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3년 3월 12일 저녁 무렵. 대궐 안쪽은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거기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아름다운 미녀들이 말이다.
"전하~ 여기 보시옵소서. 아름답지 않사옵니까?"
"하하하! 그렇구나. 꽃이로구나 꽃이야. 말하는 꽃. 선인들이 어찌하여 해어화(解語花)라 하였는지 알겠구나. 자 부어라!"
"국정에 진력하시느라 노곤하실 주상전하를 위해 정성껏 준비하였습니다. 드셔보시어요."
"흐흐흐, 개시(주 : 상궁 김개시)야말로 충신이로다. 과인을 헤아리는 네 정성에 감복하지 않을 수 있으랴! 오냐 이리 올리거라. 내 맛을 보마."
쪼르륵.
꿀꺽!
"오! 미주가효(美酒佳肴)란 말이 무색하구나. 이것이 천상의 진미일지니. 내 너에게 큰 상을 내리마. 여봐라 상선은 개시에게 상급을 후히 내리거라. 자 뭣들하느냐? 여악(女樂 : 궁중 연회의 흥을 돋구는 여자 관기들)을 더 들여라! 우리 신나게 놀아보자."
대궐 안에서 전하라 불리는 이는 오직 조선의 왕 뿐이었다.
불야성을 이룬 대궐의 연회, 그 연회의 상석에 앉은 이는 전하라 불리고 있었다.
번듯한 이마, 하얀 얼굴에 크고 힘있게 자리한 두 눈과 오똑한 콧날은 매우 기품있었고, 주삿빛 입술과 함께 어우러져 누가봐도 잘생긴 남자였다. 자리에 앉았음에도 무척 커보이는 큰 키와 단단해보이는 가슴, 넓은 어깨는 힘이 넘쳐보였다. 그 남자는 헌헌장부였다.
그런데?
그의 눈빛만은 정말 요상했다.
번들거리는 흉폭한 빛이 그의 눈자위를 감돌았고, 하얀 색이어야할 곳에는 핏빛이 도드라져 있었다. 만약 그의 눈빛을 바라본다면 누구든지 간담이 서늘할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눈빛을 가진 자가 왕이라니? 반듯한 외관에 놀라 흠모의 정을 품었던 이라도, 그의 흉폭한 핏빛 눈을 본다면 기겁하리라.
하지만 그는 조선의 지존, 왕이었다.
누가 감히 그를 거스르겠는가?
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듯 몸을 흔들며 여악(女樂) 무리 가운데로 향했다. 아름다운 여악들은 왕의 주위를 맴돌며 함께 어울렸다. 잠시 후, 왕과 여악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연회장을 가득채웠다.
그렇게 왕의 연회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었다.
같은 시각, 대궐 교태전.
"주상전하께선 국정을 살피시느라 몹시 피곤하실겝니다. 다른 이는 몰라도 우리는 주상전하의 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임진년의 변란부터 얼마나 노고가 크셨습니까? 주상전하께서는 세자시절부터 그 자리에서 편했던 날이 단 하루도 없으셨습니다. 그 자리를 흔드는 자들은 아래에만 있지 않았어요. 그걸 명심하세요. 그걸 반추하시어 즉위하시고 바로 세자를 책봉하고, 단 한번도 그걸 흔들지 않았습니다."
"알겠사옵니다. 어마마마."
대궐의 교태전에서는 3명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의 내용을 보면 왕의 정비인 중전과 세자부부인 듯 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은 그리 밝지 못했다. 아마도 대궐에서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연회가 불편한 듯 했다. 잠시간 이어지던 대화는 세자부부로 보이는 젊은 두 남녀가 교태전을 나서며 끝났다.
세자는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바마마께서 걱정이오. 요즘 연회가 너무 잦소. 저러다 옥체를 상하시지나 않을지 걱정이 되는 구료. 이를 어쩌면...."
그가 말꼬리를 흐리자 세자빈이 말을 받았다.
