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225)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에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무엇보다 저희는 젊습니다. 선장에게 들으니 한국에서는 땅을 경작하고자 하면 나라에서 적당한 땅을 무상으로 나눠준다지 않습니까? 산 입에 거미줄을 치지는 않을겁니다. 저도 부족하겠지만 힘껏 돕겠습니다."

"부인..."

그녀의 그런 상념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배는 항구에 가까워졌다. 

'이제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삶이다.'

시원한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녀의 걱정을 덜어주려는 것처럼.

성리학, 그 인식의 변화

땡!땡!땡!

중앙로의 시계탑에서 낮 12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고 있다. 

회중, 아니 손목시계를 확인해보니 시계탑의 시계와 약 2분의 차이가 났다. 서울에서 가장 정확한 시계는 시계탑의 대형시계였다. 아직까지 손목시계의 정확도는 대형시계에 미치지 못했다. 난 다소 아쉬움을 느끼며 손목시계를 시계탑의 시간에 맞췄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봤다. 그러길 잠시... 내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비서가 들어왔다.

"국왕전하! 점심식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내 방으로 가져오게. 간단하게 먹을 수 있게 해오면 좋겠네."

"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조선 광해군의 아들 부부가 무사히 도착했다.

폐주인 광해군의 아들, 폐세자 지와 그의 부인 폐빈 박씨!

내가 정보국 조선지부장에게 밀지까지 보내서 지시한 것이었다. 조선지부장은 역시 엘리트다. 구출과정에 대한 보고서를 확인하고 더더욱 그렇다. 조선지부장같은 사람이 조선의 권력자였다면 그 뛰어난 능력으로 엄청난 업적을 역사에 남겼을 것이 분명했다.

조선의 신분제도 때문에, 서얼, 중인, 양인, 노비, 백정 등에서 각자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조차 만들기 어려웠다. 모두 조정의 문관이 될 필요는 없다. 각자의 능력을 각자의 분야에서 발휘하면 된다. 그런데 조선의 신분제도는 그것을 철저히 억압한다. 

개노미, 김희두는 이민국 조선지부장이다. 

나와 처음 1번함을 타고 무역에 나섰던 노비출신이다. 그는 조선에서 '열일'하고 있다. 만약 나와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도 농사나 짓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능력은 조직관리에 특화되어 있다. 처음에는 일반 선원으로 굴렀지만 나중에 갑판장으로 승진하고 나니 자신의 능력이 개화됐다. 다른 어떤 함정보다 그의 함정에 있는 선원들의 업무역량이 빨리 늘었다. 게다가 단합력도 뛰어났다. 그걸 눈여겨보다가 발탁했을 뿐이다. 지금까지 수십만의 조선 노비 이민자, 역적 출신의 망명자들이 안전하게 한국으로 이주할 수 있었던 것. 그것은 개노미와 직원들의 헌신적인 노고 덕분이다.

정보국 조선지부장의 능력은 개노미와 좀 다르다.

마치 각종 공작, 특수작전, 정보차단 등 첩보원에 걸맞은 능력이 탁월했다. 거기에다가 정세판단을 위한 정보수집부터 그 정보의 분류, 활용에서 결론도출과정까지 완벽했다. 그의 보고에 따라 '대조선외교정책'은 수립됐고, 시행되고 있다. 

두 명의 조선지부장은 서얼출신, 노비출신이다.

내 생각에, 조선의 발전은 다음의 두 가지 선결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신분제의 혁파를 통해 다양한 인재들이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어야한다.

둘째, 성리학과 정치의 완전한 분리다. 

사대주의, 신분제 고착, 사문난적, 붕당정치 등 성리학의 폐해는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다. 서양이 발전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신정분리(神政分利)라고 들었다. 성리학은 그냥 이론만으로 끝나지 않는 것이 문제다. 그것이 교조적인 사상이 되어 정치사회경제를 비롯한 모든 것을 옥죄고 있다. 

나머지는 그 다음이다.

