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의 어느 서원 내실.
그 안에는 사대부로 보이는 자들이 모여 작은 소리로 속닥이고 있었다. 누가 듣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 내실의 바깥에는 두 명의 사대부가 주위를 경계하며 엄히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조정에서 지금 진행하는 양전사업과 주민등록사업이 우릴 올가매고 있어요. 우리가 서원에 기탁한 토지가 한사람당 수십에서 수백결에 달합니다. 그 알토란같은 땅을 은결(隱結 : 토지대장에서 누락된 토지, 면세지를 가장하여 징세 대상에서 빠진 것들로 국가재정을 위협함. 관리, 양반, 아전 등을 가리지 않고 횡행하였음.)로 몰아 모두 몰수한다고 합니다. 게다가 주민등록사업에 노비가 포함된다니! 노비가 사람입니까? 허허!"
제일 상석에 앉은 사람이 탄식하며 웃었다. 그러자 그 옆의 사람이 말을 받았다.
"저는 김자점 그자의 말을 들으니 피가 꺼꾸로 솟을 일입니다. 자기 노비를 속량한 것은 그렇다치지만, 지부상소는 선을 넘었습니다. 그건 절대로 안됩니다. 반상의 도가 무너집니다. 절대로 안돼요."
김자점은 여기에서도 화두에 올랐다. 그 옆의 사람은 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뿐입니까? 요즘 공공사업으로 풀린 쌀때문에 쌀값이 폭락했습니다. 호주에서 들여온 쌀과 밀이 배 한척마다 수천석씩 들어왔습니다. 거기에 가격도 싸게 들여오니 조선의 쌀을 찾는 사람들이 갈수록 줄어듭니다. 감자, 고구마, 옥수수도 사람들이 즐겨찾아 더 큰 문제에요. 우리 쌀이 값어치가 떨어진 것만큼 우리 재산이 줄었습니다. 이게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노비들도 그렇고 소작을 치려는 양인들이 아예 없습니다. 서로 배를 타려고 하고, 장사를 하려고 하니 말입니다."
다른 사람은 한국은행과 화폐를 비판했다.
"저는 그것보다 한국은행에서 발행한 화폐가 더 요사스럽습니다. 공공사업은 물론이고 조정관리의 월급을 죄다 화폐로 지급합니다. 이제 쌀로 물건을 사기 어려워졌어요. 쌀을 시장에 내다 팔아서 화폐를 구하고, 그 화폐로 물건을 사야합니다. 쌀을 기준으로 물건을 살 수 없으니 세상이 꺼꾸로 돌아갑니다. 시장이란 곳에선 쌀가격이 갈수록 떨어지니 우리의 손해가 막심합니다. 이젠 쌀 20석으로도 비단1필을 살 수 없어요. 쯧쯧."
그들이 처음 모인 이유는 서얼허통과 노비해방 등에 대한 김자점의 지부상소를 탄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갈수록 그 이야기는 조정의 양전사업, 주민등록사업을 넘어 화폐 등 그들의 경제문제로 귀결됐다.
사대부들의 권력 원천은 대지주인 그들의 땅이었다. 그 땅에 얽매인 노비와 소작농에 의해 생산된 쌀은 화폐와 같은 교환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쌀값이 폭락하면서 그들의 재산가치는 크게 줄어들었다.
게다가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이 철폐되면서 거주이전의 자유가 생겼다. 그것은 지방인구가 한양같은 대도시로 이동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더 먼 호주로 이주하는 사람도 늘었으니, 조선 사대부들의 땅을 경작할 사람들이 갈수록 줄었다.
당장, 호주로 가면 넓은 땅을 받아서 경작할 수 있는데 뭣하러 남의 땅을 비싼 소작료까지 내면서 경작할까? 그리고 공공사업과 상공업의 활황으로 소작보다 수입이 월등히 좋은 공공사업과 상공업에 사람들이 몰렸다.
이로 인해 농촌의 공동화(空洞化)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그들 중, 말석에 앉은 사람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힘을 모으려고 해도 아랫 것들이 말을 듣지 않을 겁니다. 지금 천연두 예방접종을 보세요! 마마를 쫓아냈다는 말에 저잣거리 민심이 어떤지 아실거 아닙니까? 그거 뿐이 아니에요. 착호갑사들이 설치고 다니니, 이것도 마찬가집니다. 나랏님이 호환마마를 쫓아냈다고 무지렁이(주:일이나 이치에 어둡고 어리석은 사람.)들도 칭송이 자자합니다."
그러자 가장 상석에 앉은 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 민심이야 잘 알고 있어요. 그보다 중요한 건, 여론이 갈리고 있다는 거요. 호주시찰단과 호주유람단을 다녀온 자들이 말해준 참람(僭濫 : 분수에 넘쳐 너무 지나친)한 것들(주:사람을 것들로 표현하며 사람이 아니라고 표현함)을 보시오. 호주에는 분에 넘치는 짓거리를 하는 것들이 대다수에요. 호주에 다녀온 그들도 그런 사치에 물들어버렸소. 이러다간 이 조선이 망하게 될거요. 우리 안에 적(敵)이 늘어나고 있어요. 더 이상 늘어나기 전에 일어서야하오."
