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간, 여차저차해서 아저씨와 그 궁녀는 1년 반만에 결혼했다.
이젠 부왕과 부왕비로 정말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참! 돌쇠할아버지도 조선에 남기로 했다.
아저씨도 돌쇠할아버지가 남는다고 하니 무척 기뻐했다.
그와 달리, 호주의 서울궁전은 아저씨와 할아버지가 없어 무척 허전할 것이다.
나 혼자는 아니겠지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슬슬 잠이오기 시작했다.
나는 옆에 누운 그녀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다 잠이 들었다.
1626년 1월 말 어느 날, 적도 인근.
숙련된 바닷사람도 오랜 항해에는 지치기 마련이다.
스페인령 필리핀 세부에서 식수 등을 보충하고 출발한지 3일째였다. 이제서야 적도를 지났고 정남향으로 항해하고 있었다. 원래 계획보다 하루가 늦었다.
다행스럽게도 날씨가 맑고 바람도 적당해서 항해하기 좋았다. 그렇게 순풍에 돛단배가 되어 대열을 갖춰 항해하던 우리에게....
"고래다! 전방 좌현에 고래가 나타났다!"
견시수가 고래의 출몰을 소리높여 알렸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그녀를 깨웠다. 그녀는 오랜 항해와 따가운 햇살에 피곤했는지 얕은 낮잠에 빠져있었다. 나의 재촉에 깜짝 잠이 깨더니 고개를 흔들고 벌떡 일어났다. 너무 귀여웠기에 속으로 웃곤 말했다.
"바다에 고래가 나타났으니 보러 나갑시다! 쉽게 볼 수 있는 구경은 아니오."
그녀는 고래라는 말에 잠이 번쩍 깼다. 서둘러 머리를 정돈하더니 큰 눈을 반짝이며 서둘러 나가려했다. 그녀의 손을 잡고 문을 열어 갑판으로 나갔다. 갑판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나와 고래를 구경하고 있었다.
내가 갑판위에 나타나자, 모두 자리를 비켜주었다. 나는 손을 들어 괜찮다는 표시를 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나란히 고래를 구경했다. 그녀는 고래를 보곤 무척 신기해했다. 처음 보는 고래니까 그렇겠지만 말이다.
선두의 고래부터 후미까지 십여마리가 넘는 대가족이었다.
내가 알기론 북극부터 남극까지 이동한다고도 했는데, 저 고래들의 목적지는 어딜일지? 무척 궁금하지만 그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고래가족의 이동을 구경하길 십여분.
고래가족들이 저 멀리 사라져, 더 이상 보이질 않았다.
그녀는 아쉬운 듯, 고래가족이 사라진 방향을 연신 쳐다봤다. 그녀가 아무리 까치발을 하고 봐도 보이지 않을 것인데도 말이다.
그렇게 적도에서의 '괴력난신'을 보는 것으로 긴 항해의 지루함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도 잠시 생기가 돌았다.
1626년 2월 1일, 호주 서울 앞 바다.
끼룩끼룩!
철썩!철썩!
쏴아아!
서울을 떠난지 만 2년을 꽉 채운 때였다.
이제야 서울항이 눈 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서울을 떠날 땐 혼자였는데, 돌아올 땐 둘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셋이었는데, 둘이었다.
김씨 아저씨와 돌쇠할아버지가 조선에 남았으니 말이다.
내 옆의 그녀를 돌아보니, 얼굴에 피곤함이 역력했다.
아쉽게도, 서울항에 도착하자마자 간단한 환영행사가 있을 것이다.
그녀가 왕궁에 도착해 편히 쉴 수 있는 것은, 그 이후가 될 것이다.
곧 수상을 비롯한, 내 오랜 동료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한국은 얼마나 변했는지, 알아볼 시간이었다.
드디어, 내가 다시 돌아왔다!
스페인의 제안
헤로니모 데 실바(Jeronimo de Silva)!
그는 작년에 갓 부임한 스페인령 필리핀 총독이었다.
작년,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명나라를 정벌하자는 둥 요구를 해서 쿨하게 씹었더니 이젠 육탄전술(?), 아니 미인계를 쓰겠다는 건가?
