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225)

"흘!"

노인, 그의 조부는 말을 이었다.

"그 놈은 쓸모가 없어. 너와 바뀌었다면 바로 죽였을지도 모른다."

"그건 대감마님께서 천년만년 해먹으셔야지요!"

"흘! 손자의 재롱이 귀엽구나.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너도 알 터인데?"

"과유불급이라 했습니다. 더 이상은 외려 화를 부를 것입니다."

"흘, 그 버리지 같은 것들은... 너만이 할 수 있다. 그걸 해내라! 기다리마."

그 말을 남기고 노인은 유령처럼 사라졌다. 순간 황량한 가을바람이 불어 닥쳐 그의 얼굴을 긋듯이 지나갔다. 싸늘한 미소 한 가닥이 그의 얼굴에 새겨졌다.

◆ ◆ ◆

◆ ◆ ◆

한양 북촌의 어느 집 내실.

"흐흐흐, 그의 노욕(老慾)은 이해할 수 없구려. 주상께서 이를 받아들일지 알 수 없지만 우리에겐 아무 상관없소이다. 주상의 변덕에 휩쓸려갈 뿐임을 어찌 모르는지. 쯧쯧."

"그에게 남은 것은 이름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입니다. 그가 그 시간을 벌어줄테니 그에게 이름을 주고, 거둬들이면 족합니다."

"그에게 이름은 남겠으나 씨가 마를텐데 안타깝구려. 크하핫!"

◆ ◆ ◆

◆ ◆ ◆

"어찌 이럴 수가 있는거요?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당신들에게 베푼 은혜를 잊은거요? 내가 죽으면 당신들이 온전할 것 같소이까?"

"무슨 말을 하는게요? 우리가 무슨 은혜를 받았다는 것인지 모르겠네. 여봐라 여기 손님 나가신다."

"영감! 문앞에 소금을 뿌려하겠소. 아침부터 재수없는 위인이 드나들었으니 말이오."

"하하하! 그말이 맞소. 여봐라. 대문앞에 소금 한됫박 뿌려라."

"....."

장년의 사내는 침음을 삼키며 은혜를 잊은 자들을 노려보고 급히 자리를 떴다.

◆ ◆ ◆

이럴 줄, 이미 알고 있었다.

음험한 주상은 대북(大北)에게 정권을 주고 있었다. 

대북은 다수인 서인과 대척점에서 있었고 또 다른 소수 붕당들이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있었다. 그 와중에 조부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를 탐냈다. 결국 그 자리에 올랐다. 불과 석달만에 죽었지만. 하지만 그 자리에 오르기위해 사용한 권도(權道)는 독배(毒杯)였다. 

조부의 욕망은 이뤘으나 그 후손은 끊어질 것이다.

비참하게 거열형을 당하느니 쾌히 스스로 목을 매리라. 

그런데...

그가 다시 눈을 떴을땐, 해가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분명 방에서 목을 매어 죽었을 터인데 산 속 작은 구덩이에 누워있었다.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몸에 힘이 없었다. 위에 덮인 낙엽을 치우려고 바스락 거리는데 누군가가 다가왔다. 

"도련님! 가만히 계셔유. 그리고 이것 좀 드세유. 출출하실거구만유."

또 그 녀석이었다.

"여기가 어디냐?"

녀석은 빙긋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목멱산 봉수대 밑이구만유. 도련님께서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셨어유."

그는 이미 잘 알면서도 다시 물었다.

"지금 집은 어떠냐?"

"말두 마세유. 대감마님부터 싹 잡혀갔어유. 삼족을 멸한다구 아씨까지 죄다 잡혀갔어유. 도련님은 제가 모시고 여기로 왔구유."

"흐흐흐, 난 죽는 것도 마음대로 못한단 말이냐?"

그는 허탈하게 웃으며 반문했다.

"도련님~ 지가 다른 건 몰라두유. 도련님은 알아유. 제가 어릴때부터 도련님은 큰일하실 분인걸 말이에유. 히히히"

"예끼! 내 나이가 벌써 서른이다. 그런데 계속 도련님이냐?"

