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225)

이제 대궐에 가면 할 일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호주에 있다보니 추위를 잘 못 느꼈는데 조선의 날씨는 참 추웠다.

압록강 북쪽은 더 추울텐데...

이거 미리 대비해야겠지?

어이쿠! 정말 할 일이 많은 거 같다.

이괄의 난 11 : 폭풍이 지난 후에

1624년 2월 12일 오전, 한양 성내.

마치 태풍이 지나간 것처럼 뒤집혀진 세상 위로 고요만이 남은 듯 했다. 

한양의 함락과 왕의 파천, 그리고 단 하룻밤의 꿈같은 사건들.

이괄의 꿈은 그렇게 사그라졌고, 왕이 돌아왔다.

그 사태가 너무나도 컸기에 한양 백성들이 감당하기 벅찼다. 

세상 전체를 놓고 벌어진 일이라면 너무나 작은 일이겠으나, 조선의 한양 백성들에게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솟아나는 일과 다름이 없었다. 이번 대사건은 천하를 휩쓴 전염병이나 전란과도 같아서 사후 처리가 중요했다. 

그때, 아침일찍부터 훈련도감군들이 한양 곳곳을 누비며 우렁차게 외쳤다. 

"한양 사람들은 들으시오! 이번 난리에 다친 사람들은 큰 거리마다 구호소가 있으니 치료받으시오!"

"한양 사람들은 들으시오! 일거리가 없는 사람들은 큰 거리로 나와 도로 청소를 하시오! 그 댓가로 밥도 주고 일한 삯도 줄거요!"

"한양 사람들은 들으시오! 이번 난리로 피해를 본 사람들은 큰 거리에 나와있는 구호소 관리들에게 신고하시오! 그럼 피해보상을 해주겠소!"

"한양 사람들은 들으시오! 이번 난리에서 이괄에게 가담했거나 협력한 사람들 모두 불문에 붙이겠소.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시오!"

또한, 한양 곳곳에 같은 내용의 방이 붙었다.

한양 곳곳은 다시 떠들썩해졌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거리에 나선 것이었다. 

평소 한양 거리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북적거렸었다. 하지만 왕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모두 숨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대사건 이후에 으례히 있었던 날선 피바람이 또다시 한양 대궐을 휩쓸고, 한양 성내에도 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양 큰 거리마다 커다란 천막들이 연이어 쳐졌다.

천막 앞에는 큰 깃발에 한글과 한자로 '구호소'라고 쓰여서 내걸렸다. 누가 봐도 의원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누가 봐도 관리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주위에는 쌀과 마른 생선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구호소 한켠에는 커다란 무쇠 솥들이 걸려있었고, 환자를 먹일 죽, 밥과 도로청소한 한양 백성들을 먹이기 위한 설렁탕이 가득했다. 아침 일찍부터 도로를 청소한 한양 백성들은 천막 아래에서 푸짐하게 설렁탕을 먹고 있었다.

그것들은 바로 입소문으로 한양 곳곳에 퍼졌다.

아픈 자는 치료해주고, 배고픈 자는 밥과 쌀을 줬다. 그리고 일한 자는 밥과 삯까지 챙겨줬다. 배고픈 자들이 밥을 먹고 기운을 차린 다음에는 도로청소 일을 하도록 권했다. 한양 백성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나와서 도로를 청소하고 난리의 상흔을 없앴다. 

한양은 거리거리마다 놀라울 정도로 깨끗해졌고, 민심은 안정되었다.

난리통에 쌀값이 오를거라 매점매석했던 상인들은 엄청난 손해를 봤다. 돈이 없는 백성들은 구호소에서 밥을 먹고, 일해서 받은 삯이 있으니 상인에게 쌀을 살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경상의 주요 상점까지 쌀 가격을 난리 이전과 똑같이 받았다.

