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225)

군관으로 보이는 자들은 부장의 자애로운 말에 모두 울고 말았다. 

훈련도감의 병사는 무려 5천에 이르고, 그 중에 월봉을 받는 군관들은 250에 조금 못미쳤다. 그 군관 1명이 20인의 보졸을 지휘했다. 그 많은 군관들은 월봉을 받아 생활했는데 그 월봉이 적어 따로 일을 해야할 정도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새로온 부장이 엄청난 부자였다. 

그 부장은 군관들의 말을 젊고 튼튼한 말로 바꿔주고, 자비로 물소뿔을 구해와서 각궁도 새로 만들어줬다. 군관들의 근무와 월봉까지 신경써주는 터라 부장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문관인 훈련대장은 군자를 빼돌려 사리사욕을 채우건만, 무관인 부장이 이리 군관들을 챙겨주니 인기가 없을 수 없었다.

부장은 다시 말했다.

"걱정들 말라! 너희들이야말로 나와 평생을 함께할 사람들이야. 그러니 힘들 내라. 다음 달부터 있을 신입 보졸들 선발에 신경써라. 내가 신분이 확실하고 실력있는 신입 보졸들을 어느 정도 추려놓았으니 그대들이 잘 살펴서 수족처럼 쓰도록 해라. 알겠느냐?"

"부장님이야말로 진정한 우리들의 대장입니다."

"아니 부장님께서 추려주셨는데 저희가 따로 볼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건 당연합니다. 저희는 무조건 부장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잠시 후, 부장이라 불린 무장은 군관들의 말에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려 사라졌다. 최근 훈련도감의 군관들은 새로 부임한 부장을 중심으로 똘똘 뭉쳤다. 군관들은 부장이 훈련대장에 부임하길 간절히 바랬다.

한양 북촌, 어느 집의 내실.

"크흠, 내 대감께서 이리 승차하실 줄 알고 있었소이다. 감축드립니다. 하하하!"

"허허허, 박진사께서 이리 금칠을 하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려."

"이 미욱한 사람이야 지방 향촌에서 소일거리나 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대감께서 이리 자리를 내주신 것만으로 광영이오이다."

"흐흠, 거두절미하고 용건을 말씀하시지요."

"으음, 다름이 아니오라 제 아들 놈이 대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허나 그 무예가 출중하니 이 아비로써는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려."

"어허 이런, 그렇다면 문무겸전의 인재란 것이 아니오? 축하하오."

"하여간, 그 녀석이 홍패를 받았음에도 천거를 받지 못해 집에서 병서만 파고 있습니다. 지난 밤에는 주상전하를 위해 진충갈력할 마음에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더군요. 그래서 부득불 대감께 찾아뵈온 것입니다."

"이런 이런, 마땅히 천거될 것입니다."

그 말과 함께 대감으로 불린 자는 함박 웃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와 함께 박진사는 소매에서 봉투를 꺼내 탁자 아래로 건넸다. 대감이란 자는 그 봉투를 열어보고는 탐욕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글의 내용을 살피고 다시 웃었다.

"크흠,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리다. 앞으로 2년간은 문제없을 것이오. 그 사이에 충성심과 능력을 보인다면 출세하는 것은 여반장이오."

"하하하! 대감께오서는 세세토록 복락(福樂)을 누리실 것입니다.

한양의 어느 관청.

"흐흐흐, 이 버러지들은 대과에 입격할 자신은 없나보구려."

"크하핫! 누구나 다 대과에 입격한다면 그게 대과겠소이까?"

"하긴 그것들이 바닥에 깔려줘야 우리들이 빛나는 거 아니겠소?"

"대북들이 매관매직했던 경관부터 싹 갈아야합니다. 문관들이야 우리 사람들도 부족하니 아니되고, 무관이야 지천이니 상관없을거요. 그들이야 가진 것도 많으니 월봉도 필요없겠지. 아니 그렇소?"

"하하하! 맞습니다. 맞아요. 이대로 합시다. 어차피 장은 우리들이 쥐고 있는데 부장부터는 인심써서 한두해씩 돌려도 될 것이오."

"나도 찬성이오."

"반대할 이유가 없소이다."

"그들도 반가의 자식들이니 그 정도야 무슨 문제겠소."

한양의 어느 관청 안에서는 화기애애하게 그들의 대화가 끝났다.

◆ ◆ ◆

평안도 안주성 관아.

"아무리 그래도 경직의 무관들을 그 따위 애송이들로 채우다니?"

"그래도 우리 양계갑사(평안도와 함경도의 갑사들로 북방을 지키는 정예병)는 믿음직합니다."

"유사시에 우릴 지원할 자들이 훈련도감이오. 최소한의 능력검증도 안된 자들을 올리다니 암울하오."

"목사(정충신)께서 염려하시는 일이야 있겠습니까? 아마도 폐주의 편에 섰던 자들을 내보내느라 그랬겠지요. 이제 곧 안정될 것입니다."

"그랬으면 오죽 좋겠소."

