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 남들이 들으면 내가 그대를 버린 줄 알겠소."
"아닌가?"
그는 다시 몸을 돌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폐주를 바라봤다. 하지만 옆에 선 폐비를 슬쩍 바라보곤 다시 몸을 돌려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그 곳엔 폐주와 폐비만 덩그라니 남았다.
아궁이의 불길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변하지 않는 것
'지금 당신은 진짜 인생을 살고 있나요?'
이 말은, 나도 여러차례 봤던 영화, 짐 캐리 주연의 '트루먼 쇼',
그 영화의 포스터 광고문구였다.
나는 고아였다.
고아원에 살았던 때부터 꾼 꿈은 이렇다. 갑자기 진짜 아빠와 엄마가 내 앞에 나타난다. 그들은 뜻밖의 사고(?)로 사랑하는 아들인, 나를 잃어버리고 애타게 그리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정보를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들이 있는 고아원으로 찾아온다. 결국 그들은 극적인 해후를 하고 모두 행복하게, 오래오래 함께 산다.
다시 생각해봐도 개꿈이다.
고아원에서 나간 후에, 사관학교 생활 중에도 가끔 꿈꿨다. 장교생활부터는 간혹 술마실 때나 옛날 고아원 생각하면서 피식거리던 것이 전부였다. 정말 그 뿐이었다. 난데없이 귀신고래를 만나고 조선에 노비로 태어난 다음에는 그런 말도 안되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고아원에서는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엄마, 내가 꿈에도 그리워 눈물흘렀던 존재가 조선에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도 몰랐던 아버지의 존재를 주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
정말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아무 것도 하기 싫었다. 꼬박 하루 동안 꼼짝않고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밥은 물론이고 물 한모금 먹지 않았다. 왕궁의 사용인들은 물론이고 수상 이하 각료들과 의원들까지 왕궁에 몰려와서 온갖 난리를 쳤다. 감히 왕이 문을 잠그고 들어앉았는데 문까지 부수고 들어왔다. 내가 왕인지 죄순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사용인들에게 문을 따고 들어가라는 지시는 수상이 했다. 수상은 나를 쳐다보곤 한숨을 쉬더니 무릎 꿇고 사죄했다. 수상이 무릎꿇고 눈물을 흘리며 너무 걱정돼서 강제로 문을 열었다고 사죄를 하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냥 기분나쁜 표정으로 '피곤하니 나를 가만히 두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 후에도 왕궁에 찾아온 각료들, 의원들의 난입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죄다 쳐들어와서 나를 압박했다. 내가 상단주일때도 감히 이러진 못했다. 왕이 아니라 동네 호구로 생각하나 하고 화가 났었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행동들 모두가 궁극적으론 나를 위한 것임을 이해하고 나니 미안한 마음도 잠시 들었다.
하지만, 그래! 난 지금 허탈했다.
그리고 괘씸했다.
믿었던 사람한테 뒤통수를 맞은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예전 기억들이 떠오른다.
우선, 수상은 그 소문을 알고 있었다.
내가 평소에 제일 좋아하는 여배우가 있었다. 나만 그런건 아니고 서울에서 최고 인기였다. 지금은 결혼해서 절대로 좋아하지 않지만 말이다. 하여간 그 여배우가 출연하는 연극은 항상 만석이었다. 나도 그 여배우를 보려고 극장에 가곤 했었다. 수상, 사용인들과 함께 말이다.
"수상! 요즘 극장에서 유행하는 연극의 주제는 '출생의 비밀'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군. 좀 더 진취적인 주제를 가진 연극을 공연했으면 좋겠는데..."
"..."
"예를 들어, 무역회사 선원들이 넓은 바다를 항해하면서 신비한 모험을 한다거나 그런거 말이오."
"크흠, 국민들이 가장 흥미있어 하는 것이 연극의 주제로 적합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극장표도 잘 팔리니까요. 크게 걱정하실 일은 아닐 듯 합니다."
