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225)

대궐과 관청을 마주한 거대한 석조건물은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대궐을 능가하는 크기와 품격이,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쉬이 느껴지는 바였다. 그것은 '의회'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그 바깥 면은 거대한 석조기둥 십여개가, 마찬가지로 석조지붕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 기둥을 지나 건물 외벽에 이르면, 돌을 깎아만든 듯한 창문에 커다란 '스테인드 글라스'라 불리는 유리창문을 달아놓았다.

중앙의 석조기둥 2개의 사이에 만들어진 작은 회랑을 지나면, 거대하고 정교한 진갈색 문이 있었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장중한 건물외부 형태에 부족하지 않은 내실이 나왔다. 그 내실은 거대한 건물에 걸맞게 크고 화려했다. 웬만한 작은 광장을 방불케하는 크기였다. 

그 안에는 1층에 대회의장, 소회의실 등이 있었다. 첫번째 문을 열고 들어간 좌우 계단을 통해 2층과 3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는데, 2층에는 정당사무실과 의회사무실이 자리잡고, 3층에는 의원들의 휴식공간이 잘 꾸며져 있었다.

이렇게 의회건물은 장중하면서도 화려하고, 그 고급스러운 면모가 왕도 누리지 못할 호사스러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지방 향촌에서 올라온 사대부 의원들은 왕의 지극한 환대에 격한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의원들에게 주어진 것은 단순히, 의회 건물만이 아니었다.

각 의원마다 멋들어진 모자와 '가운'이라는 겉옷을 지급받았다. 그 모자에는 비단수실이 고급스럽게 치장되어 있었고, 가죽과 비단으로 절묘하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가운'이라 불리는 검은 색 바탕 의복은 최고급 비단으로 만들어 가볍고도 멋들어져 보였다. 그 '가운'에는 금실로 자수된 줄무늬 문양이 둘러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의원들에게는 금과 백금으로 만들어진,  "議"자가 정교하게 새겨진 상징물을 받았다. 그 상징물은 '의원 배지'라고 불렸다. 어찌나 정교하고 영롱한지 배지의 둘레에는 꽃과 나뭇잎 문양이 살아있는 듯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그 의원 배지는 의원 한명당 한개씩 받았다. 그리고 그 배지에는 '가운'의 좌측 가슴부위에 부착할 수 있도록 장치가 되어있었다.

사대부 의원들은 대단히 만족했다.

의원모자와 가운을 입고, 그 가운에 의원 배지를 부착하고 나니, 옷이 날개란 말이 실감나는 것이었다. 왕의 지극한 후대에 없던 충성심도 절로 생겼다. 그렇게 잘 차려입고 의회건물에 들어서니 조선 천하가 그들의 발 아래에 있는 듯 뿌듯함이 느껴졌다.

이는 왕이 사대부들에게 완전히 굴복했다는 신호임에 틀림없었다.

조선은 사대부들의 나라고, 사대부들은 특별한 존재다.

왕은 사대부들이 특별한 존재임을 의회로 인정했다.

사대부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웅성웅성!

사대부들은 경악했다.

의회 대회의실에는 그들과 똑같은 의원 복장을 갖춘 자들이 있었다. 

심지어 그들보다 더 많은 숫자였다. 

'의원'이란 '특별한 존재'는 사대부에게만 허용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원익, 박승종, 최명길 등 남인, 북인, 서인의 사대부들이 내각을 구성할 당연직 의원이라는 이유로 의원직을 받았다. 그 외에도 남인, 북인, 서인의 명망있는 자들이 추천을 받아 의원에 임명됐다. 그들이 무려 20명이었다.

게다가 직능대표, 비례대표라는 의원들이 있었다.

우선 직능대표에는 경상을 비롯한 상인, 농부, 기술자, 무관, 백정 등 직업과 관련된 의원들이 있었다. 다음 비례대표에는 서얼, 중인, 양인, 노비 등 각종 신분별로 인원이 할당되어 의원직을 받았다.

직능대표과 비례대표는 그 직업과 신분계층에 속한 사람 중에 명망이 있는 사람을 추천받아 왕이 임명했다. 그 숫자가 무려 70명이었다. 

사대부 출신 의원들은 분노했다.

그들이 의회 건물에 당당히 걸어들어오면서 느꼈던, '특별한 존재'라는 우월감이 부서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멋진 의원복장과 의원이 가진 특권을 당장 포기하고, 의외 건물을 나서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그때, 이원익이 의회 대회의실 단상에 올라왔다. 

"크흠,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께 곧 수상이 될 이원익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조선의 국정을 논하는 의회 의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의회는 의원 개개인의 특권을 철저히 보장합니다. 의회 내에서의 발언에 대해서는 형사에 대해 면책특권을 부여할 것입니다. 그 외의 수많은 특권들을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이원익은 목이 타는지 단상에 마련된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 다시 말했다.