그것도 알고보니, 다른 비밀스런 내막이 있었다.
바로, 스페인 필리핀 총독의 뒤에 누에바에스파냐 부왕까지 포함된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들에게 명나라 정벌은 그저 꿈같은 희망사항일 뿐이었고, 그들의 목 앞에 놓인 가장 위협적인 칼날은 명나라 안해(安海 : 현재 대만과 중국 본토 사이의 해역을 뜻함. 명나라의 유럽무역은 이 지역으로 제한되므로 가장 빈번하게 유럽선박이 항해함.)에 출몰하는 중국해적(상단)들이었다.
스페인은 남아메리카의 포토시 은광에서 매년 막대한 양의 은을 채굴하고 있었다. 그 엄청난 은을 배에 가득 싣고 명에 판매한 다음, 비단과 차 등을 구매해서 유럽에 다시 팔았다. 스페인이 채굴한 은을 명이 가장 비싸게 사주기 때문에, 스페인은 물론이고 일본의 이와미 은광에서 캐낸 은도 명으로 팔려나갔다.
이처럼 명나라는 전 세계의 은을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같았다.
유럽과 아메리카, 아메리카와 명, 명과 인도, 인도와 유럽 등 전 세계를 잇는 해상무역로는 노다지나 마찬가지였다. 우리 한국도 그 안에서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얻고 있었다. 해상무역로는 우리의 생명줄이었다.
스페인이 이 정도로 애절(?)하게 요구하는 것을 보면,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일단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수상! 지난 번에 필리핀 총독이 요청한 쾌속선 추가건조 건은 이미 승인하지 않았소?"
스페인 필리핀 총독의 3가지 요구 중에서 쾌속선 추가건조는 이미 허락했던 것이기에, 그것부터 확인했다. 나는 수상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물론입니다! 국왕전하께서 승인하신대로 쾌속선 추가건조에 착수했습니다. 다만, 쾌속선을 인수받기 전에 사용할 배를 빌려달라고 해서 5척을 빌려줬습니다. 그동안 쾌속선 사용료는 건조비용의 3할이고, 수리비는 그들의 부담입니다. 만약 침몰 등의 중대한 사고가 발생한다면 건조비용의 10할 전액을 보상하기로 했습니다. 사용료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수상의 답변대로라면, 쾌속선 추가건조는 문제없이 승인됐고 건조중이었다. 그런데도, 스페인 필리핀 총독이 쾌속선을 인수받기 전에 우리 배를 빌려간 것을 보면 뭔가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세계 해양패권을 거의 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스페인이었다. 영국, 네덜란드 등의 사략선들이 골치아프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 스페인이 배가 부족해서 빌렸다니?
세계해양강국 스페인이 자국 선박의 수요예측조차 제대로 못할 리가 없었다.
나도 한국의 선박수요를 면밀하게 계산해서 선박건조를 진행했다. 일반적인 무역회사는 물론이고 정기여객선 회사들도 자기 회사의 수요를 감안해서 선박을 건조한다.
그런데 스페인이 선박건조 수요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다고?
그건 어불성설이다!
그렇다면, 남은 이유는 단 하나다.
스페인의 배들이 예상치를 초과하는 막대한 손실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태풍같은 해난이거나 사략선같은 해적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많은 배를, 비싼 사용료를 내면서까지 빌릴 이유가 없었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수상과 외교부장에게 즉시 명령했다.
"수상께서는 외교부장과 함께 이번 사안에 총력을 기울이셔야 합니다.
첫째, 스페인령 필리핀이 어떤 위협에 노출됐는지 정확히 확인하시오!
아마도 명나라 안해의 해적들이 스페인령 필리핀을 또 공격했을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세부(스페인령 필리핀의 총독 주재지)가 아니더라도 마닐라 지역이 위험할지도 모르겠소.
둘째, 스페인의 대명 무역량과 선박출입상황을 점검하시오.
스페인이 배가 부족할 정도라면 무언가 큰 손실이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의 무역량을 선박숫자와 함께 계산하면 그들의 손실을 대략적으로 알아낼 수 있을겁니다.