"저하. 저도 걱정이옵니다. 하오나 중전마마는 물론이고 저하께서도 심려하고 있으니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세자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소. 내 마음을 잘 다스리리다."
세자 부부로 보이는 두 남녀는 불야성을 이룬 대궐 연회장의 소리를 들으며 동궁으로 향했다.
세상에 빛이 밝을수록 그 주위의 어둠은 더욱 깊어지기 마련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세자 부부가 불야성을 등지고 사라진 그 길은, 갈수록 그 어둠이 깊어졌다.
그 시각, 비변사에선 고성이 터져나왔다.
쾅!
"뭣이?"
영의정 박승종은 탁자를 치며 크게 소리질렀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역모의 고변이 잦아 신경이 곤두서 있던 터였다. 게다가 이번 고변은 그 역모의 정황이 너무도 구체적인지라 듣자마자 아연실색했다.
이이반과 김신국은, 자신들이 이후배, 이후원이라는 자로부터 서인(西人) 당여들이 능양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다고 하면서 역모를 고변했다.
"이후배, 이후원을 즉시 포박하고 고발된 모든 사람을 나포하라! 추국청을 설치해야겠다. 주상께는 내가 허락을 얻겠다."
영의정 박승종은 서둘러 대궐로 향하면서 급히 명령했다.
영의정 박승종은 대궐 연회장에 들어서며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연회장 안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연회석에는 미주가효가 산을 이루고 여악(女樂)들은 왕과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영의정 박승종이 연회장에 들어서기 전, 상선에게 급한 보고가 있음을 알렸음에도 말이다. 왕의 뒤에서 상선도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영의정 박승종은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어 왕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진언했다.
"주상전하! 급보이옵니다."
"오! 영상이구려. 어서 이리와서 한잔 드시오. 아주 재미있소이다."
"주상전하! 참람되게도 역모이옵니다. 즉시 추국청을 설치하고 역모고변이 들어온 자들을 나포해야 합니다. 어명을 내려주시옵소서."
그러나 왕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러기를 잠시 말을 이었다.
"역모라... 이번에도 서인이오?"
"네 맞사옵니다."
"내 허락하지 않겠소. 내일 의논합시다."
"주상전하! 이번 보고는 역모의 정황이 너무나도 구체적입니다. 즉시 추국청을 설치하고..."
"내 이번엔 허락하지 않겠소. 영상도 한잔 하실거면 남고 아니면 돌아가시오."
"주상전하..."
왕은 박승종의 말을 듣지 않고, 몸을 돌려 다시 여악들과 술래잡기를 시작했다. 박승종은 다시 왕을 따라가 허락을 구하고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한참을 실랑이하다 결국 포기한 박승종은 연회장을 떠나 비변사로 향했다.
잠시 후, 비변사.
영의정 박승종이 비변사 안에서 훈련대장 이흥립을 다그치고 있었다.
"그대가 장유를 비롯해서 서인 무리들과 역모를 꾸민다는 고변이 있다. 장단부사 이서와 이천부사 이중로에게 편지를 쓴게 사실인가?"
"영상 대감! 저는 결백하옵니다."
"그대가 혹시 김류, 이귀하고 함께 모반하려고 하는거 아닌가?"
"제가 딴 사람도 아니고 어찌 영상 대감을 배반하겠나이까?"
박승종은 훈련대장 이흥립을 노려보며 잠시 숨을 골랐다.
훈련대장 이흥립은 그와 사돈이었다.
그래서 안심하고 그를 훈련도감의 장인 훈련대장에 두었다. 훈련대장은 한양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인 훈련도감군을 통솔하는 자리였다. 아무리 서인 무리들이 반란을 일으켜도, 대궐 창의문을 닫아 걸고 도감군이 굳건히 지키면 되었다. 대궐을 지키는 사이에 경기감사로 있는 아들 박자흥이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러 달려오면 역모가 성공할 리 없었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과했나보군. 이만 돌아가게. 대궐 방비를 굳건히 해야할걸세."
