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 반정의 성공도 그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였다. 하지만 최명길은 서인의 무리를 하나 둘씩 힘들게 모아 기적처럼 성공하지 않았던가?
최명길의 앞에 다시 따사로운 햇빛이 내리쬐는 듯 했다.
최명길은 자기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 자리를 떴다.
그래 이제 다시 시작이다.
잠시 후, 서울의 어느 장소.
"흠, 이게 최명길이 조선으로 보내려는 서찰이라고?"
"네 최명길이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서찰입니다."
"크흠, 눈물없이 볼 수 없는 내용이구만. 자네는 천벌을 받을게야."
"아니 제가 왜요?"
"이런 순진한 사람이 세상에 있으니 말일세. 조선땅도 아니고 서울 한복판에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과, 정말 우연~하게 만날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나?"
"흐흐흐, 그건 그렇지요."
"최명길 그 사람이 절망에 빠져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속을 리가 없지. 자네도 그걸 알고 접근한 것 아닌가?"
"최명길에게 접근해서 감시하라고 하신 건 과장님 명령이셨습니다."
"이렇게 쉬울 줄 알았으면 안시켰지. 그리고 최명길 그 친구의 순진함에 눈물이 나도록 미안하구만. 자네 뿐만이 아니야. 나도 천벌받을거야. 암 그렇고 말고."
"그런데 이 편지내용은 어쩌실 건가요?"
"어쩌긴 뭘 어째?"
"편지 내용이 좀 그렇잖습니까? 조선 왕에게 우리 국왕전하께서 폐주 광해군의 아들이라고 못박는 것, 우리 한국에 조선의 폐세자 부부가 살아있다는 것, 국왕전하께서 조선의 역적이니 세력을 모아 처단해야한다는 것 등 말입니다."
"그래서?"
"위에 보고는 드려야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보고는 드려야지. 하지만....(속닥속닥)...."
"예? 과장님 너무 잔인하십니다. 아 이건 좀...사탄 같네요."
"이거 봐, 원래 인생은 잔인한거야. 너 임마 영국 유학다녀왔다고 영어 좀 쓰는구나. 그런데 사탄이 뭐냐?"
"그냥 너무하단 거에요. 과장님께선 신경쓰지 마세요."
"크흠, 그래? 하여간 시킨대로 해. 최명길하고 잘 어울리고. 다른......"
놀랍게도 아까 최명길과 의기투합했던 남자는 과장이라 불린 다른 남자와 최명길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자세히 듣고보니 그 남자는 최명길을 기망한 것이 아닌가? 그 두 남자의 이야기는 한참 계속되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났다.
폐주의 꿈
임진년의 어느 날, 인정전(仁政殿).
한참 말이 없던 임금이 말했다.
"징병체찰사 이원익은 관서의 민심을 많이 얻었기 때문에 관서의 백성들이 경을 잊지 못한다고 하니, 관서로 가서 백성들을 위로하라."
편전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이원익은 눈물을 흘리며 절을 하고 임지로 떠났다. 편전의 그 누구도 이원익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 장담하지 못했다. 이원익의 눈물에 편전을 가득 채운 자들의 가슴은 먹먹해졌다. 임금의 말은 또 이어졌다.
"최흥원은 해서 지방을 잘 다스렸으므로 경을 흠모한다고 한다. 국가가 토붕와해(土崩瓦解)의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선왕의 깊은 사랑과 두터웠던 은혜를 일깨워주라."
최흥원 역시 눈물을 흘리며 절을 하고 떠났다. 능히 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고 했던 중신들이 홀로 임지로 떠나고 있었다. 그들의 뒤는 보이지 않았다. 눈물 때문이 아니었다. 왜적의 갑작스러운 침입에 단 한번도 제대로 대적하지 못한 조선의 운명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갑작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예측하지 못했으니 갑작스러웠던 것이다. 조선은 분명 망해가고 있었다.
그때, 편전의 대신들이 세자 책봉을 건의했다.
과연 그 누가 망해가는 나라의 세자가 되고 싶을까?
임금은 즉위한 지 25년이 넘도록 세자를 책봉하지 않았다. 건저(세자책봉)를 주장하는 대신들의 건의는 항상 거부했던 임금이었다. 그랬던 임금이 얼굴에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광해군(光海君)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그를 세워 세자로 삼고 싶은데 경들의 뜻에는 어떠한가?"
"국가의 종묘 사직과 백성들의 복입니다."
편전의 모든 대신들이 일제히 아뢰었다.
그래 그때였다.
그의 나이 고작 17살, 그는 세자로 지목된 기쁨이나 명예보다는 오히려 착잡했다. 전란(戰亂)이라는 짐이 그의 어깨를 한없이 짓누르기 시작했다. 나이도 어렸던지라 지금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주어진 이 막중한 책무를 감당할 수 있을지 두려웠다.
