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유로 나는 유럽의 시계제작자들에게 엄청난 보상을 약속하고 초청했다. 그리고 일반인을 위한 시계제작소를 열었다. 그리고 그 기술을 아낌없이 전파하도록 유럽의 시계제작자를 회유했다. 대신 그 기술은 국내에 한정하여 아낌없이 전파한다. 그 공장들이 정밀가공이 가능하려면 얼마나 걸릴까? 실제 역사에서는 1700년대에 가서야 크로노미터 시계가 제대로 개발되었다고 했는데 말이다.
대항해시대의 패권을 가질 수 있는 국가는 그를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내가 준비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 해 놔야한다. 1622년인 지금, 나는 아직 스물 다섯살된 청년이다. 하지만 언제 죽을지 아는 사람이 있나? 나는 돈지랄로 행복을 만끽하기 직전에 귀신고래에 이끌려 이 곳에 왔다. 아닐 수도 있지만.
서기 1622년,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다.
수상을 비롯한 내각 각료들과 의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하고 있다. 모두 무역회사부터 지금까지 내가 인정한 인재들이긴 하다. 하지만 조선의 노비해방은 너무 나갔다. 그들을 아무 대책없이 해방한다치자. 그걸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
조선지부장의 생각은 혁명이다.
하지만 혁명이란 너무나 폭발성이 강해서 잘되면 좋겠지만, 만약 잘못된다면 그 결과(부작용)를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과연 우리 신생 한국이 조선을 장악할 힘이 있을까?
조선지부장과 수상 등 내각이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국민의 여망을 외면할 수 없어 걱정이다. 조선의 노비로 살아왔던 그들의 가족, 친지들은 아직 조선에 많이 남아있다. 한국의 발전을 위해서 조선의 이민자는 필요하고, 조선에서 망명하는 사람들도 필요하다. 이래저래 외통수에 걸린 듯 했다.
이것이 크로노미터 시계입니다. 경선의(經線儀)는 선박의 진동 및 온도 변화에 영향을받지 않는 정밀 휴대용 태엽 시계를 말합니다.
샌드위치 효과
사람이 살면서 먹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밀의 제분과 빵을 만드는 과정은 사람의 힘으로 하기엔 시간이 걸리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힘이 드는 과정이다. 괜히 축력, 풍차, 수차가 생겼겠나?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산업혁명 직전에만 영국에 수천개의 풍차, 수차가 있었다고 했다.
독일 등 유럽에는 마을에 제분소와 제빵소가 필수적으로 존재했다. 농부에 의해 재배된 밀을 밀가루로 만들고 빵을 만들어 주민들에게 나누어주는 과정은 하나의 거대한 경제시스템이다. 그 경제시스템을 통해 국민들은 하나가 되고 있었다.
어느 농가에서는...
"여보! 새참드시고 하세요."
"하하하. 가서 먹으면 되는데 뭐하러 여기까지 나와?"
"호호호. 애들 먹으라고 샌드위치 만든 김에 가져왔어요. 우유랑 같이 드세요."
"흐흐, 안그래도 출출했는데 고마워."
"햄하고 으깬감자에 치즈도 들었어요. 채소도 빼지말고 드세요."
"감자하고 채소는 빼면 안되나?"
"국왕전하께서 건강에 좋다고 하시잖아요? 작년만해도 감자는 국왕전하만 드실 수 있었어요. 감자밭에 군인들이 감시까지 했었다구요. 거기에 채소를 먹지 않으면 괴혈병에 걸린다는데 당신 어쩌려구 그래요? 내가 못살아 정말..."
"알았어. 그만하라구, 다 먹을테니깐."
"결국 다 먹을걸 왜 반항을 하고 그래욧!"
"끄응, 여기 딸기쨈 좀 더 줘봐."
"알았어요. 체하지않게 우유랑 같이 드세요."
서울의 어느 학교에서는...
"자! 오전 수업이 끝났으니 다들 식당으로 가서 점심 먹자. 오늘 점심은 샌드위치에 소세지다. 한사람씩 나눠줄테니 질서있게 받아가라."
"네 선생님!"
모든 이주민들에게 의무적으로 시행되는 국민학교는 대성공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훌륭한 성과는 식문화의 보급이 아닌가 생각한다.
