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0/225)

촉주 유선은 그 후, 모든 세상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나는 그런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그리 대단한 위업을 남기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럴 자신도 없고.

또, 내가 맨 앞에 선다고 해서 칼들고 싸울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장병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오직 이것 뿐이다.

그래서 난 그들의 맨 앞에 섰다. 

이제 조선으로 간다.

왕의 회상(回想)

인정전(仁政殿)의 옥좌에 앉은 왕은 소리없이 탄식했다.

도대체,

언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혹시 그 날부터...?

◆ ◆ ◆

"이번에 명나라 장수를 보고 함께 협력해 오랑캐를 토벌하겠다고 말했는데, 우리 조선의 병사가 형편없으니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압록강 하류의 아래, 평안도 북쪽 해안에 위치한 가도에는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3만 군사를 이끌고 주둔해 있었다. 엄연한 조선의 국토에 주둔한 명나라 장수 모문룡은 왕이 오랑캐인 후금을 명과 함께 정벌하겠다는 말에 흡족한 답신을 보내왔다.

왕은 폐주가 사르후 전투(1619년)에서 참패한 굴욕을 잊지 않았다. 

명의 재조지은을 명분으로 일어났음도 잊지 않았다. 그렇기에 후금에게 참패한 것을 설욕하고 명을 돕는다는 것, 그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신 도원수 장만 아뢰옵니다. "성상 전하께오서 1~2년 정도 민생을 휴식시키면 백성들 역시 즐거운 마음으로 모병에 응할 것입니다. 성상 전하의 생각도 정해지셨고, 비변사의 계책도 결정되었으니, 신은 단지 오랑캐후금와 맞서 싸워 한 번 죽을 각오뿐입니다! 이괄이나 이서 중에서 택하여 북쪽 변방에 파견하소서!"

도원수 장만이 왕의 질문에 답변했지만, 만족스럽진 않았다. 장만의 대답은 열심히 싸워보겠다는 것이지 승리할 수 있을지에 대한 답변이 아니었다. 왕은 다시 장만에게 물었다.

"우수한 자를 모두 차출해 함께 데리고 가도 무방하다. 현재 명나라의 형세로 볼 때 군대를 출동시켜 오랑캐를 토벌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도원수 장만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대답했다.

"명나라는 혼이 빠진 상태로, 우리가 임진년에 왜적을 두려워했던 경우와 비슷한 듯 싶습니다!"

왕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명의 내정은 어지러웠고 후금 오랑캐의 기세는 심상치 않았다. 사르후 전투의 참패는 아직도 악몽 그 자체였다. 1만3천의 최정예를 출병했으나 살아온 자는 3천에도 모자랐다. 명을 믿고 따라나서기도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조선이 가진 역량이 어떤지, 어느 정도의 역량이면 오랑캐들에게 설욕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왕은 다시 도원수 장만에게 물었다.

"만약 명나라와 협력해서 오랑캐를 토벌할 경우, 군사는 얼마나 필요하다고 여겨지는가?"

도원수 장만이 다시 대답했다. 

"신의 생각으로는 10만 정병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집니다."

"우리가 10만 정병을 마련해 낸다는 것은 형세상 무척 어려운 일이다."

"10만이 아니라면, 최소 5만 명이 안 되고서는 거사를 해낼 수 없습니다!"

왕은 10만이니 5만이니 하는 말에 속이 답답했다. 

그리고 폐주 당시, 과거를 떠올렸다.

1619년(광해 11), 폐주는 1만 3천여 명의 조선군을 만주 땅으로 파병했다. 그러나 심하 전투에서 조선군 9천여 명이 전사했고, 이로 인해 조선은 정예 병력의 상당수를 상실했다.   

조선군 장병의 엄청난 피해에, 명나라 조정은 은 수만 냥을 보내어 전사자 가족들을 위로하게끔 했다. 그러나 폐주는 명나라가 보낸 은 수만 냥을 궁궐 공사에 투입시켰으며, 심지어 변방의 군수 물자와 강화도의 곡식 수만 석을 궁궐 공사에 투입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좋은 명분을 얻은 왕은 폐주에게 실망한 무인들과 함께 거병했다. 그들이 서인과 합세해 약 1~2천여 명의 사병과 함께 왕을 도와 정권을 탈취하였다. 조선의 새 지존이 폐주에서 자신으로 바뀐 순간이었다.

폐주의 집권 당시, 무리한 궁궐 토목 공사로 인해 세금이 급증해서 백성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그래서 왕은 백성들의 1년 세금을 탕감하는 조치를 취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는데 진력했다. 하지만 그때 사라진 재정이 다시 돌아오기라도 하던가?

왕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후금의 팽창에 경계심을 느끼고, 무인들과 함께 자주 변방의 형세 등을 의논해왔다. 우선 폐주 때 9천여 명의 알토란같은 정예병이 사망했기에, 변방의 방어능력에 문제가 생긴 것은 분명했다.