한편 그의 아버지인 임금이 융복을 입고 나오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드디어 전쟁이란 것이, 파천이란 것이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궁궐의 대신들과 궁녀들 가운데는 소리없이 우는 자들이 많았다. 성문의 열쇠를 관리하는 군사들도 가족을 만나기 위해 도망쳤다. 그 와중에 북방 여진족이 임금의 어가를 공격할 것이라는 불길한 소문도 들려왔다. 그 밖에도 온갖 해괴망측한 소문이 나돌았다.
그는 파천을 떠나는 와중에 아버지인 임금의 얼굴을 바라봤다. 임금은 아무 말이 없었고 깊은 시름에 빠져있었다. 그리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는 아비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끝없이 침잠되는 것을 느꼈다. 과연 조선의 운명은 어찌될 것인가?
백성들은 북방으로 파천하는 임금의 어가를 바라보면서 울부짖었다.
그때, 어가 앞에서 좌의정 윤두수는 칼을 뽑아들고 분연히 외쳤다.
"동지들이여, 떠나지 말고 나와 함께 하자!"
윤두수는 끝내 칼을 내리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의 울부짖음에 어가의 행렬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백성들의 곡소리는 멈추지 않았고 그 처절함에 임금은 눈을 감고 말없이 뜨거운 눈물만 흘렸다. 그의 눈에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런 백성들의 울음소리를 뒤로하고 임금의 어가는 초라한 피난길에 올랐다.
임금의 어가는 황해도를 거쳐 평양을 향했다. 다행스럽게도 임금의 파천소식을 접한 근왕군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어서 임금은 서북의 관문이자 옛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까지 당도했다.
그에게는 좋은 소식도 있었다. 평양에 피난 도중에 세자빈이 아이를 낳았던 것이다. 17세의 세자, 그는 자신의 아이를 안으며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그러한 표정을 말이다.
허나, 비보는 계속되었다.
임진강 방어에 실패했다는 소식이 도착했다. 도순찰사 김명원의 장계가 평양에 도착한 것이었다. 이날 임금은 다시 평양의 군민을 위로하고 군사를 뽑고 있었다. 이렇게 민심을 다독이고 있었는데. 임금의 어가는 다시 영변을 향해, 북으로 파천에 올랐다.
임금의 어가는 곧 영변에 도착했다. 영변에서 조금만 더 간다면 의주였다. 의주는 조선의 최북단이었다. 그는 기억한다. 영변에 도착한 그날엔 궂은 비가 억세게 내리고 있었다. 다음 날, 임금은 그를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세자가 강계(江界)로 가서 혼란한 정국을 안정시키고 수습하라."
이어 임금을 따르는 신하들과 세자를 따르는 신하들이 갈라졌다. 조선에 조정이 2개가 된 것이었다.
임금이 말을 타고 의주로 떠날 무렵에 유조인이 임금의 말 앞에 나와 울면서 청했다. 세자가 임금의 어가를 따르도록 말이다. 하지만 임금은 유조인의 청을 허락하지 않았다. 임금은 세자인 그를 오랫동안 서서 위로했다. 그리고 의주를 향해 떠났다.
두 조정의 신하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이별했다. 세자인 그는 임금의 어가 뒤에서 엎드려 절을 하며 소리없이 울었다. 영의정 최흥원, 좌찬성 정탁, 형조판서 이헌국, 형조참판 윤자신, 동지 유자신, 부제학 심충겸, 병조참의 정사위, 승지 유희림 등 관료와 수행할 십수명이 분조의 전부였다.
이제 그는 아버지인 임금의 곁을 떠나 혼자가 되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 새로운 조정을 이끌고 가야할 그였다. 단 한순간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험한 산길을 타는 것은 궁궐에서 자란 그에게 힘든 고행이었다. 먹을 것이 변변치 않아 산중에서 노숙을 하고 빗속에서 밥을 먹기도 했다.
분조의 소식을 알리고자 일행 중에 날랜 자들을 사방에 풀었다. 하지만 아무 소식도 없었다. 그렇게 산길을 타고 강원도 이천 경계에 도착했을 즈음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장한 군사들이 지평선에 나타났다. 그는 겁이 났다. 미칠듯이 무서웠다. 그러나 무장한 군사들의 정체는 분조 소식을 듣고 마중나온 이천현감 유대정의 군사들이었다. 이천현감 유대정은 세자를 보고 예를 취하며 말했다.
"오늘 날, 남쪽 변방의 국가 장병들이 전몰하여 시체가 쌓이고 성상께서 변방으로 파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매일 울었습니다. 그런데 지혜로우신 세자 저하를 뵙게 되어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조선의 억만년 대계를 세우소서."