맞아요!
맞습니다!
옳소!
내실 안의 사람들은 모두 동의했다.
그 중에 가장 적극적인 사람은 상석과 말석에 앉은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이며 내실의 사람들을 둘러봤다. 그리고도 그들의 이야기는 오래도록 계속됐다. 결국 그 모임이 파하고 사람들이 떠났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은 좀 더 남아 이야기를 나눴다.
그 두 사람은 불과 5년 전에 이 지역에 자리잡은 신흥 부자였다. 이 두 사람은 지역에서 가장 큰 재산을 가지고 있는데다, 넉넉하게 인심을 썼다. 그래서 모임에 쉽게 참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추천으로 모임은 갈수록 커졌다.
모임의 총 인원은 50명이 넘었고, 방금 모인 자들은 23명이었다.
두 사람은 좀 더 대화를 나누다가, 각자 말을 타고 흩어졌다.
이런 모임은 삼남(충청,전라,경상)을 중심으로 조선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지방 향촌의 이런 움직임에는 어떤 구심점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이 어떤 목적으로 이런 모임을 이끄는 지, 아직 아무도 몰랐다.
툭탁툭탁!
땅땅땅!
드륵드륵!
한양 대궐과 관청 사이의 노른자 땅 위에는 건축공사가 한창이었다.
그 건물은 대궐의 법궁보다 크게 지어지고 있었는데, 조선에서는 볼 수 없었던 양식으로 만들어진 석조건물이었다. 하지만, 호주의 서울에 다녀왔던 사람들은 이 건물이 호주 서울의 '의회(議會)' 건물과 매우 비슷하게 생겼다고 말할 것이 분명했다.
그것 하나가 아니었다.
대궐 앞에서 숭례문까지 이어진 대로의 좌우에는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 건물들도 석조건물인데, 앞이 뻥뚫려있어 괴이한 모양이었다. 건축공사를 하는 사람들 말로는 상점을 만든다고 했다. 이 역시 호주유람단을 다녀온 사람들이 확인해줬다. 각종 상점의 진열대가 놓을 것이며, 그 진열대는 유리로 만들어져서 안이 보일 보이게 만들 수 있다고 말이다.
종로 거리에는 또 다른 구경거리가 연신 들어서고 있었다. 신촌운동(新村運動)의 견본주택 전시장이 들어섰다. 거기엔 각종 가구와 식기구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신촌의 견본주택에는 기본적으로 석탄난방을 하도록 했다. 그 외에도 새로운 의복과 구두가 인기상품이었다. 한양 사람들은 궁금했다. 이런 궁금증은 호주유람단에 다녀온 사람들이 어느 정도 해소해줬다.
호주유람단의 효과는 정말 대단했다.
풍문만 믿고 멀리 호주까지 이주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보는 것이 믿는 것'이란 격언이 있다.
조선 백성들의 마음엔 드디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훗날, 이민열풍(移民熱風)이라 불린 뜨거운 바람이었다.
한양, 이민국 조선지부 안가.
커다란 방에는 단 한 사람이 책상에 앉아 있었다. 출입문 맞은 편 벽에는 커다란 지도가 걸려있었는데, 그 지도는 조선 전체를 그려놓은 전도(全圖)였다. 지도는 매우 세밀한 금이 그어져 있었고, 그 금의 가운데에는 각 지방 이름이 세필(細筆)로 적혀 있었다.
지도가 걸려있는 벽에서 가까운 책상에는 한 사람이 앉아서 책자를 읽고 있었다. 그 책자에는 세필로 적힌 수많은 글자들이 어지럽게 나열되어 있었다. 책자의 두께를 생각하면 적어도 수백장은 될 법한 양이었다.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 책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읽던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책자을 놓고 뒤로 돌아 지도를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생각에 빠진 그에게, 누군가 다가오더니 그에게 말을 걸었다.
"지부장님! 삼남에서는 이미 조직결성이 끝났습니다. 나머지 지역에서도 조직이 결성됐고, 삼남만큼은 아니지만 과반수는 챙겼습니다. 파천(破天)은 어찌 할까요?"
이런! 지부장님이란 소리를 들은 사람은, 놀랍게도 개노미였다.
개노미는 상대를 돌아보며 잠시 고개를 끄덕이고 묵직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진행시켜!"
개노미가 진행시키라는 말을 하자마자, 개노미의 수하로 보이는 자는 감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는 말없이 돌아서서 문을 나섰다. 개노미는 그가 문을 나서는 것을 보곤 책상자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상념에 빠졌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이다!'
개노미의 눈에선 불길이 이글거렸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싸움, 건곤일척의 대결이 이제 곧 벌어질 것이다.
삼남을 필두로 선비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 선비들은 조선 팔도 방방곡곡에서 한양을 향해 출발했다. 그들의 얼굴엔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의가 역력했다. 그 숫자는 하나 둘이 아니었다. 들리는 말로는 삼남의 어느 한 향촌에서만 스무명이 넘는다고 했다. 그들이 움직이는 길목 곳곳마다 북적거렸다. 누구는 걷고, 누구는 가마를 탔으며, 누구는 말을 탔다.