그리하여 북쪽 변방을 방위할 새로운 전력이 필요했는데, 폐주가 망가뜨린 재정이 가장 큰 문제였다. 돈은 없는데, 새로운 정예병력은 필요했다. 

그래서 있는 재정, 없는 재정을 모두 털어, 전라 · 충청 · 경상 등지에서 건장한 장정을 모집하여 북방군을 재편성했다. 이렇게 만든 것이 '1만 8천여 명'의 북방군이었다.

도원수 장만이 5천여 명을, 부원수 이괄이 1만 3천여 명을 지휘하게 되었는데, 장만이 이괄의 상관이었지만, 반정에서 보인 이괄의 군사적 능력이 인정받아 장만보다 더 많은 군사를 지휘하게 됐다.

그래서 왕은 도원수 장만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명과 후금의 사이에서 조선의 현실은 어떤지, 어렴풋이 알고 있음에도 확인하는 차원에서 물어보았다. 왕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가, 결국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마무리 짓고 말았다.

"군사를 해마다 징발하므로, 오랑캐가 오기도 전에 나라 안이 피폐해지고 있다. 변방의 관리들이 백성들에게 수탈을 한없이 자행한 나머지, 백성들이 징병에 신음을 앓고 있으니, 반드시 탐관오리를 모조리 제거해야만 일을 성취시킬 수 있을 것이다!"

◆ ◆ ◆

◆ ◆ ◆

댕대에에댕!

삘리리삐!

1623년 4월 14일, 드디어 북방군의 첫 출정이 시작됐다.

왕이 친히 융복(주 : 임금이 입는 군복을 말함)차림으로 북방군의 출정식에 나섰다. 

이날엔 도원수 장만이 이끈 5천여 명의 북방군이 먼저 출정하기로 되었다. 

도원수 장만은 평양에 주둔하여 북방군 전부를 관할하기로 되어있었다. 부원수 이괄은 1만3천을 이끌고 영변에 주둔하여, 평양의 도원수 장만과 기각지세를 이루기로 말이다.

출정식에는 영의정을 비롯한 판서들, 그리고 고위 관료들이 모두 나와 북방군의 출정식을 환송했다.

왕이 도원수 장만을 부르자, 투구와 갑옷 차림을 한 도원수 장만이 왕의 앞에서 두 번 절을 했다. 

그리고 장만 휘하의 군관 74명도 모두 왕에게 두 번 절을 했다.

왕은 북방군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백금 20냥과 구마 1필을 하사했다.

그 뿐인가? 왕이 도원수를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고 직접 어주를 따라주며 권했다.

"경은 직접 한 잔을 들고 다 마시라."

장만이 사양하자, 왕은 어탑에서 내려와 친히 상방검을 건네며 장만에게 하사하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대장 이하로 명을 듣지 않는 자는 도원수가 직접 이 검으로 목을 베라!"

"성상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북쪽 변방을 오랑캐로부터 사수하겠나이다."

와아아!

주상전하 천세! 천세!

그 날의 출정식은 더 할 수 없이 만족스러웠다.

그로부터 4개월 후,

드디어 부원수 이괄이 지휘하는 북방군 1만 3천여 명도 출정 준비식을 마쳤다.

부원수 이괄이 지휘하는 북방군은 평양에서 북동쪽에 위치했다. 도원수 장만이 지휘하는 5천 북방군과 함께, 북쪽 변방을 지킬 핵심 정예병이었다.

왕은 여기에서도 거창한 출정식을 마련해서 부원수 이괄을 위로했었다.

출정식에 나아가니 부원수 이괄이 왕에게 절을 했고, 왕은 인자한 모습으로 부원수 이괄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도원수 장만이 가고, 이제 그대가 가니, 과인이 북쪽 변방에 대한 근심을 잊겠다. 간첩 행위나 변방을 방위하는 일을 마음을 다해 힘껏 하라!"

"신이 이 막중한 임무를 맡으니, 밤낮으로 떨리고 두렵습니다. 오랑캐가 침입해 오면 군사의 많고 적음과, 강하고 약한 차이가 현격히 다를 것이니, 앞으로 어떻게 당해내겠습니까? 그러나 감히 한번 죽기로 싸워 나라의 은혜를 갚지 않겠습니까!"

"북방의 군대가 거의 2만, 3만명에 이르는데 번(番)을 나누어 교대로 보낸 뒤에는 다른 도의 군사를 잇달아 보내겠다. 그 다음에 또 다른 계책이 없는가?"

"군사를 모집하는 일은 사세를 보아가며 해야 합니다. 신이 주둔할 곳에 가서 또한 원수와 더불어 상의하여 치계하겠습니다. 대체로 구주(龜州)와 태천(泰川)은 성채(城寨)가 없고 영변(寧邊)이 주둔할 만한데, 병사는 소속된 각 고을로 들어가 지키게 하고 신은 수하에 딸린 군사를 거느리고 적군이 향하는 곳을 따라 그때그때 방비하겠습니다."

