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225)

이원익은 잔에 커피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잠시 한숨을 쉬었다.

그런 이원익의 눈에는 열심히 일하는 최명길의 모습도 보였다.

다들 열심이었다. 이원익은 한숨을 마저 쉬고 다시 일에 빠져들었다.

하루가 무척 짧았다.

이괄의 난 10 : 시류영합

1624년 2월 10일 늦은 저녁, 한양 경상.

이 날은 이괄의 군대가 한양을 완전히 장악하고, 흥안군 이제가 즉위식을 마친 때였다. 

한양 백성의 민심은 이괄을 환영하는 측과 관망하는 측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양의 오랜 터줏대감인 한양 경상은 누구보다 그 민심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양 경상의 정보는 남달랐다. 

경상의 행수 김갑석은 노구를 이끌고 사랑채에 나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어르신! 말씀하신 물목은 전부 창고에 준비했습니다. 말씀과 동시에 내어놓을 겁니다. 쌀만 1만석이 넘습니다. 기타 잡곡, 소금 등 모든 물목들이 평시와 다름없는 가격에 살 수 있게 준비해놨습니다. 혼란을 틈타 매점매석이나 평시보다 가격을 올려받는 상점은 없도록 단단히 일러두었습니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있다면, 다신 경상과 거래할 수 없을거라 말해 뒀습니다. 제가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김갑석은 수하의 보고에 만족한 듯 웃으며 말했다.

"고생했네. 한양의 민심은 가장 먼저 시장 골목골목에서 알 수 있네. 자네도 그걸 알아야해. 사람은 먹는 것에 가장 민감하다네. 당장 먹을 쌀을 구할 수 없으면 불안해하지. 갑자기 가격이 비싸지면 화가 난다네. 불안한데다가 화까지 나면? 그게 폭동이 되고 변란이 되는거야. 내 말 명심하게. 내일부터 누구든 쌀을 일정량 이상 사재기 하지 못하게 철저하게 감시하고, 가격은 평시와 똑같이 받게. 우리가 손해보는 가격은 다른 것으로 충분히 보상받을게야."

김갑석의 말에 수하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대답했다.

"네 어르신! 저도 아주 믿기진 않지만, 명나라와 일본과 자유롭게 교역을 할 수 있을거란 말을 이젠 조금씩 믿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경상이 크려면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김갑석은 몹시 흥분했다.

그의 젊을 적 소원이 이제 이루어지려고 한다.

김갑석은 파릇파릇할 때, 명나라 사신행렬을 따라 북경에 다녀왔었다. 그 후에도 여러번 다녔다. 그래서 무역의 단맛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조선의 물산은 박하다. 하지만 무역을 통해 그걸 보완할 수 있었다. 아니 크게 일으킬 수 있었다. 당장 쌀이 부족하면 굶어죽는 조선의 백성이 허다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국내의 쌀 생산을 늘리는 일이다. 그런 쌀 생산이 부족하면, 다른 나라에서 수입하면 되지 않는가? 

김갑석은 그 무역의 맛을 보고, 해금령에 좌절했었다. 왕이 원망스러웠다. 그냥 숙명이거니 하고 포기하고 살았다. 그저 경상의 행수로 만족하고 살았다. 하지만 이제 꿈이 이루어지려고 한다.

내 아들, 손자에게는 세계를 누비며 당당히 장사할 수 있는 나라!

그리고 상인이 천대받지 않는 나라가 될 것이다.

그걸 위해서 김갑석은 약속을 지키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경상만이 아니었다.

만상, 내상에 최근 송상도 마음을 돌려서 돕기로 약조했다.

김갑석의 심장은 젊을 때와 마찬가지로 세차게 뛰었다.

1624년 2월 10일 늦은 밤, 한강 남쪽 어느 안가.

"크흠, 어차피 이미 끝난 일입니다. 저는 원래 주..아니 능양군 그 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우리 중에 구굉이란 자가 능양군의 외숙이라서 그냥 아쉬운대로 세웠을 뿐이지 않습니까? 이 김자점은 새로운 국왕전하께 충성을 다 할 것입니다. 국왕전하의 존안을 뵙자마자 성세(聖世)가 열릴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따라야 합니다."

서인 당여인 김자점은 고개를 치켜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김자점의 말을 들은 다른 서인 당여들은 기가 막혀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김자점을 보며 온몸을 부들대던 대사헌 이귀가 말했다.

"네 이놈! 주상의 총애를 잊고 어찌 그런 망발을...크윽..."

털썩!

대사헌 이귀가 가슴을 부여잡고 자리에서 쓰러지자 김자점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김자점의 얼굴엔 한점 부끄러움 없이 당당해 보였다.

"흥!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합시다. 이대감이 이괄의 역모고변을 무고한 것이 몇번이오? 이괄, 한명련, 정충신, 유비 등등 서인들만의 나라를 만들겠다고 그 짓을 한 것이고, 그래서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오? 내 말이 틀렸소? 그리고 그대야말로 광해군의 분조에서 동고동락을 하고도 뒤통수를 쳤지요. 광해군은 분조 당시에 동고동락했던 당신을 믿고 역모고변이 있어도 항상 봐줬소. 이대감은 충신불사이군(不事二君)이란 말을 내뱉으면 안되는 사람이오. 주상(광해군)의 총애를 가장 먼저 뒤통수친건 당신이지."

