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께서는 요즘 걱정되는 일이 있소?"
"글쎄..., 딱히 걱정되거나 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요즘 일이 술술 잘 풀려나가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신지?"
"음, 아..아무 것도 아니오. 하실 일 하시오. 난 이만 돌아가겠소."
수상은 실패다.
내 마음을 귀신같이 알아채는 사람은 역시 돌쇠할아버지 밖엔 없는거 같다. 할아버지께서 조선으로 가시면서 하신 말씀이 압권이다.
"흘흘, 결혼도 때가 있는데 지금 안가면 언제 가누? 누가 떠밀어 줄 때 가야 후회가 없는데..."
할아버지! 지금 후회하고 있어요. 어서 돌아와서 저를 떠밀어 주세요.
젠장, 결혼하고 싶어서 침대를 긁어대다가 할아버지가 그리워질 줄이야!
아마도, 엄마가 살아계셨으면 벌써 결혼했을거 같긴 하다. 엄마한테 손자라도 낳아서 보여주면 무척 행복해하셨을테니 말이다. 사실 아버지란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진 않다. 우리 엄마같은 사람에게 선택을 받았다면 무척 대단한 사람일거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엄마는 노비였지만 기품 자체가 달랐거든. 나는 고아로 자란데다가 오랜 사회생활로 인해 그걸 알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엄마때문에 내 눈이 높아져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어쨌든, 오늘따라 내 아버지란 사람이 대체 누군지 궁금했다.
내 아버지란 사람...
그 비싸보이는 청옥관자(靑玉貫子)를 사용하는 사람인 걸 보면,
아마도, 조선 어딘가의 좋은 집에서, 좋은 옷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호의호식하고 있지 않을까?
오늘따라 엄마가 사무치게 그립다.
그리고 내 아버지란 사람도 조금, 아주 쬐끔 궁금하다.
경험(經驗), 관념(觀念), 공동체의식
호주 서울, 수상의 집무실.
수상은 바삐 움직이던 오전 일과가 끝나고 나서, 비서에게 커피 한잔을 갖다달라고 부탁했다. 비서가 커피에다가 수상이 평소 즐기던 건포도 약간을 접시에 담아 내왔다. 수상은 커피와 함께 망중한(忙中閑)을 즐기며 과거의 어떤 기억을 떠올렸다.
◆ ◆ ◆
당시 수상은 2등 항해사관이었다.
아마도, 바쁜 선상업무때문에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때로 기억했다.
그때, 상단주였던 국왕의 질문은 너무나 뜬금없었다.
"혹시 말인데... 2등 항해사관은 비누를 써 봤나?"
"아직 써보진 않았습니다."
"흐음... 아직 써보진 않았다?"
"네! 그렇습니다. 제 생각에 비누는 너무 비싸니까요."
"음..., 자네는 얼마나 자주 씻나? 간단히 세수, 세안하는 것과 아예 목욕하는 것까지 나눠서 이야기해보게."
"세수, 세안이야 매일 합니다만... 목욕은 열흘에 한번 정도 합니다. 항해 중에는 아예 할 수 없구요."
"그럼 내가 비누 하나 줄테니까 한달동안 세수, 세안은 물론이고 목욕까지 해보게. 반드시 말이야. 이건 명령이야! 내가 직접 확인하겠네."
"...알겠습니다."
그때, 국왕전하께서는 상단주셨다.
갑자기 바쁘게 일하던 사람을 불러 뜬금없이 비누이야기를 꺼냈고 그 비누를 사용해 본 다음에 확인까지 하겠다고 하셨었다. 처음엔 당황했고 나중엔 미안했다. 수전노처럼 돈을 아끼는 그를 안타깝게 여겨서 비누를 사용하도록 해준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 ◆ ◆
호주 서울, 수상의 집무실.
한국수도공사장의 대면보고는 계속됐다.
"수상 각하! 영국 뉴리버사(작가 주 : 영국에서 1619년에 설립된 최초의 상수도 회사 : 런던에 처음 수도시설이 설치된 1582년부터 상수도시설이 늘어나고 그에 따라 설립된 회사)와의 기술이전 및 협력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파이프라인 기술은 이미 기술이전을 받았습니다. 향후 물의 수질개선을 위한 정수처리방법을 개발하는 데에 자금을 비율대로 투입할 겁니다. 서울에는 파이프라인 설치가 4할 정도 진행되었습니다. 앞으로 3년 후면 서울의 파이프라인은 모두 완공될 예정입니다. 하수도 시설은 상수도와 겹치지 않게 지하매설이 가능한지 사업타당성을 검토중입니다. 현재 지상 하수도는 악취 등의 문제가 있는데다 수년 내에 포화상태일 것이 뻔합니다. 런던의 하수도 시설을 참고해서 이른 시일내에 보고드리겠습니다."
