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225)

"야! 너도 오줌 지리던 때가 있었지. 크크크."

"뭐 임마? 내가 언제..."

"닥쳐라 이놈들아. 이 엉아가 말이야..."

"좌현 함포사격 준비하라! 복명복창!"

"좌현 함포사격 준비! 준비! 준비!" 

"좌현 함포사격 준비 완료!"

"오랜만에 네덜란드 사략선인가?"

"아마 그럴걸? 그 놈들 지난 번에 우리한테 털리고는 이를 갈고 있으니까 말이야."

"흥! 그래봤자지. 이번에 제대로 한번 붙어보는거야. 아예 나포해서 우리가 먹는거지."

"퍽이나? 이번에도 경고차원에서 끝나지 않을까?"

그때였다.

"땡!땡!땡!"

"비상해제! 적선이 퇴각한다. 전투대기 유지하고 현위치에서 휴식할 것."

그때 였다.

"펑","췩"

갑자기 포성이 울리고 중갑판에 미약한 충격이 있었다. 그 후에 다시 포성이 들리진 않았다. 부갑판장 이하 모든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보며 이상을 확인하는데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기억에는 하갑판 쪽 계단에 있었던거 같은데...

"여기 포탄이 관통했다. 이런 한명 쓰러졌어. 의무선원 불러와."

"의식이 없다! 빨리 중갑판으로 끌어내고 자리 치우고 뉘여라. 의무선원~"

쓰러진 것은 녀석이었다. 

네덜란드 사략선이 아무런 기대없이, 의미없이 쏜 대포가 1번함 외벽을 뚫고 녀석을 충격한 것이었다. 

'제발! 일어나라. 일어나. 이 새끼야!' 

그는 소리없는 괴성을 지르며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당장 의무선원 멱살을 잡아 오려고 일어난 찰나에 의무선원이 도착했다. 의무선원은 녀석의 상의를 벗기고 상체를 면밀히 살폈다. 녀석의 복부에는 직경 4센치정도의 부러진 선재가 깊이 박혀있었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지면서 머리를 부딪힌 듯 했다. 아마도 포탄에 직격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의무선원은 재빨리 독한 술을 꺼내 자신의 손과 녀석의 상처부위에 붓고 닦았다. 그리고 가방에서 바늘과 실을 꺼내 놓고 잠깐 준비를 하더니, 갑자기 부러진 선재를 뽑았다. 부러진 선재가 뽑힌 자리에선 피가 서서히 스며나오고 있었다. 의무선원은 상처부위를 다시 꼼꼼히 보면서 가시 몇개를 뽑았다. 그리고 다시 독한 술을 약간 붓고는 바늘에 실을 꽂아 상처를 꿰매기 시작했다. 촘촘히 꿰맨 부위에서 피가 서서히 멈추기 시작했다. 의무선원은 그걸 보더니 다소 안심한 듯 한숨을 쉬었다.

"뱃속 장기는 다친거 같지 않아. 아마 피가 멈추고 운이 좋으면 금새 털고 일어날거야. 운이 나쁘면 고생할거고. 그런데 말이야. 머리는 나도 몰라! 용왕님께 기도하자구."

그 말을 끝내고 의무선원은 녀석을 선실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함장도 녀석의 상태를 확인하러 선실로 왔다가 떠났다. 

의무선원은 자신이 맡은 다른 업무를 하기 위해서 그에게 녀석을 맡기고 선실을 떠났다. 녀석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녀석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손가락만이 아니었다. 잠시 후엔 손도, 팔도, 아니 온몸이, 아니 거기에 내 영혼도 떨렸다. 세찬 여울에 몸을 던질때도, 스스로 목을 매었을 때도, 이렇게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담대했었다. 그때와 무엇이 다른 것일까? 그는 깊이, 바닥이 없는 심해속으로 침잠되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불현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내가 너를 두고 잠이 들다니.' 

그는 가늠할 수 없는 자책감에 온몸이 떨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때, 녀석의 눈꺼풀이 조금씩 떨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의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솟아 올랐다. 혹여 녀석이 깨어나는 것이 보이지 않을까 걱정되어 재빠르게 눈물을 훔쳤다. 녀석의 눈꺼풀은 거칠게 저항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녀석은 온전히 두눈을 떴다. 감동이었다. 녀석은 두 눈을 뜨고는 눈동자를 굴리더니 그를 쳐다보며 함박 웃었다. 