그 소식에 한양을 떠나 도주했던 도성수비군, 순라군, 조정관리들도 더 이상 눈치보지 않고 돌아오기 시작했다. 대궐의 궁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괄에게 기대했던 한양백성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를 바꿨고, 관망했던 자들은 무신경하게 역시 그려러니 했다.

한양의 백성들은 이제 의심하지 않았다.

이괄의 난으로 촉발된 난리는 완전히 끝났다.

1624년 2월 12일 오후, 대궐 인정전(仁政殿).

왕의 자리인 옥좌는 비어있었다.

하지만 그 아래에선 조정대신들이 열띤 논의 중이었다. 

그 논의의 중심엔 박승종, 이원익, 최명길 등이 있었다. 그들은 이괄의 난으로 무너진 조정의 행정장악을 다시 확고히 하기 위해서, 조선 각지에 선전관을 보내 각종 현황파악에 힘쓰고 있었다.

오후부터는 파천에 호종하지 못했던 중견 문관들과 하급문관들이 돌아왔다. 그 결과 일이 빨라졌고, 전체적인 틀이 잡혀 어려운 일은 없었다. 다만, 바빴을 뿐이었다. 

그런데, 인정전 조정대신들의 자리에는 작은 탁자가 놓였고, 그 앞에는 음식들이 올려져있었다. 왕이 업무를 보는 자리에 그 신하들이 자리잡고 음식을 먹으며 일하고 있는 것이었다.

조선에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이전의 조선이라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원익은 탁자에 올려진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물고 장계를 읽고 있었다. 박승종은 커피를 한모금 마시며 잠시 쉬고 있었다. 그 옆의 최명길은 옆의 문관과 샌드위치를 먹으며 담소하고 있었다. 인정전 안은 커피향기로 가득했다.

그들은 어제 오후부터 인정전을 떠나지 못하고 계속 일했다.

잠은 대궐의 빈 방에서 잤다. 왕이 특별히 허락한 것이었다. 대궐은 왕의 공간인데도 말이다. 조정대신을 비롯한 모든 관리들이 대궐에서 먹고 자고 일하고 있었다. 그만큼 바쁘게 돌아갔다는 뜻이다.

그러기를 한참, 이원익이 기지개를 펴며 일어서서 말했다.

"이제 얼추 끝난 듯 하오! 모두 집으로 갑시다. 집에서 푹쉬고 내일은 정오에 대궐로 모이시오. 국왕전하께서 우리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실거요."

이원익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나왔다. 서로 수고했다며 격려하길 잠시, 재빨리 인정전을 나가 집으로 향했다. 피곤에 찌든 모습과 달리 그들의 발걸음은 힘찼다. 앞으로 최소 한달은 고생확정이지만, 그만큼 커다란 댓가를 받을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퇴궐했다.

1624년 2월 13일 오전, 대궐 인정전(仁政殿) 앞.

도원수 장만, 정충신 등 관군 장수와 군관들은 경악했다.

그들은 왕이 파천케한 죄에 대해 벌을 청하기 위해, 모두 무장을 벗고 죄인의 복장을 하고 입궐했다. 그들은 대궐 앞에서 무릎을 끓고 머리를 조아렸다. 왕의 의심과 분노를 산 이상, 오직 그것만이 살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충성의 대상인 왕이 바뀐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연로한데다 몸이 좋지 않았던 장만은 큰 충격을 받고 쓰러졌다. 그들의 구심점이었던 장만이 쓰러지자 정충신 등 장수들은 어쩔 줄 몰랐다. 그들이 대궐에 오면서 하급 군관들은 도감군의 인솔하에 도감군영으로 가버렸고, 그들의 주위엔 금군들이 삼엄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그때, 정충신의 앞에 그가 나타났다.

정충신은 놀라 소리쳤다.

"아니....어찌 그대가?"

그는 놀란 정충신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그렇게 됐소이다. 다들 아시겠지만 하늘이 바뀌었소. 그대로 따를 분들은 우측으로 서시오. 단 한번이오."