"한국수도공사장! 물에 대한 수요예측은 어떤가?"
"비누사용의 경험이 축적되고, 국민학교 교육을 통해 국민들의 위생관념이 확고하게 자리잡았기 때문에 물의 수요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현재 14개의 관정에서 물을 충분히 공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향후 수요에는 못미치는 만큼, 추가적인 관정을 설치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에게 깨끗하고 안전한 물을 공급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게. 상하수도요금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은 없나?"
"위생은 물론이고, 물을 편하게 가져다 쓰고 버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금에 대한 반발은 크게 없습니다. 게다가 공기업으로 설립한 만큼, 이익만을 추구하는 회사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긴, 조선에서는 물을 구하러 가는 것도 일이었지. 그래도 항상 주의하게. 국민들의 위생관념이 확고하게 자리잡히고 있으니..., 그에 따라 물의 수요가 증가한만큼 물의 중요성은 우리의 생명과 직결되는 일이야. 그걸 국민들도 잘 알아. 우리가 그런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그 즉시 국민들의 신뢰를 저버리게 된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수상은 한국수도공사 사장의 보고를 받고 생각했다. 국왕전하께서 비누를 써보라고 말씀하신 것은 수상을 불쌍하게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국왕전하는 수십 년의 미래를 생각하고 계획하신 것이 분명했다.
무려 수십년에 걸친 계획 말이다.
첫째, 국민들에게 비누의 사용을 장려한다. 그를 통해서 깨끗함에 대한 즐거운 경험을 하도록 유도한다.
둘째, 그 비누로 씻는다는 행위를 통해 즐거운 경험이 쌓이고 위생관념화 하도록 한다. 거기에는 비누 사용 등의 경험을 포함해서 국민학교에서 위생교육 및 건강교육을 실시한다.
셋째, 국민들의 위생관념이 정착하고 비누 등 위생관련물품이 인기를 끈다.
넷째, 비누의 수요가 올라감에 따라 물건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지고 비누의 가격이 갈수록 낮아진다. 이는 국민건강에도 효과적이다.
다섯째, 국민의 건강상태가 획기적으로 좋아진 것이 갈수록 체감된다. 이 또한 국민학교 교육을 통해 국민들에게 주지시킨다. 이로인해 국민들의 위생관념, 건강관념이 강화된다.
여섯째, 국민의 위생관념, 건강관념이 강화된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국민들의 위생용품, 물, 의료에 대한 수요와 관심이 크게 증가한다.
일곱째, 그에 따라 국민들은 상하수도, 보건소, 병원 등에 쓰이는 비용을 아끼지 않게 된다. 나중에 병으로 고생하느니 상하수도나 보건소 등에 쓰이는 비용이 오히려 저렴하다고 느낀다. 결국 병으로 고생할 비용을 선제적으로 투입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다.
여덞째, 국민들의 건강과 위생에 필수적인 공기업을 세운다. 상수도사업 등 국민의 수요가 있는 것들은 대규모의 자본이 소요된다. 개인보다는 국가가 나서서 대규모의 자본을 들여 저렴하게 공급한다. 그리고 그 비용을 국민들이 별다른 저항없이 내도록 한다.
아홉째, 이 사업들은 항상 국민에게 공개하고 국민들이 신뢰할 수 있게 홍보한다.
국왕전하의 이 계획으로 국민들은 국가에 대한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한국이란 국가와 사회는 하나의 공동체임을 확인시켜줬다. 국왕, 정부, 국민이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정말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그리고 그 어려운 일의 시작은 아주 단순한 "경험"이었다.
그 단순한 "경험"이 쌓여서 위생 및 건강 등의 "관념"이 되었다.
그 관념은 국가의식, 사회의식, 공동체의식으로 진화한 것이다. 그런 국가, 사회, 공동체 등은 개별 구성원 상호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유지될 수 있다. 개인, 사회, 국가라는 구성원 상호간의 신뢰 말이다.
수상은 또 생각했다.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해 자신이 가졌던, 한국에서와 같은 신뢰, 공동체의식이 있었는지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없었다.
조선의 왕, 사대부, 양인, 노비들이 어떤 신뢰가 있을까?