그런데?

녀석의 눈동자가 이상했다.

생각은 맑고 밝았으나, 그 창인 눈동자는 항상 혼탁했었다.

그 아쉬움에 의원을 찾아가 보인적도 있었다. 의원은 이리 말했다.

'어릴 때에 머리를 다쳤거나, 날때부터 잘못되어 그 창(窓)이 흐려진 것이다.'

라고 말이다. 

아아! 그런데 오늘 녀석의 창이 맑고 뚜렷했다. 아주 깨끗했다. 

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녀석의 깨끗한 눈빛에 빠져들고 있었기에. 그리고 깨달았다. 그는 녀석의 부재(不在)가 두려웠던 것이다. 세찬 여울에 몸을 던졌을 때, 스스로 목을 매었을 때와 달리 말이다.

처음엔 바보라 놀렸었다. 그 후엔 그의 외로움을 달래줄 아랫것. 그러나 녀석의 순수함을 알고 난 후엔 부러움과 부끄러움이 혼재했다. 녀석은 나에게 무엇이던가? 

그는, 녀석의 함박 웃음에 겨우 눈물을 그칠 수 있었다. 이제 웃을 수 있었다.

이제 웃을 수 있었는데...

"도...련..님?"

"그래 나 여기 있다."

"히..히! 어..때.유? 나 잘했...쥬?"

녀석의 눈빛이 본래의 맑고 깨끗한 빛을 찾은 시간은 오직 순간이었다. 

"이..이, 둔하고 어리석은 녀석!"

"미...안해...유..."

차라리 웃지나 말 것이지. 녀석의 함박 웃음을 앞에 두고 그는 마주 웃을 수 없었다.

"안 돼!"

녀석에게 힘껏 소리쳤지만 입 밖으로 던져진 외침은 극심한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처럼 말라비틀어진 소리였다. 그 가래끓는 듯한 그의 외침에 녀석의 눈빛은 잠시 밝아지는 듯 했다. 

"마..님...과...약...속..해..는..데...미...안......."

그는 철없던 어린 시절에 녀석을 바보라 놀리며 잠시나마 자신의 서자 신세를 잊을 수 있었다. 그는 비록 사대부가에 태어났으되, 어미의 더러운 피를 받고 태어났기에 그 어미를 죽기전까지 원망했었다. 

녀석이 바보라니?

그에게 유일한 친인(親人), 그 어미조차 원망으로 보냈던, 그가 바보였다. 다시는, 이제 다시는 그런 바보짓을 않으려 했는데. 녀석이 떠나고 있었다. 

그는 어미가 친가에서 데려온 녀석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어미의 친가에 남았던 외조모가 세상을 떠나고 외로이 남은 녀석을 어미가 데려왔었다. 정말 '멍청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의 어미는 그와 녀석을 구분하지 않고 똑같이 대했었다. 그것이 서러워 녀석을 괴롭히고 했는데도... 어미와 나를 따르며 바보처럼 순진하게 웃는 녀석이었다. '어미와의 약속?'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녀석이 천만배는 더 중요했다. 그런 소중한 녀석이 아주 멀리 떠나고 있었다. 

'말하지 마라. 말하지 마.' 

녀석은 말을 하면서도 내 눈을 힘주어 쳐다보려 했다. 하지만 녀석의 눈은 아무 힘이 없었다. 녀석의 눈꺼풀은 힘없이 떨렸다. 그러기를 잠시, 영원히 아래로 닫겼다. 

그런 녀석의 얼굴이 밝아서 서러웠다.

그는 꺼억꺼억 소리만 냈다.

'사람이 가장 아름답단다.'

어미는 말했었다.

그는 그 말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때려죽인다한들 인정 못했다. 

그래서 세상을 증오했다. 아니 사람을 증오했다. 

세상이 사람을 이리 만든걸까. 아니면 사람이 세상을 이리 만든걸까. 

그래서 세상도, 사람도 증오했다. 

어미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 누구도 그녀의 죽음을 예상치 못했었다. 허망했다. 

사람이 가장 아름답다고 한 사람. 

그가 보기엔 사람이 아름다운게 아니라 아름다운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 아름다운 사람. 

원망했으되 사랑했고, 사랑했기에 원망했던 사람이 또 떠났다.

아름다운 사람아!

어미도, 녀석도.

