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휴가가 끝나면 해군사령부는 각 해역별로 함대를 분산배치할 예정이다. 어차피 호주까지 공격하러올 유럽의 해군은 아마 없을테니 서울항에 주력이 있을 것이고, 인천과 신의주에 분견함대, 유구국에 해외원정함대 사령부를 설치할 것이다.
해군의 가장 큰 장점은 융통성이다.
언제 어디든지 바다로 통한다면 마음먹은 곳에 해군력을 투사할 수 있다.
나는 조선과 해상전투를 할 일은 절대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건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노를 저어 다가오는 판옥선, 거북선은 원양작전이 어렵다. 또 결정적으로 느리다. 그 느린 배에 우리 해군의 빠른 전함이 근접해서 싸울 필요가 없다.
조선에서의 전쟁준비는 분명히 시작되었다.
나는 가능하다면 전쟁을 피하고 싶다. 하지만 우리 한국의 핵심이익을 위해서는 전쟁을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이 우리의 해상무역로를 위협할 능력은 절대로 없다. 아마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을 것...아니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조선과의 전쟁에 있어서 너무나도 유리한 입장에 있다. 조선과의 전쟁을 하는 시기와 장소를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영토에서는 전쟁이 없다. 오직 내가 원하는 시간,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만전의 준비를 갖춘 군대로 공격할 수 있는 것이다.
만전의 준비!
나는 제국시대 영국의 해군, 현대 미국의 해군이 전 세계를 주름잡는 이유를 잘 알고 있다. 영국, 미국 해군이 세계해양의 제해권을 잡고 있을 때, 전세계의 주요지역에 그들의 해군기지, 보급기지가 있었다. 그들은 언제든 충분한 보급을 받고 있었고 그에 따라 작전에 방해가 되는 일이 없었다.
전투 중에 탄약, 식량이 떨어지면 어떤가?
삼국지, 당나라의 고구려침공 등 보급(군량, 무기)이 원활하지 않아 원정을 포기하거나 심하면 전멸하는 것이 허다했다.
미국해군이 세계최강인 이유?
세계제일의 해군전력을 보유하고, 그 해군전력이 보급에 아무 지장없이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해군도 그래야한다.
조선과의 전쟁?
난 사실 조선과 해군으로 전투할 일은 없게 만들것이다. 지금도 조선은 해금령 뿐만 아니라 해안에 어부들도 잘 없다. 게다가 해군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판옥선이든 거북선이든 그들이 우리를 공격할 수 있어야 위협일 것 아닌가?
그래서 바다에서 조금 멀리 배를 정박하고 단정으로 이민자들을 실어나르고 있다. 내부의 조력자들이 있으므로 힘든 일도 아니다. 이는 정보부 조선지부장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된다. 조선이 내부에서 무너지고 있으니 조선 내부의 조력자들을 규합하여 조선의 왕을 잡아내기만 하면 된다.
만약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일본에 생포되었다면?
두말할 것 없이 임진왜란은 조선의 패전으로 끝났을 것이다.
이제 조선의 내부를 흔들 방법을 찾아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얻어야 한다. 그 방법은 조선지부장과 내각에 맡겨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잠깐, 인조반정 이후에 곧바로 정묘호란, 병자호란이 생길텐데 여진족 힘을 빼놓을 순 없을까? 조선에 발을 들여놓으면 결국 여진족과 싸울 일이 생길텐데 말이야.'
수상과 내각, 사령부에 조선에 대한 작전계획을 수립하라고 지시한 다음 떠오른 생각은 인조반정, 이괄의 난 이후에 발생할 여진과의 전쟁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정말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었다. 난 인조를 전혀 동정하지 않는다.
솔직히 삼전도에서 인조 대가리가 깨지건 말건 나랑 무슨 상관인가?
그래 인조 대가리만 깨진다면 그것도 대환영이다. 원 역사에서 인조는 대가리가 깨지고 개망신을 당했다. 내 생각에 그런 망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조선의 백성들은 무려 수십만명이 여진족의 노예로 끌려가서 온갖 노역을 당하고 심지어 죽었다.
화냥년이란 말의 유래가 환향녀였던가?
이런 비극은 가능하면 미리 대비해서 막아야한다. 호미로 막을 수 있는 일을 가래로 막을 순 없다.
그래서 나는 내각, 특히 외교부장과 정보부장에게 은밀히 지시했다.
"외교부장과 정보부장은 내가 지시한대로 명과 여진족의 정세를 자세히 살펴보고 보고하라. 아마도 명은 여진족과 조공관계를 이미 끊었을테니 여진의 물자부족이 심각할 것이다. 우리가 그걸 잘 이용하면 쉽지 않겠는가? 특히, 지난 전투에서 여진족에 포로로 잡혀있는 조선군 전 도원수 강홍립에게 은밀히 접근하여 줄을 놓도록 하게. 이런 작전에는 절대로 돈을 아끼지 말라."