국민학교에서, 오전에는 한글과 산수를 배우고, 점심식사를 한 다음, 오후에 한국의 정치-사회-영토-자연 등 필수적인 이민적응교육이 시행되었다. 그 중에 점심식사는 이주민들에게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초기에는 국가와 초청한 가족이 식사비를 제공했다. 그러나 이주민들이 땅을 불하받고 자리를 잡으면 거주지 근처 국민학교에 가서 스스로 교육비와 식비를 내고 교육을 받았다. 이주민들이 한국의 새로운 생활방식을 익히는데 가장 중요한 과정 중 하나였다.
그들이 조선에 있을 때는 고기는 커녕, 밥도 양껏 먹기 힘들었다.
그런 이민자들이 고기와 빵에 적응하는데에 국민학교만큼 좋은 곳이 없었다. 국민학교에서는 단순히 한글과 산수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다. 국민학교에서 이주민들은 같은 교육과 같은 식사를 하면서 모두 동등한 자유와 권리를 가진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배웠다. 고기와 빵, 치즈와 우유 등을 양껏 먹으면서 그 맛을 배웠다. 이를 통해 이주민, 이민자들은 쌀로 만든 밥, 채소 위주의 식단에서 고기와 빵 위주의 식단으로 빠르게 적응했다. 사실 고기가 없어서 못먹었던 것이지 있는데도 밥과 채소를 먹었겠는가?
게다가 아메리카에서 들어온 감자와 옥수수도 인기였다.
감자가 들어온 초기에는 감자를 돼지사료로나 썼다. 사람은 먹을게 아니라고 했었다. 나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사례를 떠올려 감자를 대중에게 전파할 계획을 세웠다. 먼저 감자는 왕만 먹을 수있다고 공표했다. 왕이 돼지나 먹는 감자를 먹는다는 이야기를 하니 국민들은 경악했다.
하지만 나는 그걸 밀어붙였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방법을 그대로 쓴 것이었다. 왕의 농장을 지정하고 국민들이 볼 수 있게 감자를 키웠다. 낮에는 군인이 철저하게 지키게 했다가 밤에는 군인들을 철수시켰다. 왕의 농장에서 감자를 훔치든 말든 말이다.
그리고 그 감자요리를 매 끼니마다 왕의 식탁에 올리게 했다. 삶은감자, 으깬감자, 튀긴감자, 볶은감자 등등 다양하게 음식을 해먹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국민들도 점차 감자를 즐기게 되었다. 거기에 국민들이 채소를 즐겨 먹도록 거짓 괴혈병을 소문냈다. 고기를 먹으면서 채소를 곁들여 먹어야 땅에서도 괴혈병이 걸리지 않는다고 말이다.
샌드위치란 이름도 그냥 그대로 샌드위치라 명명했다. 아직 생기지도 않은 것이지만 외국에서 유래된 것으로 기억한다면서 빵 사이에 햄이나 고기, 채소를 끼워 먹는 음식은 샌드위치로 부르라고 지시했다.
맨 처음에는 내각회의, 의회에서 내가 직접 만들어서 나눠줬다. 내가 직접 빵사이에 치즈, 햄, 채소 등을 끼워넣어서 줬더니 다들 기겁을 했었다. 음식을 그렇게 먹는다는 것을 생각조차 못했던 것이다.
그래도 왕이 줬으니 먹지 않을 수 없어 먹었다. 먹다보니 편리하고, 독특한 맛이 있어서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그 다음 수순으로 국민학교, 사관학교, 관공서에 보급했다. 그게 대인기를 얻고 우리 한국의 독창적인 식문화가 되었다. 서울시내에는 여기저기 샌드위치 판매점이 생겼다. 샌드위치에 우유, 샌드위치에 차를 파는 판매점 말이다.
처음부터 영국 등 유럽의 제도와 문화를 베끼듯 도입하면서 식문화도 그대로 도입했다. 그 결과 중 하나가 샌드위치일 뿐이다. 조선에서 이주하는 이민자들도 처음에만 낯설어할 뿐, 곧 고기, 유제품, 빵 등에 익숙해졌다.
또한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싸게 들여오는 향신료들에도 익숙해졌다. 서울 어디를 가봐도 유럽의 식문화가 어색하지 않다. 그래서 유럽인들도 한국을 편하게 생각하는 듯 했다.
나는 내각회의 중, 짬을 내어 각료들과 함께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음료는 좀 비싸지만 커피와 함께였다. 수상도 그렇고, 각료들도 그렇지만 처음에는 음식을 손으로 잡고 먹는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조선에서부터 익숙했던 식사예절 문제도 있었다.
