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조선의 사대부 문제는 현재진행형이었다.
정보부와 이민국의 보고에 따르면, 사대부의 반발이 조금씩 우려된다고 했다. 그리고 정보국과 이민국의 기존 계획대로 작전이 진행 중이라고 했다. 정보국은 정보국대로, 이민국은 이민국대로 말이다.
수상도 비루했을망정 양반 사대부였다.
그래서 그들의 속마음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들의 아성을 깰 방법은 다른 것이 없었다.
하지만 국왕 우진은 혁명이 아니라 개혁을 원했다.
그래야 조선이 순항할 수 있다고 말했다.
수상도 동의했다.
그래서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떡밥을 던졌다.
의회라는 떡밥을.
조선의 사대부들은 의회에서 싸우면 된다.
박터지게!
호주시찰단과 호주유람단은 모두 의회를 방문했다.
그들은 의회를 통해 여론이 결집되는 과정을 확인했다.
조선의 의회는 한국의 사례처럼 사대부만의 것이 아니게 될 것이다.
조선 사대부들은 의회에서 소수가 될 뿐이고, 각 이익단체들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면서 조선도 한국처럼 입헌군주제와 권리장전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국왕과 수상은 그렇게 예상했다.
과연 그럴 지는 지켜봐야겠지만.
그 포문은 국왕 우진의 마음 속 1등 공신 김자점이 열었다.
스페인 총독의 욕망
헤로니모 데 실바(Jeronimo de Silva)!
올해 갓 부임한 스페인령 필리핀 총독이었다.
그런데도 예전 총독들과 같은 소리를 했다. 그리고 그 요청에 대한 애절(?)한 편지도 함께 왔다. 무슨 내용인지 읽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뻔하지 뭐.
그 내용은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요청, 아니 요구였다.
첫째, 명나라를 함께 정벌하자는 것.
둘째, 그것이 안된다면 명나라 안해(安海 : 현재 대만과 중국 본토 사이의 해역을 뜻함. 명나라의 유럽무역은 이 지역으로 제한되므로 가장 빈번하게 유럽선박이 항해함.)에 출몰하는 중국해적(상단)을 섬멸하고 대만을 함께 분할하자는 것이었다.
셋째, 필리핀의 한국조선소에서 건조되는 쾌속선을 더 많이 구매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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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주 : 16세기 중반에 중국해적들이 스페인령 필리핀을 공격한 적이 있습니다. 그로 인해, 스페인 총독들은 명나라 해적과 오랜 기간 싸웠고, 아예 명나라를 정벌하자는 탄원을 필리페2세에게 간곡히 요청했습니다. 스페인 국왕은 여러가지 이유로 거절했지만 필리핀 총독들은 자기들만으로도 충분히 정복이 가능하다고 주장(코르테스가 아즈텍을 정복한 사례)하며 탄원을 계속했습니다. 그것에 대한 연장선에 있다고 보시면 이해하시기 편할 겁니다.
거기에다가 대만과 중국 사이의 안해(安海)에는 유명한 중국상단(사실상 해적이나 마찬가지인, 명나라 사람 이단의 상단이 대표적임.)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정지룡이라는 걸출(?)한 해적이 이단의 상단을 통일합니다. 그리고 정지룡의 아들(정성공)이 대만을 차지해서 정씨 왕국을 세웁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글을 썼습니다. 참고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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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필리핀 총독들은 그동안 지겹게 요청해왔다.
왜냐하면, 동아시아의 해상패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쥐고 있었으니까.
맨 처음에는 스페인 총독들이 대놓고 우리에게 갑질을 했었다.
하지만 우리 무역상단의 배가 10척이 넘는 순간부터 갑과 을이 역전됐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 무역상단의 배만 수백 척이 넘는다. 거기에 해군전함, 여객선을 합치면 천척이 넘는 해상대국이다.