도원수 장만이 쓰러진데다가 무장없이 들어온 그들이 금군의 상대가 될 순 없었다. 게다가, 조선에서 무관에 대한 대접은 보잘 것이 없었다. 반정 당시에도 무관들의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가 왕이 되든 무관들에겐 상관없었다.

몇몇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우측으로 섰다. 그러자 쓰러진 장만, 정충신을 제외한 모두가 우측에 섰다. 그 사이에 장만은 들것에 실려 나갔다. 결국 정충신만이 충격에 떨며 그의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대가 원한다면 아무 일 없이 보내주겠소. 그대가 부산에서 내게 베푼 후의에 보답하는 것이라 생각하시오. 다시 묻겠소. 우측으로 서시겠소?"

정충신은 그의 질문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는 조선을 떠났고, 자신이 부산의 만호로 있을 때 그를 도와줬었다. 그런데 십수년만에 이렇게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상상치 못한 일에 사람은 충격을 받는다. 게다가 왕이 바뀐 상황에 그가 나타났으니 그 충격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정충신은 노비출신을 벗어나 고위 무관이 된 자였다. 반정에서도 신경쓰지 않고 자리만 지켰다. 이번 이괄의 난에서는 억울하게 무고를 당했기에 그저 살기 위해 단기필마로 도원수 장만의 막하에 합류했을 뿐이다. 그래서 왕이 누구든 상관없었다. 

정충신은 결국 우측에 섰다.

그는 그걸 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국왕전하께서 그대들의 공을 치하할 것이오. 금군을 따라가서 편히 쉬고 있으시오. 곧 사람이 가리다."

그는 그 말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그들도 금군의 인솔로 자리를 떴다.

대궐에서 도원수 장만의 군권을 회수함과 동시에, 도원수 장만의 막하에 있던 관군들은 모두 흩어졌다. 훈련도감군의 군관들이 관군진지에 도착해서 개별적으로 구분해서 적절하게 처리했다.

우선, 삼남에서 번상병으로 올라온 군사들은 후한 상급을 받고 각자 고향에 내려가도록 했다. 그리고 고향에 내려가면 발급한 확인증을 관아에 내도록 했다. 그것으로 군역을 마친 것을 확인하고 그간의 월봉을 채워준다고 약속했다.

둘째, 북방에 배치되었던 자들은 원래 위치로 돌아갔다. 그들도 후한 상급을 받았다. 그 군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도 공에 따라 추가적인 보상을 약속했다. 앞으로 월봉은 충분하게 지급할 것임을 알려줬고, 북방 각지에 충분한 물자를 공급하겠다고 했다. 그들도 만족해서 각지로 떠났다.

마지막으로, 조총병과 기병 등 특수병과에 해당하는 자들은 따로 구분해서 명령을 기다리도록 했다. 다른 부대에 배속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들에게는 높은 월봉과 좋은 무기 등을 약속했다. 조총병과 기병도 만족했고 그들은 한양으로 들어와 재편될 군영에 들어갔다.

정말 폭풍과도 같았던 일주일이 지났다.

한양을 비롯해 조선 전역이 안정을 찾았다. 

왕이 바뀐 것에 별 다른 저항은 없었다. 이제부터 시작될 개혁에 어떤 반응이 있을 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피로 점철된 혁명을 원하지 않는다. 조선 만백성이 감내할만한 개혁을 소망한다. 그 개혁은 착착 진행중이다.

그 개혁은 단시일 내에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호주의 한국에서 큰 성공을 경험했다. 그 성공경험과 노하우로 조선경제개발계획을 수립했으니 믿어볼 만 했다. 한국의 직원들과 기술자들도 속속 들어오고 있다. 우리는 한국과 조선 두 개의 나라가 아니다.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당분간 양국체제를 유지하겠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지난 일주일 동안 가장 고민한 것은 이괄의 난이 초래한 북방군의 괴멸이었다.

