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225)

박진사의 수하들은 크게 웃으며 왁자지껄했다. 박진사도 웃으며 쳐다보다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조선 각 지부에서 우리 번상병(番上兵 주 : 조선은 번상제의 형태로 군역을 수행했기에 대부분의 군인들이 번상의 형태로 한양에 올라와 돌아가며 군역을 수행하였음. 이 당시는 훈련도감을 제외한 모든 군영이 번상제 형태로 군역을 수행함. 이괄의 북방군도 삼남의 군사들이 번상병으로 올라간 상태였음.)을 올리고 있다. 우리 병력들의 무기와 갑옷을 빠짐없이 잘 챙겨서 올려보내야한다. 창고에 쌓인 무기와 갑옷을 잘 정비해놔라. 특히, 무기와 갑옷에 우리편 표식인 인식표를 확실히 해놓는거 잊지마라. 같은 편끼리 싸울 순 없다."

"네 알겠습니다!"

박진사의 수하들은 우렁차게 대답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박진사는 그들의 모습을 흐믓하게 바라보며 탁자의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경기수영의 밤은 깊어졌다.

충청도의 아산 감영.

"너, 너, 너 그리고 이쪽에 선 자들은 전부 빠진다."

"예? 이번에 뽑혀서 한양에 올라간다고 해서 왔는뎁쇼?"

"이미 다 뽑았다. 너희 자린 없다. 그냥 돌아가. 안받아줘."

"이번 군역은 제 차례인데 나중에 치도곤을 당하는거 아닙니까요?"

"감영에서 지시하는데 감히 토를 달아? 바로 여기서 치도곤을 당하고 싶으냐!"

"아, 아닙니다요. 쇤네가 잘못했습니다."

충청도 모 감영의 군관은 눈을 부라리며 군역에 응한 이들을 다그쳤다. 한양에서 급히 근왕군을 모집하란 명령이 내려왔고, 그에 따라 군역을 치를 번상병들이 자기 순서대로 모집에 응했다. 그런데 다시 집으로 돌아가라니 어안이 벙벙했던 것이다.

"크흠, 너희들이 가져온 군복은 여기 내어놓고 가거라. 그리고 각자 호명하면 대답해라. 이번에는 너희 군역을 이미 치른 것으로 해주겠다."

"어이쿠! 그게 참말입니까요?"

"네 이놈! 내가 너희를 모아놓고 거짓부렁이라도 하겠느냐? 잔말말고 시키는대로 하거라."

"예이 알겠습니다!"

군역에 응했던 이들은 크게 호응하며 기뻐했다. 한양에 큰 변란이 일어나서, 각 지방마다 대대적으로 번상병을 모집했다. 그들은 정말 재수없게도 자신의 차례였기에 모집에 응한 것이었다. 그런데 군역을 치른 것으로 하고 돌아가라니?

이런 운수좋은 날이라니!

군역에 응했던 자들은 재빨리 자신이 지참한 군복을 내어놓고 줄행랑을 쳤다. 다음 번상병때는 다시 군복을 마련해야겠지만 아깝지 않았다. 목숨걸고 싸워야할 줄 알고 왔는데 날로 먹는 상황아닌가! 군복 따위야 다시 마련하면 된다.

그렇게 아산 감영의 하루는 저물어갔고, 번상병의 모집은 얼추 끝난 듯 했다. 

아산 감영의 수령은 반정 이후에 낙점된 자였다. 그 수령은 특이하게도 감영의 군관들을 자신이 데려온 심복들로 모두 채웠다. 그렇게 감영 전체를 장악하고는 기존 아전들을 통해 사재를 넉넉히 풀어 민심을 다독였다.

그렇기에 아산 감영의 수령이 민심을 얻은 것은 금방이었다. 이번 군역에 대해서도 군복을 제외한 무기는 모두 감영에서 마련한다고 했다. 기존에는 군역에 소용되는 물자들을 마련하느라 온 백성들이 고통을 받았다. 그래서 수령에 대한 아산 백성들의 지지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그렇게 모인 번상병 2천명은 수령과 군관의 인솔 하에 한양으로 출발했다. 

아산 백성들은 수령과 번상병의 무운을 빌며 거리에 나섰다. 