물론 거함(巨艦)은 그리 많지 않았다. 호주의 연안을 빠르게 움직이면서 사람과 물자를 손쉽게 나를 수 있는 스쿠너 등 소형함이 대다수였다. 그 선박들은 필리핀의 조선소에서 매년 수십척씩 만들고 있다.
필리핀의 열대수림엔 선박의 선재로 쓸 수 있는 엄청나게 큰 나무들이 수없이 많았고, 또한 그 비싼 선박용 밧줄을 만들 재료가 무궁무진했다. 만약 조선에서 배를 만들어야 한다면? 큰 나무도 없고, 그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기에 이렇게 많은 배를 만들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역대 스페인 총독들과 밀월관계를 맺고 필리핀에 대규모 조선소를 세웠다. 건식 도크로 만들어진 조선소에서는 동시에 10척씩 건조가 가능했다. 스페인도 내 덕분에 꿀을 빨고 있다. 내가 만든 스쿠너, 클리퍼 등 고속함들은 대항해시대의 종결자에 가까운 배들이니까. 거기에 윈드재머도 시험제작중이었다.
내가 만든 클리퍼함은 호주 서울에서 조선 부산까지 빠르면 19일에서 늦어도 25일이면 충분히 도착했다. 그것은 물류혁신, 아니 혁명과도 같았다. 스페인 총독은 나의 배에 군침을 흘렸다. 내가 스페인에 팔아먹은 배만, 10년 넘게 100척이 넘었다.
하여간, 이 스페인 총독들은 지치지도 않는가보다.
이번에는 나도 그냥 웃어넘기기 어려운 이유가 있었다.
가도의 모문룡을 제거하기 위해 스페인 총독의 힘을 빌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뭔가 이득을 주긴 줘야했다. 내 생각엔 그동안 충분한 이득을 줬다고 생각했지만, 각자의 계산은 다른 법이다. 나에겐 나의 계산, 스페인 총독에겐 그의 계산.
첫째 명나라 정벌은 그냥 무시하고, 둘째 안해(安海)는 좀 더 검토해 볼 생각이었다. 대신, 셋째 쾌속선은 별 문제가 없으니 더 많이 건조해주기로 결정했다. 나도 조선에서 운용할 연안용 쾌속선이 수백척은 더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걸 위해 필리핀에 신규 조선소도 지어야할 것이다. 조선의 기존 선박건조기술자들도 필리핀 조선소에 보내 새로운 조선기술도 가르치고, 새로운 조선공들도 추가육성할 생각이었다.
조선 연안의 쾌속선은 조선 상단과 정기여객선 회사에서 필요한 수량 등을 잘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한국의 여러 무역회사들은 다년간의 경험으로 필요한 선박을 시기에 맞춰 건조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 상단은 그런 경험이 없으니 당분간 다른 무역회사의 배를 빌려서 사용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런데도 배가 필요하다면?
당분간 부족한대로 운용하고 필요에 따라 추가건조하도록 설득했다. 정기여객선 회사는 지금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정기노선이 대호황이었으니까. 정기여객선은 개인들의 소화물까지 운송하면서 추가이익을 얻었다. 나는 조선병합과 동시에 정기여객선 수요가 폭증할 것을 예상했다. 그래서 정기여객선 회사에 엄청난 숫자의 추가선박건조를 반강제했다. 그땐 아마 나를 엄청 욕했을거다. 그러나, 지금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조선소에 추가건조를 독촉하고 있었다.
그렇게 정리될 일이었는데,
뭐! 필리핀 총독의 요구사항이 하나 더 있다구?
스페인 필리핀 총독은 편지를 인편에 보냈는데, 그 사람은 필리핀 총독의 개인 집사였다. 그 집사는 이렇게 말했다.
"존귀하신 국왕전하께 대 스페인의 필리핀 총독이 감히 중매를 하고자하니 허락해주시길 간청드리옵니다! 그녀는........"
아! 너무 좋다.
난 하루종일 단꿈을 꿨다.
하늘을 나는 기분이 이런걸까?