"도련님이 입에 붙어서유."

"흐흐흐, 그래 이제 달아나면 살 수 있겠느냐? 나는 대역죄인의 후손이다. 그냥 죽는게 낫다. 날 버리고 집으로 돌아 가거라. 너는 누구보다 신실하니 누구든 널 해하지 않을 것이다. 가서 살 길을 찾아라."

"헤헤헤! 도련님이 왜 죽어유? 앞마을 덕칠아저씨한테 들었는데 이어도에 가면 아무도 차별받지 않는데유. 도련님도 말이에유. 우리 이어도에 가유. 네?"

"그딴 헛소리는 듣지 마라."

"그게 왜 헛소리에유? 덕칠아저씨는 평생 거짓말을 해본적 없는 사람이에유. 도련님 저랑 같이 가유. 김포에서 배를 타고 가면 금방이래유."

"흐흐흐..."

그는 잠시 말을 잊었다. 

그렇게 꼬박 이틀이 지나고 나니 살고 싶다는 마음보다 이 풍진세상을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강해졌다. 그러면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과연 이어도란 곳이 있을까?', '그곳은 누구든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라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가 아는 상식에서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예전부터 이어도와 금적산에 대한 풍문을 익히 들었었다. 

하지만 그건 허망한 이야기였다. 그렇게 다시 마음이 잦아들었다. 헌데 그러다가 또 미련이 생긴다. 그도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접받고 살고 싶었다. 또 이틀이 지났다. 제대로 먹은 것이 없는데도 머리는 맑고 배는 고프지 않았다.

"도련님! 덕칠아저씨가 글피에 배가 온데유. 우리도 거기 가유. 대감마님부터 전부 양화나루터에 계세유. 다 돌아갔구만유. 여기 계시면 도련님도 큰일나유. 저두 도련님 따라갈래유."

"..."

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을 때, 목멱산 위로 아스라이 떠오른 석양은 그날따라 붉었다. 그리고 그 석양이 까매진 때에 그는 그 자리에 없었다.

외전 : 더러운 피 02 - 아름다운 사람아

녀석과 함께 목멱산 봉수대 밑 동굴을 몰래 빠져나온지 10달이나 지났다. 녀석이 말한 덕칠아저씨란 사람은 무역상단의 한양지부 파견직원이었다. 그를 따라 김포의 안가로 들어가 3일을 지냈었다. 그리고 새벽무렵에 단정을 타고 바다로 나가 3번함에 올랐다. 

거기엔 수백명의 노비, 서얼 들이 있었다. 불안한 얼굴들. 하지만 희미하게나마 희망이 엿보였다. 그와 녀석은 3번함에 오르자마자 선실바닥에서 잠이 들었다. 마치 죽은듯이 말이다.

"20번 올빼미! 입수준비 완료."

"21번 올빼미! 입수준비 완료."

...

...

...

이어도는 정말 있었다. 

누구나 차별받지 않는다는 것도 이젠 믿는다.

양반이건 노비건 차별은 없었다. 

특히, 기본군사훈련에서는 말이다. 

비록 서자일지언정 사대부가에서 지냈던 그는, 이렇게 강제적인 훈련을 받을지 상상도 못했었다. 그래서 훈련교관들은 물론이고 훈련동기들의 집중적인 비웃음을 받으며 꼴찌로 훈련을 마쳤다. 그의 인생에서 단 한번도 없었던 꼴찌였다. 

그 힘들었던 3개월간의 기본훈련을 수료하고, 그와 녀석은 함께 1번함 승조원으로 배치되었다. 그는 녀석과 함께 승진하고 싶어 5개월째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비록 생각은 느렸지만 깜짝 놀랄 정도로 행동이 빠르던 녀석이었다. 어쩌면 본능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녀석은 그와 연관된 것에는 귀신처럼 빨랐으니 말이다. 녀석의 순박한 눈빛은 어딘가 혼탁한 기운이 느껴지긴 했었다. 하지만 생각만은 맑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자네 서기로 근무하지 않겠나? 원한다면 바로 보직변경 해주겠네."