왕과 이렇게 함께 밥을 먹다니!
물론 왕과 신하들이 함께 밥을 먹는건 언제 어디서든 있었다. 하지만 왕궁의 만찬장 등 커다란 식당에서, 격식을 차린 상태로, 좀 딱딱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것이 대부분 이었다. 또한 배에서는 선장실에서 따로 먹었고 말이다. 그런데 왕과 각료들이 이렇게 얼굴을 마주보고 손으로 샌드위치를 들고 먹는다니!
이것은 그들에게 문화적 대충격이었던 것이다.
나는 샌드위치를 다 먹고 난 후, 커피향을 음미하고 있었다. 내가 커피를 다 마시고 내려놓을 즈음, 각료들도 식사를 다 끝낸 듯 했다. 그러자 비서들이 책상의 음식 접시들을 분주히 치웠고 어느새 자리가 정돈되었다. 각료들은 다들 커피잔을 옆에 내려놓고 회의가 속개될 것을 기다렸다.
"식사시간이 아까워서 샌드위치로 대신하게 했으니 미안하군요."
"아닙니다. 전하! 샌드위치는 한끼 식사로 충분할 뿐만 아니라 아주 맛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전하. 샌드위치는 맛도 있고 건강에도 좋습니다."
"하하하. 이렇게 금칠을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 회의를 속개하겠습니다."
국왕이 주재하는 내각의 회의도 이러한데 의회를 비롯한 각 행정부서, 국민들의 식생활과 식문화는 볼 것도 없었다. 그렇게 샌드위치 효과는 국민들에게 빠르게 퍼져나갔다. 국왕이하 모두가 함께 즐기는 음식으로 국민들은 서로 동질감, 유대감을 느끼게 된 것이었다.
물론 먹는 것만은 아니다. 가장 많은 식재료가 밀, 고기, 유제품 등이라는 것에서 별 차이가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 모두를 아우르는 음식의 존재는 달랐다. 현대 대한민국에서 김치, 치킨 등을 떠올리면 되는 것이다.
국왕 우진의 작은 생각은 이렇게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그것에는 샌드위치만이 아니었다.
국민들이 입는 옷도 그렇고, 그들이 사는 집도 그렇다.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올라가고 그에 따라 비슷한 식문화를 함께 즐기며, 비슷한 생활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국민들은 하나가 된 것이다.
한국 국민들은 조선에 두고 온 자신의 가족, 친척, 친우 등이 어떤 환경에서 생활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에 남아 있는 그들은 남이 아니었다.
조선에 남아있는 그들에게도 한국의 이런 생활을 누릴 권리가 있지 않을까? 바로 이런 생각이 한국 국민들에게 점점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기본적이면서 가장 중요한 먹는 것! 그것에서 시작된 변화였다.
같은 시각, 스페인 왕궁.
스페인 국왕 필리페4세는 총신 올리바레스 공작에게 물었다.
"그래서 한국 국왕은 개종하겠다던가?"
"본인의 개종은 확답하지 않았습니다. 말씀드린대로 유럽인들의 종교활동을 차별하거나 방해하지 않을 것을 확약했습니다."
필리페4세는 올리바레스 공작의 답변에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올리바레스 공작은 필리페4세의 눈치를 보며 다시 말했다.
"그래도 다른 국가들에 비해 전향적입니다. 한국의 수도 서울에는 교회가 다수 있고 유럽인과 한국인이 함께 기도를 하는 것도 종종 보입니다. 한국인들이 종교활동을 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음..."
필리페4세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필리페4세는 부왕이던 필리페3세가 1621년 서거한 이후 스페인왕으로 즉위했다. 그의 아버지인 필리페3세처럼 그 역시 카톨릭의 포교에 힘쓰고 있었다. 또한 스페인의 막대한 부를 가지고 다양한 예술분야를 후원했다.
그런 필리페4세는 한국에 대한 고민을 더 이상 길게 이어가진 않았다.
현재 스페인은 광대한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고 황금시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그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많았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독립운동 등 눈에 가시같은 적들이 스페인의 패권에 도전 중이었다.
특히, 네덜란드의 독립운동은 격렬했다. 수십 년째 이어진 신교도 네덜란드의 독립전쟁은 스페인의 부를 뿌리부터 갉아먹고 있었다. 스페인 국왕은 합스부르크 가의 영주 중 하나였고, 그의 적법한 영지 네덜란드는 종교와 과세의 문제로 스페인에 저항하고 있었다.