"국가와 왕실이 무너져 충의로운 지사가 사라진 줄 알았습니다. 현감이 직접 용맹스러운 군사를 이끌고 나와주시니 이는 하늘이 권토중래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는 이천현감 유대정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런 유대정의 먼 발치에 그녀만을 바라보던 그 남자도 있었다.
그래, 그녀가 기억났다. 그녀만을 바라보던 그 남자도.
이건 꿈이다.
그래 꿈이 분명하다.
"허 참, 좋은 꿈이라도 꾸시는 모양이구려. 나라 말아먹은 폐주의 꿈이니 퍽이나 대단하겠소. 힘 빠지니 그만 중얼거리시오."
입으론 험한 타박을 늘어놓으면서도 폐비의 손은 바쁘게 부채를 휘젖고 있었다. 아마도 폐주의 더위를 잠시라도 식혀주려는 듯 했다. 그런데 그 부채가 향하는 방향은 전혀 달랐다. 폐비는 온 몸에 열이 오르는지 연신 자신에게 부채를 휘저었다.
폐비 유씨는 반정 이후,남편 광해를 따라 함께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어린 나이에 아비를 떠나 이현궁에 들어간 후, 폐위되어 유배된 지금까지 쭉 함께였다. 폐주의 본처였지만 그는 여성편력이 심했다. 폐주의 곁에는 늘 다른 후궁들이 가득했다. 그 중에 김개시와 소용 정씨는 반정 당일에 자결했다. 소용 임씨는 강화도까지 함께였으나 사약을 받았다. 이젠 폐주와 폐비 뿐이었다.
이미 죽음에 반쯤 발을 들여놓은 그녀, 폐비의 눈이 원망스레 폐주를 향했다.
폐비는 단 꿈을 꾸는 지, 아직 그 꿈에 취해 쉬이 일어나지 못하는 폐주를 바라보며 짧은 상념에 빠졌다.
폐주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그녀는 3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그중 둘은 일찍 죽었다. 둘째였던 아들 이지는 장성했고 세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 아들마저 불을 질러 자결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는 무너졌다. 모든 희망은 사라졌다. 그런 그녀에게 무슨 미련이 있을까? 폐주도 마찬가지리라. 그녀는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폐주에게 함께 자결하기를 요구했었다.
그것은 그녀가 그에게 할 수 있는 아주 정당한 요구였다.
그럼에도 폐주는 그녀의 정당한 요구를 매몰차게 거절했다.
그때부터 폐비는 깊이 앓아누웠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타닥 타닥
폐주의 얼굴에 화광이 일렁였고, 그의 눈 속에서 불꽃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폐주가 흠칫 놀라며 품속에 손을 넣고 무언가를 만지는데, 그 목소리는 익히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그대를 이런 데서 또 보는구려!"
"내금위장!"
"이젠 아니오."
이 곳은 엄중하게 감시 중인 유배지였으니, 지금 나타난 그가 한없이 반가웠다. 그는 아궁이 앞에 철푸덕 엉덩이를 깔고 앉으며 말했다. 폐주라지만 일국의 왕이었던 그에게 마치 친우를 대하듯 말하는 그였다. 지독한 현실에 치를 떠는 것도 잠시. 폐주는 그에게 반색하며 말했다.
"날 구하러 온건가?"
"아니, 아들 부부는 살아있소. 그걸 전하러 왔소."
폐주는 놀란 얼굴로 화색을 띄며 생각했다. 아들 부부가 불에 타서 자결했다는 소식이 거짓이라니. 그렇다면 아들 부부를 구해낸 근왕군이 있다는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폐주는 함박 웃으며 말했다.
"그럼 언제쯤 거병한다던가? 아니, 근왕군이 지금쯤 한양..."
"꿈 깨시오. 반정은 이미 성공했소. 그대를 위해 일어날 이는 모두 죽었지."
"으음..."
"아들 부부는 조선 밖에 있소. 능양에게 죽을 일은 없을거요."
그때였다.
땡그랑
그 소리와 함께 나타난 사람은 폐비였다. 그녀는 아들 부부의 자결 이후로 홧병이 들어 누웠었다. 그렇게 앓아누운 그녀는, 스스로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었다. 당장 오늘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오늘따라 잠자리가 뒤숭숭했고,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 나왔었는데...
"그게 정녕 사실인가요?"
폐비는 신음하듯 목소리를 떨며 물었다. 그는 달갑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그리곤 폐주와 폐비를 잠시 쳐다보곤 몸을 돌렸다.
"말도 없이 가는가?"
"우리 사이에 굳이 그런 게 필요하오?"
"섭섭하군. 미운 정도 정이라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