안주목사 정충신은 부장의 위로에 다소 얼굴이 풀렸다. 하지만 사르후 전투의 참패로 정예병이 크게 줄어들었고, 북방의 정예병도 이제 한계에 다다른 것이 눈에 보였다. 거기에다가 조정의 정예병도 애송이들로 바뀐다면? 

임진년에 노비로 시작해서 만호까지 오른 정충신은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당장 여진족의 후금이 쳐들어온다면 그 기병을 막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아니 막기 힘든 정도가 아니라 한양까지 파죽지세로 달려들 것이 뻔했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경계심이 없다.

아니 경계심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최소한 기본은 해야하는 것 아닌가?

불과 31년전, 임진년에는 왜군에게 평양까지 넘겨주었던 조선인데...

안주목사 정충신은 가슴이 답답했다.

그런 정충신의 뒤로 청천강의 석양이 내려가고 있었다.

공공연한 비밀

호주 서울, 수상의 집무실.

어느 화창한 오후, 수상의 집무실에서는 수상과 한 사람이 커피와 다과를 들여놓고 대화 중이었다.

"그래, 조선에서 높은 벼슬과 후한 상급을 주겠다?"

"네. 저희 집안이 원래 서인과 다소 친분이 있었습니다. 저희 집안은 지금 폐주인 광해군 때, 이이첨의 무고로 온 집안이 멸문당했습니다. 저는 숙부님의 양자로 들어가서 죽지는 않았지만 관노가 됐습니다. 수상 각하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망명으로 한국에 왔습니다. 최명길은 그런 저를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회유하려고 했습니다."

"그럼 자넨 어떤가?"

"크하하! 크흠, 수상 각하 죄송합니다. 그에게 회유되는 사람이 바봅니다. 조선에 가족과 큰 재산이 있어도 고민할 판국인데, 가족은 멸문이고 재산도 없습니다. 조선에서 고관대작으로 사느니, 여기에서 농사지으며 살아도 절대 안갑니다. 하물며, 저는 법원에서 판사로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습니다."

"최명길이 회유하려던 내용이 구체적으로 뭐였다구?"

"아예 드러내놓고 한 이야기는 첫째, 조선으로 탈출할 수 있는 배편을 요구했습니다. 둘째, 배편이 불가능하면 비밀리에 서신이라도 보낼 수 있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럼 그 다음은?"

"음...,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최명길은 국왕전하께 불충한 무리들을 규합하려는 의도를 나타냈습니다. 특히, 서인 양반 출신들을 찾아서 국왕전하에 대한 불순한 소문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그 소문이 국왕전하께서 조선의 폐주, 광해군의 사생아라는 건가?"

"네 바로 그겁니다. 저한테도 국왕전하의 비밀을 아느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러면서 최명길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인 것처럼 말했습니다. 제가 아는 서인 출신들도 한결같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뭐라던가?"

"저도 예전부터 알고 있던 일입니다. 국왕전하께서 폐주의 젊을 때와 판박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망명한 서인 양반 출신들 중에 폐주 광해군을 젊었을 때 봤던 사람들이 한둘이겠습니까? 저도 그런 의문을 가지긴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저와 친하게 지내는 서인출신들도 마찬가집니다. 국왕전하께서 광해군의 아들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충성하겠다고 말입니다. 제가 관노생활을 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사대부로 있었더라도 다르지 않을 겁니다. 조선에서와 지금의 삶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법원의 판사로 재직 중이라는 사내는 말이 길어지자 목이 탄 듯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고 다시 말했다. 그의 표정은 단호했다.

"저는 물론이고 저와 친하게 지내는 서인출신들도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배가 꼬여서 아플 정도로 웃음을 참았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벌써 6년 전부터 그런 소문이 돌지 않았습니까? 제일 처음엔 한양의 대궐 관비출신들이 이주오면서 소문이 퍼졌고, 다음엔 양반출신 관비들이 망명하면서 확실해진 것으로 압니다. 서울 시내에서 사람 잡고 물어보면 모르는 사람 찾는게 더 어려울 겁니다. 수상 각하께서도 이미 다 아시는 거 아닙니까?"

그의 긴 이야기를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던 수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잠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오후의 따스한 햇살이 잠시 그리웠던 모양이었다. 이윽고, 수상은 커피잔을 내려 놓으며 말했다.

"자네 말대로 나도 알고 있네. 국왕전하께선 아마도 모르실거야. 그런 소문이 있다는 것을 말이지."

수상은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잠시 입을 닫았다. 그리고 말했다.

"국왕전하께서는 친부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네. 사실 외모가 비슷한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지. 한국 정부의 입장은 공식적으로 국왕전하의 친부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네. 국왕전하께서도 모르시는 것처럼 말이지. 자네도 그렇겠지만 국왕전하께서 누구의 아들이건 상관없네. 오늘 대화는 즐거웠어. 이만 돌아가게. 바쁜 사람 시간뺏어 미안하군."

"수상 각하! 오히려 바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명길과 관련된 일은 언제든 새로운 일이 생기면 정보부에 알리겠습니다."

"하하 .고맙네!"

판사인 사내가 문을 나서자 수상은 잠시 상념에 잠겼다. 

