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225)

"이미 폐주때의 고사(古事)대로 처리 중이었소. 능창군이 석회섞인 밥을 먹다가 분통해서 자결하지 않았소. 그들도 머지않아 그러리라 생각했는데 말이오. 불을 지른 것은 우리가 아니오."

"불에 탄 흔적으로 보면 더욱 그렇지 않소이까? 숯이 없이 그리 맹렬하게 탈 수 없어요. 많은 숯이 발견된 것도 그렇고 폐인이 그 숯을 준비할 수 없소이다."

"음, 저는 불측한 의도를 가진 대북 잔당들이 거행한 일이라 생각하오. 우리는 반정명분 때문에 폐주는 살려둬야하오. 폐세자는 연산군의 전례로 보아 폐세자 이황을 사사하였으니 상관없었다 이거요. 그래서 때를 보아 사사할 것을 주청하면 한 두번 미루시다가 될 일이었어요. 우리에게는 불을 놓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거요. 이걸 통해서 이득을 볼 자들은 대북 등 북인들이오. 우리 명분을 희석시켜 살 길을 도모하거나 아니면..."

"아니면?"

"그들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볼 수 밖에 없소."

"크흠, 북인 잔당의 역모라..."

"그런데 말이오. 당시 그리 철저히 조사했음에도 어떤 증좌도 발견되지 않았지 않소이까? 이는 누군가의 비호가 없이 되기 어렵지 않소?"

"어허, 너무 나갔소. 그 누군가를 설마 주상.."

"닥치시오! 말이면 다인 줄 아시오?"

"아니 그럴만한 정황이 있... 알았어요 알았어. 더 말하지 않으리다. 에잉."

"이만하고 조정과 지방에 남은 북인 잔당부터 쓸어냅시다. 그들의 자리에 적절한 자들을 추천하구요."

"..."

"..."

왕의 침전.

쪼르륵!

탁!

왕은 술잔을 비우고 작게 냉소했다. 폐세자 이지와 폐빈 박씨가 불을 질러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엔 당황했었다. 하지만 곧 기분이 좋아졌다. 어차피 죽일 것인데 알아서 자결하니 반정명분에 대한 부담도 덜 것이니까 말이다. 

또한, 그들이 무척 독한 것들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냥 목을 매면 고통없이 편히 죽을테데, 힘들여 불을 질렀다니? 장례라도 후히 치러 주겠다고 마음먹고 의례적인 조사를 명했었다. 그런데?

위리안치된 곳에 숯으로 불탄 자국이 선명했다고 했다. 증좌인 숯도 발견됐다. 폐인들이 감히 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죽고자 했으면 쉽고 빠르게 죽을 방법을 찾지, 있지도 않은 숯을 들여와서 어렵고 고통스럽게 죽으려고 하진 않을 것이다. 

왕은 이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직, 폐인이지만 사적으로는 사촌동생이니 장사를 후히 치르도록 명했을 뿐이다. 하지만 몹시 불쾌했다. 우선 왕 자신이 명령한 것은 결단코 아니었다. 그렇다면 자결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생각나는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북인 잔당이 저지른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서인 당여들이 저지른 것이다.

만약 북인 잔당이 결행한 것이라면 간단했다. 왕의 반정명분을 몰각시키고 폐인의 동정여론을 부각시켜 역모를 손쉽게 하려고 함이다. 그런데 이런 해석에는 문제가 따른다. 폐주인 광해군은 민심을 너무나도 크게 잃었기에 역모의 구심점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폐세자를 세우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이것은 기각이다.

결국 서인 당여들이 결행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견 이치에 맞았다. 그렇지만 여기에도 조금 의문이 남는다. 어차피 폐세자는 죽일 것으로 결론낸 상태였다. 그래서 석회가 섞인 밥을 주고 있었다. 한 두달만 기다리면 자결을 명할 것으로 합의했었다. 그런데 왜 이리 급하게 결행했을까? 왕이 폐인의 사사를 허락하지 않을까봐? 역시 그건 말도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인 당여들이 결행한 것이라면? 