셋째, 명나라 해적들의 현황을 파악하고 그들을 분쇄하기 위한 전력은 얼마나 필요할지 검토하시오!
이 모든 내용을 확인한 후에 스페인에 요구할 사항을 논의합시다."
수상은 나의 지시사항을 듣고 잠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게 물었다.
"국왕전하께서는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의 제안을 어쩌실 겁니까?"
나는 수상의 돌발적인 질문에 잠시 고민에 빠졌다.
스페인령 필리핀은 스페인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다시말해, 스페인 필리핀 총독은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의 부하였다. 결국 스페인 필리핀 총독의 제안은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의 제안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처음 스페인 필리핀 총독의 편지를 받았을 땐, 스페인 필리핀 총독이 아예 막나가는구나란 생각을 했었다. '감히 직속상관인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을 제끼고서 이런 큰일을 추진하다니'하고 말이다. 그런데 실상을 알고보니 아니었다.
그런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은 나에게 귀족여인을 보냈다.
그녀는 히메네스 가문(주 : 스페인 왕국의 전대왕국 중 하나인 레온-카스티야왕국 및 갈리시아 국왕의 가문)의 여식으로 과거 스페인 군주의 혈통이라고 했다. 히메네스 가문출신 왕의 혈통은 이미 수백년 전에 끊겼기에, 지금은 왕족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도 스페인에서는 내로라하는 집안이라고 했다.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은 대놓고 '훌륭한 신붓감'이란 말을 편지에 써서 보냈다.
그의 의도는 한국과 스페인의 혼인동맹이었다.
스페인 국왕이 직접 주선한 것이 아니기에 '격'이 아주 많이 떨어지긴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먼 친척인데 용모가 훌륭할 뿐만 아니라 아주 영리하다고도 했다.
대신 물려받을 영지나 지참금은 없다고 했다. 한마디로 몸만 간다는 이야기였다. 귀족간의 결혼은 영지 등에 대한 복잡한 계산을 거쳐 이루어지는 것이 통상적인 일이었다. 그녀의 신분이야 귀족이겠지만 그 외엔 어떤 것도 없는 여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한국은 영국과 가장 긴밀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현재의 스페인은 누가 뭐래도 세계최강의 국력을 보유한 패권국가였다. 그런 스페인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영국과 손을 잡았다. 영국의 모든 제도를 전면적으로 들여온 것도 그 이유중의 하나였다.
영국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찔렀다고 한들, 스페인의 국력이 그 한번 해전으로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도 수십년간 스페인의 패권은 지속될 것이었다. 나는 스페인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영국과의 긴밀한 관계가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스페인이 네덜란드 등 유럽 내의 세력다툼때문에 아시아에는 크게 세력을 떨치지 못했다. 스페인은 아메리카 식민지만으로도 엄청난 부를 창출해냈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스페인 때문에 아메리카에서 발붙이지 못하고 아시아로 진출했다. 물론 스페인의 아시아 공략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나는 내심으로 영국과의 혼인동맹을 원했다.
그것이 스페인을 견제하는 가장 적절한 패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스페인의 제안이 온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스페인의 제안은 단순히 명나라 해적을 소탕하는 것만이 아닐 공산이 컸다.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이 여기에 끼어든 이상, 진짜 명나라를 공격하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몰락한 왕족출신 여자를 미끼로 던져준 것일지도 몰랐다.
이렇게 되면 내 계산에는 전혀 수지가 맞지 않았다.
여기엔 뭔가 다른 이득이 주어져야 했다. 그것도 아주 넘치도록 충분한 댓가로 말이다. 그런데 아직 그 댓가에 대한 것이 확실하지 않았다.
그녀가 무척 아름답다고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순가?
고작 여자 하나때문에 아무 이득없이 전쟁에 휘말려들어갈 수는 없다.
결국, 나는 구체적인 답변없이 일단 대충 얼버무리기로 결정했다.
어찌됐든 나중에 잘 해결되리란 기대(?)를 품고서 말이다.
"음... 일단, 그녀는 외교공관에 모셔두고 잘 대접하면 될 일입니다."
나는 그 후에도 잡다한 업무들을 보고받고, 몇가지 지시를 한 다음에 회의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