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또 하루 해가 저물었다.
테르시오 vs 전열보병
해군사관학교 연병장.
삐~익
스페인 대 한국의 축구경기는 '3 : 1'로 또 졌다.
역시 스페인 사람들은 타고난 축구민족인 듯 하다.
10년째 축구, 족구로 단련된 우리를 정말 무참하게 박살냈다.
지난 7월, 스페인 필리핀 총독은 테르시오 장교단을 포함해서 총20명을 선발해서 보내줬다. 내가 스페인의 2배가 넘는 월급을 그들에게 약속한데다가, 총독에게 클리퍼의 추가 건조를 확약했기 때문에, 총독부 사병들까지 적극 지원했다고 한다.
지난 6개월간 동고동락하며 스페인 최강 테르시오 보병의 훈련에 매진했다. 처음엔 그들과 함께 즐길만한 것을 찾았지만 그들이 거절했다. 그들은 그냥 숙소에서 쉬거나 서울 시내에서 술을 마시러 나가곤 했다.
그러던 그들은 우리 병사들이 족구와 축구를 하는 것을 보고 함께 하자고 끼어들었다. 유럽에서 축구는 현대 축구는 저리가라 할 정도로 전투적이었다. 그들은 우리 축구의 규칙을 물어보고는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함께 하자고 먼저 제의한 것이었다.
역시 스포츠였던가!
우리는 함께 불타올랐다.
잘 만들어진 축구장에서 공 하나만 가지고 진행되는 진검승부.
사실 돈이 적게드는 스포츠를 생각하다가 축구공을 만들라고 지시한 것은 나였다. 우리가 축구하는 것을 본 영국인들이 자신들의 스포츠까지 가지고 왔냐고 비아냥거렸었다. 하지만 축구규칙을 듣고는 신기해했다. 유럽의 초기축구는 거의 전투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 후에는 영국인들도 우리가 만든 축구공을 가끔 구해가곤 했다.
지난 6개월간,
테르시오 훈련을 제외하면 계속 축구만 했다. 첫달은 축구규칙과 축구장에 익숙한 우리가 압도했다. 하지만 그들도 곧 축구규칙에 익숙해졌고, 그 후에는 이렇게 처참한 상황이다. 영국인이 축구를 잘하는 것은 골드러시 때부터 유명했다. 영국의 축구는 정말 야만인의 전투같은 축구였기에 그걸 제어할 규칙이 필요했다. 그래서 현대축구의 규칙을 도입하고 엄하게 규칙을 적용했다.
난 영국의 훌리건이 왜 생겼나 했는데 그들의 거칠고 야만적인 축구문화가 영국의 초기축구 형태였고 그것이 훌리건의 원인이라 생각되었다. 스페인의 축구도 영국에서 들어온 모양인데, 스페인 국왕도 좋아하는 스포츠라고 했다. 다만 우리가 만든 축구규칙은 놀랍다고 말했다. 야만적인 스포츠라 불리던 축구를 적절한 축구규칙으로 그 폭력성을 억제한 것을 말이다. 나도 스페인 장교단, 우리 장병들과 열심히 축구장을 뛰어다녔다.
탕!탕!탕!탕!탕!
척척!
"1중대, 선회하라!"
"정신 똑바로 차려! 2중대와 대형을 유지해!"
"이 굼벵이들아! 방진이 무너지면 너희 모두 죽는거야..."
역시 훈련은 하는 것보다 보는 것이 제 맛이다.
7개월간의 맹훈련으로 20개 중대의 테르시오 중대가 완편되었다. 중대당 250명을 기준으로 5천명의 보병이다. 이 중에서 상비군은 3천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2천명은 해군의 육전대였다.
우리처럼 평상시 해군위주로 작전하고 일부 지상전투에서 써먹을거론 테르시오가 최고였다. 물론, 테르시오도 약점이 있었다. 테르시오처럼 밀집대형은 화포의 화력이 발전함에 따라 밀집대형이란 강점이 약점이 될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 테르시오가 사라지고 전열보병이 나타난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조선이나 호주에서 예상되는 전투는 당분간 테르시오로 충분하리라 생각되었다. 화포나 총기의 발전에 따라 전열보병도 고려할 수 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특히, 호주라는 대륙의 특성상 바다로 둘러쌓인 섬인데다가 유럽을 제외하면 쳐들어올 나라가 없었다.
