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잊었던 것들이 생각났다.
폐세자부부가 불을 질러 자결했다. 왕은 아무 말없이 지나갔었다. 그렇지만 그 내면에 감춰진 것은 왕에 대한 '은밀한 경고'였던 것이 분명했다.
그것 뿐만이 아니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역모 고변이 줄을 이었다.
조정의 서인 중신들은 남인, 북인, 북쪽 변방에 나가있는 무신들을 가리지 않았다.
그들의 경계심으로 '기찰(譏察 : 신하들의 행동 등을 넌지시 살피는 행위. 여기에서는 사전예방적, 막무가내식 역모고변을 뜻함)'이 강화되고 그에 따른 역모고변에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 역모고변 사건 때, 부원수 이괄의 이름이 거론되었고, 조정에선 이괄을 붙잡아 엄중히 조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터져 나왔다. 이괄 뿐이 아니었다. 북쪽 변방에 나가있는 장수들의 이름은 대부분 거론되었다. 그 중엔 의주부윤 유비도 있었다.
왕은 의주부윤 유비의 어미에게 직접 약을 내려줄 정도로 총애했다. 그런 유비를 비롯해서, 부원수 이괄, 정충신, 한명련 등 대부분이 역모에 거론됐다. 어느 정도여야 믿을만하지 북방 장수 거의 전부를 역모라고 고변하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경고차원에서 한마디 했다.
"서쪽 변방에 있는 무장들은 오랑캐로부터 우리의 변방을 수호하기 위해 분골쇄신하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그들을 붙잡아 소환해야 하는가?"
그랬더니, 대사헌 이귀가 이렇게 말했다.
"이괄이 역심을 품고 강한 군사 1만을 손에 쥐었으니, 일찍 처리하지 않으면 뒤에는 제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왕은 속으로 코웃음쳤다.
의주부윤 유비는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평안도 지역에서 백성들을 약탈하는 것을 엄중히 차단했다. 그에 따라 변방 백성들에게 인심을 얻었다. 부원수 이괄도 반정공신으로 영변에서 군사를 엄격히 조련중이었다. 군량 등 지원이 부족함에도 말이다.
서인들의 역모고변을 모두 들어준다면, 조정의 세력은 서인을 제외한 그 누구도 남지 않을 것이 뻔했다. 그럼 서인들에 둘러싸인 왕은 어찌 될까? 왕 조차도 남기지 않고 모두 쓸어버릴지도 모른다. 왕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말했다.
"부원수는 충성스런 사람인데, 어찌 반역할 생각을 가졌겠는가? 이것은 흉악한 무리가 그의 위세를 빌리고자 한 말이다. 경은 무엇으로 부원수가 반역하리라는 것을 아는가?"
"이괄의 반역 모의는 신이 잘 모를지라도 그 아들 이전이 반역을 꾀한 것은 신이 잘 알고 있나이다. 어찌 아들이 아는데 아버지가 모를 리가 있겠나이까!"
왕은 대사헌 이귀의 말에 아연실색했다.
"사람들이 '경(대사헌 이귀)이 반역한다고 고변한다면 과인이 믿겠는가? 부원수의 일이 어찌 이와 다를 수 있겠는가! 천하가 필시 나를 비웃을 것이다. 더는 의심치 말라."
왕은 더 이상 재론을 금했다. 이만하면 어떤 신하도 말을 그쳐야했다.
하지만, 그것은 왕만의 생각이었다. 대사헌 이귀는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전하! 고변한 사람이 있다면 어찌 신이라 해서 묻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잡아가두고 국문하여 그 진위를 살핀 뒤에 처치해야 할 것입니다!"
이귀를 따르는 서인 주축 신하들은 이괄의 소환 조사를 강력하게 요청했다.
하지만 왕은 모든 소환 조사를 강력히 거부했다.
"부원수는 나의 충성스러운 신하다. 부원수의 직책은 그가 아니면 맡을 사람이 없다!"
왕은 자리를 박차고 편전을 나섰다.
평안도 영변, 부원수 이괄의 막사
쾅!
부원수 이괄은 한양의 가족에게서 받은 서찰을 보고 소리나게 탁자를 치며 분노했다. 그의 두 눈에선 시뻘건 광망이 흘러나왔다. 그러길 잠시, 이괄은 얼굴색을 바로하고 말했다.