김자점의 비아냥거리는 소리에 이귀는 말을 못하고 가슴만 부여잡고 있었다. 주위 서인 당여들도 마찬가지였다. 조정대신 대부분이 서인이었고 남인과 북인은 극소수였다. 그래서인지 그 자리에서 남인, 북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 김자점이 또 말을 이었다.

"난 국왕전하께 충성할 것이오. 정보국 조선지부장님을 뵙고 결정했소이다. 그 분께서는 전부터 나와 개인적으로 술자리도 하고 그랬소. 그만큼 아주 친밀하오. 내가 그 분만큼 마음을 터놓고 술자리를 가진 사람은 단언컨데 없소이다. 서자출신? 지금이 어느 세상인데 신분을 가지고 왈가왈부하시오? 잘못된건 바로 잡아야지요. 이 김자점은 구시대의 잘못을 혁파하는데 온 힘을 다 바칠 것이오."

모든 사람은 김자점의 발언에 아연실색했다.

서인은 물론이고, 남인과 북인도 그랬다. 반정 1등공신이 그런 말을 하니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 와중에 김류를 비롯한 서인당여, 남인과 북인의 계산도 복잡해졌다.

그들이 보기엔 우진이 광해군의 친자식인 것이 너무나도 분명했던 것이다. 

우진이 데려온 폐세자 이지를 보면 더 확실했다. 우진이 광해군의 자식이고 광해군은 선조의 아들인만큼 우진을 새로운 국왕으로 모신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사실 없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폐주인 광해군을 상왕으로 모시게 될 경우였다. 그러면 서인들은 역적이 되니까 말이다. 그런데, 광해군을 상왕에 모실 일이 없다고 단언했다. 그 사실은 서인에게도 살 길을 열어준 것이었다.

서인 당여들의 마음은 점점 김자점에게로 기울고 있었다.

다만,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말이다.

1624년 2월 10일 늦은 밤, 한강 남쪽 어느 안가.

능양군은 분통해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대궐의 바닥에 엎드려 빌던 폐주(광해군)의 모습에 통쾌했던 것이 불과 1년도 되지 않았다. 1623년 3월 14일에 즉위했으니 말이다. 한강을 건너 처음 잡혔을 땐, 이괄의 무리인 줄 알았었다. 그런데 폐주의 자식이라니? 거기에 폐세자 부부도 살아있었다. 

폐주와 똑같은 얼굴을 보니 기가 막혔다. 

이젠 모든 것이 끝났다 자포자기했고,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또한, 순순히 옥새를 넘겨줬다. 강화도든 제주도든 유배가서 평생을 살게 될 것이니 미련도 없었다. 하지만 단 하나 남았다.

서인 이 놈들은 멱살잡고 같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괄의 난은 결국 서인들의 말도 안되는 무고때문에 생겼다. 특히, 대사헌 이귀 그 놈은 뼈째 씹어먹고 싶었다. 이귀는 폐주 광해군은 물론이고 자신까지 죽여버린 꼴이다.

서인들은 폐모살제니 명분이 아니라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반정에 나선 것이다. 물론 능양군도 같은 마음으로 참가했다. 하지만 정도껏 해야지. 숭용산림이니 역모고변이니 해도 너무한 것 아닌가. 

능양군은 너무 억울했다. 그리고 이를 갈았다. 이귀는 역모고변을 남발해서 이괄의 난을 일으켰고, 김자점은 바로 그 놈(우진)에게 붙었다. 하긴 자신이 반정에 성공하니 모두 자신에게 붙지 않았는가. 그와 똑같은 상황이니 또 그 놈(우진)에게 붙을 건 뻔했다.

사대부들이 말하는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같은 말은 바라지도 않는다. 최소한의 기본적 양심은 있어야 하지 않나? 능양군은 사대부란 것들의 허상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뼈저리게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능양군은 결심했다.

그 놈(우진)이 원하는대로 해주겠다고.

대신 자신이 원하는 것을 꼭 들어달라고 요구할 것임을.

1624년 2월 11일 오전, 강화도 앞바다.

"이 놈들아! 난 못 간다. 내가 조선의 왕이다."

폐주(광해군)는 선실에서 몸부림치며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폐비는 얌전히 선실에 앉아 곶감을 먹고 있었다. 거기에 커피도 함께 말이다. 폐주와 폐비를 태운 배는 유구국으로 가는 해군 연락선이었다. 

함장은 폐주 부부를 처음 인계받고 무척 놀랐다. 

폐주의 얼굴을 보니 국왕전하의 출생은 역시? 그랬던 것이다. 

