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흠, 그들이 나를 보고 놀란 이유가 뭘까?
정보국 조선지부장은 내 명령을 정말 잘 수행했다.
100% 아니 300% 이상이었다. 내가 내린 밀지에는 '만약 가능하다면, 반정에서 희생될 북인 중 명망있는 인물을 탈출시켜 서울로 보낼 것. 남인과 서인 중에서도 마찬가지이나 서인 중에는 최명길을 반드시 포함할 것.'과 '반정에서 희생될 사람 중에 명망있는 자들의 가족은 가능하면 구출할 것.'이었다.
그 외의 지시사항은 다른 밀지에 보냈는데 그것도 잘 수행되리라 믿고 있었다.
조선의 명신, 최명길은 역알못(역사를 잘 알지 못하는)인 나도 기억하는 역사상 실존 인물이었다. 이원익은 남인에서 가장 명망있는 사람으로 광해군때 영의정을 했던 사람이고, 박승종은 광해군 시기의 마지막 영의정이었다.
세 사람 모두 내가 내건 조건에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사대부들은 사림에서 동서분당, 동에서 북인, 남인으로 나뉘고 서인은 나중에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는 등 그 계보가 아주 복잡했다. 모두 성리학이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박승종, 이원익, 최명길 등을 통해 반드시 이루고 싶은 일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불러들였다.
"그럼 모두 성에 대감을 붙여서 호칭하겠습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왕에게 무릎을 꿇거나 업드리는 예는 따로 없습니다. 그냥 편하게 자리에 앉으세요."
"..."
"..."
"..."
그런데 그들 모두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아마 납치에 대한 반발심일 수도 있으려니 생각하고 다시 말했다.
"여행은 다들 즐거우셨습니까?"
"..."
역시 아무 말도 없었다.
혹시 이동 중에 고문같은 걸 당했었나? 아니면 내 앞에서 말을 조심하라는 협박이라도 당했나? 탁자에 놓인 음료수와 과자를 먹는 사람도 없었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는다는 속담이 있다. 이 사람들 고수가 분명했다. 아니면 너무나 큰 분노를 삼키고 있을 지도 몰랐다.
역시 그들의 인내심은 대단한 듯 보였다. 아마도 젊은 내가 인내심이 부족한 것을 알고 서로 공모했을 것이다. 납치한 내가 먼저 잘못했으니 먼저 말을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먼저 말을 시작했다.
"세 분을 여기까지 모신 것은 제가 명령한 것입니다. 저희 직원들에게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긴 여행으로 피곤하실까봐 이제야 만났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말을 계속했다.
"초면에 모든 것을 말하기 어려우니 차차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앞으로 약 1년간 한국에서 지내게 될 겁니다. 그동안 우리 한국에 대해 많은 것들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가장 먼저 국민학교에서 몇가지 필수교육을 받게 될 겁니다. 그 후에 수상을 비롯한 내각의 각료들, 의회와 의원들, 법원과 판사들을 만나 우리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알게 될 겁니다. 나중에는 우리 국민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생활하시며 확인할 것이구요. 계시는 동안 불편함없이 지내도록 우리 한국 정부가 성심성의껏 도울 겁니다. 박대감께서도 1년 후에는 걱정없이 조선으로 돌아가실 수 있을 겁니다. 아무 것도 말입니다."
"..."
"..."
"..."
나는 생각했다.
'조선의 왕은 참 답답하겠다.' 고 말이다.
이렇게 말없는 신하들과 함께 일을 하다간 답답해 미칠지도 모른다. 갑자기 돌쇠할아버지가 그리워졌다. 투머치토커는 곤란하지만, 아예 말이 없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오랜 여행으로 피곤하실테니, 오늘 만남은 이것으로 끝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음 만남은 제 비서를 통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사실 오늘만 날이 아니다.
나는 그들을 내보내고 다음 일정을 소화했다.
그들은 대체 왜 놀란걸까?
금선탈각(金蝉脱殻)
어두운 동굴, 아니 어두운 갱도에서 작은 화등 하나만을 의지하고 조심스레 걷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 중간쯤에 걸어가던 사람 하나가 순간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 했다. 그는 놀라 새된 소리를 지르며 몸을 곧추세웠다.