똑똑!

"전하! 식사 들이겠습니다."

"들여오게!"

역시 비서는 내 취향을 잘 아는군. 

오늘 점심은 양고기로 만든 진한 맛의 살라미, 치즈가 듬뿍 첨가된 샌드위치와 간단한 샐러드였다. 거기에 깔끔한 맛을 자랑하는, 왕궁 주방장의 특제 블랙커피도 함께였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음식을 들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일 수 있겠지만... 솔직히 폐세자 부부도 한국에서의 생활이 그리 고달프진 않을 것이다. 폐세자 부부는 나에게 대접 잘 받고 조선에 돌아가서 그저 얼굴마담만 잘 해주면 된다. 한국과 조선 어디에서건 그들의 목숨을 위협하진 않을테니까... 그들도 편히 지내면 되는 것이다.

내가 따로 만나볼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위로와 환영을 겸한 식사정도는 한번 해줘야겠지?   

오늘따라 샌드위치도 커피도 맛이 좋았다.

박승종은 아들 박자흥과 손녀 부부를 보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날 뻔했다. 하지만 정말 간신히 참고 그들을 반겼다.

"먼 길에 고생했구나!"

"아이고 아버님,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흑흑."

"흐흑, 할아버지..."

"..."

박승종은 아들 박자흥을 비롯해 폐세자 부부를 보고는 다시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허튼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빈손을 꽉 쥐고 있을 뿐이었다. 손녀와 손녀사위는 조선에서와 달리 초췌한 빛이 역력했다. 

반면에 아들 박자흥은 어쩐 일인지 헤어질때보다 살이 많이 쪘고 얼굴색이 더 좋아졌다. 게다가 계속 실실 웃는 것이 정신이라도 나간 듯 했다. 박자흥은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궁금증보다 손녀를 안심시키는 것이 먼저였다. 

"그래 오면서 힘든 것은 없었느냐? 여기는 날씨도 따뜻하고 사람들도 친절하다. 살기에 그리 부족함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안심하고 어서 숙소로 가자. 거기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맘껏 하자꾸나."

"네 할아버지."

"세, 아니 이제는 손서(孫壻 : 손녀사위를 뜻함)라 부르겠네. 자네는 세자가 아니고 여기는 한국이니 그리 예에 어긋나지는 않을게야. 나도 영의정 박승종이 아니네. 손서 자네도 여기에서의 생활에 잘 적응하도록 노력하게. 우리가 함께 뭉쳐 노력한다면 그리 힘들지 않을게야. 자 가세나."

"아버님 걱정마십시요. 제가 배에서 잘 말했습니다. 그렇지? 사위!"

"네, 장인어른."

박승종은 숙소를 향하는 사두마차를 향해 가족들을 이끌었다. 국왕은 박승종과 가족들이 쓸 별채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조만간 가족 모두를 식사에 초대하겠다고 말했다. 며칠 지난 후에, 아들과 손녀부부의 피로가 풀리면 국왕에 대한 이야기를 차분하게 해줘야 할 것 같았다.

박승종 자신도 국왕에 대해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있었다.

이번에 알현하게 되면 그 의문을 풀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박승종의 질문에 이원익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글쎄! 나는 그의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하오."

"아, 비스켓 좀 그만 드시오! 그렇게 먹으면서 이야기하니 자꾸 튀는구만. 에잉."

"누가 먹을때 물어보라고 했소?"

"쯧쯧, 크흠. 그럼 그냥 닮은 사람이란 거요?"

"그렇소! 처음엔 그의 아들이 아닐까 의심했지만 지금은 아니오."

"이유가 뭐요?"

"자세히 설명할 순 없지만 분위기가 너무 다르오. 눈빛은 마음의 창이오."

"그건 무슨 말이오?"