그들이 모이기로 약속한 날짜가 다가올수록 한양을 향하는 도로는 몸살을 앓았다. 개국이래, 조선 사대부들이 이렇게 많이 모여든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이미 한양에 도착한 선비들만 수백이라는 말이 돌았다. 호사가의 말로는 수천 수만이 모일 거라고도 했다.
유래없는 사대부들의 대이동은 마치 태풍처럼 한양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조선 사대부들의 굳은 결기는 한양, 아니 조선을 날려버릴 태풍의 눈이 될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이 절치부심하며 준비한 연명상소와 지부상소.
그것이야말로, 그동안 잘못된 것들을 전부 뒤집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대궐 앞이 좀..., 아니 많이 이상했다.
한양, 대궐 앞 대로.
큰 길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긴 장대에 깃발이 달려있었다. 그 깃발에는 조선 팔도의 지명이 크게 적혀있었다. 그 깃발들 아래에는 탁자와 의자가 놓였는데, 그 의자마다 사람이 앉아서 크게 소리치고 있었다.
"경상 선비들 모두 이쪽으로 오시오!"
"평안도에서 오신 분들!"
"충청! 충청에서 오신 분!"
"..."
"..."
그렇게 사대부들을 불러모은 사람들은, 자신을 '사무원'이라고 불렀다.
대궐 앞에 모인 지방 사대부들은 영문도 모르고 사무원들의 안내에 따라 어디론가 이동했다. 지방 사대부들을 인솔한 자들은 한양 각지의 커다란 기와집으로 안내했다.
그 기와집에는 방마다 깨끗한 침구가 정리되어 있어, 머무는 사람이 편히 쉴 수 있게 준비되어 있었다. 그 기와집의 빈 방이 거의 찼을 무렵, 그 집의 안내인이 식사할 수 있게 술과 밥을 준비했다고 외쳤다.
사대부들은 그 집에서 든든하게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며 편하게 쉬었다. 다음 날 일어나보니 다시 아침을 준비했다고 해서 먹었다. 사대부들이 이제 나가려고 준비하니, 안내인이 나와서 지방 사대부들의 대표자를 찾았다.
사대부들은 향촌마다 앞다퉈서 올라왔기에 대표자라는 것은 알지 못했고, 그저 목소리 큰 사람들이 이끄는 대로 올라왔었다. 그래서 얼떨결에 대표자를 한명씩 선정했는데, 대부분이 목소리 크고 앞에 나서기 좋아하는 자들이었다.
그렇게 사대부들의 대표자는 안내인을 따라 어디론가 나갔다. 그렇게 대표자를 기다리던 사대부들은 다시 밥과 술을 먹고 이야기를 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 대표자들은 저녁 늦어서야 기와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계속 대표자만 불려가는 상황이었다.
사대부들은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국왕에게 목숨을 걸고 연명상소와 지부상소를 올리기 위해 한양까지 단체로 올라왔는데, 연명상소와 지부상소는 커녕 계속 놀고먹는 상황이었다. 기와집의 술과 밥은 무척 맛있었고, 방은 편히 쉬기에 좋았다. 하지만 상경한 목적과는 그 괴리가 심하기에 점차 불만의 목소리가 나왔다.
그때, 각 지방의 대표자들이 사대부들에게 몇가지 사항을 발표했다.
하나, 각 도별로 사대부들의 대표자를 선발한다.
둘, 각 도의 사대부 숫자에 비례해서 대표자를 선발한다.
셋, 대표자의 의견은 각 도 전체 의견을 대표하는 것으로 본다.
넷, 대표자는 각 도에서 명망있는 자를 다수 득표자 순으로 선출한다.
다섯, 대표자의 임기는 3년이고 연임할 수 있다.
여섯, 대표자는 의원으로 임명되어 의회에 소속된다.
일곱, 의원들은 조선 사대부를 대표하여 국정을 논하고 입법을 담당한다.
여덟, 의원들은 국가가 지급하는 세비를 지급받고 지위는 재상의 예에 준한다.
....
대표자의 발표사항을 들은 사대부들의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연명상소와 지부상소라는 것이 사라지고 없었다.
사대부들은 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을 지지할 동료 사대부를 찾기 시작했다. 각자의 세를 불리기 위해 기와집은 떠들썩해졌다. 그들은 각 방마다 메뚜기처럼 뛰어다니며 술을 찾았고, 의리를 이야기했다. 그 곳에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등의 말은 아주 흔해빠진 소리였다. 그들은 학맥, 인맥, 혼맥 등을 거론하며 격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그 싸움은 밤새 이어졌고, 치열한 세대결 속에서 대표자들이 결정됐다.
그렇게 조선 사대부를 대표할 최초의 의원은 총 60명이었다.
그들은 승리자였고, 그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패배한 자들은 쓰라린 속을 달래며 울분을 삼켰다.
패배를 인정하지 못한 일부 사대부들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 다신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조선 최초의 의회가 열렸다.
그들의 가슴은 더할 수 없을 만큼 부풀어 올랐다.
예정된 결말
한양, 의회(議會) 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