외전 : 조선책략 - 수상(首相)의 하루

수상은 잠시 숨을 골랐다.

개국 이후, 정말 숨가쁘게 달려왔다. 

우리 한국은 건국 10주년이 얼마 남지 않은 신생국가다. 푸른 바다 저 멀리, 제대로 알지도 못하던 미지의 섬. 아니 이제는 미지의 대륙이라 부른다. 우리가 호주대륙이라 부르는 거대한 땅에, 우리가 세운 나라다. 새 희망이 넘실거리는 바다였다. 하늘 높이만큼 깊은 바다였다. 조선에서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우리의 나라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 왕과 사대부의 나라다. 

조선의 산천은 오롯이 왕과 사대부의 것이다. 수상인 자신도 그걸 부인해 본 적이 없었다. 단 한번도. 조선에서 나는, 조선을 '우리의 나라'가 아닌 '사대부의 나라'로 생각했고, 조선의 왕은 나라의 제일가는 사대부라 여겼다. 그래서 왕에 대한 충성은 당연했다. 그것은 천명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국은 내 나라이자 우리들의 나라다.

처음엔 암담했다. 우리들의 힘으로 가능할런지 몰랐다. 분명히 해야했지만 할 수 있을지 불분명했었다. 그 불가능해 보이던 건국을 우리는 해냈다. 그 자부심은 나 뿐만 아니라 서울 거리의 누구를 보더라도 그 얼굴 전체에 역력히 드러났다. 수상관저를 비롯해서 거리의 누구라도 그 얼굴에서 자부심, 자신감, 새로운 희망들이 묻어나왔다.

내가 유럽에 가본 적은 없지만, 유럽인들이 말하는 서울의 거리는 유럽의 주요 도시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다고 한다. 유럽인들이야 유럽의 거리와 비교하겠지만, 나는 한양의 거리와 비교한다. 대궐과 북촌 사대부의 집을 제외하면 너무나 더러웠다. 도시계획은 없었다. 대궐 앞길을 제외하면 난잡하게 들어선 집과 구불구불 더러운 거리들. 혹여 초가집에서 불이라도 나서 옮겨붙으면 어떨지 조마조마했었다.

서울의 거리는 깨끗하고, 밝은 표정의 사람들이 그 거리에서 분주하게 살아가고 있다. 처음 이민선을 타고 왔던 사람들. 그들의 표정은 항상 똑같았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지. 희망이 없던 거무죽죽한 표정들. 그런 사람들이 변했다. 같은 경험이 아니었다면 그들이 조선에서 온 이민자란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 였다. 

"각하! 내각회의가 준비되었습니다."

"알았네."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와 내각 각료회의 준비가 끝났음을 알려주었다. 

오늘 내각회의의 안건은 '조선책략'이다. 

2년전인 1619년에 명과 조선의 연합군이 여진족 누르하치에게 대패하면서 만주의 패권은 오롯이 여진족에게 돌아갔다. 당시 국왕전하는 물론이거니와 내각과 의회도 공황상태에 빠졌다. 

국왕전하께서는 모든 정보력을 총동원해서 사르후 전투의 결과에 대해 평가하고 대책을 마련하도록 지시하셨었다.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나고 사르후 전투의 결과에 대한 내각의 평가회의가 있었다. 당시 내각의 평가회의 후, 국왕전하의 제안으로 난상토론을 했다. 위아래 없이, 국왕전하의 말을 끊건 말건, 각자의 생각을 형식없이 자유롭게 말했다. 

그때 토론의 결과로 국왕전하께서는...

"수상께서는 내각에 정보부를 신설할 방안을 마련해서 보고하세요. 정보부는 국내정보와 해외정보로 부서를 나누고, 해외정보는 유럽, 인도와 동남아, 명, 일본, 유구국, 만주, 조선을 중심으로 가장 적합한 담당자를 선발하시오. 세부 사항은 수상께 일임하겠습니다."

국왕전하께서는 나와 내각에게 정보부의 신설을 명하셨다. 

그렇게 정보부가 창설되고 각국의 정보가 모이기 시작하자 해외무역은 물론이거니와 각국의 정세에 대한 판단도 쉽고 정확해졌다. 정보부의 역량이 커질수록 우리 한국의 국익도 잘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정보부의 보고를 바탕으로 '조선책략'을 의논할 예정이다.  

'조선책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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