"하하하! 설마 주상전하께오서 이 이괄이를 믿지 못할 리 없다. 믿지 못했다면, 애초에 1만이라는 엄청난 병권을 맡겨 변방으로 보내지 않을테니. 전하의 옆에 있는 그 사특한 무리들이 전하를 겁박하며 일을 꾸미고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아무 걱정할 것이 없다."
이괄은 잠시 말을 멈추고 예하 군관들을 살펴보았다. 그들 모두 감히 부원수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괄이 그리 군기를 엄정하게 통제했던 때문이었다. 이괄은 다시 군관들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음하하핫! 나 이괄은 주상전하께서 친히 수레를 밀어주시고, 어도까지 내려주셨던 사람이다. 나를 보내면서 북방의 일에 대해서는 근심을 잊겠다고 친히 말씀하셨다. 너희들도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이 부원수 이괄은 그런 사람이다. 의심치 말라. 이럴수록 훈련에 전념해야 할 것이야. 알겠느냐?"
"네 알겠습니다!"
이괄은 예하 군관들의 우렁찬 함성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군관들의 해산을 명했다. 이괄은 그들이 모두 나갈때까지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한명씩 눈을 맞췄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나가자마자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반정의 거사 당일부터 이괄의 마음은 더할 나위없이 분명했다. 자신을 우대해준 왕을 향한 마음만은 변함없이 뜨거웠다. 그런데 이런 역모고변이라니.
거사 당일, 김류같은 겁쟁이 소인배에게 뼈아픈 한마디를 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졸렬할 지는 상상치 못했었다. 한양에 있을때부터 그들이 자신과 가족들을 노린 여러가지 고변의 횟수는 열 손가락도 부족할만큼 많았다.
이괄이 주둔한 영변의 막사는 북풍한설에 몸서리 쳐질만큼 추운 곳이었다.
그 곳에서 이괄의 뜨거웠던 가슴도 차츰 얼어붙기 시작했다.
쿠당탕!
챙!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이괄의 눈에서는 핏빛 광망이 뿜어져나왔다. 이괄은 동시에 어도를 뽑아 금부도사를 향해 소리질렀다.
"네 이놈! 아들이 잡혀가는데, 그 아비가 무사한 경우가 있다더냐?"
이괄의 행동에 놀란 금부도사는 뒷걸음질치며 이괄을 달래려고 했다.
"부...부원수 나리, 본관은 금부도사요. 이거... 으아악!"
그러나, 이괄의 칼은 힘차게 허공을 갈랐다.
싹!
털썩!
그렇게 이괄은 자신의 아들을 잡으러온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단칼에 베었다.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이괄 자신도 비기(秘記)와 가기(佳氣)에 잠시 혹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정충신, 한명련, 유비같은 장수들과 역모를 꾸민 적은 결단코 없었다.
방금, 금부도사가 알려온 '문회, 이우, 권진' 등이 무고한 것도 사실이 아니었다. 이괄의 아들 이전은 영변 산골짜기에서 훈련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무고를 당한 것도 억울한데, 아들을 역모혐의로 잡아가겠다고 금부도사가 왔다.
조선에서 아들이 역적이 되어 죽었는데 그 아버지와 가문이 멸문지화를 입지 않은 곳이 있다던가?
부원수 이괄의 막사 안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만큼 조용했다.
막사 바닥에는 금부도사와 선전관의 시체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누구도 그 시체를 치울 생각조차 못했다. 이괄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졌고, 눈빛은 이글거렸다. 수십의 군관들이 막사 안에 있었지만,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두근두근
또르르
막사는 수십의 사람들이 놀라서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 마찬가지도 그 열기가 지나쳐 식은 땀이 흐르는 소리만이 눈에 보일 듯이 들렸다. 그 심장과 땀소리는 이괄의 눈에 그대로 보였다.
그래! 이건 반역이다.
나 이괄이 복수할거야! 모두 가만두지 않을테다.
감히 잠자는 호랑이의 콧털을 건드리다니.
김류, 이귀 등등 모두 뼈째 씹어주리라.
이괄은 마음 속으로 맹세했다.
그런 이괄의 눈에 다시 막사 안의 상황이 들어왔다.
