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능양군, 아니 이제 상이다.
드디어 이 자리에 앉았다.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 옥좌다. 저 아래에 선 버러지같은 것들이 감히 쳐다볼 수 없는 조선의 왕! 그게 나다.
숭용산림(崇用山林), 산림직?
그래 준다. 거사를 위해 약조했으니 주마.
너희들은 나의 역린(逆鱗)을 건드렸다.
나는 너희들의 눈치를 보며 살지는 않을 것이다.
너희들은 이번 한번이지만 왕을 바꾼 경험이 있다.
한번이 두번, 두번이 세번되는 것은 정한 이치다.
나는 지켜보리라.
너희들은 또 욕심이 날 것이다.
한번 바꿨는데 두번은 못할까?
내 조부도 죽기 전까지 놓지 않았던, 아니 못했던 자리다.
그런 자리다.
마음껏 날뛰어보아라.
내 모조리 죽여줄 것이니.
쏴아아.
끼룩끼룩.
철썩철썩.
호주 서울항의 날씨는 맑았다. 항구에 가까워올수록 갈매기들이 우는 소리가 가까웠다. 호주 해군의 정예 클리퍼함은 속도를 위해 적재량을 다소 양보한 배였다. 함포는 16문으로 다소 적었지만 속도가 무척 빨랐다. 호주의 클리퍼함은 앞뒤로 길쭉한 모양의 파격적 선체로 유명했다. 이 배는 중간기착지 3곳을 들렸다. 그리고 22일에 가까운 항해끝에 서울항에 거의 도착한 것이다.
◆ ◆ ◆
퍽!
"크~윽!"
거사 당일, 최명길은 잠시도 쉴틈없이 바삐 움직였다.
창덕궁 돈화문 앞에서 사방을 경계하고 있던 중 이었다. 누군가 군사를 갈라 도망친 폐주를 잡으러 창덕궁의 뒷물쪽으로 가자고 했었다. 주위에서 그에 호응하는 말이 들렸고, 최명길도 그 말을 옳게 여겼었다. 또 그때, 그 누군가가 '대감께오서 저희를 이끌어 주셔야합니다.'하고 부추겼었다.
최명길은 분위기에 취해 그들을 이끌고, 아니 그들에게 이끌려 창덕궁의 뒷문쪽으로 달려갔다. 그때 누군가 '저쪽을 보라.'는 말을 했다. 그래서 그쪽을 바라보는데 뭔가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던 것이다. 그 후로는 어떤 곳간에 갇힌 상태로 깨어날때까지 아무 기억이 없었다.
최명길은 거사 당일, 그 누군가에게 납치당한 것이었다.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땐, 거사가 실패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래서 자결할 생각으로 혀를 깨물려고 했었다. 그런데 혀를 깨물 수 없었다. 입이 얼얼하여 힘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재갈도 물려있었다. 몸에도 힘이 없었고, 팔과 다리가 묶여있었다. 포승줄을 풀기 위해서 안감힘을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가끔 밥을 주는 이에게 물어봤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가 잠이 들었었다.
다시 잠이 깼을땐, 그들이 들어와 나를 관곽같이 생긴 나무상자에 집어넣었다. 있는 힘껏 발버둥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또한 나에게 무언가를 강제로 먹였는데, 그것을 먹고나니 정신이 없어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일어나니 배안의 선실에 묶여있었다.
최명길은 분노했다.
이번 반정의 거사는 최명길이 아주 큰 역할을 했다. 그 대업을 이룰 찰나에 괴한들이 그를 납치한 것이다. 대체 무슨 이유일까? 배의 함장인 김소령은 항상 정중하게 대해주었다. 배가 잠시 유구국에 기항하고 있을 때를 빼고는 그를 묶어놓지도 않았다. 다만, 선실을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김소령의 말로는 혹시라도 바다에 빠질 수 있어서 그렇다고 했다.
최명길은 김소령에게 참 많은 것을 물었다.
하지만 김소령은 정중하게 대접하면서도 질문의 답은 피했다. 김소령은 말했다. 서울에 도착하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이제 곧 도착할 것이라 말했다.
최명길은 이것이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 ◆ ◆
"대감마님! 선전관이 어명을 가지고 왔다 합니다."
"뭣이라? 내 의관을 갖출테니 어서 모셔라."
이원익은 선전관이 어명을 가지고 왔다는 말을 듣고 대경실색했다. 오후 늦게 비변사에 역모고변이 있었다는 풍문에 긴장하고 있었다. 서인의 역모고변이기에 남인이었던 그와는 상관없었다. 하지만 역모고변에 서인, 남인은 없었다. 아마도 누군가가 함께 이름을 올려 고변한 것 같았다.
만약 주상전하께서 긴요한 일때문에 불렀다면 상선을 보냈을 것이다. 이원익은 그렇게 긴장하고 선전관을 맞이했다. 이원익이 맞이한 선전관은 분명 낯이 익은 자였다. 평소 여러번 대궐에서 마주친 자로 기억했다. 선전관은 어명을 받기위해 예를 취하기도 전에 손을 잡아 끌었다. 그리고 어서 궁으로 가야한다고 재촉했다.
