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감께서 이리 못난 사람을 만나주시니, 이 은혜 백골난망이옵니다."
"허허허. 부사께서 제 얼굴에 이리 금칠을 하시니 부끄럽소이다."
"아니옵니다. 제가 부사로 부임하고 대감의 높은 이름을 흠모한지 오랩니다. 그 말씀 거두어 주시옵소서."
"자자. 술 한잔 받으시오. 겸양이 과하시오. 쭈욱 들이키시오."
"감사하옵니다. 대감."
"그래 부사께서 이 못난 사람을 보시고자 한 연유를 알고 싶소이다. 이 사람은 배운 바가 협량해서 말을 길게 하지 못하오."
"크흠. 대감께옵서 말씀하신 관비 세연은 그 아비가 역모로 처단되어 어렵습니다. 제가 감히..."
딱!
개노미는 술잔을 탁자에 소리나도록 내려놓았다. 그리고 말했다.
"부사께서 원하시는 것을 말씀하시오."
"제가 감히 대감께 원하는 것이 있겠습니까마는...관비 세연을 딱 집어 말씀하시는 것이...소관에게 의문이..."
"허어! 그럼 부사께서는 아니된다는 게요?"
"어이쿠 대감. 아니옵니다. 다만 소관이 관비 세연의 적을 넘기려면 이리저리 일이 생기니..."
"알겠소이다. 그 아이는 나와 조금이지만 스쳐가듯 인연이 있던 자의 여식이오. 내 그 아이가 불쌍하니 어찌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겠소? 그 아이도 여자로써의 기쁨을 알고 피를 잇고자할 터인데 말이오."
개노미는 말을 마치자마자 부사를 은근히 쳐다보며 씩 웃었다.
부사는 개노미의 말을 듣고, 이제 알았다는 듯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화답했다.
"대감마님의 깊은 뜻을 모르고 소관이 이리 무례를 저질렀으니 그 죄를 어찌 갚겠습니까? 부디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허허허! 내 부사의 본의를 어찌 왜곡하겠소. 원하시는 것은 이루어지리다."
"대감마님의 은혜는 하해와 같으니 평생 대감마님의 깨끗한 성명을 잊지 않겠습니다."
우웩!
매번 그렇지만, 너무 역겨워 또 토악질을 하고 말았다.
그 비싼 술에 고기 안주를 먹고 아깝게 토하고 말았다. 항상 그렇다. 개노미는 그럴 때마다 국왕인 우진과 조선의 노비들을 떠올리며 다짐했다. 그들을 위해 이 한 목숨 바치겠다고. 오늘 부사와의 만남은 쓰라렸다. 그래도 거부할 수 없었다.
'세연 아씨'
◆ ◆ ◆
개노미는 그 끔찍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대역죄인 김희범은 오라를 받아라!"
개노미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아니 잊을 수 없다. 영원히. 주인마님께서 대역죄인이라니? 개노미의 주인 김희범은 영남지방의 유서깊은 양반가문의 자제였다. 재산은 백석지기로 그리 많지 않았다. 생원시와 진사시에 입격하였지만 관직에 환멸을 느껴 귀향하고 말았다. 백석지기는 그리 많지도, 적지도 않은 재산이었다. 김희범은 스스로 부지런히 농사를 짓고, 책을 읽으며 살았다. 김희범이 데리고 있던 노비는 4인으로 솔거노비는 자신 뿐이었다. 그래서 주인마님과 자녀들도 농삿일은 물론이고 자기 일은 자기가 직접 해야했다. 그 속에서 개노미는 대접받고 살았다.
"자네 이름을 바꿀테니 이제 희두(熹斗)라 하는게 좋겠네. 저 북두성만큼 성하리란 뜻이네. 그리 알고 앞으론 희두라 하겠네."
"마님 저처럼 천한 것이 어찌..."
"더 이상 말하지 말게. 내 달에는 관아에다 이름을 바꿔 올리도록 하지. 혼인하면 외거로 집을 지어 나가게나. 돈을 모아 내면 속량해줌세. 돌아가게."
"마님...흐흐흑."
개노미의 기억은 다시 이어졌다.
"저 놈 잡아라."
"헉헉헉."
개노미는 작은 남자아이를 품에 안고 심장이 터지도록 뛰고 뛰었다.
작은 남자아이는 김희범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김희범은 세연이란 딸과 세준이란 아들이 있었다. 갑작스런 군졸들의 난입에 김희범과 안방마님은 속절없이 붙들려갔다. 김희범의 아들인 세준은 개노미와 서당을 다녀오다가 그 모습을 보고 달아나고 있었다. 개노미에게 주인마님은 하늘이었다. 그 아들과 딸인 세준, 세연도 마찬가지다. 개노미의 심장은 개노미에게 제발 뛰지말고 멈추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개노미는 멈추지 않았다.
