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225)

세연 모녀는 이상함을 느꼈다. 하지만 어찌하리요? 세연 모녀는 목욕과 식사를 마치고 저녁시간 늦도록 별채에서 말없이 기다릴 뿐이었다. 그렇게 기다림에 지칠 즈음, 별채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 사람이 들어섰다. 

그 사람은 키가 크고 체구가 당당한 사람이었다. 세연 모녀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별채 방안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저 일어나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일수유의 시간이 흐르고 문이 닫혔다. 그가 말했다. 

"이 개노미가 안방마님과 세연아씨를 뵈옵니다. 크흐흑."

세연 모녀는 소스라치듯 놀라 고개를 들어 그 남자를 보았다. 세연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아는 듯 했다. 어머니는 그저 소리죽여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세연 또한 아무말을 못했다.

"마님! 세연아씨! 이 개노미가 마님과 세연아씨를 이렇게 늦게 모신 것을 용서하여주십시요. 주인마님의 영전에 이 개노미의 죄를 빌겠습니다. 흐흑."

"어찌...어찌..."

"마님! 세준도련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날 제가 모시고 도망쳤습니다. 지금은 영국이란 나라에서 공부를 하고 계십니다. 곧 만나실 수 있을겁니다. 이 개노미가 약속합니다. 흐흑!"

세연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앞에서 울고 있는 사람이 개노미라니? 

이 키크고 당당한 체구의 멋진 남자가, 자신이 알던 그 개노미라니? 믿기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계속 울기만 하고 자신을 개노미라 말하는 사람도 울었다. 그렇게 밤은 깊어졌다.

"주인마님의 유골만 간신히 한국에 모셨습니다. 양지바른 추모공원에 잘 모셨으니 도착하시면 제가 직접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제 주인마님이란 말을 마세요. 제가 민망하네요."

"주인마님을 주인마님이라 부르는게 어찌 민망합니까? 그런 말씀 받잡기 어렵습니다."

"아니 그래도..."

"그래요! 자꾸 마님이니 아씨니 그러니까 듣기 거북합니다. 편하게 불러주세요. 저희 은공이십니다."

"아씨! 은인은 국왕전하이십니다. 한국에 도착하시면 국민학교부터 다니셔야 합니다. 그럼 우리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국왕전하께서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 알 수 있을겁니다. 저는 국왕전하의 한낱 심부름꾼에 불과합니다."

개노미는 한국행 클리퍼함에 승선한 세연 모녀와 선실에서 함박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세준에 이어 세연모녀를 구출하면서 개노미의 심원(深願)은 대부분 풀린 것이다. 

개노미는 주인마님의 죽음과 그 친우의 배신을 보며 맹세했다. 

주인마님의 가족을 구하고 주인마님을 죽음에 이르게한 그 악마를 벌하리라고. 그 악마를 벌하는 것은 쉬웠다. 그러나 주인마님의 가족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그 불가능해 보였던 것을 이렇게 이루고 나니 개노미의 마음은 푸근해졌다. 설혹, 그 악마를 벌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잠시간이나마 할 정도였다.

그렇게 조선발 한국행 클리퍼함은 호주 서울항에 가까워졌다.

"여보!"

"아버지!"

"주인마님!"

서울 근교의 시립추모공원에서 세연 모녀와 개노미가 한 자리에 섰다. 

그리고 김희범의 비석 앞에서 함께 눈물을 흘렸다. 

개노미는 이제 여한이 없었다. 개노미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그 뜨거운 눈물은 지난 10년 세월의 무게였다. 아버지같고, 형님같던 주인마님의 따뜻한 마음이 켜켜이 쌓이고 쌓인 세월처럼 말이다.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흘러내리는 눈물에 개노미의 가슴은 뜨겁게 벅차올랐다.

쾅!

"국장님!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제 직을 걸고 거절합니다."

"감히! 국왕전하의 명을 거역한다는 것인가?"

"국왕전하께서 저에게 이런 명을 내릴 분이 아닙니다."

"허허! 자네는 국왕전하를 모신 최초의 33인이네. 수상각하도 함께였었지."

"그건..."

개노미는 이민국장의 입에서 국왕인 우진이 나오자 말을 잇지 못했다.

이민국장은 침묵하는 개노미를 부드럽게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국왕전하께서 내게 명령하셨네. 궁내부 비서인 김세연 양의 청을 받아들여 자네에게 혼인을 주선하겠다고 말이야. 자네는 국왕전하께서 직접 명령, 아니 부탁하는 혼인도 거절하겠다는 것인가?"

