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흑흑... 어르신...."
그렇게 그들의 이야기는 끝을 맺었다.
어쩔 수 없는 미봉책
일본 통신사가 방금 서울항을 떠났다.
정말 융숭한 대접을 받고 말이다.
일본의 배로는 대양을 건널 수 없어 정부의 쾌속선으로 왕복 항해를 지원했다. 에도 막부의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국서를 가져온 통신사는 음식부터 화려한 선물까지 정말 거하게 대접받고 갔다. 물론 내가 일본 쇼군에게 보내는 호주특산품 등 선물까지 잔뜩 가지고...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죽고, 그 쇼군 직을 물려받은 도쿠가와 히데타다였다. 이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잔존세력을 완전히 멸망시켰으니 일본내부에 다른 적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끔찍했던 일본 전국시대의 잔재가 남아있었는지 극도로 몸을 사리는 듯 했다. 그래서 한국과 일본의 외교적 교섭은 서로간의 이익을 확인하고 그 이익에 대해 서로 인정하며 침해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정도로 끝났다.
한국의 핵심이익, 여기서 핵심이익이란 양보할 수 없는 전략적 목표다. 한국의 핵심이익이자 전략적 목표는 조선이다. 그리고 그 핵심이익의 생명선은 조선-유구-필리핀을 잇는 해상무역로였다.
일본의 핵심이익은 명과의 무역, 외교적 고립탈피, 막부의 권위 제고 등이다. 다시 말해 일본의 핵심이익은 중개무역이고, 그 중개무역의 생명선은 조선-대마도의 해상무역로, 유구국-사쓰마번의 해상무역로였다.
결론적으로 한국과 일본과의 대외관계는 현상유지를 한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과거와 달라진 것은 딱 하나, 한국과 일본의 '정식외교관계' 수립이었다.
만약, 한국과 일본의 이해관계가 대립할때는 과거와 달리 상호 정식 외교대화창구가 있으니 싸우기 전에 협의를 할 기회가 생겼다.
한국과 일본의 외교협정 내용은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과 일본은 서로 침략하지 않으며 영구히 평화를 추구한다.
둘째, 한국과 일본은 정기적으로 통신사를 파견한다.
셋째, 한국과 일본은 각자의 이익을 침범하지 않는다.
넷째, 한국과 일본은 각자의 자유로운 무역활동을 보장하고 합당한 세금을 납부한다.
다섯째, 한국과 일본은 유구국에 존재하는 각자의 이익을 해하지 아니한다.
여섯째, 한국은 유구국이 일본에 조공함을 인정하고 일본은 유구국에서 한국의 무역을 간섭하지 아니한다.
일곱째, 한국과 일본은 서로간의 세금에 대하여 그 합당한 절차를 협의하여 결정한다.
.....
내용을 보면 결국 서로 건드리지 말자. 니가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건드리지 않을께. 이런 내용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각자의 이익인데, 문구에 들어간 것은 유구국만이다.
나는 우리의 이익이 조선과 유구국이며 이를 양보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다만 유구국의 현상유지(일본과의 조공관계)에 대해서는 아예 상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우리도 유구국에 이익이 걸려 있고 그에 대해 일본이 방해하지 않으면 된다.
일본은 조선에 대해서 중개무역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한국이 유구국에서 회사를 운영하는 것에 대해 어떤 이의도 없다고 했다. 그리고 유구국에 대한 일본과의 조공관계를 인정하지 않으면 물러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이 두 가지를 인정하면 우리가 유구국에서 가진 이익을 절대 간섭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러니 현상유지 아니겠는가? 난 만족했다.
일본과의 이번 협정으로 후방의 위협은 일시 해소되었다.
내 생각에 별로 심각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이번 기회에 일본의 사정도 확인해봤는데 역시나였다. 일본도 명, 조선, 여진의 싸움은 알고 있지만 그것이 명의 멸망으로 이어질 것이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현재 상황에서 명이 망할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 내가 이상한 것이다.
지금은 명이 어렵다는 정도로만 아는게 일반적인 외교 상식이었다.
일본과의 정식외교를 열었으니 유구국과도 정식외교를 시작해야겠다.
유구국과의 정식외교는 일본과의 정식외교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진행될 것이다. 어차피 유구국은 명과 일본이란 두 나라에 모두 조공하는 이중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유구국이 명과 일본에 조공하는 관계를 인정하고 그 조공관계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외교관계를 수립한다. 아마 유구국은 우리 한국의 힘을 통해 일본의 간섭을 배제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런데 미안하다. 현실적으로 그건 안된다.
