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225)

만약, 제1의 전장으로 예상되는 청천강의 방어선이 뚫린다 하더라도 평산, 개성, 한양을 잇는 방어선을 제2의 전장으로 설정하여 시간을 끌며 장기적인 지구전을 전개한다. 그와 함께 삼남(충청, 전라, 경상)지방의 근왕군이 한양으로 상경하면 모든 전력을 모아 적을 물리치는 방안을 실행하면 되었다.

조선의 왕은 서북방의 조선군이 지연전술로 시간을 끄는 사이에 강화도로 천도하여 군을 통솔하면 되는 것이었다. 전조인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서도 수십년을 버틴 강화도였다. 그렇기에 조선의 전략은 믿음직해 보였을 것이다. 오랜 경험은 어디 가는 것이 아니기에 말이다.

하지만, 장년의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조선의 경우, 방어의 이로움은 병력의 이동거리와 시간, 보급선 역시 마찬가지로 짧다는 것이었다. 적의 침입이 예상되는 방어선에 성벽 등 방어시설을 마련하고, 군량을 비축한다면 그 이로움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후금의 경우, 몽골과 마찬가지로 기병이 중심이었다. 

유목민족의 기병이 가진 장점은 과연 무엇인가? 빠른 진격속도와 기본적인 보급선이 아예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장기적인 보급이 쉽진 않았다. 장기적인 보급은 약탈이나 후방 보급을 받아야했다. 유목민족 기병이 가진 장점에 비해 단점은 극명했다. 기병만으로 무거운 공성병기를 가지고 오기 힘들었기에 성에 올라 방어에 전념하는 조선군을 공격하기 힘들었다. 또한, 후금의 약탈이 불가능하도록 청야전술을 펼치는 경우에는 장기적인 보급이 어려웠다. 후금의 기병은 속전속결을 원하지 장기적인 보급이 선결조건인 지구전, 장기전을 원치 않았다.

조선군은 전조의 사례 등을 참고하여 후금에 대비한 방어전략을 수립했고, 일견 타당해 보였다. 

단 두 가지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장년의 사내는 계속 생각했다.

첫째, 전쟁은 공격정신이 고양된 자에게 승리의 미소를 짓는다.

군대의 사기가 중요한 이유이자, 공격자에 비해 선택의 폭이 좁은 방어자의 어려움을 이야기한 것이다. 후금이 가진 기병으로 전혀 예상치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공격이 이뤄진다면? 조선이 세운 방어전략은 그대로 흔들릴 것이다. 기병은 기동력의 장점이 극대화된 군대다. 의주를 지나치듯, 안주를 지나칠 수도 있다. 예상외의 공격, 출기불의(出其不意)가 별 것인가? 촉한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등애의 단 한번 공격에 촉주 유선이 겁을 먹고 항복했다. 역사에 숱한 사례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둘째, 전쟁은 다수가 소수를 이기는 것이 당연하다.

수많은 전략전술가들이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적군에게 완전한 승리를 얻고 싶어했다. 그러나, 바로 전의 사르후 전투가 어떠했나? 분산된 명군, 조선군은 후금의 기동력에 의해 각각의 장소에서 시간차로 각개격파되었다. 조선군은 각각의 요충지에 소수의 병력으로 분산되어 있다. 물론 집중적으로 군사를 배치해야한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조선군이 분산배치의 단점으로 인해 생기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조선군은 기동력이 극도로 부족했다. 후금 기병이 그냥 스쳐지나가면? 그대로 뚫려버린다. 후방에서 집결하기 전에 시간적 우위, 장소에서의 병력우위를 이용해서 각개격파한다면? 조선군은 그대로 소멸하고 말리라. 

역사적으로 유목민족의 기병을 막기위해 만리장성을 쌓고, 공격로를 제한하는 방식으로 대응한 것은 이런 이유였다. 그런 목적으로 쌓은 만리장성도 방어에 어려움이 있어 수시로 뚫렸다. 후금의 기병은 지금도 만리장성의 취약한 곳을 우회해서 수시로 명을 약탈하고 있었다. 그 취약한 곳으로는 대규모 병력을 이동시킬 수 없어서 후금의 누르하치가 산해관을 뚫으려 했던 것이다. 만리장성은 완전한 방어가 되진 않았다. 공격없는 완전한 방어가 가능하기나 할까?