그 생각에, 왕은 피식 웃었다.

이는 말할 것도 없는 그들의 경고였다. 그들의 말을 고이 듣지 않는다면 왕도 가만두지 않겠다는, 왕도 폐주와 똑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란 경고였다.

그래, 분명했다.

한번 고기에 맛들리면 쉬이 고기를 끊지 못한다.

바로, 그런 것이다.

그렇게 왕의 밤은 깊어졌다.

한양 인근의 어느 안가.

"한성판윤 이괄이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떠났습니다. 도원수 장만이 몸이 좋지 않다고 해서 부원수까지 얹어주었다 합니다. 왕은 평양으로 가는 수레를 밀어주는 등 극진히 대접해서 보냈습니다."

"한성판윤으로 재직 중에 있었던 난동사건은 어찌 결론이 난거냐?"

"이괄이 사직하겠다고 하니 왕이 받아들이지 않고 재신임했습니다. 김류, 이귀 등 반정공신들이 재차 국문을 청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왕의 이괄에 대한 신임이 두터운 것 같습니다."

"흠, 기병까지 포함해서 1만5천의 군사라...."

"부원수까지 제수되었으니 도원수 유고시엔 그가 북방 군사의 전권을 가지게 됩니다. 왕이 무척 신임하고 있습니다. 진짜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진짜 이유?"

"도원수 장만이 서인 반정의 1등공신인 최명길의 장인입니다. 그도 서인이라는 말입니다. 서인이 조정에 가득하고, 군권까지 전부 가진다면 왕이 불안할 수 밖에요. 아마도 그걸 견제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긴, 반정의 짜릿한 단맛을 본 자들이 두번은 못할까?"

"왕이 남인과 북인 잔여세력을 등용한 것에 대해 불만을 표하는 반정공신들이 많습니다. 왕이 서인을 견제하는 형식을 취한다해도 수년 내로 서인의 단독정권이 될 것임은 자명합니다. 매일같이 북인의 죄를 논해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왕도 더 이상 외면하지는 못할 겁니다."

"금선탈각의 계에 대해서는?"

"당연히 서로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왕이 폐세자 부부의 자결에 대해 처벌한 자가 없으니 그대로 지나가는 듯한 모양새이긴 합니다. 하지만 영의정을 비롯해서 남인 등을 등용하면서 갈등의 골이 깊어졌습니다. 지금은 중앙부터 지방까지 북인 잔당을 몰아낸다고 혈안이 되어있으니 그냥저냥 지나갈 것입니다."

"음, 어차피 그 전에 끝낼 것이니 그 이후는 신경쓰지 말게. 그건 그렇고, 이괄에게 비기(秘記 : 실제 역사에서 이괄은 비기를 얻었다고 스스로 말하면서 딴 뜻을 품었다고 기록됨)는 보냈나?"

"물론입니다. 남건은 요술로 서로 친하고 남응화는 망기(望氣)를 잘하는데 이괄의 집에 가기(佳氣)가 있다고 했습니다. 윤수겸은 이괄이 갑자년 명수(命數)를 타고나 극히 길(吉)한 것으로서 한번 지휘하면 태평을 이루게 된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것들을 잘 버무려서 비기를 만들었습니다. 어차피 말로야 뭘 못하겠습니까? 비기는 이괄이 우연히 얻은 것으로 생각되게 잘 처리했습니다."

"고생했네. 이괄은 김류와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니 조만간 사헌부와 사간원을 움직인 서인의 탄핵을 받을거야. 왕이 당분간 이괄을 비호하겠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진 않을걸세."

"알겠습니다. 거사 준비에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

"..."

길었던 대화가 끝나고, 상대가 떠나고 난 뒤 정보국 조선지부장은 호롱불을 앞에 두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요즘 한양의 밤하늘은 어둠이 더 빨리 물들고 있었다. 해가 저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사물을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캄캄했다. 올해 겨울은 분명 여느 해보다 한참 더 추울 것이다. 

문득 정보국 조선지부장이 창밖을 내다보며 조용히 혼자 말했다.