무역상단 1번함장이 그에게 권유했다. 하지만 그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함장님께서 제게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는 중갑판의 업무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습니다."

함장은 고개를 숙여 책상 위 항해일지를 확인하며 손가락으로 펜을 두드리다 그를 바라보지 않고 대답했다. 함장의 고민은 무척 짧았다. 하지만 아쉬움은 남았다.

"자네에게는 재능이 있어. 난 알 수 있네. 기다림세. 이만 업무에 복귀하도록."

"충!"

그는 절도있게 경례하고 함장실을 빠져나갔다. 두어개의 선실을 지나 계단을 내려가니 중갑판이 보였다. 1번함은 만재배수량 100톤급 스쿠너로 조선과 일본, 일본과 유구국 사이에서 정기적으로 중개무역을 했다. 

1번함의 함장 이하 선원들은, 무역상단의 첫번째 건조, 제1번함의 일원으로써 크나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무역상단주는 1번함으로 첫 무역을 성공시켰다고 했다. 그 첫 무역을 성공시켜 얻은 자본금을 바탕으로 굴지의 무역상단을 일궈냈다. 현재는 무려 6번함까지 총 6척의 선박을 보유한 상태였다. 무역상단주는 1번함장을 무척 신뢰하여 가장 민감한 지역인 조선과 일본의 중개무역에 투입하였다고 했다.

그는 중갑판에 도착하자마자 중갑판의 책임자인 부갑판장에게 복귀보고를 했다. 

부갑판장은 부식과 식수재고를 면밀히 확인하고 있었다. 불과 7시간 후면 목적지에 도착하는데도 그랬다. 그는 처음 1번함에 탑승해서 하갑판에서 근무했다. 하갑판은 매의 가장 아래층에 있는 곳으로 2명의 선원이 근무했다. 

하갑판에는 가장 무겁고 배의 균형을 잡는데 중요한 화물들을 잘 배치하여 항해중에 움직임이 없도록 유지해야했다. 그래서 항해중에 그리 할 일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중갑판은 달랐다. 하갑판과 달리, 갑판 아래에서의 모든 업무는 중갑판에서 진행되었다. 1번함은 맨 아래 하갑판, 중갑판, 맨위 상갑판의 선내 2층이고 선상1층이었다. 하갑판에는 창고 외에 별다른 것이 없는 단순 적재물 구역이었지만 중갑판은 선실, 함포, 적재구역, 완충지역, 작업실 등이 복잡하게 혼재되어 있었다. 물론 그 복잡하단 것도 정말 철저하게 설계되었기에 모든 구획이 그렇게 만들어진 이유가 있었다. 한마디로 군더더기 없이 딱 맞도록 지어진 배였다. 1번함은 무역상단주가 설계부터 선재준비까지 모든 것을 관여했다고 말했다. 믿기지 않지만 말이다.

그 중갑판 업무는 기본훈련에서 배운 것만으로는 좀처럼 익숙해지기 힘들었다. 그래서 5개월째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말이다.

"히히. 도련님 어디갔다 오셨어유?" 

"도련님이라 하지 마라. 우린 같은 계급이고 1번함의 동료선원이다."

"히히. 그게 맘대로 되나유?"

"끄응, 그래도 조심해라. 부갑판장님께 혼난다."

"알았어유."

"너희들 또 노닥거리냐? 곧 도착할텐데 하역 순서대로 작업준비해야지. 이러다가 승진누락되고 후회한다. 명심해."

"네 알겠습니다."

"네 알겠어유."

"곧 항구에 도착한다. 잡담 그만하고 마무리에 집중해."

이렇게 이번 항해도 별 일 없이 끝나가는 듯 했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땡!땡!땡!"

"비상!비상!비상!"

"전원 전투준비,  전투준비, 전투준비!"

"시벌, 도착 3시간 전인데 무슨 일이지?"

"입다물고 적재물 고정 단단히 해라. 고정 끝나면 각자 위치에 전투대기하고, 지시 떨어지면 그에 따라 빠릿빠릿하게 행동해!"

"네 알겠습니다."

"우리 신참들은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오줌 지리겠구먼!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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