조선의 방어전략은 일견 훌륭해 보인다.

하지만 그뿐이다. 

조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장년의 사내가 여기에 존재하는 이유였다.

그것이 그 아이가 진정 원하는 바였다.

장년의 사내가 반드시 지켜줘야 하는 것.

그 사내가 이전에 지키지 못했던 것을 갚아야 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지도 1 - 후금의 형세

지도2 - 조선의 북방군 배치상황

지도3 - 조선의 기본 방어전략

민심

성(盛)하면 반드시 쇠(衰)한다. 

개인과 기업은 물론이거니와 나라도 그렇다. 제법 오래 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빨리 그렇게 된다. 왜 모든 것은 반드시 쇠할까. 

고려의 하늘이 닫히고, 조선의 하늘이 새로 열린지 200년이 넘었다. 고려는 신라의 흥망성쇠를 수습하며 500년 기업을 이뤘다. 고려 이전의 신라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쟁패를 거쳐 천년 가까운 기업을 일군 나라였다. 그럼 또, 신라 전에는 없었나? 아니다! 부여, 옥저, 동예, 가야 등등 수많은 나라들이 똑같이 그 역사 속에서 명멸(明滅)했다.

길든 짧든 이들 나라의 패망사를 보면 그것을 관통하는 매우 중요한 철칙이 있는데 그것은 민심이반(民心離反)이었다. 모든 나라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백성의 민심이 떠받쳐 주느냐 민심이 떠나느냐에 정확하게 연결되어있었다. 

백성의 민심이 떠나는 것. 그것이 민심이반(民心離反)이다.

내가 알고 있는 민심이반이 일어나는 이유는 매우 다양한 데 가장 흔한 경우가 폭정(暴政)이다. 유능하고 바른 말 하는 신하를 죽이거나 사치와 향락에 빠져 민생을 돌보지 않는 폭정은 가장 고전적인 민심이반 원인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무능한 후계자를 세우는 군주의 판단착오, 무리한 전쟁, 군주의 오만함 등이 있다고 배웠다. 

그렇다면,

내 아버지?  

광해군은 왜 반정(反正)으로 쫓겨났을까?

임진왜란에서 그 누구도 흔들 수 없었던 업적을 남긴 사람. 그 빛나는 업적을 부인하는 자는 없었다. 광해군은 사대부에서 일반 백성들까지 진심으로 성군이 될 것임을 의심치 않았을 정도로 훌륭했던 세자였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는 흑화(黑化)했다.

폐모살제나 명에 대한 배신은 대표적 명분이었지만, 반정의 성공에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봐야했다. 반정 당시 폐모살제는 벌써 9년 전에 있었던 일이고, 민심을 흔들었던 중요한 사건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중요했던 것은 '궁궐매니아' 광해군의 잦은 옥사를 통한 폭정이고 궁궐건설을 위한 가혹한 세금, 가렴주구였다. 그로 인해 광해군은 민심을 잃고 말았다. 만약 광해군이 민심을 잃지 않고 적당한 수준의 민생이라도 유지했다면 과연 서인의 반정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대부분의 군주들은 민심이 떠나는 것을 잘 못 느낀다. 군주가 되기 전에는 그렇게 영명하던 사람도 일단 군주가 되면 좁은 공간에 갇혀 버리게 된다. 그것은 군주이기 때문이다. 겹겹이 쌓인 보위장치 혹은 위계장치 혹은 권력을 독차지 하려는 집권세력 때문에 적나라한 민심이 군주까지 닿지를 못한다. 

광해군의 흑화와 잦은 옥사, 대북 집권세력의 권력독점과 매관매직, 궁궐건설로 인한 가혹한 세금 등으로 서인 반정 직전엔 백성들의 민심이 그를 떠난 지 오래였다. 이런 민심의 흐름을 수시로 접하기 위해서는 둘러 처져있는 유무형의 장막을 끊임없이 절단하고 소통해야 하는데 그걸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민심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있었으니, 광해군이 반정 당일 첫 일성은 '반란을 일으킨 자가 이이첨이냐'는 말이었다고 한다. 이이첨은 대북 집권세력의 핵심이었다. 나는 그런 점에서 나라를 세우는 것보다도 나라를 지키고 이어가는 것은 몇 배나 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국가 흥망성쇠의 비밀'은 다른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를 비롯한 사람들, 모두가 아는 당연한 것이다.