"우리가 할 몫은 거의 다 했군. 이제 본국에 알려도 되겠어. 나머지는 이민국과 그들이 해결할테지. 준비는 끝났다."

타닥타닥

작은 호롱불이었지만 불티가 날리고, 그 탁한 불꽃이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는 듯했다. 그렇게 밤은 깊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북방의 형세(形勢) - 지도 확인 요망

한밤 허름한 북녘 고성(古城).

하늘엔 뭇별들이 가득했고, 허물어진 성벽의 잔해들이 어지럽게 흩어진 곳이었다. 그 잔해들이 널브러진 곳에 두 사람이 자리잡고 앉아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밤바람을 막아줄 만한 아늑한 공간에서 모닥불을 지펴놓고 대화하고 있었다.

"흘흘, 그 녀석 운이 하늘에 닿았누?"

"..."

"불문곡직(不問曲直), 단 칼에 벨 줄 알았거늘 둘 다 무사하구나. 별장(別將 : 폐주인 광해군은 유배지에서 죽을때까지 감시역할의 별장, 나인과 함께 거주했음.)은 오줌이라도 지렸겠누."

"그가 알아서 피하니 뽑을 일이 없었지요."

"흘흘, 여기 올땐 한바탕 피바람..."

"저라고 피를 좋아하겠습니까? "

"..."

"..."

타닥타닥.

그들이 잠시 말을 멎었을 뿐인데, 모닥불 타는 소리만이 요란했다. 사위는 캄캄했고 적막감마저 흘렀다. 그 적막감을 참지 못한 늙은이가 술과 건량을 꺼내며 한숨부터 푹 내쉬었다. 

"흘흘, 내 늘그막에 이리 역마살이 끼었누. 다 죽어가는 늙은이면 가늘고 길게 살다가 평안 무탈하게 죽어야하거늘, 이래 다 늙어서 무슨 부귀공명을 얻겠다고 이 먼 곳까지 와서 이리 요란하게 사누?"

그 늙은이는 술 한모금을 가득 들이키고는 그 쓴 맛을 삼켰다. 그리곤 건량 약간을 입에 넣고 질겅거렸다. 그 와중에 상대의 눈치를 살폈지만 아무 말없이 시간은 흘렀고 이를 참지 못한 늙은이가 다시 말하려는 순간에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렸다. 

한밤 허름한 북녘 고성(古城)은 주위 십여 리가 무인지경(無人之境)이었거늘, 그 누구인들 마땅히 놀랐을 일이건만 두 사람 모두 미동도 없었다. 마치 누군가 나타나길 예상이라도 한 듯 장년의 사내는 말없이 모닥불을, 늙은이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건량을 질겅질겅 씹으며 인기척이 들린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벽녘.

아직 동쪽 하늘에 여명이 트기 전이었다. 장년의 사내는 여행용 짐을 챙기며 슬그머니 일어나서 자리를 정돈했다. 밤새 버티던 모닥불은 마지막임을 감지한 듯, 격한 몸짓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옆에는 모닥불을 등지고 누운 늙은이가 부스럭거리며 일어나려 안간힘을 썼다. 

잠시 후, 그 두 사람은 고성(古城)을 등 뒤로 하고 동트는 곳을 향했다.

"끄응, 나이를 먹으니 삭신에 쑤시지 않는 곳이 없구나! 조금만 더 가면 영변(寧邊)이누?"

"어제 조직원이 일러준대로면 옳습니다."

"흘흘, 그 녀석 무재(武才)가 출중하니 가르쳐 볼만 하겠다. 욕심나는 녀석인데..."

"이제 손을 떼셨다 하셨지 않습니까?"

"크흠, ....어제 들은 바로는 북방의 형세(形勢)가 심상치 않겠구나?"

짜증난 투로 늙은이를 쏘아붙이려던 장년 사내는, 그의 시기적절하면서도 재빠른 태세전환에 감탄했다. 출기불의(出其不意 : 뜻하지 않은 때에 나아감. 불의의 일격을 의미하며 늙은이의 태세전환 속도에 감탄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란 손자병법의 옛 가르침은 이와 다르지 않다고 여겼다. 오랜 동거생활로 더 이상 당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었기에 뼈아픈 일격이었다. 그리곤 어젯 밤 그 녀석과의 길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 아래의 설명은 첨부된 지도 1, 2, 3 을 참고해 주세요.