"대감.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제가 훈련도감을 장악한 이상 아무 걱정마시옵소서."
영의정 박승종은 훈련대장 이흥립의 뒤를 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자신의 노파심이 과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만사는 불여튼튼 아닌가?
"여봐라. 게 누구 있느냐?"
박승종의 말에 비변사 선전관이 들었다.
"네 대감! 여기 있사옵니다."
"지금 즉시, 경기감사 박자흥에게 역모고변을 알리거라. 상황이 다급하니 만약의 일이 생기면 즉시 출병하도록 준비하라고 말이다. 알겠느냐?"
"네 알겠습니다."
선전관이 급히 나가며 문이 닫혔다.
박승종은 비변사 선전관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다 눈을 감고 생각에 빠졌다.
'내일, 그래 내일 해가 뜨면...'
영의정 박승종의 그 생각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렇게 그의 밤은 더욱 깊어갔다.
밤 2경, 홍제원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집결하고 있었다.
서인 당여 이귀, 김자점, 송영만, 한교 등이 각각 모집한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있었고, 북병사 이괄도 그의 군관 20여명을 거느리고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으며, 다른 서인 당여들이 급히 끌어모은 자들도 수백 명을 넘겨 모여들고 있었다.
당초 거사를 약조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었다. 언뜻 보아도 수천은 될법한 숫자였다. 거사를 계획했던 서인의 주요인사들은 수천의 인파에 자못 고무되어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있었고, 거사의 실패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후에, 장유가 와서 충격적인 말을 전했다.
"큰 일이오. 누군가 고변하여 추국청을 이미 차려놓았고, 사방으로 체포령이 내렸다고 하오. 훈련도감 중군 이확이 포수 수백명을 거느리고 창의문을 나왔다는 말도 있소."
이때, 약속한 군사는 반수를 간신히 넘긴 상태였다.
그들이 판단하기에 정예병력인 장단부사 이서의 군사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에, 지금 모인 군사는 숫자만 수천이지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모두 크게 놀라 얼굴색이 굳어졌다. 이때 이귀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리고 즉시 북병사 이괄의 손을 잡고 귀에 대고 말했다.
"애초에 대장으로 약조했던 김류 공이 아직 오지 않았으니 북병사 영감께서 대장이 되어야하겠소이다. 그래야 대중을 제대로 진압할 수 있겠소. 나는 평소에 군대의 일을 익히지 못했으니 이런 급박한 때에 힘이 될 수 없소."
이귀는 북병사 이괄에게 작게 귓말을 한 후, 무리를 향해 소리쳤다.
"북병사 이괄 장군이 이제부터 우리의 대장이오. 이괄 장군께선 나 이하 그대의 지시를 어기는 자를 모두 베시오."
"알겠소이다."
북병사 이괄은 대답과 동시에 두 눈을 치켜뜨며 무리들을 둘러보았다.
이괄의 눈은 광기로 번들거렸다. 이괄은 잠시 무리를 쳐다보다가 고갯짓으로 군관들에게 신호를 했다. 이괄의 고갯짓에 군관들은 미리 준비했던 '의(義)' 자가 적힌 매듭 수백 개를 꺼내 여러 사람들에게 나눠주어 등에 붙여 의군(義軍)임을 표시하게 했다.
그 일이 거의 끝날 즈음, 이괄은 크게 소리쳐 명령했다.
"군의 일에 통제가 없으면 변고에 대처하기 어려우니, 속히 모든 군관들은 군사를 나누어 통솔하고 맡은 바 소임을 다하라. 명을 따르지 않는 자는 즉시 참하라."
북병사 이괄은 턱을 치켜들며 무리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우리에겐 천명(天命)이 있다! 모두 진격하라!"
"우와아!"
"진격하라!"
"반항하는 모든 자는 목을 베어라!
북병사 이괄은 무리들의 함성을 들으며 군관이 끌고온 말에 올랐다.
챙!
그리고 칼을 뽑아 들고,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