어쩐지 지난 5년간 연극 공연에서는 왕의 출생의 비빌, 선원의 출생의 비밀, '알고보니 왕의 아들', '숨겨진 귀족의 딸' 같은 주제가 끊이질 않았다. 이제 식상해질 법도 한데 계속 나왔다. 현대의 드라마에서도 죄다 숨겨진 회장의 아들 딸이 나오지 않았던가? 현대의 기억때문인지 그 기억들이 오버랩되면서 연극공연이 재미없어졌다. 그래서 그 다음부턴 연극공연도 거의 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나 때문이었다니?
지난 5년간 소설이든 연극이든 가장 인기있는 소재는 바로 나였다. 언제부턴지 흘러나온 왕의 비밀이었다. 내가 조선노비 출신이란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광해군의 숨겨진 아들이란 소문이 돌았다. 그 소문은 빛보다 빨랐다. 거기에 추가적인 증인들이 속속 나타났다. 그들의 증언들이 뼈에 살을 붙인 것이다. 다만, 왕인 내 이야기를 직접 연극무대에 올릴 수 없기에 각색하여 올렸다고 한다.
다시 말해, 영화 '트루먼 쇼'에서 그 트루먼이 바로 나였다.
아니 이 사람들이?
아무리 그래도 당사자인 나한테는 말을 해줬어야지!
최소한 김씨 아저씨와 돌쇠할아버지는 조선에서부터 알았을 것이 분명하다.
별 것 아니지만 나중을 위해 빨리 짚고 넘어가야겠다.
나는 그렇게 결심했다.
그런데,
"국왕전하께서 조선 왕의 친자라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있겠습니까?"
"..."
"우리 한국은 모든 면에서 조선을 잇지 않았습니다. 정치경제사회 등 어떤 것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조선의 신분제와 국시인 성리학을 부인합니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국왕전하의 혈연에 대해 전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그런가?"
"조선에서는 오히려 이득입니다. 우리가 조선을 병탄함에 있어 사대부들의 반발을 잠재울 수 있는 유리한 패를 가진 겁니다. 폐세자 부부를 얼굴마담으로 사용하려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국왕전하께서 친자라고 하셔도 그들을 써먹을 수 있고, 아니어도 상관없이 써먹을 수 있습니다."
"..."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우리 국민들이 있습니다. 국왕전하께서 폐주인 광해군의 아들일 수 있다는 소문이 난 후에 국민들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소설로, 연극으로 최고의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만큼 국민들의 마음을 얻으셨다는 겁니다. 폐주인 광해군이 왜 반정으로 물러났겠습니까? 우리 한국은 국왕전하의 결단으로 세워졌습니다. 건국하신 분입니다. 누가 감히 흔들 수 있겠습니까?"
수상은 잠시 목을 축이고 다시 말했다.
"국왕전하께서는 항상 스스로의 권위에 기대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를 비롯해서 모두에게 권한과 책임을 법률과 제도에 따라 분산하셨습니다. 이는 조선과 완전히 다릅니다. 조선의 누구도 따라할 수 없습니다. 그를 통해서 국왕전하의 위치는 반석에 올랐습니다. 조선처럼 반란이 무서워서 역모죄로 수십수백을 죽일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에 의한 지배가 아닌, 법에 의한 지배이기 때문입니다."
"..."
내가 생각이 짧았다. 역시 똑똑한 사람들이 나라를 다스려야한다. 내가 스스로 영국식 내각책임제를 들여오고, 법치주의를 위해 헌법과 권리장전을 제정했다. 지금이야 건국왕이니까 그렇지만 수십, 수백년이 지나면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왕이 권위로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법과 제도에 의한 통치로 말이다.
내가 괜히 걱정했다. 오히려 수상이 걱정이다. 내가 이런 멍청한 말을 했으니 말이다. 오히려 국왕인 내가 수상을 의심하는 것이 된 것이다. 너무 미안했다. 이럴 때에 수상이 날 의심하냐고 받아치면 얼마나 창피한 일일까?