"만약, 후금이 조선을 친다면 허투알라에서 출격할 이유가 없습니다. 빠른 기동력을 이용해 압록강 하류의 좁은 물목(주 : 물이 흘러 나가거나 들어오는 어귀. 당시 압록강 하구에는 기병이 도하가능한 강변의 좁은 어귀가 무척 많았음.)을 건널 것이 뻔합니다. 

지금 가도(압록강 하류 끝에서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다소 내려간 섬. 명의 모문룡이 명군 3만을 주둔시켜 놓은 상태)에는 명군 3만이 기각지세로 주둔 중입니다. 

조선의 계산은 첫째, 의주에서 후금의 선봉을 잡아놓은 다음에 시간을 버는 것입니다. 둘째, 그렇게 번 시간으로 모문룡의 명군 3만과 평안도 곳곳에 분산된 방어군을 결집해서 후금을 요격하는 겁니다."

사내는 목이 탄 듯, 말을 멈추고 가죽수대에 담긴 물을 한껏 들이켰다. 다시 숨을 고르고 고른 그가 말을 이었다.

"조선군도 최선은 의주에서 후금을 맞이한 후, 격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헛된 기대라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습니다. 

압록강은 여러 곳의 물목이 좁아서 후금 기병의 도하를 막을 수 없고, 후금의 기병들이 의주성을 공격하면서 시간을 끌 이유도 없습니다. 후금의 기병들이 의주를 뒤로하고 진격하면 청천강에서 반드시 거쳐야할 지점인 안주(安州)가 있습니다. 그 안주목사에 정충신(鄭忠信)이 있습니다. 

조선의 주 방어선은 안주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 청천강은 도하할 마땅한 곳이 적어 후금 기병의 도하를 막기 유리합니다. 

둘째, 영변(부원수 이괄 13000명)과 평양(도원수 장만 5000명) 등지에 배치된 북방의 정예군이 안주로 집결하기에 시간적, 거리적으로 최적의 위치입니다. 

셋째, 안주는 가도의 명군이 우리 군과 합류하기 좋은 위치입니다. 

마지막으로 청천강 이북의 북방군이 군사를 모아서 후금의 후방을 위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조선의 기본적인 후금 방어전략입니다."

사내의 보고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조선의 다음 병력배치도를 확인하면 이미 설명드린 조선의 후금 기본 방어전략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의주와 백마산성은 시간을 벌기 위해 있을 뿐 입니다, 불과 3천 남짓한 수비병력으로는 성을 지키기도 버겁습니다.

청천강 이북의 주요 군사는 구성의 한명련, 정주의 정호서가 있습니다만 군사가 적고 소수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한 전력이라 후금 대군을 요격하긴 어렵습니다. 의주 방어군과 함세해서 후금의 후방을 위협 및 교란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방어군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는 누가 뭐라해도 안주입니다. 안주목사 정충신은 1천의 병력을 가지고 안주의 길목을 수비하고 있습니다. 의주를 지난 후금군의 소식이 들리면 영변의 부원수 이괄이 1만3천 기동군으로 안주를 손쉽게 구원할 수 있습니다. 후금을 섬멸하기는 곤란해도 청천강 방어선을 지키는 데에는 충분합니다.

여기에 평양에 있는 도원수 장만이 예하 5천 정예병과 모문룡의 명군3만도 함께 집결할 수 있습니다. 

수비군의 이로움을 감안한다면 조선의 입장에서 필승(必勝)의 패입니다. 

이상입니다!"

장년의 사내는 말없이 생각했다. 

후금의 전력이 기병을 중심으로 한 기동군이라는 점과 조선이 가지는 방어군으로서의 장점을 따졌을 때, 크게 군더더기는 없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나름 최선의 대응전략임에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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