쏴아아, 끼릭끼릭, 쏴아아
덜컹덜컹.
나무통은 바닥면을 빠르게 움직이며 덜컹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감히 눈을 뜰 수 없었다. 갱도 안은 오직 작은 화등 하나가 외로이 불을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어두웠다. 그 와중에 이리 빨리 움직이니 겁이 났다. 그렇게 순식간에 그 나무통은 막다른 곳에 도착했다.
"다들 내려!"
"내려 어서!"
막다른 곳에는 또 다른 사내 5명이 있었다. 그녀의 일행은 나무통에서 내리고 그 5명의 사내들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 곳은 바닷가였다. 바닷가에는 작은 배 2척이 대어있었다. 일행 모두는 배 1척에 옮겨 탔다. 사내 5명이 거의 끌어내다시피 태웠다. 그녀는 지아비는 물론이고 아버지가 함께 탔기에 그리 겁이 나진 않았다. 아버지가 데려온 자들이라 생각하니 안심이 되고 눈물이 났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제 살 수 있다'고 말이다.
그녀와 지아비의 운명은 어찌 바뀌는 것일까?
끼익끼익.
작은 배는 점점 섬에서 멀어졌고, 주위는 어두웠다.
작은 화등마저 꺼버린 배는 노젓는 소리만 무심했다. 섬과 멀어질수록 그녀는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할까? 오늘만해도 빨리 죽기만을 소망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이처럼 간사한 것이다. 이제는 어디로 가야할지 고민을 한다.
그렇게 그녀의 어두웠던 시간은 작은 배의 곁으로, 그 작은 물결을 따라 그녀의 뒤로 스쳐 흘러갔다. 그녀의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그 눈물이 그녀의 짜게 식었던 가슴을 따스하게 적셨다.
얼마 후, 한양 비변사.
쾅!
누군가 책상을 내리 치며 분노했다.
"지금 뭐라고 했소이까?"
"대감...., 폐세자 부부가 불에 타 모두 죽었다고 합니다."
"아니 그게 말이 되는거요? 제대로 본거 맞냐 말이오?"
"대감! 소리지르지 말고 좀 들어봅시다. 그래서 시신은 모두 확인했느냐?"
"네! 강화유수가 군사를 전부 풀어 나루 통행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시신을 확인했습니다만... 너무 처참해서 얼굴은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의 체구는 비슷하고, 타버린 곳에서 남은 옷 조각은 그들이 입던 옷과 같다고 하옵니다."
"무슨 불측한 일이 있었는지 확인해 보았나?"
"대감, 무슨 말씀이신지?"
"대체 누가 죽였냐는 말일세. 대체 누가?"
"어허! 대감 흥분을 가라앉히시지요."
"지금 흥분을 안하게 됐습니까? 흥분을..."
"대체 어떤 새끼가 불을 싸질렀느냔 말이오."
"이런 말을 가려하시오."
"말 가려서 하게 생겼어?"
"뭐 이런..."
한양의 비변사에서는 당상관 이상의 높은 벼슬로 보이는 두 명이 멱살까지 잡는 추태를 보였다. 강화도에 위리안치시킨 폐세자 부부가 불에 타서 죽었다는 보고가 들어온 것은 이른 새벽이었다. 강화유수가 급보를 보내 배를 타고 양화나루까지 보내고, 양화나루에서 한양 비변사로 오기까지 4시간이 걸렸다.
만약, 보고대로 폐세자 부부가 불에 타서 죽었다면 어제 늦은 밤에서 오늘 새벽 사이에 죽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 그들이 달아난 것이라면?
비변사는 충격에 빠졌다. 둘 다 외통수였던 것이다.
그들은 폐모살제를 명분으로 거사를 일으켰고 성공했다. 폐주가 친형, 동생을 죽이고 그 어머니를 폐하였다는 명분. 그래서 그들은 폐주와 그 가족을 살려주었다. 물론 진짜 살려주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겉으로는 그랬다. 폐주야 죽을때까지 감시만 잘하면 된다. 하지만 폐주의 아들은 죽여야했다. 연산군의 폐세자 이황도 사사되지 않았는가? 그래서 폐세자 이지는 명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잘 되어가고 있었는데...
번민(煩悶)
이원익은 서울에서의 생활이 무척 즐거웠다.
우선 그는 매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깨끗하게 씻는다.
그가 머물고 있는 숙소에는 수도시설이 있어서 깨끗한 물을 받아서 썼다. 나무로 된 관으로 흘러나오는 깨끗한 물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 깨끗한 물을 세수용 그릇에 받아서 쓴다.
세수할때에는 비누를 사용해서 씻었다. 기름야자나무의 열매에서 엄청나게 많은 기름이 추출된다고 하는데, 그 기름을 이용해서 이렇게 비누를 만든다고 했다. 그렇게 비누를 사용하면 정말 깨끗하게 씻을 수 있었다. 그래서 매일 상쾌하게 씻고 하루 일과를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상쾌하게 씻은 다음엔 잠시 신문을 보다가 아침식사를 했다.