오늘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생각나는 밤이다.
물론 언젠가 누군가의 약속파기로 깨어질 수 있는 밀약일 것이다.
내가 먼저 깨지만 않으면 되겠지.
이번 협정도 후대의 누군가에게는 엄청 까일거 같다. 안까면 이상하겠지.
내 흑역사 하나 더 추가다. 대체 나한테 왜이러는데?
좀 미안한데... 이건 유구국에겐 희망고문이다.
가능한 한 주둔비라도 풍족하게 내 줘야지.
"유구국과 정식 외교사절을 교환하기로 했습니다. 우리 상단의 정박부두에 군함의 접안과 보급을 허용하되 병력의 하선은 사전동의 후에 하기로 했습니다. 곧 국서를 가지고 서울로 올 것입니다."
"유구국 외교사절을 후히 대접하도록 하고, 유구국의 항만시설을 확충하게. 사령부에서 보고한대로 해외원정단 인원을 선발하여 훈련에 만전을 기하도록."
"명을 받들겠습니다."
일본에 이어 유구국도 정식 외교채널에 포함되었다.
이제 동아시아에서 미수교국은 명, 조선, 여진이다. 그러니 조선에 파견된 이민국, 정보부가 잘 하고 있는지 확인해봐야겠다. 이민국은 개국 이전부터 조선에서 맹활약중이고, 정보부는 만 3년 가까이 되는 신생조직이지만 조선에 나가서 열일중이다. 이민국과 정보부는 서로 밀접하게 업무협조를 하고 있다. 이민국과 정보부의 시너지 효과를 확인할 겸, 그들을 불러봐야겠다.
세상은 넓고 또라이? 아니 인재는 많다. 어안이 벙벙하다.
"1분기 이민현황을 보고드립니다. 조선 9개 지부에서 4천2백32명이 입국했습니다. 그 중 초청이민이 3천8백20명으로 대부분이고 나머지는 기술자 우대이민, 서얼 및 퇴직한 궁의 관비, 망명노비 등입니다. 망명이 1백3명입니다. 망명신청자 중에는 추노들이 대부분입니다."
이민국의 보고는 계속되었다.
"전년도 동기대비 초청이민의 숫자가 줄었고, 망명신청이 점차 늘고 있습니다. 올해 이민자는 전년과 비슷하거나 소폭 증가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입국한 이민자에 대한 적응교육은 계획대로 실시할 것입니다. 초청이민자의 관련비용은 정산이 완료되었고, 기술자 등 기타인원은 예산에서 지출하였습니다. 이상입니다."
이민국은 일을 잘하고 있다.
다 노비출신이라서 그런지 동병상련의 정이 있다. 게다가 노비였던 가족을 초청이민 형식으로 데려오니 그 비용도 문제없다. 사실 배삯과 관련비용뿐이다. 정부에서도 국가의 번영을 위해 필수적이니 반드시 이민을 활성화시켜야한다.
작년에만 이민자가 2만이다. 개국한지 10년되어가는 한국의 국민은 대략 50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인구는 폭증하고 있다. 초반에 비해서. 물론 이 넓은 땅에 50만이면 빈땅이나 다름없다. 한국민 50만에 유럽인이 2만가까이 있다. 골드러시와 유럽제도이식을 위한 정부의 유럽기술자 초청때문이다.
앞으로 10년만 이런 추세대로 가면, 현재 아이들이 엄청난 속도로 늘어가는 상황에서 인구100만을 달성할 것이다. 그리고 20년정도 후에는 그 아이들이 또 아이를 낳아서 인구200만이 되려나? 이거 엄청나다. 나는 흐믓하게 웃으며 다음 보고를 기다렸다.
다음 보고는 정보부였다. 조선에 보낸지 벌써 만 3년이 다 되어간다. 1619년 사르후 전투가 끝나고 첫 선발요원을 보냈으니 1622년인 지금은 햇수로 3년차다. 이제 인조반정이 얼마 안남았을거다. 조선의 상황파악부터 해야지.
꽝!
나도 모르게 책상을 내리쳤다.
보고자 뿐만 아니라 내각의 각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이런이런 사태수습이 먼저다.
"흠흠. 벌레가 있어 잠시 실례했군. 계속 보고하게."
다리가 부들부들 떨린다. 이 인간들이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거야. 내가 말하지도 않은 것을 왕명으로 판단하고 일을 하다니. 난 조선을 해방(?) 또는 점령할 생각이 전혀 없다구!