나는 먼저 정보부장에게 여진족의 나라, 후금의 내부에 첩보망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우리의 무역네트워크를 이용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잘 알겠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바람직한 동아시아 정세는 현상유지였다. 한국 호주의 현재 인구, 군사력으로는 강소국은 될지언정 강대국은 힘들었으니까. 한국이 강대국이 되려면 기본적으로 적정 인구가 있어야했다. 그걸 위해서 조선을 차지하고 인구를 늘리고, 그를 통해 전체적인 산업생산력을 더 높이 끌어올려야한다.
조선과의 완전한 통합이야말로, 한국이 세계의 강대국 반열에 오르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이었다.
너무 기쁜 나머지 말이 헛나왔다.
"오!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군."
수상을 비롯한 각료들은 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스페인 필리페4세를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칭한 것은 실수였다.
"..."
그래서 수상이 내게 물었다.
"전하.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무엇이옵니까?"
나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에둘러 표현했다.
"하하하! 스페인 국왕전하께서 이리 우리를 후대하니 감사할 일이란 뜻이다. 그럼 필리페4세께서 보내주신 장인들과 물품에 대한 보답은 어찌하면 좋을지 말해보게."
그러자 외교부장이 나서며 말했다.
"스페인 필리핀 총독 알론소 파하르도 데 엔텐사의 신규 선박건조 요청이 있으니 그걸로 대신하면 될 듯 합니다. 그들이 요구한 배는 최신형 제1형이고 수량은 10척입니다. 선박 건조비용을 일정부분 감하여 주거나 건조비용 일부를 구리로 대납토록 하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외교부장의 의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구리는 스페인 노천광산의 채산성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물론 가격과 수량측면 모두 다 였다.
"내각에서 검토하여 그리하도록 하게. 그리고 필리핀 총독에게 세계최강의 스페인 장교들을 만나보고 싶다고 말한 다음에 그들을 서울로 초청해서 데려오게. 그들을 초청하는 데에는 돈을 아끼지 말도록. 신규 선박 가격을 원가만 받고 건조해주더라도 말이야."
나는 필리페4세의 후한 선물에 잠시 흥분했다.
스페인 무적함대가 1588년 칼레해전에서 영국한테 깨지긴 했다.
하지만 스페인은 아직 유럽의 최강국이었다. 아메리카에서 나오는 은과 구리는 물론이고 엄청난 영토에서 나오는 다양한 상품으로 그 부유함은 명나라를 제외하곤 달리 비할 곳이 없었다. 실제 역사에서 앞으로도 몇십년은 잘 나가는 나라였다. 그들의 패권도 유럽 30년 전쟁이 끝나면서 막을 내리겠지만...
필리페4세는 스페인의 부유함을 자랑하기 위해 자국이 자랑하는 다양한 물품들을 보내왔다. 특히, 자신들의 막강한 무력을 자랑하기 위해 테르시오 보병의 갑옷과 무기세트를 선물로 보내왔다.
이거 혹시 스페인에 까불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일 수도 있겠다.
사실 나는 해군을 제외하고 지상전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너무 시의적절하게 나를 일깨워준 것이다. 스페인의 테르시오는 17세기까지 유럽최강의 보병 대형이고 전력이었다. 이걸 알고 있는데 안써먹으면 그건 병*이다.
테르시오도 무기만 있다고 되는게 아니니까 유능한 교관이 필요했다. 실전경험까지 많으면 더 좋을 것이다. 지금 필리핀에 스페인 테르시오 장교들이 놀고 있을거다. 그들을 잘 치켜세워주고 돈을 듬뿍 준다면 그 전술을 배우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겠지. 게다가 테르시오 방어구와 무기들도 왔으니 우리한테 맞게 만들어 쓰면 된다.
이런 대박이 있나.
스페인 국왕전하 필리페4세 만세!
만수무강하소서.
외전 : 개노미의 임무 01 - 기억
한 여름 무더위에 매미들마저 숨소리를 죽인 오후였다.
여느 사대부와는 달리 권세있어 뵈는 사내가 4인교에 높이 앉아 연신 부채를 펄럭이고 있었다. 이 무더위에 4인교를 메고 가는 4명 외에도 그 뒤로 수십인의 장정들이 연이어 지나갔다. 저잣거리 한복판을 지나가는데, 그 사람 많던 길이 썰물빠지듯 뻥 뚫렸다.
아마도 그 사내의 위세가 평소에도 대단했던 모양이었다.