"... 그리고 의회는 정당을 만들어서 그 의견을 모으는 과정이 필요하니 각자 마음에 맞는 사람들을 모아서 정당등록을 해야 합니다. 가능하면 다양한 의견을 논의할 수 있게, 각 비례대표와 직능대표를 골고루 포함해서 정당을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국왕전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전문적인 의견을 모을 소위원회도 구성할 것이니 나눠드린 책자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나머지는 초대 의회 사무총장을 통해 전달하겠습니다. 초대 의회 사무총장은 최명길 대감이오."

이원익은 말을 마치고 단상을 내려갔다. 그와 함께 최명길이 단상에 올라 말을 이었다.

"흠흠, 이 사람이 초대 사무총장 최명길이외다. 이제부터 의회 의장과 부의장을 선출할 것이오. 의회 의장과 부의장은 의회를 대표하는 막중한 자리입니다. 그 선출은 의원들이 다수결로 선출하게 됩니다. 그 절차는....."

이원익과 최명길이 시기적절하게 올라와 말하는 바람에, 사대부들은 비례와 직능대표에 대해 반발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일부 반발하는 사대부 출신 의원들이 있었지만 주위에서 조용하란 고성이 터져나와 조직적 반발을 하진 못했다.

의장선출이란 말에 또 솔깃해진 사대부들은 다시 분열됐다. 

지연, 학연, 혈연 등등 다양한 이유로 이합집산(離合集散)을 하더니, 영남출신 지역향반인 김희두가 초대 의장에 선출되는 기염을 토했다.

지역향반인 김희두는 영남에서 몰표를 받았고, 놀랍게도 비례와 직능대표들의 표도 많이 받았다. 나머지 사대부들은 서로 입후보하는 통에 불과 십여표를 얻은 자가 부의장이 되었다. 김희두의 득표수는 과반수를 넘겨 87표였다. 부의장은 무관의 직능 대표로 의원에 선출된 정충신이었다.

그렇게 150명의 의원들은 의장 김희두, 부의장 정충신, 사무총장 최명길을 선출하고 난 후, 다시 소위원회를 나누는 치열한 수싸움에 돌입했다.

소위원회의 상임위원장이란 자리가 아주 탐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의회는 밤새 격론이 벌어졌다.

그것은 그날 하루만이 아니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사대부들은 그들의 상경목적을 이미 잊어버렸다.

그렇게 반 년이 눈깜짝할 새에 지났다.

한양, 의회 대회의실.

"이것으로 조정에서 올린 경장은 원안대로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땅땅땅!

김희두 의장이 의사봉을 세번 두드리며 조정이 1년 넘게 추진한 경장이 최종 시행을 눈 앞에 두게 되었다. 

대회의실 의원석에는 이원익을 비롯한 내각 각료들, 한양 사대부 의원, 지방 사대부 의원, 비례대표 의원, 직능대표 의원 순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동안 의회는 수많은 정당이 난립하여 의견이 제대로 모이지 못했다. 서로 정당대표, 상임위원장이 되기 위해 이전투구를 했기에 그랬다. 의원 중에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아래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같은 지역 사대부 간에도 극심한 합종연횡이 두드러졌다. 오늘과 내일의 내편이 다르고, 그 다음 날엔 적이 달라졌다. 그 다툼 속에서 의견이 모이는 것은 잘 없었고, 그들의 분열이 지속될수록 조정의 업무는 내각을 중심으로 흘러갔다.

심지어 의원 상호간에 심한 욕설과 주먹다짐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의원의 특권에 따라 의회 내에서는 아무런 처벌이 없었다. 

의원들 간에는 단합이 잘 되는 것도 분명히 있었다. 그것은 의원들의 특권에 관한 사안이었다. 그것에는 귀신처럼 일치단결해서, 신속하게 합의를 도출했다.

의회는 그들만의 세상이었다.

그 의회에서 사대부들의 목소리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특히 지방 사대부들의 부침이 심했다. 김희두를 중심으로 한 영남을 필두로, 부유한 사대부를 중심으로 사대부들의 세력이 재편된 것이다. 

그렇게 점차적으로 사대부 세력이 분열되고, 신흥 부자들이 일어섰다. 거기에 상공업의 발달로 상공인들의 목소리도 커졌다. 상공업을 천시하던 사대부들은 갈수록 자리를 잃어갔다. 그렇게 구성된 의회에서는 성리학에 대한 논의가 점차 발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서, 초기 의회는 아직 의정활동 그 자체가 미숙했기에 내각이 그 논의를 주도했다. 그래서 이원익을 중심으로 한 내각의 경장 원안이 손쉽게 의회 다수결로 통과된 것이다.

의회는 한결 같았다.