일단 이 제안도 '킵' 해야겠다.
하루종일 표정관리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그렇게 나는 혼자서 온갖 망상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때, 일이 터졌다.
아! 나의 김자점이...
"자네 그 소식 들었나? 김자점 대감께서 집안의 모든 노비들을 속량시켰다는군. 노비들의 항산을 위해 계속 일하고 싶은 자는 월급을 주고, 독립하고 싶은 자는 땅을 나눠주고 말이네. 세상 오래살고 볼 일이야. 나는 김자점 대감이야말로 탐관오리의 전형이라고 보았었는데, 내 눈이 틀린 게지. 참 부끄럽군."
조선을 병합한 이후,
나는 김자점의 그 대단한 아첨(?)에 질려서, 그를 '호주시찰단 제1기'로 보내버렸다. 그에겐 특별히 수상, 의회 지도자들을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올 것을 명했다. 김자점은 울면서 가지 않겠다고 버텼지만, 어명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김자점은 눈물을 흘리며 호주로 떠났다.
그렇게 호주를 다녀온 김자점은 정보국 조선지부장에게 껌딱지 붙었다.
그리고 갑자기, 김자점은 집안의 노비들을 모두 속량시켰다. 조용히 속량시켰으면 아무 일이 없었을지도 몰랐다. 조정 대신 중에는 이원익 등이 제일 먼저 사노비를 전부 속량시켰었다. 그땐 아무 소문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김자점이 노비를 속량시키자 온 한양이 떠들썩해졌다.
내가 은밀히 알아보니 김자점의 수하들이 여기저기에 소문을 내고, 그것을 미담으로 연결지어 퍼뜨렸기 때문이었다. 역시 좋은 일은 알려야하나보다?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는 격언은 엿바꿔 먹은 모양이다.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김자점이 '호주시찰단 제1기'로 가 있는 동안에, 조정에서는 모든 관노비를 면천시켰다. '관노비해방령'은 그 관비들에게 월급을 주며 직접 고용하고, 호주에 이주해서 정착하고 싶은 관비들은 순차적으로 보내줄 것을 약속했다. 이주가 되기 전에는 계속 월급을 주며 고용할테니 안심하라고 했다. 대궐과 관아에서 숙식하는 자에게도 집을 구할 때까지 계속 거주하도록 했다. 나는 전광석화처럼 이 일을 진행했다.
내가 관노비를 해방시키면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이 그들의 경제적 자립이었다. 그걸 해결하지 못하면 그들은 다른 양반들에게 투탁(投託 : 경제능력이 없어 스스로 노비가 되는 것을 뜻함. 조선시대 노비의 상당수가 양반 등 대지주에게 투탁한 노비가 많았음.)할 것이 뻔했다.
이와 달리, 사노비 문제는 보다 복잡했다.
내가 관노비였기에 관노비의 일상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문제없이 '뚝딱' 처리했다. 그와 반대로, 사노비는 양반이나 양반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재산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래서 여러 개의 단계가 추가되어야 했다.
그래서 그 단계들을 차례로 밟아나가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정책들이 양전사업(토지측량사업), 주민등록사업, 공공사업(도로공사, 항만공사 등 관급공사), 한국은행과 화폐보급, 이앙법 전면시행, 구황작물(감자, 고구마, 옥수수, 땅콩 등) 소개 및 경작 장려, 신촌운동(新村運動), 오가작통법 폐지 등이었다.
이런 다양한 정책과 사업들을 통해 양반과 대지주에 예속된 노비들을 보다 온건하게 풀어내려고 했다. 이 정책들이 자리를 잡는 시점에선, 노비를 이용한 대토지의 경작이 그리 효율이 좋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었다. 이미 눈치챈 사람들도 무척 많았다. 그래서 이에 대한 반발이 수면 아래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이런 반발의 움직임은 정보국에서 수시로 보고하고 있었다.
이런 시점에서 김자점이 나선 것이다.
