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방납을 철폐한다는 것은 다소 아쉽지만, 화폐를 전면적으로 유통하고 금과 은으로 태환해주신다니 믿겠소. 우리 상단은 적극적으로 돕겠소이다. 약조대로 준비하리다."
"감사합니다 행수어른. 우리의 약조는 변함없습니다."
"알겠소이다....."
이민국 조선지부에서는 개노미와 박진사가 대화중이었다
"경기수영과 교동도까지 한달 후면 완공이라..."
"네. 그 날 전에 완성될 겁니다. 경기지역은 운송에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좋아. 일시적인 장악은 혼란 중에 가능하다. 허나, 그 후에는 반드시 충분한 물자를 저렴한 가격에 풀어 안심시켜야한다. 경기지부는 천연두 예방접종을 모두 끝냈나?"
"조직원들은 지난 주에 모두 끝냈습니다. 그 날 이후를 위해 철저히 준비중입니다."
"우리가 퍼뜨린 소문이다. 본토에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조선의 백성들에겐 꿈같은 일들이다. 조선의 백성들이 가진 꿈을 이뤄준다면, 우리의 자리는 반석과 같다. 민사작전담당자들은 모두 선정이 완료됐다. 그들을 지원하는데 전력을 다하라."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전에 경상과는 이야기가 끝났네. 경상에서 납품할 물목을 잘 확인해서 인수하고 배분하게. 삼남은 우리 세력이 확고하기에 달리 걱정이 없어. 한양과 경기지부는 다소 부족한 면이 있으니 경상의 지원을 좀 받아야하네. 본토에서 지원이 올 것만 기다려서는 안돼."
"여부가 있겠습니까? 지금 경기지부와 한양지부의 물자만으로도 반년은 너끈합니다. 장기전이 되지 않는다면 충분할 겁니다."
"우린 그 장기전도 대비해야 하네. 내 자네를 믿겠네."
"지부장님의 은혜를 만분지 일이라도 갚는다면 그게 제 소원입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무슨 소리. 우리는 같은 임무를 수행하는 동지다. 그럼 돌아가게."
"네 알겠습니다.
박진사가 돌아간 후에도 개노미의 바쁜 일과는 계속되었다. 최근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었다. 개노미는 그 날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개노미는 짧은 상념을 마치고 다시 일에 집중했다. 이민국 조선지부는 개노미 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바빴다. 그 날을 위해서.
◆ ◆ ◆
그날 밤, 한양 모처의 화려한 최고급 기방에서는 꽃같은 기녀들과 미주가효를 앞에 두고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하하하! 대감마님께오서 이리 후대하시니 소인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런이런, 자네가 소인이라니? 이번에 자네 조부의 신원은 당연히 이뤄졌어야했지. 폐주의 폭정에 자네 집안이 그리 쓸려나간 것이 너무 안타까워 난 매일 눈물을 흘렸었다네. 자네가 비록 서자였지만 이젠 당당한 사대부가 아닌가? 곧 주상전하께서 첩지를 내리실게야. 기대해도 좋네."
"대...대감마님! 이 은혜는 죽어도 잊지 못할 겁니다."
"하하하! 내가 누군가? 정사공신 1등공신 김자점이네. 자네가 거사일에 도움을 준 것을 잊지 않고 있어. 비록 공신에 오르진 못했지만 외직(주:한양 외의 관직)을 맡기에는 충분한 공이야. 여기 술을 올리거라!"
"호호, 천녀가 존귀하신 대감마님께 옥로주를 올리겠습니다."
"흐흐, 그래! 오늘 하루는 내가 이태백이 되리라. 크하핫!"
"대감마님께서 이태백이면 저는 그 시종이 되어 노를 젓겠사옵니다. 이야말로 제 기쁨이옵니다. 하하하!"
"어허 이 사람, 이렇게 겸양해서야 쯧쯧. 어서 한잔 쭉 들이키게."
