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귀에 각료들 소근대는 대화소리가 들린 것은...
"참 간이 크구려. 겨우 그 정도 병력으로 반정의 성공을 꿈꾸다니? 아무리 한양에서 지근거리에 군사를 가지고 있다한들 말이오."
"반정이야 왕만 사로잡으면 끝나는거 아니오? 게다가 저들끼리 적아(敵我)구분이 되질 않으니."
"내가 능양군이면 서인들의 추대를 받고 허수아비 왕이 되진 않을거요. 서인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보시오. 이들의 본심은 영구집권이오. 서인이 집권하면 피바람이 불 것이 분명하오. '숭용산림(崇用山林), 물실국혼(勿失國婚)'이라니? 권력과 왕비는 영원히 서인이 갖는다는 뜻인데, 능양군이 이를 알고 받았으면 멍청한 것이고 몰랐어도 마찬가지요. 내가 조선에서는 글 깨나 읽었는데, 이들이 정권을 잡으면 성리학은 더욱 극단적이 될거요. 물론 조선은 갈수록 문을 닫아걸 것이고."
"그럼 설마 그..."
그래 바로 이거였다.
역시 조선지부장이 천재중의 천재는 맞다.
거기에 내가 조금만 거들면 되겠어.
그럼, 다음에 편해지겠군. 아주 많이...
같은 시각, 조선 한양.
밤 2경이 넘은 시각, 한양의 북촌 외곽에 있는 어느 사대부의 사랑방에는 나직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벌써 2달이요. 2달... 이귀 공이 세 아들과 궐 아래에서 폐주(廢主 : 왕)에게 죄를 청하고 있소. 이로써 폐주의 눈을 잠시나마 가리고 있음이니 어찌 만고(萬古)에 아름다운 일이 아니라 하겠소? 우린 이때를 놓치지 말아야하오."
"맞소. 거사의 계획이 이미 탄로되었으니 죽기는 마찬가지요. 빨리 거사할 기회를 정합시다."
"훈련도감 이흥립이 박승종과 사돈이라 말하기 어렵소이다. 이귀 공의 말로는 장유의 아우 장신이 이홍립의 사위이니 장신에게 그 뜻을 전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데 어떠하오?"
"그것이 옳소. 이흥립과 도감군이 우리와 함께 한다면 걱정할 것이 없소."
"그럼 이렇게 합시다. 우리가...."
놀랍게도 조선의 왕을 감히 폐주라 칭하는 이들은 말한 순서대로 최명길, 김류, 심기원, 김자점, 구굉이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온 이름들은 왕의 사돈인 영의정 박승종, 그 박승종의 사돈인 훈련대장 이흥립, 이흥립의 사위인 장신이었다.
감히 조선의 왕을 폐주라고 칭하다니!
이는 역심을 품은 자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조옥건은 다시 말해도 안될거요. 처음에 가서 달랠 적엔 들어주지는 않았지만 다행히도 무사하게 돌아왔소. 그러나 위태로운 길이었소. 이제 다시 찾아가 이를 되풀이한다고 해서 마음을 돌릴 이치도 없을 뿐더러, 만약 잡아놓고 고변한다면 어떻게 하겠소?"
"..."
그들의 밀담은 나직한 목소리로 한참동안 계속됐다.
그런데 그때였다. 밖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렸다.
그 집의 주인은,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엄명을 아랫것들이 잊었나하여 노하려는 찰나였다.
"장신입니다."
그 누군가는 다섯 사람의 대화에 등장했던 장신이었다. 그들의 굳었던 얼굴색이 금새 풀렸다. 그리고 그들은 장신을 반가이 맞이했다.
"어서 들어와 앉게."
최명길은 나직하지만 힘있게 말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자는 곧 인사없이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며 작지만 힘차게 말했다.
"장인께서는 합류하겠다고 하십니다."
사랑방의 다섯사람은 크게 기뻐하며 너나 할 것없이 모두 일어나 장신에게 절하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장신은 그들을 만류하며 다시 말했다.
"장인께서 시기를 확정하여 전해달라고 하십니다."
"물론이오. 곧 거사일을 통기하겠소."
그들의 대화는 밤 늦도록 계속되었다.
늦은 밤, 김포를 지나 강을 거슬러 오르는 2척의 단정이 있었다.
그 단정 2척중 1척은 양화나루에 못미쳐 그 건너편에 있는 작은 나루에 단정을 대었다. 나머지 1척은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배에서 내린 3인이 십여분을 걸어 도착한 곳에는 30칸이 넘는 기와집에 그만큼 더 큰 창고가 있었다. 그들이 문을 두번 두드리고 한번 긁는 소리를 내자 소리없이 문이 열렸다. 문을 연 사람은 아무 말없이 3인을 들이고는 문을 닫았다.