"여기가 한국이고, 우리끼리니 솔직하게 말하는 거요. 선조라는 인간도 그렇지만 임해군, 정원군, 순화군 등 그것들이 사람새끼요? 선조부터 그것들의 눈에는 기본적으로 광기가 있었소. 광해군은 그렇지 않을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똑같았지. 선조는 기축옥사로 천명넘게 선비들을 죽였소. 광해군도 숱한 옥사를 일으켜 죽였고. 임해군같은 말종들도 살인, 강간은 예사였소이다."

"으음, 그래서?"

"맞소. 여기 국왕은 선조나 광해군의 피를 받았다고 말하는 자체가 욕이오."

"최가는 국왕이 그의 아들이라 믿는 눈치던데?"

"만약 내 생각이 틀리고, 국왕이 그의 아들이라면...난 국왕에게 조선을 병탄하도록 청할 것이오. 그렇다면 오히려 잘 된거지."

"아니 뭐요?"

"내가 생각하기론, 국왕은 조선을 가질 충분한 힘이 있소. 그리고 조선을 가지려는 의지도 있소. 우릴 데려온 것도, 1년 후에 조선에 보내준다는 것도 그게 이유요. 1년 후에 조선을 병탄하려는 것이고 병탄에 대한 확신이 있는거요. 조선을 병탄하고 우리에게 조선의 개혁을 맡기려는 것이오. 그래서 우리에게 한국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고."

"..."

"솔직히, 조선은 말만 소중화지. 왕과 사대부를 제외한 사람들에겐 인세의 지옥이오. 한국에 와보니 알겠소. 내가 먼저 조선을 병탄하라고 청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소. 그런데 국왕이 조선 왕의 피를 이었다? 그럼 조선을 병탄해서 병합해야지. 그게 조선의 만백성이 한국처럼 잘먹고 잘사는 가장 빠른 길이오."

"..."

"지난 주에 국왕이 천연두 예방접종을 맞는거 보셨소? 국왕이 이리 솔선수범하여 국민에게 믿음을 주는 나라를 조선이 이길 수 있느냐 말이오. 국민 모두가 빵과 고기를 배불리 먹고, 호환마마를 걱정하지 않는 나라. 누구든 능력이 있으면 출사하건 사업을 하건 성공할 수 있는 나라. 조선은 상대가 되지 않소. 성리학은 틀려먹었소. 성리학은 왕과 사대부들이 백성들을 옥죄기 위한 올가미일 뿐이오. 내 평생 성리학에 천착했지만 이젠 아니오. 성리학으로는 조선을 바꿀 수 없소. 그럴 수 없다면 성리학부터 혁파해야지. 그렇지 않소?"

"..."

"박대감도 나랑 같이 합시다. 우리야 죽으면 그만입니다. 삼한이 고려에, 고려가 조선에 귀의한 것이라 생각하면 되오. 조선은 그 쓰임이 다했소. 그러니 그 조선의 국시인 성리학도 끝난거요. 성리학은 조선이란 나라, 조선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체계요. 그 체계가 잘못되었으니 함께 무너져야 하는 것이오. 조선의 백성들이 잘먹고 잘사는 나라에서 살 수 있다면 이 한몸 쾌히 바치리다."

그때였다.

"이..., 역적 놈아!"

박승종과 이원익이 놀라서 그 소리가 들린 곳을 쳐다보았다. 식당 안의 가까운 곳에 최명길이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박승종과 이원익을 노려보고 있었다. 박승종과 이원익이 대화에 집중하느라 최명길이 근처에 있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최명길은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이원익의 말에 분노했다. 최명길은 역적놈이라 고함을 친 후에 탁자로 다가와 이원익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이 역적놈이, 주상전하(주:작가의 말을 참고해 주세요.)의 은혜를 몰라보고..."

"이거 못놓나?"

콰당!