한양, 내각 회의실.

경장 원안이 가결됨과 동시에 임시 수상에서 정식 수상이 된 이원익은 바쁘게 회의를 주관했다. 국왕은 통크게 인정전을 내각 회의실로 지정했다. 이원익과 각료들은 그에 반대했지만, 우진의 강력한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내각 회의실은 호주 서울의 내각 회의실과 비슷하게 만들어졌다. 긴 회의용 탁자에 의자들이 배치됐다. 그 탁자에는 각종 보고서와 커피가 올려져있었다. 수상을 비롯한 각료들은 자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회의를 이어갔다.

"국왕전하께서 경장 원안이 의회에서 가결되자마자 승인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조선은 경국대전을 폐기하고 새로운 헌법을 바탕으로 법률안을 공포할 것입니다. 각 부서별로 이에 만전을 기하시오."

수상인 이원익은 왼쪽에 앉은 김육을 바라보며 말했다. 김육은 내각의 국정상황실장직을 맡고 있었다. 호주시찰단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 수상의 곁에서 충실히 보좌역을 맡았다. 그에 실력을 인정받아 내각의 각 부서업무상황을 파악하여 정리하는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김육은 수상 이원익의 말에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각 부서별로 올라오는 보고를 잘 검토해서 종합하겠습니다."

이에, 수상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새로 부수상 겸 외교부장을 맡은 최명길이 말했다.

"수상 각하! 이제 경장도 마무리 되었으니, 국왕전하의 국혼에 대한 논의를 시작함이 어떻습니까?"

그러자 선임 부수상 박승종이 말을 받았다.

"그건 지당한 말이오. 국왕전하의 보령을 생각하면 이미 한참 늦었지 않소?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박승종은 이원익은 물론이고 내각 전체를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내각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국왕 우진의 혼인은 늦어도 너무 늦었던 것이다. 당금 조선에서는 15세 전후로 혼인하는 것이 통상적인 일이었다.

"그럼 본 수상이 국왕전하께 말씀드리겠소. 경장에 의해서 간택령이나 가례도감은 폐지되었으니, 선임 부수상께서 관할하셔서 업무를 담당하도록 합시다."

이원익의 말에 박승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알겠습니다. 수상 각하!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내각 회의는 끝났다.

내가 조선에 온 지 벌써 1년 반이 지났다.

한양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었다. 내가 관노비로 살던 그 한양이 아니었다. 거리는 깨끗하고, 사람들은 활기찼다. 대로에는 돌로 포장되어 마차도 잘 다닌다. 서울의 오분의 일은 될만큼 좋아졌다. 

가장 큰 성과는 큰 잡음없이 경장을 이뤄낸 것이다. 

김자점과 정보부 조선지부장은 물론이고 이민국 조선지부장 개노미, 즉 김희두가 큰 공을 세웠다. 

골치아픈 사대부들을 의회로 몰아넣어서 그런지, 아주 평온했다. 의회 안에서 치고박는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 바깥으로만 나오지 않으면 된다. 

지난 십여년간, 엄청난 재원을 투자해서 이룩한 일이었다.

개노미를 통해서 땅을 사들이고, 조직원들은 공명첩과 족보를 사들여 양반이 되었다.

그 양반이 된 조직원들은 풍부한 자금력으로 향촌을 좌지우지했다. 그런 조직을 통해서 향촌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 결과가 의회 사대부 다수파였다.

개노미, 김희두는 의장까지 됐다. 그가 '진행시킨' 의회장악은 허무하게 끝났다. 김희두가 수장으로 있는 다수당은 사대부만 절반을 조금 넘고, 비례와 직능의원을 포함해 과반의원이 소속되어 있다.

의회는 이미 내 친위 세력이 완전히 장악한 상태였다.

그러니 경장은 손쉽게 통과됐다. 이젠 신분제의 완전폐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신분제의 완전폐지도 의회 주도로 할 것이다.

여론이 그렇다는데 어쩌겠나?

왕이 여론을 받아줘야지.

의회의 싸움박질은 현대에서 봤던 국회나 지금 조선의회나 똑같은 것 같다.

이건 격투기장도 아닌데 수시로 욕설하고 싸우는 꼴에, 보는 내가 부끄럽다.

각종 이권에는 귀신같이 단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이권이나 특권 앞에서는 언제 싸웠냐는 듯이 하하호호 했다.

오늘 내각에서 국혼을 진행하겠다고 보고했다.

나는 그러라고 했다.

내 혼인 대상이 될 사람은 과연 누굴까?

무척 궁금했다.

나는 조선만이 아니라 호주에서도 다른 비를 맞아들일 것이다.

필요하다면 다른 나라와 정략결혼도 할 용의가 있다.

그 결혼 후에, 나는 호주로 돌아갈 결심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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