그들에게 공동체의식, 즉 소속감이 있을까?
사대부들의 공동체의식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양인, 노비들의 공동체의식은 있는 것일까?
수상은 이것이야말로 조선의 근본적인 약점이고, 가장 취약한 연결고리라고 생각했다. 국왕전하께서는 당시 비누라는 간단한 예를 들어 이 어리석은 사람을 일깨워주셨다. 정보국 조선지부장의 계획도 마찬가지로 국왕전하의 복심을 깨닫고 기획된 것이었다.
그때였다.
"수상 각하! 마지막 작전선이 서울항에 도착했다는 보고입니다."
"알았네."
수상의 망중한(忙中閑)은 그렇게 끝났다.
한국 수상의 자리는 너무 바쁜 자리였다.
한양 인근의 어느 안가(安家) 내실.
"오랜만이오!"
"바쁘신 분께 죄송합니다. 한가한 제가 찾아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정보국 조선지부장이 한가한 자리라면 저는 죽어야 합니다. 하하하!"
"이민국이야말로 바쁜 자립니다. 제가 먼저 사과드리겠습니다. 시기가 시기인만큼 이민국의 협조가 필요해서 말입니다."
"말씀하시지요."
"여기 이 유서의 내용을 향촌(주 : 양반들이 향약 등을 통해 향리와 일반인들을 그들의 지배하에 두고 있는데 그것을 의미하는 것을 앞으로 '향촌', '향안' 및 '향안질서' 등으로 지칭함)에 은밀하게 퍼뜨려주십시오."
"흐흐흐, 이거 재미있겠습니다. 유서 원문은 놔두고 대략적인 내용만이죠?"
"그렇습니다. 이미 폐세자 부부가 불을 질러 자결했음은 널리 퍼졌으니 말입니다."
"크흐흐, 향촌에 싸움 좀 나겠습니다. 유자라는 사람들은 이상하리만치 음모에 민감하더군요. 폐모살제를 명분으로 일어선 자들이니 더욱 그렇겠지만 말입니다. 이걸 흘리면 많은 유자들이 의심할 겁니다. 폐세자 부부가 자결했다는 것을..."
"하하하! 맞소이다. 거기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다름아닌..."
"..."
그들의 대화는 점점 소리가 작아졌다. 그렇게 잠시 더 이어지던 대화는 어느 새 끝났다. 그리고 그 자리엔 아무도 남지 않았다.
호주 서울항을 향하는 배의 어느 선실 내에선 작은 실랑이가 있었다.
"쯧쯧, 아니 자네는 그게 안되나?"
"장인어른도 그거 못하셨지 않습니까?"
"어허! 소리가 크구먼. 자네 지금, 나한테 화내는건 아니지?"
"..."
"자 다시 해보게. 옳지! 하하하, 이제 되는구먼."
그녀는 아버지와 지아비의 대화를 보며 살포시 웃었다. 권신인 이이첨 등과 친분을 유지하며 권력에 욕심이 많았던 아버지. 그래서 세자빈으로 있을 때에는 잠깐 멀리하기도 했었다. 지아비인 세자, 아니 이젠 서인인 그에게도 저렇게 편히 말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태세전환(?)은 정말 빨랐다.
그녀의 지아비도 이제 편안해 보인다. 세자의 자리에서 내려와 서인(庶人)이 된 지금에도 말이다. 그 지엄한 신분이었기에... 비록 장인이지만 그 반말(?)에 당혹한 것도 잠시, 이제는 서로 얼굴을 붉히면서 싸우기도 한다. 싸우는 이유 대부분은 사소한 것들이다. 옷입는 것부터 밥먹는 것까지 다양했다. 아마도 박자흥은 그녀와 지아비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는 의도이리라.
"이제 서울항에 진입합니다. 곧 하선할 준비를 하시지요. 하선하시면 정보국 직원들의 친절한 안내를 받게 되실 겁니다."
"알겠소이다. 제 아버님도 뵐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그것도 정보국의 안내를 받으십시오."
"고맙소."
아버지 박자흥은 지아비와 함께 갑판 위에서 서울항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뭔가를 기대하는 듯, 잔뜩 흥분된 모습이었다. 반면에 지아비의 얼굴은 복잡미묘했다. 그녀는 어젯밤의 대화가 생각났다.
"부인, 자오?"
".."
"안 자는거 알고 있소."
"...말씀하세요."
"한국에 가서 어찌 살지는 걱정마시오. 내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리다."
"..."
"내가 말이오. 이래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