달구벌 개천가에서는 망나니들이 서슬퍼런 칼을 또 갈고 있었다.
거기에는 주인마님이 두팔을 뒤로 묶여 무릎꿇려 있었다. 개노미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군졸들과 망나니들이 무서웠다. 군졸들이 짓쳐들어온 날에 간신히 세준을 빼돌렸다. 세준은 개노미의 친우, 외거노비로 산목일을 하는 녀석에게 맡겼다. 꼭 데리러 간다고 말하고.
주인마님은 역모를 일으키려 했다고 했다.
무슨 개소리를? 주인마님은 나와 농사나 짓던 분인데?
싹! 털썩!
김희범의 목이 달구벌 개천가 한켠에 허무하게 떨어졌다.
개노미는 결국 그 자리에서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도 몰랐다. 옆 사람이 오줌냄새를 맡고 자리를 뜨며 말해줘서 알았다. 개노미는 저도 모르게 주인마님의 시신 앞으로 걸어갔다. 그때 개노미는 자신의 머리를 내려치는 군졸의 매를 맞고 쓰러졌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차라리 주인마님과 함께 죽었으면 좋았을텐데...
◆ ◆ ◆
개노미의 팔자는 사나웠다.
다시 어떤 양반의 노비가 된 것이었다. 불행중 다행인듯 원래 주인마님 댁과 그리 멀지 않았다. 새 주인은 주인마님과 친우였던 사람이어서 다행이었다. 세연아씨는 관비가 되었다고 했다.
틈을 내서 대구감영으로 찾아갔더니 그 작고 귀엽던 세연아씨를 먼 발치에서나마 볼 수 있었다. 안방마님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7살짜리 아씨를! 개노미는 눈물이 났다. 그래도 자신이 몰래 세준도련님을 보호하고 있으니 다행이었다. 새 주인도 이를 알면 친우와의 우정을 보아 보호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새 주인은 악마였다.
개노미의 주인마님을 역모로 밀고한 것은 주인마님의 친우로 알고 있던 새 주인이었던 것이다. 새 주인이 현감과 술을 마시고 집으로 올때까지 기다리다 모시고 돌아왔다. 그 길에 새 주인은 기분이 좋았었던 것 같았다.
그는 술에 취하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 말을 개노미에게 하고 말았다.
어찌 친우를 역모로 몰았단 말인가?
개노미는 새 주인을 단매에 쳐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꼼짝할 수 없었다. 오늘은 기회를 보아 세준도련님에 대해 말하려 했었는데...그랬다면 세준도련님도 망나니의 칼에 죽었을 것이 분명했다.
이 비참한 현실에 개노미는 피눈물을 흘렸다.
외전 : 개노미의 임무 02 - 탈출
더 이상 희망은 없었다.
개노미는 살아도 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그냥 죽고 싶었다. 아무런 희망이 없는 삶. 뒷산 절벽 앞에 서기를 수차례였다. 그때마다 세준도련님이 눈에 아른거렸다. 세연아씨, 안방마님도. 그냥 새 주인을 죽이고 달아날까? 그 고민도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세준도련님이 눈에 밟혀 하지 못했다.
그날은 새 주인의 심부름으로 마름영감과 함께 부산포까지 내려갔었다. 바닷가 포구에서 개노미는 생전 처음 바다를 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그렇게 멍하니 바다만 바라보던 개노미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온 것은. 그는 우진이었다.
"아저씨! 아저씨! 여기 좀 보세요."
개노미는 깜짝 놀랐다. 생전 처음 와본 곳에서 자신을 찾다니? 누군지 궁금했다.
"누구요?"
"하하! 아저씨한테 볼 일이 있어서요. 아저씨는 키가 크고 덩치도 있어서 제가 할 일에 딱 적당할 거 같아서요. 저희하고 같이 일해볼래요? 돈도 많이 줄게요."
"저는 노비라서 안됩니다."
"노비일거 같아서 말씀드리는 거에요. 제가 아저씨 주인한테서 사려구요. 나중에 일 열심히 하시면 속량도 해드릴 수 있어요."
개노미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지나고나니 자신도 모르게 화가 났다.
"쓸데없는 소리 마시오. 괜히 헛바람 들이켰다가 경을 치겠네."
"아저씨! 속고만 살았어요. 아저씨만이 아니고 가족들도 속량시켜줄께요."
그말이었다. 개노미를 움직인 것은. 믿지 못할 말이지만 개노미가 간절하게 원하던 것을 우진이 말했다. 개노미는 기도했었다. 자신은 영원히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불타죽더라도 세준과 세연만은 구해달라고 말이다. 그것은 물속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듯, 개노미에겐 꿈결같은 소리였다. 그렇게 개노미는 우진을 만났다.