그는 경황이 없어 급히 따라 나섰는데, 대문 앞에는 아녀자들이나 탈법한, 사면이 막힌 가마가 놓여있었다. 선전관이 더욱 재촉하여 가마에 오르니 건장한 4명이 가마를 지고 질풍처럼 이동했다. 대궐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인데도 가마는 계속 달렸다. 너무 답답해서 선전관을 불렀더니 아무 말이 없었다. 결국 2각이나 더 가서야 가마에서 내릴 수 있었다.
가마에서 내리고나니 어떤 집안의 마당이었다. 선전관은 없고, 여러 사람에 둘러싸여 곳간에 갇혔다. 소리치면 재갈을 물린다고 해서 조용히 있었다. 선전관이 불렀으니 곧 주상전하가 오실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선전관도, 주상전하도 나타나지 않았다.
◆ ◆ ◆
이원익은 지금 배 위에서 멀리 서울 항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원익이 탄 배의 선실에서는 최명길이 서울 항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두법의 발견
가난, 호환, 마마.
조선에서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들이다.
가난은 왕도 구제하지 못한다.
호환은 호랑이를 산군(山君)이라 말하며 두려워했다.
마마는 마마신이라고 해서 그 자체를 운명이라 말했다.
그런데 이거 전부... 는 아니어도
몇 개는 내가 구제할 수 있겠는데?
쓱쓱.
싹싹.
메에에.
푸륵.
"국왕전하! 이번에는 경쟁이 아주 치열합니다. 작년 대회 우승자가 오히려 밀리고 있습니다. 3연속 우승은 어렵겠습니다."
"하하하! 이번 대회는 의외의 실력자들이 나타나서 즐거움을 주고 있습니다."
"저것도 가능하군? 양털깎는 속도도 속도지만 저렇게 깔끔히 깎다니!"
"자네 저기도 보이나? 깎은 양털을 효율적으로 잘 정리하는 그의 방식을 보게. 저건 시간낭비가 거의 없어. 난 저 선수에게 가산점을 줄거야."
제10회 국왕배 양털깎기대회 결승전이 과열되고 있었다.
농축산부의 보고에 따르면 호주의 현재 인구는 45만이지만 키우는 양의 숫자는 대략 20배인 천만마리에 육박한다고 했다. 물론 말과 소도 많았지만 양에 비해선 아주 적었다. 양은 말 그대로 호주의 젖줄이었다.
양털은 잘 모아서 옷을 만드는 모직산업을 키우는 토대가 되었고, 양젖(羊乳)은 치즈 등의 유제품을 공급하여 국민의 식탁에 오른다. 또한, 양고기는 국민의 육류소비 대부분을 차지한다.
최근엔 젖소의 숫자가 크게 늘고 있어서 우유, 소고기 등의 비중이 커지고 있긴 했다. 하지만 아직은 양에 비할 수 없었다.
국왕배 양털깎기대회는 농축산인들에게 축산업의 최신 정보를 전파하고, 그에 대한 교육을 겸해서 시행한 것이다. 양털깎기만 있는게 아니고 양젖짜기, 소젖까기, 치즈만들기, 버터 등등 다양하다.
모든 경쟁부문마다 순위에 든 사람을 국왕이 직접 포상하는 대회였다.
처음 영국에서 양을 수입한 다음, 영국 농민들을 통해 국민들에게 양과 젖소 등 목축업을 전파했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조선에서 논농사, 밭농사만 하던 사람들이 처음부터 잘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농축산부에 농업학교를 세우도록 지시했다. 그래서 농업학교를 통해 국민들에게 기본적인 목축을 가르치고 관련 지식을 꾸준히 전파 및 재교육했다. 그 다음에 농축산업에 관련된 경연대회, 음식축제 등을 열어서 경쟁하게 만들었다.
그게 벌써 10년째가 된 것이다. 처음엔 양털깎기만 있었다. 그 다음부터 경쟁분야가 계속 늘어났다. 지금은 양털만이 아니라 가장 큰 양, 가장 많은 양, 치즈, 버터 등등 다양하게 말이다.
양털깎기대회가 끝나면 푸짐한 포상과 함께 다양한 축제도 열린다.
"여기 새로 나온 맛있는 양젖 치즈를 드셔보세요! 특별한 발효방법을 써서 새콤달콤합니다. 빵에 살짝만 발라드시면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몰라요."
"새끼 양고기로 만든 특제 살라미에요. 짜지 않고 육질이 부드럽습니다. 오늘만 공짜에요. 어서 오세요!"
"최고급 양가죽으로 정성들여 만든 이 마구(馬具)를 보세요! 너무 부드러워서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또 무게도 가볍기에 말도 좋아합니다."