"..."

개노미는 신음같은 침음을 내며 고개를 숙였다.

"세연양은 국왕전하께서도 칭찬할 정도로 비서로써 탁월한 업무능력을 갖췄네. 세연양이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아나? 그런 세연양이 오직 자네만을 바라보고 있다네. 다른 사람들이 자네를 질투하고 있어. 그런데도 자네는 구태의연한 생각에 빠져 그녀의 희망을 저버릴 셈인가? 자네 참 용렬하군."

그때 누군가 말했다.

"제 부군은 용렬하지 않습니다."

이민국장이 고개를 돌리니 왕궁의 비서 김세연이었다. 그는 멋적게 웃으며 말했다.

"오 세연양이군. 내가 좀 말이 심했나? 하하하. 잠깐! 수상관저에 보고할 것이 있는데 깜빡했구먼. 다음에 같이 이야기하세나. 난 이만..."

이민국장이 서둘러 자리를 피하자, 이민국장실에는 개노미와 세연만이 남았다.

세연은 개노미를 정면으로 쳐다보며 다가섰다.

또각또각.

개노미는 감히 그녀를 쳐다볼 수 없었다. 

그녀의 또각거리는 발걸음 소리에 그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지난 1년간 그녀를 피해다니려 애썼고, 이제야 조선으로 발령받아서 그녀를 피할 수 있게 되었는데...

"저를 똑바로 보세요."

김세연은 나직하지만 또렷하게 말했다.

개노미는 그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리고 '바보같은 놈. 난 그녀를 쳐다볼 자격도 없어. 하지만 오늘이 마지막이니 용기내어 말해야겠다.'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그녀의 작은 얼굴이 개노미의 눈에 가득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혈색 좋은 입술이 요염하게 열리며 보인 새하얀 이가 개노미의 입술을 살짝 물었다. 개노미는 저항할 수 없었다. 정말 살짝 물렸을 뿐인데...

그렇게 억겁의 시간이 지나고, 세연은 가만히 개노미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이젠 도망치지 말아요!"

그렇게 개노미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다음 날, 이민국의 3대 요직 중 하나인 조선지부장의 결혼식이 국왕의 주관하에 열린다는 소식이 서울의 화제거리로 등장했다. 

화려한 결혼식과 함께, 조선지부장은 부부동반으로 조선으로 파견되었다. 조선지부장과 그 비서로 말이다.

외전 : 더러운 피 01 - 올가미

역겹다. 

그래 끝내자꾸나. 

이 풍진세상에 나를 원하는 이는 단 하나도 없다.

이리 쉬운 것을 내 어찌 몰랐을까?

온몸이 불타듯이 차갑다. 이리 큰 야망을 주셨으면 그에 맞는 피도 주셨어야지.

온몸이 시릴만큼 뜨겁다. 이리 천한 굴레로 얽어매려했으면 당신께선 그리 큰 정(情)을 주셔선 아니되었습니다.

어머니! 그대를 진심으로 원망합니다.

어머니! 그대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순간, 첨벙 소리와 함께 세찬 여울이 잠시나마 통곡했다. 

그때, 어떤 인형(人形)이 벌건 석양을 등지고 물살을 헤치며 여울을 훑었다. 그리고 세찬 여울에 투신한 사람을 상투째 덥석 움켜잡아 물밖으로 올리고는 다시 석양을 향해 헤엄쳐 갔다.

"도련님, 정신차리세유!"

철썩! 철썩!

투신한 사내를 물 밖으로 끌어낸 인형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사내의 뺨을 치고, 가슴을 눌렀다. 한참을 계속 하자 사내의 입에서 물이 쭈욱 나왔고 그 뒤를 이어 숨이 트였다. 그리고 그 사내의 눈에는 귀기어린 표독함이 그의 뜨거운 눈물과 함께 흘렀다.

"살았구만유. 도련님! 살았구만유."

그 말을 하는 인형의 두 눈에서는 닭똥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인형은 투신한 사내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사내는 생각했다. '그래 아직 내게 정을 둔 자가 남았었구나!' 그리고 사내는 소리없이 통곡했다. '미안하다. 내가 미안하다.' 그렇게 일각여의 시간이 흐르고 사내는 비틀거리며 일어났고 그 인형과 함께 사라졌다. 

◆ ◆ ◆

"쯧쯧, 그런 꼴이라니! 네 어찌 이리 집안을 욕보인단 말이냐?"