기방 안에서는 김자점이라 말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맞은 편에 장년의 사내가 앉았고 그 주위를 어여쁜 기녀들이 시중들고 있었다. 말대로라면 정사 1등공신인 김자점이었다. 김자점은 서인의 반정으로 그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한 자였다. 그런 그를 앞에둔 장년의 사내는 놀랍게도 정보국 조선지부장이었다.
"대감마님께오서 저희 서얼들을 지극히 아끼시니 어찌 그 은혜를 보답하지 않겠습니까? 조정 내에도 저와 같이 대감마님을 따르려는 서얼들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이 모두 대감마님게서 쌓으신 덕 아니옵니까? 소인은 이 자리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흐흐흑."
"어허! 사내 대장부가 이리 눈물을 보여서 되나? 자네들의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질게야. 나를 따르면 말일세."
"대감마님의 말씀 각골명심하겠습니다."
"자자 마시게! 오늘 이 좋은 자리에서 눈물이 뭔가? 자 여악을 울려라."
기방은 다시 화기(和氣)가 돌기 시작했다. 어여쁜 기녀들은 춤추고 노래하며 분위기를 돋궜다. 김자점과 정보국 조선지부장은 연신 술을 들이키며 대소했다.
그렇게 화려한 밤은 늦게까지 이어졌다.
◆ ◆ ◆
한양 인근의 어느 안가.
"이번에 고신공명첩(告身空名帖 : 임진왜란때 실제 관직이 아닌 이름만 있는 허직을 받았던 공명첩을 말함.)을 받았던 자들도 모두 경기를 포함해 외직을 받았습니다. 수원부사는 전 훈련대장 이흥립이 맡고 있어 얻지 못했지만 감영의 부장자리는 저희 조직원입니다. 군관들도 새로 뽑아 들이고 있으니, 이흥립만 처리하면 저희 손에 들어옵니다."
"흐흐, 대북의 매관매직을 욕하던 서인들이 더 심하군. 이번에 들인 돈은 그 날 이후에 철저히 환수해라. 모두 조선의 만백성들에게 쓰일 돈이다."
"하하. 물론입니다. 그날이 오면 그놈들 창고에 쌓인 물목들은 죄다 압수할 겁니다. 걱정마십시요."
"지금 김류와 이귀 쪽은 어떤가?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이괄을 탄핵한 결과는 어찌 되었는지 보고하게."
"이괄에 대한 김류의 원한은 대단합니다. 주로 대사헌 이귀를 통해 탄핵을 하고 있습니다. 사헌부에서 이괄 형제와 그 아들까지 탄핵을 했지만 아직 왕이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않을 겁니다."
"이괄의 근황은 어떤가?"
"현지 보고에 따르면 한명련과 자주 술자리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군관들을 엄히 단속하고 있습니다. 조직원에 따르면 군관들에게 비기(秘記)를 스쳐 지나가듯 언급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괄 본인도 믿는 눈치였다고 합니다."
"알겠네. 그 날이 머지않아 올거야. 우리 세력을 잘 가다듬고 때가 오면 단 한번에 일어서야한다. 이민국과 긴밀하게 협조하라."
"알겠습니다."
정보국 조선지부장은 보고하던 조직원이 나가자마자 탁자에 올려진 차를 들이켰다. 어젯밤의 술자리에서 김자점이 인사불성에 빠질때까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 숙취가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 얼굴색이 좋지 못했다.
이제 준비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 날은 다가 오고 있었다.
운명의 그 날이.
물밑 작업 2
탁!
외교부장의 대(對)일본통신사 보고서를 책상에 내려놓고, 잠시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벌써 7년 전부터 독도에 한국 영토라는 동판과 석비를 세워났다. 울릉도에도 조선에 들키지 않을만한, 다소 외진 곳에 같은 동판과 석비를 세워놨다. 최근에는 마라도에도 영토표지를 만들어 놨다. 외교부에서는 다소 기이하게 생각하겠지만 꾸준히 일하도록 지시하고 확인도 했다.