기본적인 전투는 해상전투가 될 것이고, 일부 전력이 지상에 상륙할 수 있다. 그런데 대규모는 아닐테니 소규모 테르시오로 대응이 가능할 것이다. 또한, 우리에게는 예비군이 있었다. 비정규군이지만 주방위군에 편제하여 조총수로 기본교육을 시킨 예비군 말이다. 이들은 나중에 병력이 부족하면 즉시 동원하여 훈련시키고 배치할 예비병력이었다.
스페인 장교단은 나의 환대에 몸둘 바를 몰랐다.
하긴 그렇게 돈을 쳐발랐는데...
그들이 나같은 호구... 아니 국왕에게 버릇없이 군다면 말이 안된다.
"전하께서 이렇게 저희를 환대하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어서 즐기시오. 내가 총독은 물론이고 국왕전하께도 감사를 표할 것이오. 그대들의 노고를 절대로 잊지 않겠소."
"감사합니다. 전하!"
"자자 잔을 채우시오! 우리 한국과 스페인, 스페인과 한국의 영원한 발전과 우의를 위하여!"
"위하여!"
역시 립서비스는 중요하다.
별다른 보답없이 립서비스만 있다면 모를까? 약속했던 2배의 보수에 성과급까지 푸짐하게 얹어줬다. 아까 말한 것처럼 그들에게 나는 진정한 호구였다.
그뿐인가?
필리핀 총독에게 보내는 선물도 화려했다. 그들이 원하던 선박건조도 후한 조건에 해준데다가 마닐라에 남아도는 구리도 잔뜩 매입해줬다. 나는 그 구리들을 다른 곳에 더 비싸게 팔아먹을 거지만 판매처가 달리 없는 필리핀총독에게는 처치곤란한 애물단지였다.
물론 필리핀 총독이 애타게 원하던 클리퍼 설계도는 어림없었지만 클리퍼의 충분한 수량 건조에는 기분좋게 합의했다. 원래는 클리퍼 추가건조를 거절하려고 했지만 스페인 장교단 일부를 군사고문으로 영입하는 조건으로 받아들였다.
앞으로 화포의 발전에 따라 전열보병이 중심이 될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전열보병에 대해 준비는 이미 하고 있다. 그러나 전열보병은 화포와 총기의 발전을 전제로 한다.
아직 그에 걸맞은 화력이 부족하니 전열보병은 발전과제로 남겨둬야했다. 빠르면 50년 전후로 전열보병이 전장과 보병의 주인공이 된다. 테르시오는 그때까지다. 테르시오는 여진족 기병과의 전투까지 염두에 둔 나에게 당분간 유용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만약 지금 플린트락과 강력한 야포가 있다면?'
아마도 플린트락이라도 있다면 테르시오는 건너뛰고 전열보병을 우선 생각해 봤을 것이다. 분당 3-4발의 연사라면 선형 대형으로 전열보병을 운용하더라도 연사화력으로 적을 압도할 수 있으니 말이다.
아아~ 물론 플린트락 조총은 이미 시장에 나와 있긴 했다.
그 가격이 너무 비싸고, 연사속도가 예상보다 다소 떨어져서 그렇지만...
유럽의 조총기술자들은 벌써 수십년 전에 플린트락에 대한 기본 설계를 마쳤다. 하지만 부싯돌의 가격, 제작비용 등이 매치락에 비해 6배에서 심하면 10배를 초과했다. 가격이 비싸더라도 성능이 좋으면 된다. 그런데 그렇지도 못했다.
나는 플린트락의 개량을 지시했다.
우선 발사속도에 주안점을 두고, 그 다음 안정성을, 마지막으로 대량생산에 유리하도록 연구의 목표를 설정하도록 명령했다. 거기에 내가 알고 있는 미래의 지식을 가미해서 연구방향을 알려주었다.
전열보병과 강력한 야전대포...
이것이야말로 풍운아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포병장교를 넘어 장군이 되고, 결국 황제가 된 무기였다.
나폴레옹은 강력한 포병으로 적 밀집대형을 분쇄했다. 적의 선봉은 나폴레옹군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예봉을 빼앗겨 산산이 흩어졌고, 그런 적의 전력은 각개격파되었다. 유럽의 전장은 불과 수십년 후에 전열보병의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전열보병도 무적은 아니다.
전열보병이 선형 대형으로 길게 배치된 것은 치명적 단점이다. 전열보병이 전방의 적과 전투중일때, 그 전열이 선형으로 얇고 길게 배치되었으므로 측면이나 후방은 무방비상태나 다름없다.