조선에서는 참 귀한 식재료인 밀가루였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이 밀가루가 주식이었다. 아침에는 밀가루로 만든 부드러운 빵, 신선한 우유, 양고기 나 햄, 계란 요리가 나왔다. 특히, 빵 사이에 치즈, 햄, 계란, 감자, 채소 등을 끼워서 먹는 샌드위치가 좋았다. 샌드위치는 우유나 커피와 함께 먹으면 기가막히게 좋았다. 하루종일 샌드위치만 먹어도 좋을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맛있게 아침식사를 하고는 간편한 복장으로 학교에 간다.
한국의 복장은 정말 간편하게 입고 벗을 수 있어 좋았다. 모든 옷에 단추가 있거나 옷에 고리가 있어서, 입거나 정리가 편하다. 버선이 아니라 양말이라고 하는 것도 좋다. 양모로 듬성듬성하게 구멍이 나서 바람이 잘 통했다. 버선은 무척 덥고 땀도 잘 찼는데 양말은 아주 시원했다. 거기에 신발은 어떤가? 신발도 가죽을 엮어서 만들었기에 통풍이 아주 잘 되는데다가 바닥에는 아교로 잘 붙여놓은 판이 충격을 흡수해서 발바닥이 편했다.
학교에서도 책상과 의자가 있어 좋았다.
일상생활도 그렇지만, 학교에서 오래 공부하려면 책상과 좋은 의자가 필수다. 이전에는 평생 바닥에 앉아서 공부했었다. 하지만 이젠 책상과 의자 없이는 못 살 것 같다. 필기구도 붓보다 편하다. 펜과 잉크는 붓보다 편하고 더 빠르게 쓸 수 있다.
또한 서울에서는 길이 너무 편했다.
한양에서는 가마를 타건, 말을 타건 궁궐 주위의 대로가 아니면 울퉁불퉁 다니기 힘들었다. 거기에다가 지독한 냄새들이 문제였다. 그런데 서울엔 길도 잘 뚫리고, 냄새도 안났다. 큰 길에는 바닥이 돌이다. 그 돌길 위로 마차들이 잘 다녔다.
거기에다가 시계, 거리의 식당, 커피장사하는 상점 등등
이원익은 갈수록 서울의 생활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슬슬 두려웠다. 1년 후에 한양에 간다니! 다시 한양에 간다면, 한양의 생활에 만족할 수 있을까? 그것이 두려웠다. 이원익은 생각했다. 한양을 서울처럼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게 과연 가능할 것인지 의문이다.
그렇게 이원익의 하루는 또 지나갔다.
이원익은 웃으며 박승종을 반겼다.
"박대감 어서 오시오!"
"먼저 와 계셨구려?"
"여기요 여기! 커피하고 비스킷 좀 주시오."
"이대감은 비스킷을 너무 많이 드시는 것 아니오?"
"사는 재미 중에서 제일이 먹는 재미 아니오?"
"하하하! 한양에서는 서로 당파가 달라 이대감과 제대로 사귀지도 못했거늘. 여기에서는 이리 즐겁구료."
"박대감께서 너무 딱딱한 성미여서 그랬소이다. 무슨 당파 핑계요?"
"그도 그렇소!"
박승종은 이원익의 말에 크게 웃었다. 그들이 그렇게 대화하는 사이에 직원이 커피와 비스킷을 가져다 주었다. 이원익은 접시에 담긴 비스킷을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바라보다 그 중 하나를 들어 베어물면서 말했다.
"우물우물, 오늘 왕립 서울대학교를 둘러본 소감은 어떻소?"
"쯧쯧, 입에 음식을 넣고 말하진 맙시다."
"어허~ 내 박대감을 진정 친우라 생각해서 그러는게요. 이건 예의를 잃은 것이 아니라오. 지난 번에 만찬회에 참석했잖소? 다들 맛있게 먹으면서 담소하고, 웃고 말이오."
"...하긴 그렇소."
"박대감도 너무 딱딱하게 그렇지 마시오. 수상이 그랬지 않소? '한국에서는 한국의 방식을 따라서 생활 해보는 것도 좋다'고 말이오."
"아아 알겠소이다. 내 너무 과했소. 왕립 서울대학교는 참 대단하더이다. 크기도 왕궁보다 훨씬 크고, 도서관에 그 많은 책이라니? 그 안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대학생들을 보고 정말 놀랐소. 한국이 발전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대학생들의 열의(熱意) 때문일거요."
"나도 비슷하게 느꼈소이다. 거기에 색목인들이 함께 공부하는 것도 보니 더욱 신기하였소. 곧곧에서 색목인들의 말들이 귀에 들려오는데, 그걸 잘 알아드는 사람들이 또 많지 않소? 가끔 나도 한번 색목인들의 말을 배워볼까 하고 생각한다오. 그리고..."
그때 박승종이 이원익의 말을 끊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크흠... 최가는 아직도 혼자 다니오?"
