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 중심인 명이 망하고 있다. 정치외교가 안정되어 있지 않으면 무역은 불안해진다. 무역상관이 불안하고, 해상로도 안전하기 어렵다. 여진족의 나라 청이 중국을 통일해도 우리는 괜찮다. 그걸 아는 나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수상을 비롯한 의원들, 무역회사 및 해군은 초긴장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해야할까?
동아시아는 명, 조선, 청, 일본, 유구국 총 5개국이 있다. 우리는 그 5개국 중 만주를 제외한 4개국과 무역을 하고 있다. 우리의 이해관계는 동아시아 4개국에게 있다. 동아시아 5개국가는 우리와 외교관계가 없다. 오직 무역관계만 있고, 외교적(무역도 일종의 외교이지만)인 접촉은 없었다. 이제 외교적 접촉을 시도해 볼 때였다. 나는 장고끝에, 내각과 의회에 외교정책의 대전환에 대한 정보수집을 2년전 명령했었다. 이제는 더 지체할 수 없다. 그동안의 정보수집을 바탕으로 뭔가를 해야했다.
무역은 우리의 심장이다. 해상무역로는 그 심장을 잇는 혈관과 피다.
"그동안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내각과 의회는 일본, 유구국과 먼저 통교하여 후방의 위험을 없애야한다고 뜻을 모았습니다. 명, 조선, 여진과는 그 후에 생각해야 합니다."
외교부장의 발언과 동시에 해군사령관이 발언했다.
"동아시아는 거리가 있습니다. 보급선 때문에 해군력의 투사가 제한적입니다. 유구국에 양해를 구하여 무역회사의 항만시설과 보급창고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효율적인 작전수행이 어렵습니다."
외교부장이 말을 이었다.
"일본은 1609년부터 유구국을 자신의 세력하에 두었습니다. 현재 사쓰마번이 유구국의 일부 영토를 빼앗고 조공을 받고 있습니다. 유구국 전 국왕 쇼네이가 에도 막부에 입조까지 했습니다. 작년(1620년)에 쇼네이 왕이 죽고 새 국왕이 명과 조선에 사신을 보내 일본을 견제하려고 노력중입니다. 하지만 명은 내부 반란과 여진때문에 여력이 없습니다. 조선도 마찬가집니다."
외교부장은 잠시 목을 축이고 계속 말했다.
"일본은 유구국이 명에 조공무역을 하기 때문에, 그 이득을 위해 유구국을 아예 병탄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유구국은 명과의 조공무역은 물론이고 사무역도 가능하기에 일본의 젖줄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일본은 조선, 유구국 및 우리와 중개무역을 합니다. 이 3개국 중개무역은 모두 명의 물품을 조선, 유구국, 우리를 통해 일본으로 들이는 것입니다. 일본이 유구국을 포기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명과 직접 통교를 하더라도 유구국은 명과의 해상교역로입니다."
외교부장은 해군사령관에게 눈짓을 했다. 해군사령관이 이어 말했다.
"우리에게 유구국은 디딤돌이고 최종목표는 조선입니다. 유구국의 후방에 있는 일본이 불안하면 전략목표를 달성하기 힘듭니다."
이제 또 그 말이 나올거 같다.
"그래서, 우리 해군은 일본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하고 유구국을 아국의 영토로 편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꾸 일이 커진다.
나도 안다구. 알고 있어.
이러면 또 나만 나쁜 놈이 된다.
외교부와 해군은 힘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이제 조금씩 자신이 생긴 것이다. 실제 우리 무역회사와 해군은 유럽의 사략선을 겁내지 않는다. 상선은 속도가 빠르니 잡힐 일이 거의 없다. 지금까지 무역회사가 사략선에 털린 것은 딱 1번이다. 나머지는 메롱하며 빠르게 지나가거나 역관광시켰다.
무역회사 시절에도 유구국을 병탄하자는 말이 나왔었다. 사실 가능했을거다. 일본이 옆에 있어서 자극할까봐 못했다. 내가 일본핑계를 대면서 직원들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역회사 시절의 유구국 병탄 주장이 오늘 또 나온 것이다. 유구국을 우리 세력에 편입시키면 정말 좋다. 그건 인정한다. 일본, 조선, 명을 연결하는 꼭짓점을 우리가 잡게 된다. 3개국의 멱살을 잡고 있는 것이다. 유구국은 힘이 없으니 3개국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명과 조선은 폐쇄적이니 유구국이 힘이 있어도 신경쓰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절대로 아니다. 유구국이 힘이 없으면 명과의 조공무역 등 무역통로로 유지만 해도 된다.
그런데 유구국 자체로 힘이 있거나 다른 세력이 유구국을 차지한다면?