수십인의 장정들은 등짐을 지고 따라가는데 그 등짐 하나하나가 매우 귀한 물건들로 보였다. 비단으로 곱게 포장된 등짐 속에는 과연 무엇이 들었을까? 그 행렬의 마지막은 소가 끄는 5대의 수레였다.
그 수레 안에는 또 얼마나 비싼 물건들이 들었을지. 저잣거리의 사람들은 궁금했지만 감히 그 행렬앞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고개를 들었다간 치도곤 당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그 행렬이 지나가고 나서야 저잣거리는 평소처럼 왁자지껄한 모습을 찾았다.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저잣거리를 들썩이게 한 행렬이 막 도착한 곳은 고래등같은 기와집의 대문 앞이었다. 그 집 대문은 집의 크기 만큼이나 무겁게 열렸다. 문이 완전히 열리자마자 4인교가 지나고 그 뒤를 사내들, 소가 이끄는 수레 등이 그 문을 한참동안 지났다.
"하하하!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자 다들 시원하게 들이키게! 이 더운 날에 고생했구먼."
"어이구 어깨야! 다음 번에는 4인교 절대 안해. 아니 못해."
"흐흐흐. 누가 내기 지라 그랬어?"
"하하하! 그래 술내기를 진 사람이 그런 말하면 섭하지."
"4인교 위에 앉아있는 것도 편하진 않아. 부채도 맘대로 못 부친다고."
"에라이. 누군 얼굴 허옇다고 양반하고, 난 몰이꾼만 하냐? 다음엔 바꿔."
"그게 억울하면 순분아줌마를 탓해야지. 안그래?"
"이 놈이!"
"나잡아봐라~. 어이쿠 이거 쌍놈이 양반잡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행렬 무리들은 박장대소를 했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은 반상의 법도가 지엄할진데 양반과 노비로 보이는 이들이 서로 대거리하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대체 그들은 누구일까?
사랑채의 내실에서는 은밀한 대화가 이어졌다.
"이번 차수는 327명입니다. 솔거 210명, 외거 117명으로 분산수용했습니다. 아이들은 별당에서 관리중입니다. 역모 등을 이유로 망명신청한 자들은 양반, 서얼 출신을 불문하고 별도 관리중입니다. 이번 정규차수와 달리 접선하여 안전여부를 확인한 후에 승선시킬 것입니다. 망명신청자는 4명입니다."
"좋다. 이번에 새로 부임한 현감은 어떤가?"
"이전 현감에게 기름칠한 것의 족히 3배는 더 요구합니다. 방납 명목으로 면포200백을 내어 줬습니다."
"흐흐흐. 그 놈 간도 크군. 관찰사도 만석지기에게는 고개를 숙이는데 3만석지기인 우리에게 대놓고 요구하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봐온 중에는 제일 인간말종입니다. 감히 지부장님을 오라가라 하려고 했지 않습니까?"
"관아의 아전들은 잘 관리하고 있지?"
"네 이상없습니다."
"..."
계속 이어지던 대화가 끝나고 아랫사람으로 보이던 이가 방을 나섰다.
방에 남아있던 이는 지체높은 양반이 분명할 터였다.
그뿐인가? 감히 스스로 3만석지기를 운운한 것을 보니 엄청난 부자임이 틀림없었다. 조선팔도에서 3만석지기 부자가 그리 흔하던가. 절대 그렇지 않으리라.
그런데 이렇게 지체높은 양반에 대단한 부자로 보이는 자의 정체는...
놀랍게도 한국 이민국의 조선영남지부장 '개노미'였다.
사실 개노미는 노비였었다. 그러나 우진을 따라 무역상단에 들어가는 행운을 얻어 승진에 승진을 거듭했다. 그리고 3년 전, 이민국으로 영전했고 조선영남지부장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이민국은 한국에서 가장 유능한 인재라는 자부심을 가진 최고 엘리트 조직으로, 그 능력은 물론이고 충성심도 탁월한 사람들이었다. 고향인 조선의 노비들을 자유로운 한국으로 안전하게 이주시키는 것. 그 임무가 쉬울리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간혹 작전 중 곤란한 상황에 빠질 때가 있었으나 개노미와 동료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극복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지난 3년간 개노미가 이주시킨 이민자만 1만3천명에 달했다.
"뭬야?"
개노미는 수하의 말에 놀라 소리쳤다.
"네 지부장님! 찾으시던 분이 맞습니다."
"오. 하늘이 도우셨군. 모두 구매는 했는가?"
"부사가 미적거리면서 바라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지부장님을 직접 뵙고 말씀드리겠다 합니다."
쾅!
개노미는 탁자를 치며 부들부들 떨었다.
"알겠네. 자리를 만들게."
관아 인근의 화려한 기루 내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