일본과는 이미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한 상태이니만큼, 조선에 관한 이야기를 사전에 조율해야했다. 이미 일본 에도 막부는, 일본의 조선중계무역을 방해해지 않는다면 한국이 조선을 병탄하는 것에 대해 어떤 이의도 없다는 답서를 보내왔다.
대신 사족이 붙었다.
일본이 조선과 중계무역을 하는 물량만큼 한국과 무역량, 현대말로 하면 무역쿼터를 늘려달라는 것이었다. 일본은 명과 무역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조선과 유구국을 통해 중계무역을 하고, 우리 한국과 따로 중계무역을 했다.
일본은 조선의 중계무역 물량만큼 손해를 볼 수 없으니 그것을 보장해달라는 것이었다. 내 입장에서도 일본의 주장은 충분히 수용할 수 있었다. 우리 손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상단에도 해금령을 완전철폐하고 해외무역을 자유화하겠다고 약속했으니 일본과의 중계무역을 조선상단에 넘겨주면 될 것이다.
조선상단들도 일단 근거리 중계무역을 통해 해외무역의 경험을 쌓고, 점차 원거리 무역에 나서면 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번거로운 공무역을 철폐하고 완전한 사무역으로 정책을 전환해야한다. 대신 충분한 경험과 자본이 있어야 해외무역에서 손실을 보지 않을테니, 그에 대한 대비를 대한무역주식회사에서 도와주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현재 상황에서는 조선상단이 일본과의 무역만 전담해도 차고 넘칠 것이 분명했다. 일본과 처음 교역을 시작할땐, 생사만 가지고 건너갔었다. 하지만 십년이 넘는 기간동안 명의 고급비단, 설탕, 향신료, 단목 등 수많은 종류의 물품들로 교역품목은 물론이고 교역량 자체도 엄청나게 늘었다.
조선상단은 이번에 큰 공을 세울 예정이다.
나는 조선의 방납을 비롯한 조세제도를 전면 철폐할 것이고 그에 따라 조선상단에 큰 희생을 요구했다. 조선을 한국에 완전편입하고, 화폐경제로 강제전환하기 위해선 그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들이 물자의 원활한 유통을 앞장서서 따르고, 한국 화폐의 강제사용에 대해서도 순순히 받아들여야 했다.
대신 화폐의 금은 태환을 약속했다.
그리고, 난 수상의 다음 보고서를 집어들었다.
조선상단도 그렇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문제였다.
한국 정부에서 추정하기로는 조선왕실과 관청의 토지, 불법점유된 토지, 서원등에 내려진 것들을 모두 포함하면 조선토지 전체의 4할이 넘을 것으로 보였다. 거기에 이민국 조선지부가 십여년간 꾸준히 사들인 토지를 포함하면 최소 6할에 가까울 것이라 생각됐다.
나는 조선 조정을 무너뜨린 후에, 조선 조정과 관청의 가장 중요한 경제기반인 위의 토지를 '무상몰수'하여 국민들에게 '유상분배'할 생각이었다. 그 '유상분배'는 차후 조금씩 세금으로 납부토록 할 것이고 모든 세금은 화폐로만 받을 예정이었다. 어차피 무너진 조정에 '유상몰수'는 불가능했다. 조정과 관청의 관비들에게 땅을 나눠줘야하지 않나?
조선의 노비들이 왜 노비로 살 수 밖에 없는가?
그것은 노비 스스로 경제적 기반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였다.
일반 양인들도 경제적 기반인 토지가 없다면 굶어죽지 않기 위해 스스로 노비가 되곤 했다. 조선왕실, 관청, 양반들이 경제적 기반인 토지를 대부분 가지고 있기에 발생했다. 조선 말기 갑오개혁으로 노비가 없어졌지만, 일제시대까지도 머슴으로 살아야했던 근본적인 이유였다.