사실, 김자점이 나서지 않았어도 곧 해야할 일이었다.
이원익 등이 진행 중인 경장에 담길 내용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김자점이 눈치빠르게 나섰다. 그게 도움이 될 지는 잘 모르겠다.
"국왕전하! 서얼허통은 물론이고, 모든 사노비의 완전한 해방을 선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신분제도를 철폐해야 합니다. 이걸 해결해야 이 조선이 살 수 있습니다. 이 김자점은 아무런 사욕이 없습니다. 오직 조선의 미래만을 생각하고 나왔습니다. 소신 김자점 머리를 풀고 나왔습니다. 이 도끼로 소신의 목을 치소서! 흐흑."
김자점의 지부상소에 이원익을 비롯한 조정대신들은 크게 분노했다.
이미 사노비의 완전한 해방을 위해, 신분제의 완전한 폐지를 위해 순차적으로 정책과 사업을 진행중이었다. 그것은 조선 전체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완충 기간를 두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김자점이 급진적 주장을 담은 지부상소를 낸 것이었다.
김자점이 이원익을 비롯한 조정의 움직임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걸 아는 사람이 이러니 더 분노한 것이다. 이원익은 부들부들 떨며 김자점의 지부상소를 비판했다. 다른 조정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최명길은 더욱 분노했다.
최명길은 신분제의 철폐를 공론화하는 시기를 의회설립 이후에 진행하는 것에 대단히 만족했었다. 의회에서 다양한 의견을 나누고, 그 의견을 모아 신분제 철폐를 공론화하여 합의처리한다. 그러면 신분제 철폐에 대한 극심한 반발이 쉽게 수그러들 것이라 생각했다.
만약, 국왕이 노비해방령을 임의로 선포하면 어찌 될까?
일단 국왕의 힘에 굴복하고 노비해방령이 이뤄지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일 뿐이고 실질적인 노비해방령에는 더 많은 재원과 시간이 소요될 것이 뻔했다. 나는 혁명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의회에서 치고박고 싸우길 원했다.
그래서 최명길은 경장에서 의회설립 부문을 맡아 눈코뜰새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최명길은 얼마나 분노했는지, 아예 김자점의 목을 그 도끼로 쳐야한다고 주장했다. 김자점이 조정의 대사에 먹칠이 아닌 똥칠을 하고 있다고 극언했다.
하지만, 나는 씨익 웃으며 대궐 앞에 나섰다.
그리고 김자점이 머리를 풀고 그 옆에 둔 도끼를 봤다. 좀 녹이 슬긴 했는데 사람 목도 잘리긴 할 것 같았다. 다시 속으로 웃고 난 다음, 크게 심호흡을 하고 김자점에게 다가갔다.
으헝헝!
(눈물)뚝뚝!
나는 직접 대궐 앞에 나가서 김자점의 손을 잡고 울었다.
그리고 김자점이 든 도끼를 빼앗아들고 거듭 울었다. 돌아가신 엄마를 떠올리며 울고 울었다. 이상하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아마 다른 사람이 봤다면, 김자점의 지부상소에 감동해서 그런 줄 알았으리라!
내 눈물을 본 김자점의 처음 표정은 '아니 이런 미친 놈이?'였다. 물론 그런 표정은 극히 짫았기에 나도 겨우 눈치챌 수 있었다. 김자점은 억지 눈물을 짜내며 나와 함께 울었다. 그러기를 십여분, 충분히 울고 난 후에 김자점을 위로하고 돌려보냈다.
나는 김자점의 상소에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다.
조선팔도 곳곳에서 김자점의 자발적 노비 속량과 지부상소가 화제에 올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김자점의 미담을 우러러 칭송했다.
하지만 김자점의 행동은 그와 반대 입장에 선 사람들의 집단행동을 자극하는 방아쇠를 당겼다.
그 불온한 움직임은 조선 각지의 서원에서 시작됐다.
적전분열(敵前分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