"국왕전하께 심려를 끼쳐드려 너무 죄송합니다. 정보부에서 최명길을 속여 접촉한 것은 다소 과했습니다. 최명길은 조선으로 돌아가 해야할 역할이 있습니다. 그런 그를 농락한다는 것은 우리 잘못입니다. 즉시 바로잡겠습니다. 정보국은 해야할 일을 한 것이니 앞으로 주의를 주는 선에서 정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것은 수상에게 일임하겠소."
역시 수상이다. 국왕인 내 체면을 이렇게 세워줬으니 상을 줘야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수상이 폭탄선언을 했다.
"국왕전하께서는 이제 혼인을 하셔야 합니다. 내각에서 이미 여러 경로로 준비 중에 있습니다. 해외에서도 혼인의사를 타진해 온 곳들이 있습니다. 스페인, 영국, 일본입니다. 국내에서도 적절한 혼처를 찾고 있으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난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수상이 나가고 난 후, 짐 캐리처럼 폴짝뒤며 한참 오두방정을 떨었다.
오늘따라 하늘은 맑고 햇빛은 따사로왔다.
같은 시각, 서울 광장 거리의 한 식당에선 고성이 들렸다.
"아니 그, 그가 사기꾼이란 말이오?"
"쯧쯧,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그가 조선으로 편지를 보내준다고 갈취한 돈이 어마어마합니다. 설마 돈을 뜯기셨는지요?"
"아, 아니오."
"그가 사기친 사람만 수십명인데 편지는 죄다 불타버렸습니다. 안타깝지만 최대감게서 보내시려던 편지도 함께 소실됐습니다. 사기꾼은 집에 불을 지르고 도망쳤고 행방이 묘연합니다. 돈을 사기친 피해자 명단에 최대감님도 계시길래 피해금액을 확인코자 만나뵙자고 한겁니다."
경찰청 수사관이라는 사람의 말에 최명길은 크게 낙담했다. 그와 의기투합했던 그 사람은 조선에 대한 충심을 가진 이가 아닌 사기꾼이었다. 처음엔 편지를 보내주는 척 하다가 결국 돈을 요구해서 갈취한다고 했다. 그런 사기행위에 피해자가 수십명이라니?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편지는 불타 없어졌고 사기당한 피해금액도 없었다.
"알겠소이다. 더 하실 말씀이 없다면 이만 가봐도 되겠소?"
"물론입니다. 안타깝지만 편지는 소실되었습니다. 피해금액이 없으니 다행입니다만... 요즘 사기꾼들이 활개치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저도 가보겠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경찰청 수사관이라는 자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최명길을 남겨두고 식당을 빠져나왔다. 그는 얼굴을 굳히고 10분쯤 대로를 따라 걸어갔다. 그러다가 큰 길 왼쪽에 위치한 작은 건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그 안에 있던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과장님! 고생하셨습니다."
"끄응, 그럭저럭 끝냈다."
놀랍게도 이 두 사람은 최명길을 속여먹은 정보국 과장과 그 부하직원이었다.
"어쨌건 잘 처리됐군요. 그렇게 순진한 사람을 속여먹는게 마음편하진 않았으니까요."
"그래, 최명길 그 사람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지 않았으면 그럴 일도 없었을텐데 말이야. 안타깝네."
"흐흐, 그래도 재밌지 않았습니까?"
"두번 재밌었다간 구두경고가 아니라 짤리겠다. 넌 사기꾼이라고 했으니까 혹시라도 최명길 눈에 띄지마라."
"네에 네, 근데 전하께선 진짜 그 소문을 모르셨다고 하시던가요?"
"정말 모르셨던거 같은데?"
"하긴 그러시니까 정보부 보고서를 보시고 그런 난리가 났겠죠."
"하여간 너 이젠 두고보자. 앞으로 혹독하게 굴릴줄 알아라."
"아~어이없네! 처음에 접근하라고 지시한건 과장님이셨잖아요?"
"뭐 임마? 그거말고. '아 이건 좀 사탄' 말이야. 너 그거 욕이라면서?"
"어이쿠, 그걸 어째 아셨데? 저 먼저 실례합니다~ 다음에 뵈요."
"너 이 놈 이리 안와?"
정보국 과장은 힘껏 소리치며 부하직원을 잡으려했지만 실패했다.