그 측면과 후방을 적 기병이 소수라도 난입한다면?
그것은 재앙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전열보병은 화력이 분산되어 전멸될 것이다. 따라서 전열보병은 측후방을 지원할 기병 등의 병력도 준비해야한다. 지원병력들은 적이 전열보병의 측후방을 공격하지 못하게 막고 적이 병력을 집중하지 못하게 기만하는 역할도 해야했다.
우리 한국의 현실에서... 조총은 플린트락 이전의 매치락이라 연사능력이 부족했고, 화포(야전대포)도 마찬가지였다. 화기의 발전이 부족한 현 상황에서는, 기병의 접근은 장창병이 막으면서 화력의 투사는 숙련된 조총병이 맡는 테르시오가 보다 효율적이다.
전열보병에 대한 아쉬움은 화기의 연구개발이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일 때로 미뤄두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나는 테르시오 훈련을 하면서 플린트락과 개량된 야포의 필요성을 더더욱 절감했다. 연구진에게 플린트락과 야포의 연구개발을 독려한 것은 당연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제병합동전술을 도입했다.
다시 말해 서로 다른 병과인 보병, 포병, 기병 등을 중대, 대대, 여단의 부대 단위 별로 혼성배치했다. 예를 들어 보병대대에 포병과 기병을 적당하게 배치해서 상호 약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극대화하는 전술이었다.
또한 테르시오를 맹훈련하면서 스페인의 무장들도 제대로 복제했다.
테르시오의 장창, 갑옷을 갖추고 나니 훈련중인 장병들의 얼굴에도 자신감이 엿보였다. 이제야 기본적인 군사력의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테르시오 1개 중대의 편성에 드는 비용이 소형 스쿠너 건조비용과 비슷했다. 비싸더라도 장병의 안전과 전쟁승리를 위해선 필요한 것이니 전혀 아깝지 않았다.
앞으로의 당면과제는 테르시오의 기본적인 대형과 전술을 실전에 대입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김씨 아저씨가 맡았다. 사실 이번 테르시오 도입 및 훈련에 김씨 아저씨만큼 열정적으로 참가한 사람은 없었다. 돌쇠할아버지도 흥미를 보였지만 김씨 아저씨만큼은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서로 투닥거리면서 다투기도 했다. 김씨 아저씨는 집단전투를, 돌쇠할아버지는 유격전투를 좋아했다. 그렇게 서로 전략전술을 보는 관점이 달랐던 것이다.
김씨 아저씨는 테르시오가 조선보병은 물론이고 기병과의 전투에서 전술적 우세를 점할 것이라 예측했다. 단단한 밀집대형으로 적을 분산시키고 각개격파하는 것. 테르시오의 기본 전술을 조선 보병이 극복하기 쉽지 않다고 했다.
또한 테르시오의 대형에 조선기병의 돌격이 다소 제한될 것이고 유일하게 궁병으로 대응이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테르시오의 중갑옷은 그것도 어느 정도 대비가 된다. 그래서 김씨 아저씨는 조선 궁병에 대한 대비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김씨 아저씨 말대로 테르시오가 조선에서도 무적 또는 우세할지는 정말 두고 봐야 한다. 스페인이 자랑하던 무적함대도 그들이 얕보던 영국에 깨졌다. 이론과 실제는 다른 법이니 자만하면 안된다.
이렇게 테르시오 보병까지 완편 되고 나니, 긴장감이 풀린 듯, 며칠동안 심하게 몸살을 앓았다. 그리고 며칠 후,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있던 차에 긴급 보고가 들어왔다.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아니, 인조반정(仁祖反正)이 벌써?
테르시오 대형입니다.
인조반정(反正)의 서막 : 서인(西人) 결집
호주 서울, 내각 대회의실.
내각 긴급회의는 정보부장의 긴급보고로 시작됐다.
"1622년 12월을 전후하여 평산부사 이귀란 자가 장단방어사 이서와 합세하여 거사하려다 유천기의 역모 고발로 중단되었습니다. 모두들 왕이 이귀 등을 역모로 처분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불문에 붙였습니다. 이는 왕이 대북(大北 : 광해군 당시 정권을 잡았던 사대부 세력으로 그 중심은 이이첨.)과 중북(中北)의 모함에서 나온 것이라 의심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풍문만으로 옥사를 일으킬 수 없다고 하여 불문이유를 들었으나 서인(西人)의 당여인 김자점이 중간에서 수를 쓴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정보부장은 탁자의 찻잔을 들어 잠시 목을 축이고 보고를 이어갔다.