하지만 곧 책상에 앉아 빠른 속도로 일을 시작했다. 수상의 자리는 너무나도 바쁜 자리였다. 수상은 이 건에 대한 결론을 이미 내린 상태였다. 국왕인 우진의 친부가 누구건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그리고 국왕 우진 본인이 친부가 누군지 모른다면 그 비밀은 그대로 두어도 상관없다고 말이다. 국왕전하의 가장 가까운 사람인, 김씨 아저씨와 돌쇠할아버지도 말하지 않은 일이고 거기엔 으례히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수상은 또 생각했다.

국왕전하께서 폐주의 아들인 폐세자 부부를 친견하시겠다고 말씀하셨었다. 그때 폐세자 부부는 그것을 눈치 챌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그들이 국왕전하께 감히 그 소문 이야기를 하진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말해도 상관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말이다. 국왕전하께서도 언젠가는 알게 되실 일이니까. 그래 그뿐이다.

수상의 집무실은 다시 정신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 왕궁!

내 보유 주식 일부를 매각하고, 몇년 치 배당금을 풀어서 만든 왕궁이다. 2층짜리 건물에 방 6개, 집무실 겸 회의실, 서재, 경호인력이 쓸 사무실 등이 갖춰진 영국식 궁전이다. 비서실 직원이야 출퇴근하는 사람들이고 경호인력은 교대근무를 한다. 나와 왕궁에서 같이 지내는 사람은 평소엔 김씨 아저씨, 돌쇠할아버지, 그리고 일부 사용인들이다. 그나마 지금은 김씨 아저씨와 돌쇠할아버지도 없다.

개국 초기에는 왕궁도 없고, 그냥 나무로 만든 임시 숙소에서 지냈다. 그러다가 왕궁을 짓고 사용인을 모집했었다. 최종적으로 청소와 식사 등을 담당할 인원 8명을 뽑았다. 그 중에 출퇴근하는 사람이 6명이고, 2명은 왕궁에서 같이 생활한다. 사용인 8명은 나이가 들어 퇴직한 환관3명, 역시 나이가 들어 퇴직한 궁녀 2명, 궁궐에서 세답(빨래) 등을 하던 나인 3명이다. 사용인들은 왕궁의 뒷채에 기거한다.

일과 중의 왕궁에는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지만, 밤은 아니다. 

깊은 밤, 왕궁의 사용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번 이민차수에 궁궐 숙수로 일했던 이가 있다는데 우리가 한번 불러봐도 될까?"

"요즘 궁중요리 전문점에서 좋은 조건으로 숙수를 찾고 있어요. 이번에 온 숙수도 월급차이가 많이 나서 어렵지 않을까요?"

"하긴 그건 그래... 월급 차이가 좀 나지. 게다가 전하의 식성도 조선의 음식과는 확연히 다르니 조선 궁중요리가 입맛에 맞으실지 알 수 없지. 그럼 우리가 궁중요리 전문점을 탐방해서 일단 먹어보고 다시 상의하세나."

"알겠습니다. 하여간 여기는 너무 편합니다. 아니 전하께서 편하게 해주시는 거겠지요?"

"흐흐, 이런 조건이면 100년도 일하겠네. 내가 왜 그 고생을 하며 지냈는지 모르겠어. 게다가 공휴일, 휴가까지. 이건 안하는 놈이 바보야 바보."

"조선에서 퇴직한 환관이나 궁녀, 나인들도 이제 기 좀 펴고 살겠습니다. 세상에 이런 나라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어차피 궐에서 쫓겨나면 조용히 죽으려고 했었는데..."

"예끼, 이 사람아!"

"흐흐흐 말이 그렇다구요. 말이..."

"우리가 모시던 상선어르신께서 목이 달아나던 때가 잊혀지지 않는구먼. 이 좋은 세상을 보지도 못하고 가셨으니."

"상선어르신께서 보우하셔서 우리가 이 곳에 온 겁니다. 저는 전하께 남은 일생을 바치겠습니다. 양아들이지만 제 아들 놈이 이번에 해군사관학교에 당당히 입격했지 않습니까? 흐흐흐. 오늘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없어요."

"내 아들도 오라고 통기한지 오래건만 에잉~ 어서 잠이나 자게."

"삐치셨구만요? 흐흐흐."

나이든 환관출신 사용인들은 대단히 만족한 듯 했다.

"옷이 망측하긴 하지만 너무 편합니다. 여기는 더워서 꽁꽁 싸맬 필요가 없으니 좋기도 하구요."

"우리야 나이를 먹어 그렇다해도, 젊은 처자들은 더하지 않나?"

"나라에서 정해주는 것인데 따라야지요. 전하께서도 퇴근하신 후에는 그 반바지를 입으시지 않습니까?"

"처음엔 내 눈을 어디에 둘지 몰랐지. 전하께서 다리를 다 드러내고 계시니 혹시 내게 승은을..."

"호호호. 언니 너무 나갔어요."

궁녀출신 사용인들도 마찬가지였고,

"여기는 편하긴 한데...팔자 고치기는 힘들거 같아."

"으유, 응큼한 기집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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