그것은 민심(民心)이다.

그래서 나는 군사(軍事)작전 이상으로 민사(民事)작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민사(民事)작전 : 군대가 민간을 대상으로 벌이는 작전. 민사작전은 원칙적으로 전시, 평시를 불문하고 군이 작전지역에서의 민심을 얻기 위하여 하는 선전, 계몽, 의료지원, 시설지원 등의 모든 비전투 활동을 의미함. 

"민사작전 교범은 관련부서에 전부 배포했나?"

"조선지부와 사령부에 가장 먼저 배포했고, 비전투부서에도 배포중입니다."

"조선 각 지방마다 민사작전담당자를 선정하는데 신중해야한다. 양반출신이든 뭐든 상관없고 그 지방에서 인망이 있는 자가 최우선이다. 적당한 자가 없으면 아예 모르는 사람이 낫다. 현지 사정을 제대로 알고 있는 작전인력은 조선지부에서 차출될 것이다. 민사작전 교범을 충실하게 습득하고 실행할 수 있도록 만전을 다하라."

"네 알겠습니다."

"각 부서는 민사작전 교범을 확인하고, 민사작전을 지원할 세부계획을 작성해서 보고할 것. 그리고 그 세부계획에 대한 실행에 착오가 없도록 준비하라."

수상 관저에서는 수상이하 각료들의 내각 회의가 한창이었다. 

회의장 안은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아수라장이었다.  수상을 비롯한 각료 모두는 탁자에 놓인 서류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에 대한 질의응답은 쉴새없이 이어졌다. 잠시 짬을 내어 커피를 마시는 것이 고작일 정도로 바빴다. 

"군사작전을 입안한 사령부도 저희보단 한가할 겁니다. 민사작전의 개념 자체가 생소하기도 하구요. 조선의 민정(民政)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많습니다."

"그래도 민사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추가적인 비용이 크게 절감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건 맞습니다. 국왕전하께서는 조선의 백성들도 우리 한국민이라고 못박으셨습니다. 왕부터 백성까지 전부다 말입니다. 우리는 조선의 한국민들에게 침략전쟁이 아님을 확인시켜줘야합니다. 그리고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치안을 유지해야 하구요. 기타 천연두 예방 의료지원, 호환방지를 위한 사업 등을 통해 민심을 확실히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이를 통해 민심을 잡으면 그 비용절감은 말이 필요없습니다."

"민사작전 비용이 문제이긴 한데, 일단 이민국 조선지부에서 상당부분 전용이 가능합니다. 추가적인 비용은 의회와 상의해서 예산을 확보해야 합니다."

"국왕전하께서 무역주식회사 지분을 일부 출연하셨지 않습니까?"

"네, 국왕전하께서 지분을 출연하신 것이 신문에 대서특필 된 후에 국민여론이 들끓고 있습니다. 의회에서도 문제없이 통과될 것이고 국민모금운동이 활발합니다."

"이거 참 놀랍습니다. 신문 건은 국왕전하께서 일부러 노리신 게 아닐까요?"

"크흠, 그건 아닐 겁니다. 계속 일합시다."

"네!"

"..."

"..."

이렇게 수상 관저의 불빛은 밤새도록 꺼질 줄 몰랐다.

같은 시각, 이민국 조선지부.

"이번 달에만 3만결인가?"

"네 지부장님! 정확히는 3만 1120결입니다."

"대금결제 수단은?"

"우리 입장에서는 은의 가치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추세라서 은으로 결제하는 것이 이득입니다. 게다가 토지를 매도하는 측에서 보관이 용이한 은을 선호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와 토지 매도자간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기에 토지매매 대금결제의 7할 이상이 은입니다. 나머지는 정미(精米)와 면포입니다."