대청마루의 안쪽에는 멋들어진 산수화가 그려진 병풍이 그림처럼 놓여있고 그 바로 앞에는 꼬장꼬장해 보이는 노인이 말없이 앉아있었다. 그 옆에서는 근엄하게 생긴 장년의 사내가 백면의 미청년과 함께 노인과 담소하고 있었다. 그 장년의 사내는 그가 대청마루에 들어서자마자 굳은 얼굴로 호통을 쳤다.

"대감마님께 문안드리옵니다. 소생이 불민하여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만만하옵니다."

그는 연이어 인사를 올렸다.

"마님께 문안드리옵니다."

그는 인사를 마치고 대청마루의 아래 쪽으로 시립했다. 그러자 장년의 사내가 다시 싸늘하게 말했다.

"어째서 은아에게 인사를 올리지 않는냐?"

그것은 장년의 사내가 종손이자 적자인 '은'이란 청년에게 예를 갖추라는 말이었다. 그는 잠시 멈칫했으나 말없이 백면의 미청년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아무리 배다른 형제라 하나 엄연히 그가 위였다. 그럼에도 사대부의 법도에선 적자와 서자가 곧 왕과 신하의 관계와 다름이 없었다. 그의 친부인 장년의 사내가, 그 부모가 자식을 차별하는 것만큼 끔찍한 것은 없었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 때 세상에서 가장 믿는 사람으로부터 칼로 난자질당하는 것과 같은 고통이리라. 그의 가슴 뻥 뚫린 곳에 일년 열두달 휑한 바람이 쓸고 가는 듯 울음소리가 난다. 오직 그만이 들을 수 있는 그 울음소리를 들으며 '은'이란 미쳥년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것이다. 

'은'이란 백면의 미청년은 차갑게 인사를 받고 바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는 말없이 대청마루 아래에 시립했다. 대청마루 위의 노인은 눈을 감고 말이 없었다. 잠시 장년의 사내가 하는 말을 듣다가 축객령을 내렸다. 대청마루 위엔 아무도 남지 않았고, 대청마루 아래엔 쓸쓸한 바람이 남아 바닥을 차갑게 했다.

"이젠 '은'아도 나이가 제법 찼고, 관직에 나갈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그래라. 내 그리 일러 놓겠다."

"'은'아는 우리 집안의 홍복이 될 것입니다."

"..."

"음침하고 청승맞은 게 너하고 궁합이 딱 맞는구나! 성균관에는 들어가지 말아! 그러면 지난 죄는 묻지 않겠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은'이란 미청년이었다. 

아무리 적자와 서자 사이라 한들, 이복형제간에 오갈만한 대화는 결단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행랑채 툇마루에서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말이다. '은'이란 미청년은 말을 이었다.

"네 놈이 어떤 놈인지 나도 안다. 반쪽이지만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으니 못 돼도 이무기 새끼는 되겠지. 그런데 말이다. 이무기는 절대 용이 못돼. 하늘로 승천을 못한단 말이다. 태어나길 그렇게 태어났거든. 이것을 분수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분수를 모르면 금수지. 이 금수 새끼야! 지금이야 아버지께서 계시니 네가 무사할 수 있는 것이다. 나중에 내가 집안을 잇게될 터, 그땐 네 성씨를 떼어 거두고 말리라."

'은'이란 미청년은 번들거리는 눈으로 그에게 독설을 쏟아부었다. 

그는 '은'에게 눈길을 돌리며 대답했다.

"나중에 떼어가든 말든 상관않겠어.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아. 이만 가줘."

"건방진 서자 놈이...흐흐흐!"

'은'이란 청년은 그가 아무말없이 있자 흥미를 잃은 듯 자리를 떴다. '은'은 자리를 뜨면서도 그를 노려보며 위협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은'이란 미청년이 돌아가고, 그는 잠시 허전한 얼굴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리고 들고 있던 술 호리병을 입에 콸콸 들이부었다. 입에 썼다. 그는 다시 손을 들어 입을 쓰윽 훔치고는 뒤쪽에 대고 말했다.

"이제 나오시지요?"

그는 누굴 보고 하는 말일까? 

그 말과 함께 아까 대청마루에서 눈을 감고 말없이 앉아있던 그의 조부가 걸어들어왔다. 노인은 말없이 다가와 그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가 노인에게 술을 내밀며 말했다.

"조부님, 아니지! 대감마님께서도 한모금 하시겠습니까?"

노인의 얼굴에는 무언가 표정이라고 할만한 것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손을 내밀어 술 호리병을 받아 한모금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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