"...께서는 세번째 안으로 결정하셨습니다. 기존 계획대로 진행하되 가능하다면 밀지에 적힌 것을 실행토록 지시하셨습니다."
듣고 있던 사람은 아무런 말없이 밀지를 들어 개봉했다. 그 후에 작은 책자를 꺼내더니 어떤 장을 열었다. 그리고 밀지를 펴서 그 밀지의 오른쪽 아래 구석에 적혀있는 이상한 글자와 작은 책자의 어떤 장에 쓰여진 부분을 비교했다. 그 사람은 비슷한 행동을 두어번 한 이후에 작은 책자를 다시 집어넣고 밀지를 탁자위에 반듯하게 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방의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작은 대접을 탁자에 놓고 다시 사라졌다. 그 사람은 작은 대접에 담긴 하얗고 탁한 액체를 밀지 위에 조심스럽게 뿌렸다. 그러자 오른쪽 아래 구석의 이상한 글자를 제외하곤 백지였던 밀지에 글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그 글자들을 유심히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인했소. 그대로 이행될 것이오."
그리고 그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방안의 두 사람은 문 밖으로 사라졌고 밀지는 불에 타서 재가 되어있었다.
또 다른 단정 1척이 양화나루를 지나쳐 물을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단정은 광나루에 못미처 있는 작은 수풀 사이로 노를 저어 들어갔다. 단정이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어딘가에서 수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단정은 소리를 따라 가다가 멈추고 사람들을 내렸다. 그 사람들은 수풀 사잇길을 따라 2각정도 걸어갔다.
그들이 도착한 곳에는 작은 언덕 아래로 50칸은 되어보이는 큰 기와집이 있었다. 그 언덕 뒤로는 그 집의 쌍둥이처럼 보이는 50칸 기와집이 기각지세로 서 있었다. 그들이 문을 두번 두드리고 한번 긁는 소리를 내자 소리없이 문이 열렸다. 문을 연 사람은 아무 말없이 주위를 살펴보더니 그들을 들이고는 문을 닫았다.
"...그대로 시행할 것입니다. 피곤하실 터이니 돌아가 쉬시지요."
이 말을 들은 사람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런데 그 옆의 사람이 웃으며 답했다.
"흘흘, 우리 개노미 오랜만이누!"
인조반정(反正)의 서막 : 각자의 계산
그들의 대화는 은밀했지만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언성이 높아졌다.
대체 무슨 이유일까?
"동서분당(작가 주 : 1575년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사건) 이후 기축년 옥사를 잊었소이까?, 기축년(작가 주 : 1589년 기축옥사, 선조 재위 당시, 서인에 의해 '정여립의 모반' 고발로 동인 몰락. 이후 동인은 서인에게 강경한 보복을 주장하는 북인, 서인에 보복을 반대하는 남인으로 분당함)에 그들을 말끔히 치우지 못해 이꼴이오. 그들이 폐주에게 붙어 우리 목을 조르고 있어요. 지금 그들에게 정을 두자는 말이 나오시오?"
"어허! 이거 말을 좀 낮춥시다. 큰 일이 시작되기도 전에....쯧쯧."
"일의 선후가 중요하다는 말을 그리 곡해(曲解)하시니 더 말도 못하겠소이다. 에잉~"
"공께서 말씀하신 것도 맞소. 하지만 앞으로의 일이 더 중요한 건 사실이오. '숭용산림(崇用山林), 물실국혼(勿失國婚)', 맹약을 잊으셨소이까? 다시는 패역의 무리들에게 기회를 주어선 아니되오."
"그가 받아들이겠소? 상(임금)에 오르고 입을 싹 씻어버리면 어쩔 것이오."
"산림직(山林職 : 산림의 유생을 과거없이 등용하는 관직)은 거사 후에 즉시 받아들일 것이라 약조했고 나머지는 우리가 목숨걸고 이뤄야하오. 패역의 무리를 모두 주살하면 우리만 남을텐데 겁날게 무엇이오."
"맞아요. 우리 산림, 그 중에서 옳고 곧은 이는 우리들 뿐이오. 그러니 청요직은 물론이고 중요한 자리는 모두 우리가 차지해야하지. 앞으로는 모든 국혼도 우리가 맡아야하오. 왕비와 세자빈은 물론이고 왕자군들의 비도 마찬가지요."
"우리는 결단코 정암(작가 주 : 중종때 사림 조광조를 뜻함. 성리학 근본주의자로 연산군을 쫓아낸 중종반정 이후에 중용되었으나 중종에게 사약을 받고 죽음)이 되지 않을거요. 정권은 물론이고 왕비도 포기할 수 없어요. 조선은 우리만이 옳소."