그러나, 아산 백성들은 꿈에도 몰랐다. 

번상병 2천명 중에 자기들이 아는 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을 말이다.

한양 훈련도감 감영.

"부장(副將)은 도감병 중에 1천5백을 선별해서 도원수께 보낼 준비를 하라. 비변사에서 다른 명령이 내려올 때까진 현재 임무에 전념한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1천5백은 신병을 제외하고 정병으로 뽑아 올리겠습니다."

"음, 그러도록 하게. 하급 군관부터 병사들까지 애송이들만 남으니 불안하긴 하군. 그래도 범같은 부장이 있으니 믿겠네."

"걱정마십시요. 제가 군관들을 잘 다독거려서 흔들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게. 난 이만 비변사에 가보도록 하지. 부장은 감영을 떠나지 말고 자리를 지키게나."

"네 알겠습니다!"

훈련대장이 떠난 후, 부장은 모든 군관들을 소집했다. 그 자리에서 1천5백의 도감병이 도원수 장만의 예하로 들어간다고 통보했다. 그리고 차출될 군관들을 호명했다. 그런데 차출된 군관들은 하나같이 오랜 경력을 가진 자들이었고, 부장과는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이런 부장의 명령에 한 군관이 이의를 제기했다.

"부장님! 호명하신 군관들이 빠지면 도감에는 신입들만 남습니다. 그들도 무과를 통과한 자들이나 많이 부족합니다. 게다가 병사는 도감군의 3할인 1천5백이 차출되는데 군관은 전체의 8할이나 차출됩니다. 이렇게 되면 한양에 남을 병사들을 지휘할 군관들이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어허! 이 사람들이 이리 무식한 소리를 하다니?"

부장은 혀를 차며 군관들을 타박했다. 그리곤 그 군관을 노려보며 다그치듯 말했다.

"지금 삼남의 근왕군 수만이 올라오고 있다. 근왕군은 번상병이다. 근왕군을 지휘하는데 필요한 것은 노련한 군관들이란 말이다. 번상병을 인솔하는 색리(色吏 : 군역을 치를 번상병을 인솔하는 아전)들에게 인수한 다음엔 누가 그들을 지휘하겠나? 이리 생각들이 없어서야. 쯧쯧."

부장의 다그침에 군관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본 부장은 다시 한번 쐐기를 박았다.

"다시 이런 망언을 하는 자가 있다면 용서치 않겠다. 이만 해산하라!"

호명된 군관들이 부산스럽게 나간 후, 남은 군관들은 부장에게 몰려들었다. 그들은 부장에게 아양을 떨며 달라 붙었다. 그 군관들 대부분은 최근 무과에 입격하여 훈련도감에 들어온 자들이었다. 그 외에 기존에 있던 군관들은 부장과 평생을 함께 하기로 맹약을 맺은 자들이었다. 부장은 흐믓한 표정으로 주위 군관들을 둘러보았다.

"내가 자네들을 믿고 있네. 우리가 남인가? 우린 함께 영화를 누릴 것이네! 비변사에서 은밀하게 들리는 바로, 곧 파천할 것이야. 어가를 호종할 사람들은 모두 그대들이 되어야 할 것이네. 아래 병사들을 엄히 단속하게."

"명을 받들겠습니다."

"하하핫! 오늘같은 날에 거하게 한잔 해야하겠지. 하지만 그 날은 다음으로 미루세나. 자네들은 모두 후한 대접을 받을거야."

부장을 비롯한 군관들의 웃음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혹시라도 밖에 누가 듣지 않을까 주저하는 모습도 없었다. 그 방의 바깥을 경계하는 도감병들도 부장의 목소리에 미소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훈련도감에서는 무슨 일이 있는 건지.

같은 시각, 평양성 도원수 장만의 막사.

도원수 장만을 비롯해 정충신, 남이흥 등 장수들이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후에 도착한 어명을 두고 갑론을박했다. 시시각각 전령이 비변사로 향했기에 한양의 조정에서도 이괄이 대략 어디쯤에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어명이 도착한 것이었다.

'역적 무리가 이미 자산을 통과했는데, 관군이 단 한번도 교전하지 않으니 그 까닭을 과인은 모르겠다. 용맹스러운 장수와 날쌘 기마병이 있거늘, 역적의 무리가 무엇이 두려워 몸을 사리는가?'

