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225)

"틀린 말이야? 나도 처음엔 기대했었는데..."

"전하바라기가 되느니 주말엔 곱게 차려입고 서울광장에 가보자. 거기 멋진 제복구경이나 하는거야."

"나도"

"나도"

나인출신 사용인들도 즐겁게 지내는 듯 했다.

그런데 그 사용인들 모두는 한입으로 말했다.

"국왕전하께서는 조선의 주상전하와 판박이로구먼."

"어맛! 깜짝이야. 이렇게 숨겨둔 아들이 있으셨다니?"

"국왕전하께는 출생의 비밀이..."

이렇게 '국왕 우진이 조선의 폐주, 광해군의 친자일지 모른다'는 소문은 일파만파로 왕궁 궁궐담을 넘어 서울 시내, 호주 전체에 퍼지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계속되는 이주민과 망명자에 의해 추가적인 증언들이 꼬리를 물고 퍼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저 소문일 뿐, 국왕인 우진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아직까진 말이다.

철렁!

그럴리가, 그럴리가 없어. 이건 거짓말이야. 내가 꿈을 꾸고 있는거야. 이건 말이 안되잖아!

할아버지 박승종에게 이미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그저 비슷하게 닮은 사람이겠거니 생각했었다. 언뜻 소녀시절에 봤던 노비 우진을 떠올렸지만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대로 그럴리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절대로 그럴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었다.

어린시절에 만났던 노비소년 우진이, 한국의 왕이 되었다니.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친영례를 치른 후, 처음 시아버지인 그를 봤을 때도 그랬었다. 

그땐 우진과 닮은 그를 보고 놀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번엔 그와 닮은 우진을 보고 놀라 정신을 차릴 수 없다.

그녀의 다리에 힘이 풀려, 꼴사납게 바닥에 나동그라져 쓰러질 뻔한 것을 지아비가 간신히 잡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지아비를 쳐다보았다. 지아비의 손도, 눈도 떨리고 있었다. 지아비도 할아버지 박승종의 설명에 심드렁했었다. 그저 닮은 사람이겠거니 말이다. 그런데, 지아비도 심장이 멎을만큼 놀란 것 같았다. 아니 확실히 놀랐다.

그녀는 자신의 이마에 식은 땀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새도 없었다.  

그녀는 간절히 기도했다.

만에 하나 신이 있다면, 어서 이 시간을 되돌려 달라고 말이다.

그녀의 가슴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아주 맹렬히.

폐세자 이지와 폐빈 박씨

폐세자 부부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만나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 부부는 죽음을 피해 탈출한데다가 오랜 여정으로 피곤할 것을 생각해 이제야 만났다. 싸구려 동정심으로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내가 조선을 병합함에 있어 얼굴마담으로 필요했던 것이 첫번째고, 생도시절 역사교관이 낸 시험문제 '조선시대 폐세자 3명의 이름은?'이란 얼토당토않은 문제 때문에 생긴 개인적 호기심이 두번째였다. 

드디어 광해군의 아들이자 폐세자 이지를 만나게 되었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고 했으니 그의 아내인 폐빈 박씨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역사적 실존인물들을 직접 본다는 것 자체가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아침도 대충 먹는둥 마는둥 했다.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그들이 도착했다는 비서의 보고를 듣고 왕궁 접견실로 들어갔다. 왕궁접견실은 왕궁에서 가장 호화찬란한 곳이었다. 국왕의 손님이 오는 곳이란 상징적 의미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렇게 급히 들어간 접견실에는 박승종과 함께 2명의 젊은 부부가 서 있었다. 내가 위엄있는 척하며 왕이 설 중앙에 위치했다. 아마도 비서들이 일러준대로 박승종과 폐세자 부부가 국왕에 대한 예의를 표할 것이었다. 

그런데?

폐세자 부부의 태도가 다소 이상했다. 폐빈 박씨는 내 위엄있는 모습(?)에 놀랐는지 기절할 듯 힘이 풀려 넘어질 뻔 하기도 했다. 내가 깜짝 놀라는 사이에 폐세자가 폐빈을 잡아주었다. 그래서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다. 

폐세자는 폐빈의 모습에 놀랐는지 식은 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폐세자와 폐빈의 부부간 금슬이 무척 좋은가 보다.'

나는 속으로 그리 생각했다. 

폐세자와 폐빈은 유배지에서 죽기만을 기다리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구출되어 한국에 왔다. 그러니 나의 모습에 불안함을 느낀 것이 아닐까? 폐빈 박씨는 그동안의 긴장감이 극심했을 것이다. 그것이 나를 보고서 폭발한 듯 했다. 폐세자도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긴장했다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인다. 이럴 땐 두 사람을 안심시켜 주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말을 시작했다.

폐세자 부부는 아직 국왕에 대한 예를 표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큼큼, 그 먼 길을 오느라 두 사람 모두 고생이 많았을 것이오. 숙소가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독은 잘 풀었는지 궁금하오."

"..."

아... 이런 젠장!

폐세자 부부는 입에 자물쇠라도 채웠는지 또 말이 없었다. 혹시 호주로 데려온 것을 구출이 아닌 납치로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죽기 직전인 사람들을 살려놨더니 이걸 원망하진 말아야하는 건데... 잠시 시간을 주었지만 역시 말이 없었다.

박승종, 이원익, 최명길도 말이 없었는데 또 그런다. 조선의 왕은 대체 무슨 재주로 저런 사람들과 지냈단 말인가. 나는 속으로 한탄하고 다시 한번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이번엔 얼굴에 미소를 가득히 띄우고서...