이런 정보부의 보고에 내각의 각료들이 아무런 표정변화가 없었다. 이게 뜻하는 것은 하나 뿐이다.
내각과 정보부는 이미 이걸 알고 있다. 그리고 정보부의 판단을 공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의하고 있다. 이 정도면 내가 나를 의심해봐야한다. 내가 언젠가, 나도 모르게 그런 지시를 했었을지도 모르니까.
"조선지부장의 보고에 따르면 현재 조선 조정은 대북과 서인의 붕당이 당파싸움에 여념이 없습니다. 현재 조선의 정권은 대북이 쥐고 있으되, 서인의 세력이 더 많습니다. 서인은 조선국왕의 폐모살제, 삼정의 문란, 명의 재조지은 등을 이유로 은밀히 세력결집에 나섰습니다. 조선왕과 대북은 이를 해결할 능력이 없어 보입니다. 왕과 조정만이 아닙니다. 미륵신앙이 지속적으로 퍼지고 있어 최근에는 의금부에서 잡아들여 문초를 하였다 합니다. 서얼들도 심상치 않습니다. 특히 반역향으로 낙인찍한 지역의 불만이 크옵니다. 조선지부장은 이에 조선상단과 밀약을 통해 상단세력을 규합하였습니다. 미륵신앙은 정보부와 관련없는 자생세력으로 보입니다. 서얼집단은 별도 점조직을 통해 결정적인 순간에 세를 규합하는 것이 가할 것이라 사료됩니다."
허허. 가관이다. 일단 들어보자. 보고는 계속 이어졌다.
"조선지부장의 판단에 따르면, 조선은 조정의 분열이 극심하고 민심이 이반되어 북소리 한번에 무너질 것이라 합니다. 서인의 반정이 일어나면 그게 첫번째 기회이고, 서인이 대북을 말살하고 안심할 때가 두번째 기회이며, 서인이 안심하고 있을때 내부 반란을 책동하여 그 반란이 일어날 때가 세번째 기회라고 적시했습니다.
조선지부장은 세번째 기회가 가장 상책이며, 이때 조선 노비해방령을 선포하고 거병하면 될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이상입니다."
조선지부장이 천재는 천재다.
나는 현대인 이기에, 서인인지 동인인지 정확히 몰랐지만, 인조반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이후도 역사를 수박 겉핥기로 알았지. 이괄의 난은 분명히 기억한다. 이괄이 공신책봉에 불만을 가지다가 반란을 일으킨 사건 말이다. 조선지부장은 정보를 수집하고 그것을 통해 이를 예측했다. 이거야말로 한 나라를 아우르는 대단한 능력을 가진것 아닌가?
조선지부장은 어떤 유력사대부집안의 서자라고 했다.
그 유력사대부가 역모고변으로 죄다 죽었는데 그를 모시던 노비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고 우리 회사에 입사했다고 한다. 난 속으로 탄식했다. 조선이 쓸데없는 역모고변으로 사람을 죽여대지 않았으면... 조선이 서자라고해서 차별하지 않았으면... 그 역적집안 서자인 조선지부장이 조선의 발전을 위해 분골쇄신하지 않았겠는가?
조선지부장의 말은 너무나 지당했다. 나는 말없이 회의종료를 선포했다. 내가 조선지부장의 보고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었지만, 내각 각료들의 눈빛에는 이게 허락으로 보인 듯 했다.
오늘 밤은 길어질 것 같다.
대양항해의 문제점들
"오랜 시간 항해를 하는 선원들은 괴혈병(壞血病)에 걸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주기적으로 섭취하는 선원에게는 그 발병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 그동안의 오랜 항해 경험과 연구결과를 통해 확인되었다."
나는 지금 해군사관학교 대강당에서 열린 '국왕배 장기보존식품 발명경연대회'의 개회사를 열심히 읽고 있다.
"따라서 선장과 선원들은 물론이거니와 그 탑승객의 안전, 다시 말해 그들의 생명과 건강은 신선한 식품을 제대로 공급하는 것에 있다. 그래서 우리 한국은 중간기항지마다 신선한 채소와 과일 뿐만 아니라 식량과 식수도 깨끗하게 관리해야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간기항지가 너무 멀거나 아예 없는 대양항해가 있다. 예를 들어, 지난 수년간 영국과 스페인을 다녀온 선원들 중, 괴혈병으로 사망한 사람만 8명이고 경증이나 중증으로 확인된 사람은 수백명에 이른다. 이 문제의 해결은 우리 모두의 안전과 생명을 위한 중대하고도 위대한 도전이다."