이괄은 산길을 타고 이동하며 전투를 피했고, 그래서 안주를 우회해서 이동 중임에도 아무런 전투가 없었던 것이다. 이괄의 군대는 1만3천에 이르렀기에, 장만의 5천 군대로 맞서면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할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래서 북방의 군대를 집결시켜 대항하고자 했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렸다간 이괄이 한양까지 무인지경으로 아무 전투없이 온전히 도착하게 생겼다. 그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기에 모두 모여 대책을 마련하는 중이었다. 도원수 장만도 변명거리는 있었지만, 더 출병을 미루다간 먼저 자신의 목이 달아나게 생긴 것이다. 

그때였다. 

평안병사 남이흥이 도원수 장만에게 좋은 계책을 건의했다.

"도원수 대감, 역적 이괄 휘하 장수들의 마음이 분명 동요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들을 회유하여 역적의 군세를 괴멸시켜야 합니다. 이괄 휘하에는 이윤서라는 장수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 본영에 이윤서의 하인이 있으니 그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편지를 써서 주는게 좋겠습니다."

도원수 장만은 남이흥의 건의를 옳게 여겨 이윤서의 하인을 불러 들였다. 그리고 잘 대접하며 투항권유편지를 전해주고 상금을 주었다. 하지만 이윤서의 하인은 그 상금을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글을 전함으로써 주인을 죽음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만으로 이 종으로서는 다행한 일입니다. 재물은 받지 않겠습니다."

도원수 장만은 크게 기뻐하며 이윤서의 하인을 보냈다. 이윤서는 투항권유편지를 받자마자 즉시 투항했다. 이윤서가 거느렸던 이괄의 북방군은 4천에 달했다. 

도원수 장만에게 낭보(朗報 : 반가운 소식)는 계속되었다. 이괄이 후발대로 남겨둔 김효신이 또 투항했다. 구성순변사인 한명련의 부하들도 역시 투항했다.  

이렇게 역적 이괄의 군세는 계속 흩어지고 있었다. 기존 1만3천에 영변인근 병력을 동원한 것만으로도 2만에 가까운 군세였던 것이 1만정도로 쪼그라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도원수 장만은 이런 낭보를 조정에 알리고 의주부윤 유비의 국경수비병력 3천을 다시 돌아가도록 지시했다. 의주 인근 국경을 지킬 유비의 병력이 빠지게 되면 백마산성에 있는 임경업의 4백 군사가 전부였다. 

도원수 장만의 휘하에는 이윤서의 4천, 한명련의 군사들, 김효신의 후군 등이 투항해서 합류했다. 이제는 이괄의 군대와 숫적으로도 모자라지 않았다. 도원수 장만의 군대는 사기가 충천했다. 

그런 상황인지라 도원수 장만은 승리감에 도취했다.

싸워보기도 전에 이길 것이 뻔해 보였던 것이다. 

장만의 생각엔 이괄의 군대가 대동강을 건너지도 못하고 평안도 내에서 분쇄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장만은 분명 자만했다. 

그렇지만 이괄의 본대 위치가 드러나지 않은 상태였기에 군사를 갈라 각지에 파견했다. 그들을 통해 이괄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고자 했다. 장만은 황해병사 변흡에게 1천을 내어주며 곳곳을 순찰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이괄의 행방은 묘연하여, 어디에서도 발각되지 않았다. 장만이 초조해지던 찰나, 놀라운 보고가 들어왔다.

"이윤서가 투항한 틈을 타서, 이괄은 이미 대동강을 건넜습니다."

쿵!

도원수 장만이 급히 몸을 일으키다 의자가 쓰러졌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걸 신경쓰지 못했다. 전령의 보고대로라면, 이괄의 군대는 평양에 있는 도원수 장만 군대의 배후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괄의 군대는 평안도를 넘어, 아무 피해없이 황해도에 진입했다는 것이다. 이제 예성강과 임진강을 넘으면 한양인 것이다. 도원수 장만은 머리속이 하얗게 된 것 같았다. 잠시 멍했으나 곧 정신을 차렸다.