"이 멋진 양탄자 좀 보세요. 잘 연마되어 부드럽고, 조직이 치밀합니다. 색깔도 곱습니다. 집에 들여놓으면 양탄자 위에 앉자마자 잠이 올 정도로 편안합니다. 거기 사모님 여기 양탄자 들여가세요."
"국왕전하! 이번 제10회 대회도 성황리에 끝났습니다. 이번 축제를 통한 관련 상품판매도 작년보다 많이 늘었고, 대회참가자와 관람객, 축제를 즐긴 국민들도 대폭 증가했습니다."
주무부서인 농축산부장이 먼저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말도 마세요! 양털깎기대회가 계속될수록 양관련 축산업이 발전하는게 눈에 훤히 보입니다. 이건 국민축제나 다름없어요."
제10회 양털깎기대회의 회장도 농축산부장과 마찬가지로 화답했다.
"그런데 전하! 이번 대회에서 이상한 보고가 하나 들어왔습니다. 경쟁부분이 소젖짜기 였는데, 소젖짜기에 참가한 아낙네들이 주장한 겁니다. 우유를 짜는 아낙네들이 소의 마마(천연두)를 앓는 일이 가끔 있는데, 이걸 앓고 나면 다신 마마에 걸리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걸 이상하게 여긴 우리나라와 영국 의사 2명이 그걸 증명해 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농축산부장의 말을 들은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
그리고 내 귀를 의심했다. 혹시 이거 종두법아닌가?
잘하면 천연두를 극복한 우두법이 우리 한국에서...?
그럼 대박이잖아!
"오 세준! 이것 봐. 소도 사람처럼 천연두에 걸리는 게 확실해. 사람이 천연두를 앓고 생기는 증상과 아주 똑같아. 천연두는 전염병이고 사람 사이에 전염되는 것은 익히 알려졌어. 그런데 소의 천연두도 사람에게 전염이 된다는게 이번에 증명된거야."
"맞아. 나도 같은 생각이야. 우리가 들은대로 소의 천연두를 사람이 앓고나서 더 이상 천연두가 걸리지 않는다면? 천연두 치료법을 우리가 만들게 되는거지."
"하지만 너희 국왕께서 정말 천연두 실험을 허락하실까? 우리는 확신하고 있지만 괜히 십자가에 매달려 화형당하는건 아닌지 불안해."
"우리 국왕전하께서 그럴 분이 아니야. 분명 국민들을 위한 현명한 결정을 내려주실거다. 제일 먼저 소의 천연두를 앓은 사람들을 모아야해. 그 다음에 사람의 천연두를 앓은 사람도 모아야하고. 그걸 통해서 소와 인간의 천연두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거야."
"그래. 나 제임스 제너는 김세준과 함께 천연두를 치료한 의사로 영원히 이름을 남기게 될거야. 우리 힘내자구!"
영국 옥스퍼드에서 공부하고 난 후, 친구인 제임스 제너와 함께 귀국한 세준은 몹시 흥분했다. 이 천연두 치료법은 국왕배 양털깎기대회에 재미로 구경갔다가 들은 이야기 때문에 시작된 것이다.
친구 제임스 제너와 함께 여기저기 구경하고, 맛있는 축제음식을 먹다가 들은 이야기였다. 소젖짜기 경쟁부분에 참가한 아낙네들이 '소의 천연두를 가볍게 앓고 나면 사람의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그것을 들은 세준은 곧바로 그 아낙네를 붙잡고 여러가지 질문을 했다. 그 결과, 아주 많지는 않지만 소젖짜기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에게서 그에 부합하는 여러개의 사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이것들을 증명하기만 한다면, 의학계의 엄청난 대발견, 대발명이 될 것이 분명했다. 세준은 옥스퍼드에서 영국 경험주의 철학에 매료되었었다. 꼭 경험주의가 아니더라도 소젖짜는 아낙네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증명은 아주 간단했다.
결국 세준과 제임스 제너는 농축산부에 보고해서 국왕에게 이 실험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한 것이었다.
내각 대회의실.
나는 세준과 제임스 제너가 천연두 실험을 하도록 허락했다.
"그럼 농축산부는 의사 김세준, 제임스 제너의 천연두 실험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세요. 만약 소를 이용한 천연두 실험이 그들의 주장대로 입증된다면 국민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성공하면 후하게 포상하고 국민들이 천연두에 걸리지 않도록 미리 예방하는 조치를 시행하도록 합시다. 각료분들도 달리 반대의견은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국왕전하께서 말씀하신대로 된다면 국민들에게 큰 혜택이 돌아갈 겁니다.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아무리 약한 천연두라고 해도 국민들은 이를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런 두려움을 미리 해소하지 못하면 아무도 천연두 예방에 동참하지 않을겁니다."
"수상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래서 본인은 결정했습니다. 천연두를 예방하는 첫 치료를 제가 받겠습니다. 저는 천연두에 걸린 적이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