중세 유럽에서도 귀족의 장원에 예속된 농노들이 그러했다.
농노들도 자신의 토지가 있다면 왜 농노를 하겠는가?
조선의 신분제를 철폐한다고 해도, 이 경제적 예속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나는 조선의 토지는 물론이고 호주의 토지까지 모두 내놓을 생각이다. 노비들이 토지를 불하받고, 자신의 재산을 일구는 경험을 한다. 불하받은 토지에서 재산을 증식하고 그 세금을 통해 불하받은 토지의 값을 치른다. 대신 그 세금은 무척 낮게 책정될 것이다. 토지가격의 세금을 납부하는 기간도 길게 할 것이다.
그렇게 조선의 모든 노비들이 경제적 예속까지 벗어난 자유민, 자경농이 될 것이다.
그 와중에 화폐의 사용도 제대로 정착될 것이다. 아마도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말이다.
조선의 땅은 충분하지 못하니, 호주 이민자는 아주 많을 것이다.
수상의 보고에 따르면 조선 인구의 2/3 이상을 수십년에 걸쳐 호주에 이주시켜야 한다. 그래도 땅은 남아돈다. 현대의 뉴질랜드에 해당하는 '동남도(東南島)'도 이주를 시작해야한다. 호주대륙과 뉴질랜드(동남도)를 완전히 우리 영토로 굳히고, 개발해야한다.
그렇게 조선인구 대부분을 신대륙으로 옮기면서 조선의 낡은 성리학적 질서를 깨부술 것이다. 토지에 기반한 경제적 패권을 상실한 사대부 양반들이 과연 과거의 권력을 가질 수 있을까?
난 결단코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경제적 기반을 상실한 사대부들이 성리학적 질서를 강제할 수 있을까?
한국의 법적 질서가 아니더라도 우리 국민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대신, 성리학이 가진 좋은 것들은 심사숙고해서 유지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충과 효 등의 사상이 그러하리라 생각된다.
조선의 개혁과 혁명!
아주 부드러우며 점진적인 것과 아주 극단적이며 급진적인 것!
과연 어떤 것으로 할지?
수상은 나에게 선택해달라고 했다. 물론 수상 자신의 의견도 첨부했다. 이럴 때는 내가 알고 있는 미래의 지식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나는 지금까지의 생각을 정리하며 집무실을 떠나 침실로 향했다.
곧 자야할 시간이다.
김씨 아저씨와 돌쇠할아버지는 지금 바쁘게 돌아다니실텐데, 걱정이 된다. 이제 곧 만날테니 그때 회포를 풀면 되겠지.
난 잠시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다 이내 침대에 누웠다.
◆ ◆ ◆
"어이쿠 이거 무척 많구려."
"새것이나 다름 없소. 그대들은 횡재한 거요."
"그대들이 노획한 것 중에 조선군 것은 이게 다요?"
"쓸만한 것은 죄다 가져왔소. 이것만으로 최소 7천명은 무장할 수 있소."
"흐흐, 이번에는 밀과 쌀을 넉넉히 쳐주겠소. 다음 거래에는 말, 소, 돼지, 양을 사겠소. 당분간 바쁘게 다니셔야 할거요."
"전쟁이라도 할거요?"
"무슨 말씀을 하시오. 우리도 팔아먹을 거요. 조선이 비싸게 사겠지."
"우리야 값만 제대로 쳐주면 되오. 밀, 쌀, 설탕하고 비누도 필요하오. 시계와 망원경도 여기 적힌만큼 가져오시오. 그리고 말인데, 홍이포도 구할 수 있겠소?"
"홍이포는 명 조정에서 금하는 것이라 어렵소? 구하려면 조정과 연통해야하오."
"그냥 가능한지 물어본거요. 그럼 이만하고 다음에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