이괄의 난으로 발생한 인명피해는 대략 3만명이 넘었다. 이괄군과 관군에서 2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외에 관리, 민간인들의 인명피해도 엄청났다. 북방군은 거의 와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평안도와 황해도의 북방군이 약 3만명인데, 그 중에서 사망 1만7천명이고 부상이 3천명이었다. 그 부상자는 치료후에도 전투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결국 북방군은 1만명만 남았다. 따라서 조선의 기존 군사전략에 따른 북방 방위는 완전히 무너졌다. 

내가 아는 역사 지식으로는 정묘년과 병자년에 후금의 침입이 있었다. 정묘년은 1627년이니까 지금으로부터 불과 3년 후였다. 전쟁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예 침략할 엄두도 못낼 정도의 국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3년으로 불가능한 힘든 일이다. 그 사이엔 명과 후금의 사이를 이용해서 그 둘에게 빼먹을만큼 빼먹는 것이 좋을 것이다. 후금의 사정을 보면 사르후 전투 이후에 금지된 무역으로 고통받고 있다. 나는 그걸 이용해서 후금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후금의 힘은 다른 것이 아니다.

유목민족의 힘은 인구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병력과 그 기동력이다. 명은 만리장성과 산해관을 통해 그 기동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게 제한하고 있다. 내가 알기론 오삼계가 산해관 문을 스스로 열어주기 전엔 후금이 산해관을 넘지 못했다.

후금이 명을 정복한 것은 천운이 따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에겐 이괄이 있었고, 후금에겐 이자성과 오삼계가 있듯 말이다.

후금은 사실상 명에 무혈입성했다.

나는 그걸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후금이 정묘호란을 일으킨 원인이 조선의 친명배금정책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본질을 보지 못한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은 후금과의 무역을 통해 그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후금이 조선을 공격한 이유에는 분명히 친명배금정책도 있었다. 

하지만 그 주된 이유에는 배후의 위협과 동시에 경제적 이유가 컸다. 그 배후의 위협에는 조선 평안도 가도에 주둔한 명 장수 모문룡이 있었다. 또한 경제적 이유도 매우 컸다. 물론 지금은 한국과의 밀무역으로 죽지않을만큼 식량을 공급해주기에 크게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명은 늙은 호랑이지만 아직 이빨이 다 빠지지 않았다.

원숭환 등이 산해관 등에 포진해서 철벽을 구축했고, 홍이포도 들여놨다. 그에 더해서 후금에 설욕하기 위해 군사를 조련하고 있었다. 후금이 사르후 전투를 승리한 것은 천운이었다.

후금도 그걸 알기에 우리 무역회사에 홍이포를 구할 수 있는지 타진했고, 화약무기를 요구하기도 했었다. 후금의 고민은 앞엔 명이고, 뒤엔 조선이었다. 사르후 전투에서도 조선이 뒤를 쳤던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후금이 조선을 칠 때 명이 뒤를 공격하거나 후금이 명을 칠 때 조선이 배후를 위협할 것을 두려워했다. 사르후 전투같은 천운은 계속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향후 3년간 후금을 상대할 전략을 3가지로 압축했다.

첫째, 명의 배후위협을 잘 이용한다.

후금의 제일 대적(大敵)은 무조건 명이다.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후금은 명의 비옥한 영토를 탐내고 있다. 명도 그것을 알고 후금의 토벌을 벼르고 있다.

후금이 자력으로 산해관을 넘을 능력이 없는 한, 이는 유효한 전략이다.

둘째, 우리가 힘을 기르기 전까지 후금과 화친하는 것이다.

현재, 후금의 입장에서 조선은 조금 귀찮은 후방위협일 뿐이었다. 

호랑이는 아무리 늙었어도 물리면 죽는다. 하지만 현재의 조선은 그럴 힘이 없다. 조선은 기병이 적고 보병위주이고, 물산이 박해서 장거리 보급능력이 부족했다. 후금의 입장에서 성가진 정도지 커다란 위협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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