함장은 국왕의 명령대로 폐주 부부를 유구국의 해외원정군 기지에 데려다 주고 오면 될 것이다. 추운 겨울에 '따뜻한 남쪽나라'로 가게 된 것이 폐비부부에겐 좋을 것도 같았다. 함장은 또 생각했다. 아마도 '국왕전하께서 생부인 폐주에게 효도관광이라도 시켜드리는 것이 아닐까?' 라고 말이다.

함장이 언뜻 듣기로는 폐주부부는 결국 호주에 갈 것이라 했다.

함장은 감동했다. 

국왕전하의 효심은 지극하다고 말이다.

광해군(光海君)은 그 군호와 같은 인생을 살 것이다.

빛과 바다의 왕자 아닌가?

따뜻한 남태평양의 바다야말로 광해군의 군호에 걸맞는 곳이다.

그렇게 폐주부부를 태운 해군 연락선은 강화도를 떠나 유구국으로 향했다.

같은 시각, 폐주 광해군의 유배지.

"허, 참! 아버님은 끝까지 왕위를 되찾으려고 노력하셨었군."

폐세자 이지는 아버지의 유배지에 남겨진 밀지를 찾았다. 별장과 나인들이 감시했을 것이 분명한데도, 조정의 여러 신하들에게 보낼 서신들이 쌓여있었다. 서신의 내용들은 뻔했다. 자신의 복위를 위한 거사를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이지가 강화도 유배지로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진이 능양군을 사로잡았다고 말했을 땐, 당장 목을 쳐야한다고 말하며 극도로 흥분했었다. 그리고 이제 제 자리를 찾았다고 울부짖었다. 하지만 왕위든 상왕이든 들어줄 리가 없다고 말하자 돌변했다.

우진을 천하의 불효자라고 말했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지만, 아들로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불효자라니? 이지는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아버지지만 왕위에 너무 집착하시는 듯 했다. 우진의 말대로 따뜻한 곳에서 편히 사실 수 있게 해드리는게 나을 것 같았다. 

이지는 한국에서 자신의 할 일을 찾았다.

25살이 되도록 세자수업만 받은 자신이었다. 한국의 국민학교를 다니면서 느낀 것이 있었다. 넓은 세상을 보고 그 세상의 일들을 기록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우진에게 부탁했다. 유럽에 유학을 가보고 싶다고. 아니 단기간 여행도 좋다고 했다. 우진은 그 말에 선선히 응낙했다. 

이지는 무척 기뻤다. 조선을 떠나 한국에 온 것이 자신의 첫 여행이었다. 조선의 궁궐에서 갇혀 사는 것은 너무 답답했다. 세자 시절에는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숙명이라 체념했었다. 그리고 답답한 줄도 잘 몰랐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세계를 누비며 세상 모든 것을 보고 싶다는 욕심. 그것들을 기록해서 남기고 싶다는 욕심. 그걸 통해서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욕심이 가득해졌다.

그걸 위해서 일생을 바쳐도 좋겠다는 희망!

이젠 그걸 이룰 수 있다.

이지는 자신의 꿈이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느꼈다. 

조선의 일만 잘 마무리되면 유럽에 가서 많은 것들을 보고 올 것이다. 

부인도 승낙했다. 최근 별 의욕이 없어보여서 걱정했는데 말이다.

이지는 아버지의 밀지를 살펴보다가 다시 혀를 찼다.

잠시후 광해군의 밀지들은 아궁이의 불에 모두 타버렸다.

1624년 2월 11일 오전, 한강 북쪽 양화나루. 

왕의 어가는 한강 남쪽으로 파천한지 3일 만에 돌아왔다.

어가를 호위하는 군대는 파천 당시보다 몇배는 많았다. 

수천의 정예 기병이 호위하는 어가에는 감히 접근조차 못할 정도로 삼엄했다. 어가에 탄 왕의 모습은 기병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았다.

왕의 어가는 참 불편했다.

들고 가는 사람들도 힘들텐데...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타고 가지만, 다음에는 없애야겠다고 결심했다.

그건 그렇고, 김자점 저 친구는 부득부득 어가 옆을 걷고 있다. 그것도 만면에 웃음을 띄우고 말이다. 눈물을 흘리며 애타게 하소연하는데 못들어 줄 것도 없지 않은가? 어쨌든 어가 옆을 걸어가는 조정대신은 김자점 뿐이다. 

이괄, 한명련, 김자점....

숨은 1등공신이 참 많다.

이 사람들은 대놓고 상을 줄 수 없으니 어쩐다?

이괄하고는 개인적 악연이 있지만, 그걸 화풀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보기에 한명련은 그냥 억울한 사람이다. 역모고변 자체가 무고니까 말이다.

김자점은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 이왕 살려주고, 업적에 따라 중용하겠다고 했으니 잘 지켜봐야겠다. 

지금 날 쳐다보는 눈빛만 봐도 두 눈에서 막 꿀이 떨어질 것 같다.

어가 행렬은 금방 숭례문에 닿았다.

한양 성내는 '트로이의 목마' 작전 중일 것이다. 아마도 오후 일찍 완전히 종료될 것으로 생각된다. 모든 성문을 닫아걸면, 이괄은 숭례문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 때 포위해서 잡으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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