수십의 부하들이 그 배가 되는 눈으로 이괄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괄은 그런 부하들을 바라보며 씨익 웃고, 손에 든 칼에 묻은 피를 금부도사의 몸에 비벼대며 닦았다. 잠시 후, 이괄은 그 칼이 잘 닦였는지 칼날을 들어 눈으로 잘 가늠해보곤 다시 칼집에 넣었다.
크하하핫!
이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미친듯이 웃었다. 주위 수하들은 이괄의 광소(狂笑)에 어쩔 줄 몰라했다. 이괄의 웃음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일순간, 이괄의 웃음이 그쳤다. 언제 웃었냐는 듯이 말이다.
이괄은 막사 안에 있는 모두, 한명씩 한명씩 두 눈을 맞췄다.
막사 안의 그 누구도 이괄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억겁과도 같은 일순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영원하리라 생각되는 순간이었다.
"감히 어기는 자 있으면 내 단칼로 너희들의 목을 베리라!"
이괄은 자신의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며 눈을 빙글거렸다. 봄바람이 살랑거리듯 웃으며 칼을 만지작거리는 이괄의 모습은 마치 지옥의 야차와도 같았다. 막사 안은 침묵에 빠졌다.
"어허!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예!예!"
이괄의 채근에 다급히 대답하는 군관들의 목소리는 마치 숨을 삼켜 꺽꺽거리듯 '예예'거렸다. 그들의 공포는 전염되었다. 이괄의 미친 칼춤이 언제 있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이괄의 측근 장수인 이수백, 기익헌, 최덕문, 이정배가 소리치며 말했다.
"부원수 대감께오서 거병하실 것이라면, 같이 역모고변을 받은 정충신, 한명련, 유비 등에게 격문을 보내시옵소서. 한명련이 금부도사에 나포되어 끌려가고 있으니 그를 구해야합니다."
"우리는 부원수 대감만을 따를 것입니다. 자 모두들 충성을 맹세하자. 어서 어서!"
"부원수 대감! 한명련을 어서 구원하소서! 제가 일군을 끌고 출발하겠습니다."
이괄은 최측근인 그들의 말에 흐믓한 미소를 지었다. 금부도사가 오기 전부터 그들과 상의한 터였다. 삼남에서 모병된 장정들은 불과 8개월만 조련했을 뿐이었다. 지금은 어엿한 북방의 정예병이지만 굳게 믿기는 어려운 병력이었다.
그런 신병들을 데리고 함께 거병하기 위해선 막사 안의 군관들을 확실히 휘어잡아야했다. 그걸 위해 측근 장수들과 미리 상의한 것이었다. 막사 안의 수하들은 체념한 듯 보였다. 하지만 이괄에게는 그걸로도 충분했다.
이 대군(大軍)을 몰아 한양에 입성한다면, 지난 반정의 거사가 성공한 것과 마찬가지가 될 것이니까.
지난 반정도 결국 한양의 대궐을 점거하고 난 후에, 싱겁게 끝났다.
이괄은 자신했다.
자신에게 천명(天命)이 있음을.
비기(秘記)와 가기(佳氣)가 자신에게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최근 조선팔도를 휘젓는 괴이한 소문들도 그 천명(天命)이 자신에게 있다는 증거임에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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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백성이 배고픔없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세상!
누구도 호환마마로 고통받지 않는 세상!
어떤 누군가는 미륵이 이 세상에 내려온다고 했다.
또, 이어도에 가면 누구나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했다.
그 세상에서는 서얼이 차별받지 않고, 사람이 노비로 사고팔리지 않는다고도 했다. 반상의 구분없이 모두 자유롭고 평등하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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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가슴은 점점 크게 부풀어올랐다. 그 허황된 소문들은 모두 자신의 천명을 나타내는 비기(秘記)였고, 가기(佳氣)였다.
이괄의 가슴은 그 어느 때보다 벅차올랐다.
그의 바람은 북방을 휘몰아, 조선 팔도를 덮으리라!
이제 진격(進擊)이다!
이괄의 난 2 : 거병
탁!
부들부들!
안주목사 정충신(鄭忠信)은 부원수 이괄의 격문을 받아 보자마자 온몸이 떨렸다.
그는 원래부터 이괄과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그걸 잘 아는 조정에서는 정충신도 이괄에 합세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라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