장만은 즉시 정충신에게 1천8백의 군사를 주어 이괄을 추격하도록 지시했다. 장만의 급한 마음과 달리, 대동강 주변에는 배가 그리 많지 않아 병력도하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전령의 보고가 있은 다음날에게 정충신이 추격을 시작했다.

장만도 즉시 출병할 것을 결정했다.

도원수 장만, 자신이 정찰에 소홀하여 이괄의 군대가 대동강을 아무 피해없이 건넜다. 이는 누가 뭐라해도 참형에 처해질 중대한 실수였다. 이제 장만도 온전히 목을 보전할 수 있으리라 자신할 수 없었다.

북방의 상황은 이렇게도 급박했다.

그런데 그때, 출병준비로 분주한 평양성의 군대에서는 잠시 소란이 일었다. 도원수 장만에게 투항한 이윤서가 갑자기 쓰러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소란은 잠시 뿐이었고 이윤서는 그의 하인이 돌보고 그의 군대는 이윤서 휘하의 부장이 인솔하는 것으로 정리가 끝났다. 

도원수 장만의 군대는 다급히 이괄의 군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 선두는 정충신이었다.

이괄의 난 4 : 황주전투

1624년 2월 2일, 황해도 황주 지역. 

"부원수 대감! 병사들의 군심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러다간 싸우기도 전에 모두 흩어질 겁니다. 제대로 한번 싸워야 합니다."

간이 막사에서 회의를 하던 중, 한명련이 이괄에게 말했다. 이괄도 한명련과 같은 생각이었다. 이미 이윤서와 김효신이 도원수 장만에게 투항했다. 그러면서 5천의 군세가 깎였다. 하루가 다르게 도망가는 군사들이 늘었다. 처음 거병할 때와 달리 이젠 1만 남짓할 정도로 군사가 줄었다.

그들의 투항은 이미 예상했었다. 하지만 예상했었다고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괄은 더 이상 전투없이 이동하긴 어렵다고 판단했다. 군대의 사기는 너무 중요했다. 그 사기를 올리는 데에는 전투, 그리고 그 전투의 승리가 최고였다. 

이대로 한양으로 갈 수도 있겠지만, 사기가 떨어진 군대는 북소리 한번에 모두 흩어질 우려가 컸다. 정찰에 따르면 정충신의 군대가 하루 거리의 차이로 추격 중이었다. 도원수 장만의 군대는 그 뒤였다. 

이괄의 군세는 1만 남짓이고, 도원수 장만의 군세도 비슷한 것으로 판단됐다. 어차피 예성강을 건너기 전에 한번 싸워야했다. 전투없이 한양에 갈 가능성은 적고, 싸움없이 이동하다가 뒤를 잡히면 불리할 것이 뻔했다.

이괄은 심사숙고 끝에 황주의 너른 들판을 결전의 장소로 정했다.

그리고 그 들판 한켠에 진을 펼쳤다.

바야흐로, 결전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황해도 황주 인근, 정충신의 추격군.

"황주 들판에 이괄의 군대가 진을 쳤다?"

"네 장군! 역적 무리들이 황주 들판 한편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군세는 대략 1만으로 보입니다."

"좋다! 즉시 도원수께 전령을 보내고 황주로 진격한다. 거기서 이괄을 잡는다."

"네 장군!"

정충신의 계산에 따르면 이괄의 군대와는 하루 거리였다. 바삐 도망쳐도 부족할 시간인데, 이괄이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다니. 이윤서 등이 투항하면서 그들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졌을 것이 분명했다. 

정충신은 이번 한판 싸움으로 모든 것이 끝나길 바랬다.

서인들의 역모고변은 정충신도 어이가 없었다. 

역모는 커녕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는 사람을 그렇게 무고하는 것이 화가 났다. 하지만 성공가능성이 거의 없는 이괄에게 가세할 순 없었다. 오히려 이번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다음, 차후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자 정충신의 마음은 다급해졌다. 

어서 황주 들판으로 나아가 도원수의 본대를 기다려야 했으니까. 정충신은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조선이란 나라는 무관을 개취급하던 것이 일상이었다. 임진년에 그리 공을 세웠건만, 이젠 살기 위해서라도 몸부림을 쳐야했다. 

정충신은 수하들을 다그치며 행군을 서둘렀다.

황해도, 도원수 장만의 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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