바삐 사라지는 그들의 뒤로, 시원한 바람이 휘몰아 불었다.
예정된 균열
한양, 인정전(仁政殿)
편전의 상석에 앉아 왕이 말했다.
"폐인(廢人)의 죄악이 아무리 중하다 하더라도 바로 선왕(先王)의 자식이다. 그가 위리 안치되어 괴롭게 지내는 것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이제 옷을 줄 때를 당하여 포저(布苧)를 해당 관아로 하여금 넉넉히 주어 내려 보내게 하라."
왕은 조회를 끝내고 인자한 얼굴로 미소지으며 대신들과 함께 편전을 나가 침전으로 돌아갔다. 왕과 함께 편전을 나선 대신들은 약속이나 한 듯 담소하며 무리지어 나갔다. 그들은 이귀, 김류, 심기원, 김자점 등 서인 반정공신들이었다. 그들 모두는 반정 직후, 논공행상을 통해 정사공신(靖社功臣)이 되었다.
왕은 이들에게 엄청난 특전과 포상을 하사하였다. 1등공신에게는 그 공적을 기록한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또한, 부모·처에게 3등을 올려 봉증하고, 직자(直子)는 3등을 올려 음직(蔭職)을 제수하되, 직자가 없으면 조카나 사위에게 2등을 올려주었다.
그리고 적장자(嫡長子)가 그 녹을 세습하도록 했으며, 그 자손은 정안(政案)에 정사1등공신 아무개의 자손임을 밝혀 우대할 뿐만 아니라, 비록 죄를 범해도 용서하도록 하였다. 상으로는 전(田) 200결(結), 노비 25구(口), 내구마(內廄馬) 1필, 금요대(金腰帶) 1개, 표리(表裏) 각 1단(段), 구사(丘史) 7명, 직배파령(直拜把領) 10명을 하사하였다.
2등공신에게는 그의 공적을 기록한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또한 부모·처에게 2등을 올려 봉증하고, 직자는 2등을 올려 음직을 제수하되, 직자가 없으면 조카나 사위에게 1등을 올려주었다.
그리고 적장자가 그 녹을 세습하도록 했고, 그 자손은 정안에 정사2등공신 아무개의 자손임을 밝혀 우대할 뿐만 아니라, 비록 죄를 범해도 용서하도록 하였다. 상으로는 전 150결, 노비 15구, 내구마 1필, 금 또는 은요대 1개, 표리 각 1단, 구사 5명, 직배파령 8명을 하사하였다.
이처럼 그들은 조정의 당당한 권신으로서 누구도 감히 쳐다보지 못할 권세를 누리게 된 것이었다. 불과 수개월 전만 해도 야인(野人)에 불과했던 서인 당여들인데,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따로 없었다. 그러니 그들이 이리 웃고 있으리라.
왕과 대신, 그 상하의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좋아보였다.
조정 비변사의 내실.
쾅!
"주상께서 남인을 가까이 하심은 우릴 경계하는 것이 아니오? 즉위하시고 바로 이원익 등 남인과 소북의 당여들을 찾으셨소이다."
"그 뿐이오이까? 영의정부터 요직에 당색이 모호한 이들이 그대로 남았소이다."
"자자, 이만 분을 가라앉히고 한 잔씩 돌립시다. 그것들은 차차 해결될 것이오. 아직 대북 당여들의 논죄(論罪)가 한창이오. 그걸 마무리짓고 나서 진행해도 늦지 않아요."
"크흠, 그야 그렇소만."
"그것보다 걱정되는 것들이 있어요. 폐인 이지와 박씨가 불을 질러 자결한 것 말이오. 주상께선 말없이 지나갔으나 우릴 의심하고 있는 듯 하오. 혹시 우리 중에는 없으리라 믿소만..."
"어허! 이 무슨 참담한 말이오. 우리 중에 그런 자가 있을 턱이 있소?"
"맞아요. 맞아. 우리 중에는 없소. 북인 당여들을 색출하고 치죄하는 데에만 집중해도 모자랐을 일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