"어이쿠!"
그때, 넘어질 뻔한 사람의 바로 뒷 사람이 핀잔을 줬다.
"쯧쯧, 거 잘 좀 합시다. 어휴... 그게 안되나. 그게..."
그리고 핀잔을 받은 사람은 연신 미안해 했다.
"크흠, 알았소. 너무 닥달하지 마시오."
"잠시 후에 작전지에 도착하니 울거나 소리지르지 마시오. 알겠소?"
"크흐흠, 알겠소."
"흐흐흐, 그게 부정(父情) 아니오?"
"하하하"
그 일행들의 우스꽝스러운 말 장난은 우두머리 사내의 개입으로 곧 끝났다.
"쉿! 작전지 도착이 금방이다. 조용히 해."
"..."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 말장난을 하며 웃던 자들이었다. 그런데,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의 말에 일행은 즉시 침묵했다. 그들은 뭔가 손으로 신호를 하더니 갱도 깊이 안쪽으로 사라졌다.
대체 그들은 어디로, 무엇을 위해 움직이는 것일까?
◆ ◆ ◆
그릇에 담긴 것은 석회가 잔뜩 섞인 조밥.
그것은 분명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 참혹한 현실에 울고 싶었지만 차마 울지 못했다. 이리 할 것이면 차라리 단칼에 목을 베어 죽일 것이지. 이런 대접이라면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지아비는 물론이고 그녀까지 말이다.
사람이 먹을 수 없는 밥을 준다는 것.
그것은 먹지 말라는 것과 다음이 없었다.
사람은 음식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
그들은 아주 상냥했다. 겉으론 인자하게 웃으면서 예의를 갖춰 대접했다. 그리고 이 석회 섞인 조밥을 먹으라고 연신 권했다.
소리장도(笑裏藏刀)가 따로 없었다!
겉으로는 웃고 있으나 속으로 칼을 숨긴 자들.
그들은 폐모살제를 명분으로 일어났거늘. 어찌 이럴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이 지아비와 그녀의 죄업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속절없이 하루가 지났다.
위리안치(圍籬安置)!
그녀는 죄인이었다. 그녀의 지아비도. 그래서 강화도의 엄중한 곳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로 둘러쌓인 곳에 가둬졌다. 그날 이후, 그녀는 말을 잊었다. 지아비도 말을 잊었다. 이제 그것이 빨리 오기만 기다릴 뿐이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되겠지만, 그 시기만큼은 빨리 오기를.
그녀는, 그저 빨리 그 운명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한양 인근의 어느 안가(安家) 내실.
"강화유수는 어찌 했나?"
"강화유수는 나졸 수십과 함께 한양으로 출발했습니다. 유수의 부장(副將)은 동헌(東軒)에 남아있습니다."
"예상되는 시간은 빠짐없이 점검했겠지?"
"탈출 및 해안 도착예정시간까지 사전연습을 빠짐없이 했습니다. 힘들었지만 갱도는 총 3개, 도합 길이만 3200척(약 1,060미터)입니다. 작전지 바로 밑의 갱도를 제외한, 나머지 2개의 갱도는 목조궤도를 설치해서 탈출은 쉽습니다. 다만, 갱도폐쇄에는 작전지 수직통로부터해서 1시간정도 예상합니다. 갱도폐쇄인원은 안가로 움직였다가 별도로 탈출할 겁니다."
"기만조는 어떤가?"
"2달 전부터 작전지 주변에서, 나루터에서 허위정보를 퍼뜨릴 인원을 나눴습니다. 목표물이 탈출하는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을테고, 목표물이 떠나면 바로 분산탈출하기로 약조되었습니다. 훈련도 충분합니다."
"수직통로와 갱도가 사후 그들에게 들키지 않게 주의해야하네. 위장에 만전을 기하게."
"알겠습니다."
툭!툭!툭!
갱도 안에 갑자기 둔중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람이 말했다.