역시, 개회사가 길어지는 듯 하니까 따분해 보이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도 높은 분들의 개회사나 환영사가 늘어질때마다 하품만 나던 때가 있었다. 이제 그만 줄이자.
"나는 여러분들이 이번 '국왕배 장기보존식품 발명경연대회'에 참가하여 낸 소중한 성과들을 바탕으로 '항해용 장기보존식품'은 물론이거니와 국내외 '일반용 장기보존식품'의 상업적 개발을 적극 지원할 것이다. 공장건설과 회사설립도 도울 것이며 그에 자본투자도 한국은행에서 금융지원을 약속한다. 그에 대한 독점적인 특허권을 30년간 보장할 것이다. 여기에 오늘 경연대회 상금은 일부일 뿐이다. 여러분들의 건투를 빈다. 이상."
대회참가자들의 짧은 박수소리와 함께 경연대회는 시작됐다. 나는 연단 위의 대회운영관계자들을 치하하고 연단 아래로 이동하여 대회참가자들을 살펴보다가 대회장을 빠져나갔다. 왕인 내가 그 자리에 있으면 대회 심사과정이 너무 경직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위대한 군인이자 황제 나폴레옹은 원거리 군사원정에서 장기보존식품의 필요성을 느껴 장기보존식품의 발명을 지시했고, 그에 따라 철제 통조림 등이 발명되었다고 들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장기보존식품은 군대나 선박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현대의 어디에서나 냉장고는 왜 필수품인가? 과거엔 왜 배추를 소금에 절여 김치를 만들고, 그 장독을 땅에 묻었나? 유목민들은 왜 고기를 염장하거나 육포를 만들었나? 이렇게 조금만 생각해보면 장기보존이란 것이 얼마나 인간의 삶에 중요한 지 알 수 있다.
나는 장기보존식품은 물론이고 장기보존방법(통조림의 통, 유리병 마개 등)을 찾기위해 유럽 곳곳에 외교사절 또는 직원, 민간인 유람단을 보냈다. 기존 장기보존식품도 그 제조법을 배워오도록 지시해서 일정부분 성과도 얻었다. 치즈, 살라미, 햄 등의 제조법은 이미 익숙했다. 거기에 포도, 딸기, 올리브, 대추야자 등을 배에 나무째로 옮겨와서 대규모 식목 및 재배를 준비하고 있다.
이번 경연대회에서는 장기보존식품 분야와 장기보존방법으로 분야를 세분화했다. 포도, 딸기, 올리브, 대추야자 등은 쨈을 만드는 식으로 나올거 같다. 그 외에 장기보존방법에 대해서는 통조림이 나오면 좋겠으나 과연 이번년도 대회에서 성공할런지? 아마도 당분간은 장기보존식품을 제조하는 것에 집중해야할 것일테지.
최근에 스페인 돼지를 들여왔는데 베이컨을 좀 만들었으면 좋겠다. 베이컨의 장점은 정말 무궁무진하다. 우선 베이컨은 장기보존이 쉽다. 이 베이컨을 빵 등 어느 것과 함께 먹어도 음식의 궁합이 잘 맞는다. 선상에서는 베이컨을 따로 조리하지 않아도 된다. 약한 불로 간단하게 조리해서 먹으면 아주 편하고, 과일을 첨가하면 더욱 더 질리지 않으면서 선원들의 영양보충에 그만이다.
요즘, 국민들의 육류소비가 늘어나면서 장기보존식품인 햄, 살라미의 소비가 폭증하고 있다. 이 많은 수요에 돈이 몰린다. 이걸 통해서 사업에 감각이 있는 자들이 오늘 경연대회에 참가한 것이다. 국가에서 자금지원까지 해주고, 특허까지 보장해준다. 참가하지 않는 사람이 바보인 것이다.
유럽의 기존 방식들은 충분히 배웠다. 처음 사략선을 노획했을때부터 연구에 착수했었다. 영국이 원양항해를 위해 준비한 식품은 정말 끔찍할만큼 딱딱한 비스킷과 소금에 절인 고기였다. 거기에 럼주 등이다.
이러니 괴혈병으로 선원들 절반이 죽지. 괜히 괴혈병으로 수많은 선원들이 죽은게 아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단거리 노선만 주구장창 다녀서 그런 일이 없었다. 하지만 제부턴 우리도 인도양과 대서양을 지나 유럽으로, 태평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다녀야한다. 반드시 그래야한다.