왕은 반정의 거사에서 이괄이 세운 공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출정식에서 직접 손을 잡았고, 함께 수레를 끌어주었다. 그렇게 극진히 대접했고, 그런만큼 믿었다.

그렇게 믿었던 그였다. 그래서...

◆ ◆ ◆

한양, 인정전(仁政殿)

"주상전하께 아뢰옵니다. 금년에 북쪽 변방에 5천 명의 장정이 추가로 올라갈 것이온데, 그들을 먹일 양식이 없습니다. 양식을 징발하면 전국의 민심이 소란스러울 것입니다. 교체할 5천 명은 들여 보내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왕은 답답했다.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여기저기에 모자란 것들만 있다. 병력이 없으면 군량이 없고, 그 다음엔 무기와 갑옷이 없다. 

한마디로, 변방 방위 문제는 총체적 난국이었다.

변방 방위를 위해 교대 입번을 해야하는데, 교체할 인원에 대한 군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하여 교체할 5천 명을 아예 들여 보내지 않는게 어떻겠냐는 의견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런 답이 없는 상황에서 왕이 무엇을 하겠는가?

삼남(경상, 전라, 충청)에서 북방군에 쓰일 군사들을 징병하면서 많은 소요가 일어났고, 조정에서는 그 숫자를 채우기 위해 이렇게까지 말했었다.

"변방의 장정들 중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먹고 노는 자들은 종군하게 하시옵소서!"

"새로 보충한 신병은 북쪽 오랑캐의 방위에, 왜구의 방위는 삼남이 통솔하는 것이 좋으니, 남쪽의 군병과 군량을 함부로 북쪽으로 보내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닌 줄 아옵니다!"

당시 그 말을 들은 왕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조선의 백성 중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먹고 노는 것은 왕실 종친이나 사대부들만 가능한 일이었다. 변방의 장정들은 군자에서 월봉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해서 먹고 살았다. 

거기에 임진왜란의 기억때문인지 왜구에 대한 대비도 해야했다. 그러니 조정의 대신들은 삼남의 군사와 군량을 옮기지 말라고 청했다. 그럼 굶주린 북방군은 어쩌란 것인가? 

이게 대체 말인가 소인가! 

전혀 답이 없는 총체적 난국의 향연이었다.

어쨌든 군사 모병과 군량 징발은 피할 수 없었기에, 조정은 전국에서 인원과 군량을 확충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또한 무기를 사들여 서쪽 변방으로 옮겨 유사시에 대비했다. 그러나 물력과 인력이란 것이 한정되어 있었고, 징발하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이런 현실에서 북방군은 물론이요, 변방 지역의 조선군은 굶주리는 등 적잖은 고통을 받았다. 그럼에도 변방 지역의 장수들은 탈영병에 대한 참수와 함께 군기확립에 주력했다. 그리고 부족한 군량에도 불구하고 일단 군사 훈련에 매진했다.

영변에 도착한 이괄의 군대 역시 군사 훈련에 매진하며 추위와 굶주림을 애써 잊을려고 노력했다. 모든 상황이 열악해도, 영변에 도착한 부원수 이괄 휘하의 1만 3천여 명의 군대는, 이괄의 지휘하에 강도 높은 훈련을 진행하였다. 칼과 창 등 근접 병기를 다루는 훈련과 함께, 산을 타고 골짜기와 강을 건너는 등 기동 능력을 갖추기 위한 고강도 훈련을 진행하였다. 

왕은 이 어려운 난국에도 훈련에 매진하는 부원수 이괄을 총애할 수 밖에 없었다.

조정에서는 군량조차도 제대로 지원해주지 못하는 상황인데도, 이괄은 군량은 물론이고 무기와 말까지 자력으로 준비했다고 말했다. 믿지 못할 말이지만 믿었다. 삼남의 장정들 중에도 재산이 많은 자들이 스스로 북방군 모집에 자원했다는 말이 돌았다. 부유한 삼남의 장정들이 스스로 말을 구해서 북방군에 자원했다는 말이었다. 

하여간, 도원수 장만과 부원수 이괄이 보유한, 삼남의 장정들로 구성된 1만8천 북방군이야말로 북방의 최정예군이었다. 그들은 불과 4개월만에 모집된 삼남의 장정들인데도 말이다.

지도 - 북방군 배치도

이괄의 난 1 : 역모고변

추운 겨울 밤의 창경궁 침천,

"성상께오서 폐주(광해군)를 몰아내고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다 우리들의 공로임을 잊으셨나이까?"

콰직!

왕은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반정 이후, 서인들의 언행은 도를 넘기 시작했다.

산림직을 수용했고, 정사공신으로 우대했다. 그들에게 넘치도록 관직과 재산을 나눠줬다. 거기에다 국혼까지 관여하겠다고 했다. 

서인들이 잔뜩 들어찬 조정이었다. 간신히 남인과 북인 잔여세력을 구색맞춘 판국이었다. 그런데 국혼까지 간섭하려 했다. 왕은 인자하게 웃으면서 반려했다. 그렇게 좋게 넘어가면 될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랬더니 이런 말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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