"국왕전하 만세! 대한국 만세!"
개노미는 10년간 죽을 힘을 다해 노력했다.
배의 밑바닥부터 갑판까지 올라가는데 3년이 걸렸다. 갑판장이 되는데 2년이 걸렸고, 7년째에 항해사관으로 승진했다. 개노미는 한국의 개국에 즈음하여 이민국이 설립되자마자 지원했다. 6개월간의 이민국 교육은 함정근무보다 훨씬 어려웠다. 양반노릇도 힘들었다. 할때마다 욕지기가 돌고 구역질이 났다. 하지만 참았다. 그리고 2년간의 노력끝에 이민국 조선영남지부장에 올랐다.
"세준도련님! 여기에요 여기."
"지부장님 말씀 놓으세요. 저는 지부장님을 큰형님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을요. 세준도련님이 이렇게 건강히 살아계시는 것을 주인마님께서 아시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흐흑."
"자꾸 세준도련님이라 부르시면 다시 뵙기 힘듭니다. 헌법과 권리장전을 잊으셨습니까? 지부장님은 그런 말씀을 하셔선 안되는 분입니다. 저도 용납못합니다."
개노미는 세준도련님이 얼굴을 굳히고 자못 엄하게 말하는 것을 듣자 웃음이 났다.
"알았습니다. 제가 이번에 조선으로 넘어가게 되었으니 부디 보중하십시요. 영국 옥스퍼드에 국비유학가신다구요? 주인어른께서 하늘에서 보고 계실겁니다. 공부 열심히 하시고 오세요. 기다리겠습니다. 세연아씨와 안방마님도 꼭 찾아보겠습니다."
"지부장님! 아니 형님! 잘 다녀오겠습니다. 이 아우의 절을 받아주세요."
"어이쿠 안됩니다. 사내는 절대 눈물을 흘려선 안됩니다. 자중하셔야 합니다."
개노미와 세준은 서로 눈물을 흘리며 헤어졌다.
개노미는 조선으로, 세준은 영국으로 말이다.
"흐흐흐, 어르신 취향도 참 독특하시구먼? 친우였던 자의 내자와 딸을 동시에 취하려하시니 말이야. 크하핫! 내 그들에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으니 대감어른께 필히 고하시게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희는 그저 시키는 대로 한 연후에 모두 잊을 뿐입니다. 약조한 것은 궤에 가득합니다. 확인하시지요."
"이 사람이. 내 어찌 대감어른을 의심하겠나? 자네가 대감어른의 복심임을 내가 아네. 자 여기, 가다가 약주라도 한잔 하게나."
"감사하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너희는 이제 나를 따라와야 할 것이야. 짐은 챙길 것 없다. 관적에서 빠졌으니 그리 알거라. 여봐라 이 둘을 엄히 단속하여라."
"네 알겠습니다."
세연은 치가 떨렸다.
아버지 김희범이 역모로 처형된 후, 어머니와 세연은 관비가 되었다.
그리 풍족하진 못했으나 어엿한 반가의 여식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어머니와 관비가 된 것이었다. 겨우 7살, 보랏빛 꿈을 꾸던 세연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세답(빨래)으로 하루종일 허리도 펴지 못하는 어머니 옆에서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관아의 잔심부름을 하며 추접한 짓을 하는 자들도 숱하게 많았다.
가슴이 봉긋하게 솟아오르고 한 여자로 성숙하게 된 지금. 다시 양반가로 팔려가는 자신의 처지에 피눈물이 흘렀다. 어머니도 함께 울었다. 지금 양반가에 팔려간다는 것은 세연을 눈여겨본 자가 있다는 것이니까.
감영에서 세연을 노리던 양반들은 많았다.
그렇지만 부사가 엄히 단속했다. 처음엔 그 부사가 고마웠다. 하지만 부사의 속셈은 세연을 비싸게 팔아먹을 심산이었다. 세연은 그걸 알고 절망했다. 그리고 지금 양반가로 팔려가는 것은 그 절망이 확정된 것이었다.
세연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어머니도 함께 말이다.
모녀가 함께 눈물을 흘리며 감영의 뒷문을 나왔다.
뒷문 앞에는 사대부 여인들이 쓰는 가마 2개가 놓여있었다. 세연 모녀가 의아함을 느낄 새도 없이 두명의 여자에게 이끌려 가마에 올랐다. 그렇게 가마를 타고 한참을 지났다. 그리고, 어느 집앞인지 문이 열렸다. 그리고 가마는 땅에 내려졌다.
두명의 여자는 모녀를 별채로 안내했다. 거기에는 씻을 물과 옷이 준비되어 있었다.
"목욕을 하시면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르신을 뵈올 것입니다. 몸을 정결히 하십시요."
그리고 그녀들은 자리를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