역시 기반기술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었다.
장기보존식품에서는 예상대로 쨈과 조림이 대세였다. 또 육포에 훈제를 가미한 훈제육포가 인기를 끌었다. 햄에도 훈연을 가미한 것이 눈길을 끌었고 다양한 살라미 제품들이 상을 받았다. 장기보존식품은 나름대로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기보존방법에는 큰 진전이 없었다.
유리병의 대량생산은 아직 어림도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통조림용 철제캔은 스테인레스강철도 없고, 얇은 철판도 만들 능력이 없다. 철제캔의 무게가 내용물보다 수십배는 비싸고 몇배는 무겁다면 누가 쓰겠는가? 그래서 다음을 기약하며 대회 종료를 선언했다.
그래도 다양한 쨈과 조림, 훈제육류, 훈제햄 및 살라미 등이 다수 나왔다. 이제 이것들을 국민에게 소개하고, 그 생산방법을 전파하면 된다. 이 제품들이 곧 국민의 식탁을 보다 풍성하게 할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경제는 발전하는 것이다. 국민들이 햄을 좋아하게 되면, 기존의 생고기만 먹던 것에 비해 많은 장점이 있다. 장기보존식품이 별건가?
이번에 입상한 장기보존식품을 무역회사와 해군의 함정에 납품하게 해서 시장규모를 더욱 키우고, 선원들과 국민들에게 지속적으로 홍보해야한다. 이런 것들을 지시하고 난 후, 왕궁으로 돌아왔다. 그나마 내가 한국에 기여할 수 있는 것들은 이런 것들 뿐이다.
대항해시대의 시계는 너무 비싼 물건이다.
내가 아직도 원양, 대양항해를 주저하는 이유는 제대로된 경도계가 없기 때문이다. 대항해시대라하더라도 위도와 경도를 제대로 측정할 수만 있다면 대양항해에 아무 문제가 없다.
물론 나에게는 나만의 치트키인 세계지도가 있다. 다소 부정확하지만 기본적인 세계지도이자 해도가 있으니 대략적인 위도와 경도만 가지고도 동아시아와 근해는 찜쪄먹을 수 있다.
그런데 대양항해는 위험하다.
과거 대항해시대에서 유럽-인도의 항로를 항해하는 선원 대부분이 각종 해난사고와 질병으로 죽었다. 우리 역시 알토란같은 배와 귀중한 선원들을 잃을 가능성이 커진다. 망망대해에서는 작은 폭풍 한번 만나는 것으로 자신의 예상위치를 잃어버린다. 위도야 육분의를 가지고 금방 측정할 수 있다. 하지만 배의 속도, 경도 등은 아니었다. 결국 그렇게 헤메이다가 죽어나간다. 그래도 선원들은 위도를 측정할 수 있는 육분의와 본인의 경험으로 먼 바다를 항해했다.
예를 들어, 스페인에서 출발해서 아메리카로 가는 선장들은 동일 위도에 있는 대서양 반대편에는 서인도제도인 현재의 쿠바가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그동안의 경험으로 스페인에서 쿠바까지의 항해시간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위도는 계속 육분의로 측정하면서 서쪽으로 항해하면 결국 쿠바인근에 다다르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서양을 항해할 때는 큰 문제가 없었다.
또한, 해안가를 따라 인도로 가는 항로도 크게 문제가 없었다. 아프리카 해안을 빙둘러 항해하면 된다. 거기에 본인의 위도만 측정하면 아프리카 최남단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을 지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식이다. 그런데 경도를 알면 아주 정확하게 본인의 위치를 알 수 있으니 그게 아쉬운거다. 정말 처절하게 아쉽다.
현재 대항해시대 선원들은 당연히 세계지도를 알지 못한다. 본인의 경험과 위도만을 알고 항해속도 및 항해시간을 참고하여 위치를 추정한다. 그래서 비슷하게 목적지를 찾아가는 것이다.
나는 세계지도를 알고 있다. 그건 정말 치트키다. 여기에 육분의가 있으니 단거리 항해는 걱정할 것이 거의 없다. 우리 한국의 상선과 해군의 배 손실률이 아주 적은 이유다. 그런데 여기에 크로노미터 시계(경선의(經線儀)는 선박의 진동 및 온도 변화에 영향을받지 않는 정밀 휴대용 태엽 시계를 말한다.)가 추가된다면 어떨까? 우리는 이미 세계에서 가장 빠른 배를 가졌다. 거기에 더하여 세계최고의 항해기술을 가지고 대항해시대를 누비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