"박대감은 아직도 그에게 감정이 남았구려? 최가라니. 흐흐흐."
"크흠..."
"아아 내 알고 있소이다. 박대감이 그에게 묵은 감정이 없을 수 없지."
박승종은 잠시 큰아들 박자흥을 생각했다. 정보국 직원이 박자흥을 남기고 보냈을 때는 걱정이 많았다. 혹시라도 무슨 해를 입는 것이 아닐까 말이다. 그런데 서울에 도착하고는 그런 걱정이 없었다.
한국의 대접을 받아보니 그들은 함부로 누굴 죽이려고 하진 않았다. 그들이 곧 서울에 올 것이라 말했으니 좀 더 기다리면 될 것이다. 그때 이원익이 박승종에게 말했다.
"저기..., 난 말이오. 여기 생활이 너무 편하고 좋구려."
이원익은 말을 하고 나서 박승종의 얼굴을 슬며시 살폈다. 박승종은 이원익이 한 말의 의미를 되새기며 대답했다.
"크흠, 나도 편하고 좋소. 하지만 우린... 다시 조선으로 가야하지 않겠소?"
"흐흠, 누가 가지 않겠다고 했소? 그냥 여기가 편하고 좋다고 한게요."
이원익은 시치미를 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그런데...
"이대감 마음은 나도 십분 이해하오."
박승종은 그 말을 하면서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부렸다. 하지만 이원익의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만큼 커졌다. 그리고 말했다.
"박대감! 이왕 시작한 거... 우리 솔직히 말해봅시다."
"뭐, 뭘 말이오?"
"나도 영의정을 했고, 대감도 영의정을 했잖소? 그런데 조선의 현실을 한국과 비교하면 어떻다고 생각하오?"
"그야 많이 부족하지요. 감히 비교할 수 없을만큼."
"맞소. 나처럼 조선에서 호의호식한 사람도 서울 생활이 너무 좋아서 아쉽소이다. 솔직히, 가족들만 아니면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소."
"나도...이해하오."
"박대감... 우리가 조선을 이렇게, 아니 서울처럼 좋게 만들 수 있겠소?"
"..."
"박대감! 사실 우리 힘만으로는 조선을 한국처럼, 서울처럼 살기좋게 만들기 어려울거요. 나는 요즘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아시오? 조선을 한국처럼 살기 좋게 만들고 싶소. 미치도록 말이오. 그래서 요즘에는 한국이 어찌 이렇게 살기좋고 발전했는지 알아보려고 노력한다오."
"..."
"박대감께서 대답이 없어도 내 할 말은 해야 살 것 같소이다. 솔직하게 말하겠소. 만약에 말이오. 조선이 한국처럼 되지 못한다면, 내 후손들은 조선을 떠나 한국에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 생각하오."
"으음..., 이대감... 그것은?"
"알아요. 알아. 말이 안되지. 조선의 당당한 사대부인 내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말이오.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평생 배워온 것이 있는데 말이오."
박승종은 이원익의 침울한 표정에 담긴 그의 진심을 볼 수 있었다. 이원익은 조선도 한국처럼 똑같이 살기 좋은 곳이 되기를 꿈꾸는 것이다. 박승종도 이원익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조선의 힘만으로는 어림도 없어 보였다. 조선을 바꾸려면 내부의 노력만으론 어려울 것이기에...
그래서 한국의 국왕은 무서운 사람이었다. 나는 물론이고 이원익같은 사람까지 이렇게 흔들어 버리다니. 이 모든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사대부 중에 그 누군들, 한국에서의 생활이 편하고 좋지 않을까?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마음으로부터 복종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
박승종과 이원익은, 그렇게 말없이, 가만히 식어가는 커피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결혼하고 싶다. 정말 결혼하고 싶다!
내가 1598년 생이고, 올해가 1623년이니까 만으로 25살, 한국나이로 26살이다.
아직 숫총각은 아니다. 그건 확실하다. 처음에는 어려서 안했다. 회사설립할땐 바빠서 못했다. 지금은 하고 싶은데 말을 못하겠다. 여러 사람들이 결혼할거냐고 눈치를 준다. 의회에서 내 결혼을 촉구하는 결의안도 만장일치로 채택되어 보고된 적이 있었다. 내가 가장 후회하는 것은 의회 결의안이 나왔을때 거부한거다. 그때 한다고 했어야했는데...
그때 거절한 이후, 사람들도 건성건성 묻는다. 이제는 강제로 결혼시켜도 할판이다. 조선처럼 금혼령, 가례도감 같은거는 바라지도 않는다. 왕이라는 신분때문에 연애도 힘들잖아. 마음에 드는 여자한테 접근하려고해도 연애가 아닌 일이 된다. 이거 정략결혼이라도 해야겠다. 올해는 무슨 일이 있어도 결혼이야기를 꺼낼거다. 역사를 보거나 소설을 보면 왕의 결혼은 쉽다던데 나는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