"내가 한국의 국왕이오. 한국의 국민들을 대신해서 그대들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요. 서울에서는 그대들의 안전을 위협할 사람들이 없습니다. 아직 식전일테니 같이 식사하며 천천히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비서는 안내하라."

"..."

왕궁 응접실.

탁!탁!

찍!찌익!

턱!

내가 왕인게 분명한데도, 제일 불편했다.

박승종, 폐세자 이지, 폐빈 박씨 세 사람은 거의 말이 없고, 음식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특히, 폐빈 박씨는 낯을 심하게 가리는 지, 고개를 푹 숙이고 물만 한 두모금 마시고 말았다. 그렇게 힘겨운 식사시간이 끝났다. 

나는 식사를 치우고 커피를 내오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역시 커피가 다 식을때까지 모두 말이 없었다. 내 인내심이 거의 바닥이 날 즈음, 박승종이 말을 했다. 

"국왕전하께서 저희 가족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저와 가족들은 그저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지내길 희망합니다. 부디 가엽게 여기셔서 저희 소원을 들어주소서."

박승종은 그와 가족들의 안전보장과 생활지원을 요청했다. 나는 원래 그럴 생각이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바로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그대는 물론이고 그대의 가족들도 안전하게 보호할 것이니 말이오."

"크나큰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

"..."

또 말이 끊겼다. 

조선의 왕족과 고관대작들은 말수가 적은 사람 위주로 뽑거나 대접받는 것이 아닐까? 나는 아쉬웠다. 그들과 저속한 농담따먹기를 할 것은 아니지만,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었다. 그것이 개인사건 세상사건 말이다.

물론 오늘만 날이 아니었다. 나는 무척 아쉬웠지만, 나중에 대극장에서 연극 공연같은 곳에 초대하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거기라면 딱딱한 분위기를 해소할 수 있을 것아니까. 나는 오늘의 접견은 이만 끝내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했다.

진짜 이유는 내가 바빠서 그런거다. 

뭐 일종의 정신승리와 다름 없었지만...

"자자 내 일정이 바빠 그대들에게 오랜 시간을 줄 수 없어 미안하오. 다음에 대극장에서 공연이나 함께 봅시다. 오늘은 그만 돌아들 가시오."

"전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

"..."

역시 박승종만 입을 열어 말했다. 

폐세자 부부는 말없이 응접실을 나갔다. 

사실 오늘 일정은 폐세자 부부를 위해 일부러 전부 비워놨었다. 

폐세자 부부와 화기애애하게 서로 이야기하며 왕궁의 여러 곳들을 직접 안내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제 나만 덩그라니 남았다. 사실 내 일정이 전혀 없는 것을 비서도 알고 있었다. 비서는 멍하니 서있는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듯 했다. 

그래서 괜히 비서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까먹고 있었군. 즉시 마차를 준비해서 항구시찰을 나가야겠네. 어서 서둘러. 어서."

"네 알겠습니다."

밖으로 나가는 비서의 얼굴에 어쩐지 썩소가 보이는 듯 했다. 

오늘 하루는 대단히 불편한 하루가 될 것 같았다.

다그닥다그닥.

덜컹덜컹.

박승종과 폐세자 부부는 왕의 사두마차를 타고 숙소를 향했다. 그들은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왕의 사두마차가 떠나는 것을 보고 그들은 숙소로 들어갔다. 박승종은 폐세자 부부가 방에 들어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소리죽여 한숨을 쉬었다.

박승종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며 생각했다.

자신은 물론이고 손주사위 부부도 당분간 복잡한 심경일 것이라고.

그들의 하루도 불편할 것이 아주 명백했다. 

◆ ◆ ◆

최명길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에도 소리를 죽이려고 노력했다. 

"이 서찰을 조선의 관아 어디에든 전해주면 반드시 보답할걸세. 내 이름을 걸고 약조함세."

최명길과 대화 중인 사내는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걱정마십시오. 저는 부득이하게, 정말 어쩌다 한국에 오게 되었을 뿐입니다. 저는 언제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잘 아는, 뜻이 통하는 선원이 있으니 그에게 부탁하면 원하시는대로 조선에 서찰을 보낼 수 있을겁니다."

최명길은 그 사내의 말에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대같이 충성스러운 백성이 한국에 있다니! 주상전하의 성덕이 사해(四海)에 미치고 있음이 분명하네. 내가 조선에 돌아간다면 자네 가족의 신원은 물론이고 모두 속량될 것이네. 아마도 주상전하께서 자네에게는 큰 벼슬도 내릴 것이야."

사내는 최명길의 말에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말했다.

"크흐흑, 대감께오서 이리 말씀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가 할 일이 있어 바쁘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 서찰은 반드시 전달하겠습니다."

최명길은 사내의 다짐에 흐믓한 마음이 들었다. 이 사내야말로 충신이었다. 그래서 다시 조심하도록 일러주었다.

"그래 조심하게. 이 곳은 도처에 역적들이 있으니 말일세."

사내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며 다시 말했다. 

"대감! 걱정마십시오. 그럼 이만..."

최명길은 천신만고 끝에 서울의 모 관공서에 근무하는 자를 포섭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한국 정부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스스로 원치 않는 이주를 했기에 불만이 있었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고 했다. 

최명길은 정말 우연히 그를 만났고 의기투합하게 되었다. 드디어 이 역적들의 실체를 조선에 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첫 시작이 어려울 뿐이지 하나 둘씩 모인다면 그 세력도 만만치 않을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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