"왕은 별다른 처벌없이 이귀를 파직했을 뿐 입니다. 그럼에도 이귀가 그의 세 아들과 거의 두달 가까이 대궐 앞에서 죄를 청하고 대질을 원하는 상소까지 내었습니다. 왕은 붕당 간의 모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하여 역모처분을 그만두었습니다만, 서인의 움직임은 여전히 심상치 않습니다. 김자점, 송영망, 한교 등이 각각 비밀리에 사병 수백명을 모집하여 거느리고 있습니다. 이 사병들은 대수로울 것이 없습니다. 궁궐의 숙위를 담당하는 훈련도감이 움직이지 않는 한, 서인의 반정은 실패할 가능성이 거의 십할이라 사료됩니다."
내각과 나는 잠시 침묵했다. 수상을 비롯해 각료 대부분은 내게 시선을 집중했다. 나는 각료들을 둘러보고, 잠시 생각하다 정보부장에게 질문했다.
"서인이 옹립할 자는 능양군이 확실하오?"
정보부장은 나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자신있게 대답했다.
"구할이상이라 사료됩니다. 첫째, 서인 중 핵심인사인 구굉이 능양군의 외숙입니다. 구굉이 수백금을 들여 사병을 모았는데 확인결과 그 돈의 출처는 능양군입니다. 둘째, 능양군의 아비는 정원군이고 동생은 능창군 입니다. 왕의 옥사에 휘말려 동생은 유배지에서 자결하고 아비는 재산을 빼앗겨 홧병에 죽었습니다. 능양군 자신이 왕에게 씻지 못할 원한이 있습니다. 셋째, 왕이 폐위될 경우, 선왕이 후위로 생각했던 신성군의 후사 등을 감안한다면 역시 능양군 입니다."
나는 잠시 상념에 빠졌다.
그래,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이 일어난 순서는 잘 알고 있었다. 정보부의 보고로는 인조반정이 성공하기 어려워보인다고 하지만 실제 역사에선 기적적으로 성공한다. 현재 내각의 방침은 실제 인조반정이 성공할지 여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가만히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나도 내각의 방침에 별 이견없이 동의했다.
비록 작은 변화겠지만, 내가 조선을 변화시킨 것들이 다소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고민했다.
'나로 인해 인조반정이란 역사적 대사건도 혹시 바뀌는게 아닐까?'
만약 내가 역사를 잘 알았더라면 인조가 능양군인지 아닌지 잘 알 수 있었을텐데. 너무 아쉬웠다. 나는 전쟁사, 해양사는 잘 알았지만 인조반정에 대해서는 잘 몰랐기에 선무당이 사람잡는 일은 하지 못할거 같다.
그래서 정보부의 일에 가타부타 끼어들 지 못했다.
솔직히 내가 인조반정에 대해서 아는 것은 딱 두 가지였다.
첫째는 인조반정이 거의 반쯤, 기적적으로 성공한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광해군은 오래도록 살고 그 가족들은 홧병으로 죽는 부인과 사사되는 세자부부였다.
여기서 퀴즈!
-문제 : 조선시대 폐세자 3명의 이름은?
-정답 : 태종의 맏아들 양녕대군 이제, 연산군의 아들 폐세자 이황, 광해군 아들 폐세자 이지.
생도 시절, 역사시험에서 단 한명도 정답을 써낸 사람이 없는 문제였다. 출제한 역사 교관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문제를 출제한 건지 모르겠다. 맹세코 당시 역사책에 폐세자 이름도 안나왔었다.
나중에 역사 교관이 설명해줘서 알았지만 생도들 모두 분노했었다. 아니 폐위가 된 왕은 알아도 폐세자가 된 사람의 이름은 누가 알까? 왕도 태종, 연산군, 광해군을 알지 이름을 아는 경우는 드물지 않나? 솔직히 이런 자잘한 것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충격적인 기억일수록 오랫동안 남는 것 같다.
하여간 폐세자 이지 부부는 유배되어 위리안치된 강화도에서 탈출하려다 실패해서 죽는다고 했다. 또한, 광해군의 부인, 폐비는 폐세자 부부가 죽자 홧병으로 죽는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이것들이 다 쓸데없는 기억이란 것이다.
그렇다고 눈만 뜨고 가만히 있기는 좀 아쉬웠다.
그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