"기만조 신호다. 나졸들이 순찰도는 시간은 1시진이다. 섬이라서 방심하는 것도 있고, 위리안치를 했으니 그런 것도 있다. 각 조별로 각자의 임무에 충실하라."
"네! 알겠습니다."
잠시 갱도 안의 사람들이 바삐 움직였다. 그렇게 일각 정도 흘렀을까. 흙더미가 내려 앉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투둑투둑!
그때 일행 중 하나가 나직하게 소리쳤다.
"수직통로 열렸습니다. 사다리 올려줘!"
"즉시 진입해라. 2각 주겠다. 어이 당신... 좀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크흠, 알겠소이다."
갱도를 지나던 일행들은 잽싸게 사다리를 타고 지상 위로 올라갔다. 그들의 행동은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빠릿빠릿했다.
대체 그들은 무엇을 하고자 이러는 것일까?
잠시 후...
"아버...으읍!"
"읍!"
"쉿! 그냥 듣기만 해라. 여기에 지필묵이 있으니 내가 써온대로 각자 유서를 써라. 어서!"
"아버님 대체..."
"어허! 시키는대로 하거라. 크흠, 세자... 아니 그대도 빨리 쓰도록 하게. 시간이 없어. 어서 유서를 쓰고, 바로 땅굴로 탈출한다."
그녀는 어안이 벙벙했다.
죽었다던 아버지가 나타났다. 분명 그녀의 아버지는 유서를 쓰고 불을 질러 자결했다고... 그 비통한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그녀가 유배된 곳에 아버지가 땅굴을 파고 오시다니! 그리고 갑자기 나타나선 뜬금없이 유서를 쓰라고 난리다. 그녀는 무척 놀랐지만 아버지의 등장에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있었다. 이제는 유서를 쓰고 난 후, 아버지를 따라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이...
그녀의 지아비도 열심히 유서를 적고 있었다. 아버지가 가져온 유서의 내용은 차마 눈물없이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뭘 하시려는지 궁금했지만 그냥 시킨대로 급히 적었다. 그렇게 유서를 다 쓴 다음에야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여러 명의 날랜 사내들이 집안 곳곳에 숯을 쌓고 있었다. 엄청나게 많은 숯이 땅굴에서 연이어 올라오고 있었다. 아버지는 재빨리 속곳까지 전부 옷을 갈아입으라 재촉했다. 그녀와 지아비는 함께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다 갈아입고 나오니 땅굴에서 웬 포대기 2개가 올라왔다. 사내들이 꺼낸 그것은 놀랍게도 남자와 여자 시체 2구였다. 그녀는 깜짝 놀랐으나 입을 가려 소리를 막았다.
"어서 내려가라. 나머지는 이 사람들에게 맡겨. 자네도 빨리 움직여. 왜이리 굼뜬가? 어서 못 움직여?"
"자..장인어른 알겠소..습니다."
"아버지..."
"빨리 가라구. 이 답답한 사람아!"
그녀는 간신히 사다리를 타고 갱도 맨 아래까지 내려왔다. 뒤어어 지아비도 내려왔다. 갱도에는 다른 사내 2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내 2명과 그녀, 지아비, 아버지까지 5명이 갱도를 걸어 이동했다.
1각 정도 걸었을까? 갱도 끝에 도착한 듯 앞이 막혀 있었다. 사내 2명이 앞을 밀었다. 그랬더니 나무판이 열리고 그 안에 또 갱도가 있었다. 그 갱도는 지금까지 왔던 방향에서 좌측으로 꺾여있었다.
그런데, 그 갱도는 신기하게도 나무로 된 통이 있었다. 그 통의 아래에는 바퀴가 달려있었고, 그 바퀴는 갱도 바닥에 나무판의 홈에 요철방식으로 걸려 있었다. 사내 2명이 그 나무통 위로 빨리 올라가라고 재촉했다. 그녀는 정신없이 나무통 위에 올라섰다. 그녀, 지아비, 아버지가 모두 탔을때, 사내 2명이 말했다.
"고개를 바짝 숙이고 나무통을 꽉 잡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