 헤인이 약탈한 보물들은 네덜란드의 독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여담으로, 네덜란드 출신 조선인 박연(얀 얀스 벨테브레)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사략선에서 근무한 선원이었고,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조선에 표류했던 것이다. 내가 알기론 이맘때쯤이고, 표류한 곳이 제주도였던가 그랬다. 

다시 말해서,

누에바에스파냐는 네덜란드 사략함대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던 것이다.

현재 상황은 펠리페4세의 휴전협정 파기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래서 네덜란드 사략선들이 전세계 바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스페인 상선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러니 스페인의 해상무역로는 위험천만한 해적, 사략함대의 먹잇감이 되었다.

피트 헤인이 활약한 곳은 대서양과 태평양이었다.

세계 해전사를 열심히 공부한 나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선택의 열쇠는 내가 쥐고 있는 것이다.

스페인은 한국이 동아시아의 해상패권을 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네덜란드도 마찬가지였다.

스페인은 나를 이용해서 네덜란드를 견제하려고 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처음 생각했던 것은 모두 착각이었다.

스페인은 그들의 진의(眞意)를 숨겼던 것이다.

1. 편지 발신인은 스페인 필리핀 총독이 아니라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이었다.

2. 진짜 위협은 명나라 해적이 아니라 네덜란드 사략함대였다.

3. 결국, 네덜란드 사략함대를 상대하기 위해 많은 배가 필요했다.

그래서 스페인 필리핀 총독을 통해 많은 배를 신규주문했다.

그걸로도 부족하니 배를 빌렸다.

거기에 명나라 해적을 운운하면서 함께 연합해서 작전을 하자고 했다.

동아시아 해상패권을 쥔 한국 해군이 나서면, 네덜란드 사략선들은 동아시아에서 꼬리를 말고 사라질 것이다. 이는 스페인이 손도 안대고 코를 푸는 것이 아닌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