이원익의 작은 몸집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났는지, 이원익이 최명길의 손을 뿌리치자 최명길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넘어지고 말았다. 이원익은 소매를 탁탁치며 언짢은 얼굴로 최명길을 쳐다봤다. 최명길은 충격과 분노가 어우러진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그 후에 이원익을 무섭게 노려보다 식당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이원익은 식당 문쪽을 바라보다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최대감도 본심은 나와 같을거요. 내가 장담하오. 아직 성리학만이 자신의 세상이라는 아집을 버리지 못한 것일테니. 국왕은 무서운 사람이오. 성리학이라는 조선의 국시를 깨뜨리면, 조선은 그냥 망하오. 난 결심했소. 박대감이 나와 동조하건 말건 말이오."

박승종은 이원익의 단호한 표정에서 그의 굳은 결심을 느낄 수 있었다. 

박승종은 이원익의 눈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원익은 그런 박승종을 보며 함박 웃었다. 

이렇게 박승종과 이원익은 친구에서 동지가 되었다.

그날, 서울의 오후 하늘은 더욱 맑고 푸르렀다.

무역의 단맛

현대에서는 수마트라 섬과 말레이시아 반도로 불리우는 곳에 넓은 영토를 가진 아체 술탄국의 궁정에서는 정복군주 이스칸다르 무다(Iskandar Muda, 재위 1607–1636)를 알현하는 한국의 외교관이 있었다. 

한국의 외교관은 금과 은으로 장식된 고급스러운 상자를 열어서 술탄의 앞에 바쳤다. 술탄의 시종이 그 상자를 들어 술탄 앞으로 옮겼고 술탄이 그 물건을 들어서 살펴보았다. 술탄이 그 물건을 살펴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자 한국 외교관이 말을 했다.

"위대한 술탄께 경의를 표하며 저희 국왕전하께서 선물을 드리도록 명하셨습니다."

"오! 이것이 손목시계로군. 여기 반짝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푸른색 사파이어와 붉은 루비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고르고 골라 세밀하게 깎았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가리키는 부분마다 붙였습니다. 시계의 시침과 분침은 은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위대하신 술탄께 바쳐질 것이라 특별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좋다! 그대들에게 고마움의 댓가로 기름야자와 사탕수수농장의 추가건설을 허락한다. 아루 왕국을 멸망시킨 기념으로 만든 사원의 시계탑은 그대들과의 우정을 의미하는 바가 크다. 이번에 새로 합병한 아루 들리 지역에도 새로운 사원과 시계탑을 만들까 한다."

"오오! 위대한 술탄께서 건설하실 사원과 시계탑은 그 위엄을 널리 일깨울 것이 분명합니다. 저희 한국 외교부는 위대한 술탄의 뜻을 국왕전하께 말씀드리고 빠른 시일 안에 뜻하시는 대로 거행할 것입니다."

"알았으면 이만 물러가라! 그대와의 약속은 이행되리라."

"위대한 술탄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아주 짧은 알현이었지만 방문의 목적은 모두 이룬 셈이었다.

한국 외교부 특임대사인 김순돌은 아체 술탄국의 궁정을 빠져나오자마자 궁정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있는 항구로 갔다. 그 항구에는 한국의 무역회사들이 정식으로 입주한 건물들이 있었다. 

한국은 아체 술탄국에서 후추 등의 향신료를 구입해서 세계 곳곳에 팔고 있었다. 거기에다 아체 술탄국의 기후에 적합한 품종인 기름야자나무(팜유)와 사탕수수(설탕)를 키우는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아체 술탄국의 한국 농장은 아체 술탄국 노동자를 고용해서 기름야자열매를 이용한 팜유, 사탕수수를 이용한 설탕을 대규모로 생산했다. 이런 대규모 농장들은 한국의 정밀가공산업에서 생산한 손목시계 등을 아체 술탄국에 판매한 댓가로 불하받은 것이었다. 

농장의 땅을 아체 술탄국의 국민들과 동등한 권리로 구입하고 아체 술탄국의 국민을 고용해서 생산하는 것이다. 아체 술탄국의 술탄도 이런 방식을 대단히 좋아했다. 술탄과 지배층의 사치품을 얻으면서도 자신들의 금전적 부담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 대사님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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