스페인의 막대한 부는 신대륙 아메리카의 금은보화와 네덜란드의 모직업 등 세금에서 비롯됐다. 당장 네덜란드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에 대한 내정 간섭은 시기상조였다. 눈앞의 가시를 먼저 제거하고 난 후, 한국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기로 결정한 필리페4세는 말을 이었다.
"한국에 대해서는 좀 더 지켜보기로 하세. 먼저 우리의 빛나는 문화를 그들에게 보여주면 알아서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지 않겠나? 미개한 자들에게 신의 가호를 눈에 새길 수 있도록 유능한 사람들을 보내라. 그리고 그들에게는 빠른 배를 만들 기술이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들을 설득해 그 기술을 가져올 방도를 찾아오게. 그게 아니면 한국문제는 급하지 않으니까."
"알겠습니다. 전하."
올리바레스 공작은 국왕 필리페4세의 명을 받아 자리를 떴다.
전쟁준비
펑!펑!펑!
쏴아아!
철썩철썩!
함대 종합전투훈련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나는 대한민국 해군장교로는 아주 평범했다.
하지만 대항해시대에서만큼은 내가 가진 지식수준만으로도 시대를 앞선 선구자다.
한국해군에서 나는 그 기초부터 모든 것을 만들어낸 사람이다.
지금 근해작전을 총지휘하는 것도 나다. 아니 실제 지휘하는 것은 해외원정군사령관과 함장들이고 나는 검열을 겸해서 지켜보고 있다. 사실 국왕이 훈련을 지켜보고 있는데 그걸 지휘중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이상하다.
우리 해군은 무역회사에서 시작한 오랜 항해술이 밑바탕이 된 것 때문인지, 개별적인 함정의 기동이나 전투는 그리 흠잡을 게 없었다. 하지만 집단전투는 아주 어설펐다. 그래서 함대 종합전투훈련에서는 함대운용능력을 집중적으로 훈련했다.
한국은 전쟁을 통해 세워진 나라가 아니다.
네덜란드로부터 뉴홀란트(주 : 호주와 뉴질랜드) 지배권을 구입하는 형태로 영토를 얻었다. 또 그 영토는 유럽 여러나라의 승인을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전쟁이나 어떤 다른 분쟁이 없었다.
우리 한국해군은 사략선과의 전투를 제외하곤 지상전투도, 해상전투도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훈련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개별 함정의 기동이나 전투는 정말 흠잡을 곳이 별로 없었다. 탁월한 함장, 장교들이 많았다.
그런데 개별적으로는 탁월하지만 집단으로 모아놓으면 10척이 1척만도 못할 수 있다. 실제 해전에서는 다수의 병력이나 함대가 소수의 병력이나 함대에 처참하게 패배하는 일이 적지 않다.
임진왜란 당시 명량해전을 보라!
이순신 장군은 단 13척의 전선으로 일본의 수백척 함대를 대파하지 않았는가?
지난 한달동안 해군 정규함대와 무역회사 함대를 불러 기본적인 함대의 집단항해, 함대대형의 분리 및 집결, 함대진형의 규칙에 대해 입에 단내가 나도록 가르쳤다. 기본적인 이론을 습득하고, 그 이론에 따라 함대를 운용하는 실전적 훈련을 시행하니 점차 개인역량의 차이가 드러났다.
그래서 함장과 제독의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을 결정할 수 있었다. 다만, 제독의 자리는 단순히 함대의 운용만이 아닌 해군전략과 전술을 이해하고 그걸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추가되기 때문에 보다 심사숙고해서 결정해야했다.
오늘 종합전투훈련으로 기본적인 함대운용, 함대전투의 실전훈련을 마무리했다.
비록 100%는 아니지만 함장, 제독 및 사령관의 능력을 믿고 맡기기로 결심했다.
대항해시대 다른 나라의 해군이 어떨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우리를 능가할 해군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예상되는 전투상황에 알맞은 훈련을 이론과 실전으로 습득하니 장교들의 모습에는 어느 정도 자신감이 엿보였다. 처음 함대훈련을 할때는 서로 약속된 신호가 엇갈려 해상에서 충돌할 뻔한 일도 있었다.
나는 종합전투훈련이 끝나고 난 후, 함대의 해산과 장병들의 휴가를 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