"이제 그만하고 거사일을 정합시다."
"..."
"..."
1623년 3월 초 어느 날, 한양의 북촌 외곽에 있는 김류의 사랑방에서는 이귀, 최명길, 심기원 등 서인의 주요인사들이 동녘이 밝아올때까지 그 자리를 뜨지 않았다.
쾅!
늦은 밤, 능양군은 홀로 앉아 마음을 다스리려 했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오늘 있었던 모의에서 그들이 요구한 것들을... 마치 좋은 사람처럼 그저 웃으며 모두 허락하긴 했다. 사실 과거제도는 조선 사대부를 통제하는, 조선 왕의 유일무이한 특권이었다. 과거를 통해 조정에 나아가고 과거를 통해 양반, 사대부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 과거에서 시험에 통과하건말건 왕이 그 사람을 낙점하지 않으면 그는 등용될 수 없었다.
그런데...
'숭용산림(崇用山林), 산림직 이라니!'
이는 조광조가 주장했던 '현량과'가 아닌가?
현량과는 음서제도 같은 관직천거제도로 인해 권문세족들이 발호하는 근본원인이 된 제도였다. 조선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들인 것이 바로 과거제였다. 그런데 서인들이 주장하는 산림직은 현량과 내지는 음서제도와 다를 바가 없었다. 처음에는 그 산림직이 소수겠지만 점차 늘어갈 것이 뻔했다. 왕이 아닌 산림의 사대부들이 천거하는 자리에 앉은 자들이 과연 왕에게 충성하겠는가?
이는 명약관화했다.
과거를 통해 왕의 선택을 받아 입신양명한 인재들이 왕에 충성한다. 그들은 왕의 선택을 받기 위해 충성하고 왕은 그 성과에 따라 달콤한 과실을 주면 된다. 그것이 조선의 왕이 신하들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절대권력이었다.
그런데 서인 당여들은 대체...
'감히 나를 뭘로 보고....'
오늘 밤은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렇게 되면 왕이 된다한들 왕같은 왕이 아니다. 오히려 왕이 신하들의 눈치를 살피며 살게 된다. 왕이 직접 뽑은 신하들도 못 믿을 판국에 산림직에 오른 이들과 그 당여들을 어찌 믿을까?
만약 왕의 앞에서 이리 말했다면, 그들 모두 역적으로 당장 죽임을 당해도 될 극언이었다. 감히 왕에게 왕의 권한을 내놓으란 말이었다. 이건 역심이나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능양군은 왕이 아니었다.
지금은 저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웃으며 허락했다.
능양군은 이를 갈았다.
'그래 오늘 일은 절대로 잊지 않으마. 내가 일단 오르고 나면...'
그렇게 능양군의 밤은 더욱 깊어졌다.
북병사 이괄은 호기롭게 일어나 술을 권했다.
"흐흐흐, 자 다들 쭉 들이켜라!"
"대감마님! 북병사로 영전하심을 감축드립니다."
"이 사람이? 이제 병조판서가 되실 분이시다."
"아차! 그렇지? 판서어른께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이괄은 수하들의 아부에 크게 웃으며 말했다.
"크하핫! 내 너희들을 잊지 않겠다. 범같은 자네들이 있으니 거사의 성패는 불을 보듯 뻔하다. 내가 병조판서에 오르면 너희들 모두 영감소리를 듣게 될 것이야."
"병조판서 어른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자자 그만하고 쭉 마셔라. 저 궁궐의 허수아비들은 걱정할 거 없다. 우리들의 고함소리 한번에 오줌을 지리고 벌벌 떨 것이다. 잔을 들어라. 크하하핫!"
"판서어른께서 나선 이상, 우리 앞을 막을 자는 없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우리의 성공은 따놓은 당상입니다."
"자자 모두 잔을 채우거라! 거사의 성공과 우리의 영원한 부귀영화를 위하여!"
"위하여!"
"..."
"..."
"칼 잘 닦고 명을 기다려라. 내 너희와 끝까지 함께 하리라."
충!충!충!
한양 서촌에 있는 북병사 이괄의 집에서는 술잔치가 열렸다. 그런데 그들이 하는 말이 예사롭지 않았다. 북병사는 조선의 북방이 그 임지였다. 그런데 북병사가 임지로 출발하지 아니하고 한양에 있다니? 그리고 이괄의 집에서 함께 술을 마시는 자들은 이괄 직속 군관들이었다. 북병사 이괄은 어떤 거사를 앞두고 있는 듯 했다. 이괄이 병조판서 운운하는 것도 그 거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괄의 얼굴은 술기운 때문에 갈수록 불콰해졌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은 날이 선 채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