"지금 조선 조정의 수세(收稅 : 전체 토지결수 중에 세금을 거둘 수 있는 토지를 의미함. 조선의 경우 토지조사를 의미하는 양전사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전체 토지결수는 유동적임. 조선 전체 토지결수는 약170만결로 추정되고 수세결수가 70만결, 나머지는 면세토지로 판단됨) 결수가 얼마로 추정되나?"

"양전사업이 제대로 이뤄진 때가 없어서 딱히 정확하진 않습니다. 전체 토지결수가 170만결이라고 하며, 수세결수는 70만결 남짓합니다."

"좋아! 이제부터 토지매입은 현행 수준으로만 진행한다."

개노미, 김희두는 잠시 차를 한모금 마시고 숨을 골랐다. 그리고는 탁자에 놓인 책자를 펴서 자세히 살펴보고 다시 내려놓았다. 그의 등 뒤에는 조선 반도를 그려놓은 커다란 양가죽지도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지도 곳곳엔 울긋불긋하게 표시된 깃발 모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그 문양의 옆에는 아주 작은 글씨들이 숫자와 함께 적혀 있었다. 개노미는 등 뒤의 지도를 힐끔 쳐다보곤 다시 말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금력을 동원해서 식량확보에 나선다. 민사작전의 성공을 위해서는 식량이 최우선이다. 감자종자 및 재배방법도 조직망을 통해 전국에 보급한다. 그동안 우리가 보급한 잉여곡물 때문에 식량가격이 폭락했다. 우리가 갑자기 대량 매입하면 시장이 들썩일 수 있으니 주의해라."

개노미는 눈에 힘을 주어 조직원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 거사가 얼마 남지 않았다. 정보국에서 진행 중인 작전에 대해 너희도 대략적인 내용을 알 것이다. 우리는 경군의 대부분을 이미 장악했다. 북방을 제외한 지방군도 마찬가지다. 유사시에 우두머리만 제거하면 된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다. 우리의 힘으로 조선의 왕을 비롯한 양반들을 제압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민심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백일천하로 끝날 뿐이다. 지금 폐주가 쫓겨난 이유가 무엇인가? 임진년에 얻었던 민심을 폭정과 가렴주구로 잃었기 때문이다. 군사는 쉽지만 민사는 어렵다. 조선의 백성은 같은 한국민이다. 조선의 왕이나 사대부들도 같은 한국민이다. 우린 조선 만백성을 위해 함께 뜻을 모으고 일어섰다. 이걸 명심하라!"

"네 알겠습니다."

개노미와 조직원들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그들이 바란 세상이 곧 올 것이다. 

하지만 조선 만백성도 새로운 세상을 원할 것인가? 

그것은 아직 아닐 것이다.

한국과 조선에서 반상의 구분없이 만백성이 함께 바라는 새로운 세상!

그것은 개노미가 꿈에서도 바라 마지않는 것이었다.

그것에 개노미의 눈에선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개노미와 마주한 조직원들의 눈에서도 마찬가지로 뜨거운 사나이의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들이 흘린 눈물은 다시 그들의 가슴에 뜨겁게 벅차올랐다.

최근 조선 팔도, 방방곡곡에 은밀한 소문이 돌았다.

여기에 나오는 내용들은 격식을 따질 일도 없으며, 순서도 없고, 신빙성도 별로 없었다. 말 그대로 풍문(風聞)이었다. 출처없이 떠도는 말들. 그 이야기의 근원을 찾아들수록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그것은 희망이었다.

만백성이 배고픔없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세상!

누구도 호환마마로 고통받지 않는 세상!

어떤 누군가는 미륵이 이 세상에 내려온다고 했다.

또, 이어도에 가면 누구나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했다.

그 세상에서는 서얼이 차별받지 않고, 사람이 노비로 사고팔리지 않는다고도 했다. 반상의 구분없이 모두 자유롭고 평등하다고도 했다. 

이런 풍문에 사대부들은 경악했고, 

조선의 관아에서는 그 출처를 찾으려 이잡듯 헤맸다. 

하지만, 풍문이 무엇인가? 

그대는 바람을 잡을 수 있는가? 

잡을 수 없는 바람, 그 소문은 조선 만백성의 사이를 바람처럼 휘몰아 다녔다.

그 바람은 마치 꿈결처럼 만백성의 가슴에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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