일본은 자신의 해상무역로를 지키려고 전쟁을 불사할 것이다.
아무래도 또 나쁜 놈이 되어야하나?
유구국은 확정이고 일본은 어찌될까?
일단 외교부에 맡겨보자. 아직 시간이 있을거다.
임계점
조선 황해도의 어느 은밀한 곳.
"이어도는 진짜요. 그들은 거선(巨船)을 타고 다니지. 나는 그 배를 봤고 그들이 하는 말도 들었다오. 이어도에는 금적산(金積山)이 있소. 누구나 금을 캐고 가질 수 있지. 이어도는 노비들이 세운 나라요. 그리고 거기서는 양반이니 노비 구분없이 산다니 그곳이 극락정토(極樂淨土)요."
사내는 잠시 목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그 이어도에는 왕이 있고, 그도 조선의 노비였소. 그 왕은 우리를 구해주려 매년 거선(巨船)을 보내오. 나는 갯벌에 매향(埋香:미래에 미륵불이 세계에 태어날 것을 기원하며 향나무를 묻는 의식)을 하다가 그 거선(巨船)을 보았고 그 거선에 탄 이는 조금만 기다리면 우리를 데리러 온다고 말했소이다. 이것은 계시요."
사내는 주위를 둘러보며 나직하지만 힘있게 말했다.
"미륵께서 오시는 그 날이 세상이 뒤집어지는 날이오."
그 사내의 등 뒤에는 미륵하생경변상도(彌勒下生經變相圖)가 걸려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한참을 이어졌다.
조선 한양의 어느 곳에서 사대부 두 명이 대화 중이었다.
"자네도 들었나?"
"이어도니 금적산이니 다 헛소릴세."
"풍문이긴하나 제주 아래에 이어도를 본 사람이 있다네."
"그건 제주 아래에 유구국을 이르는 것이네. 흔들리지 말게."
"아예 허무맹랑한 것은 아닌듯 싶네. 천한 것들의 붕당에 조정이 발칵 뒤집혔으니."
"그거야 전조를 따르는 무지몽매한 것들이 아닌가?"
"이어도에 왕이 있고 그가 미륵이라는군. 고변이 있어 의금부에서 문초중이네. 수괴는 달아난 듯 하이. 그런데...미륵만이 아닐세. 서얼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으이."
"재조지은을 저버리고 폐모살제까지 있었어. 이런 나라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놀랍지는 않을걸세. 그러니 하늘이 진노하여 그 천한 것들까지 이 난리..."
"쉿. 목소릴 낮추게. 누가 들을까 두렵네."
"크흠. 이만 가지."
최명길은 깊은 상념에 빠져 있었다.
임진년의 그는 빛, 그 자체였다고 내 스승(주 : 이항복)도 극찬했다.
허나, 지금 주상은 혼군(昏君)이다.
그간 일어난 수많은 옥사는 차치하더라도, 민생의 문란은 그 누구도 비호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민생의 문란이 궁궐 공사라니. 이는 걸과 주가 하늘의 노여움을 사게 된 일이 아닌가. 오죽하면 공정하게 행정업무를 수행하는 지방관이 탄핵받거나 임기가 끝나 교체될 경우, 백성들이 스스로 돈을 모아 연임토록 청을 할까.
궁궐공사 재원을 마련하기위해 세운 영건도감 소속 조도사들은 울고 싶은 사람의 뺨을 때렸다. 안그래도 불타오르기 전인데 불씨를 당긴 것이다. 왕의 비호아래 정해진 수량에다 방납가를 적용해서 최대 100배까지 징수해서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짰다. 이를 보다 못한 관료들이 주상에게 조도사의 불법행위를 고발했는데 주상의 말에 모두들 아연실색했다. '조도사들이 취한 건 별비(別備)지 백성들에게 취한 게 아니다.'라니. 이건 궤변이다. 그는 혼군이다.
2년 전에는 장만이 말을 듣지않아 거사가 수포로 돌아갔다. 이젠 2년 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 자신의 부당한 파직이야 참을 수 있다. 그러나 내 스승(이항복)은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귀양가서 돌아가셨다. 이제 조야(朝野)의 민심은 끓어 넘치기 직전이다. 아니 끓어 넘치고 있다. 숨을 죽이던 서인이 이제 움직인다. 능양군은 애비가 그 인간말종 정원군이다. 선조는 임해군, 순화군, 정원군 같은 것들을 세상에 내보냈다. 흐흐, 그것들이 사람새끼던가? 지금 주상도 처음엔 다르게 봤더니 씨는 못 속이는 것 같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아닌가. 우리 서인이 중심을 잡아 성군으로 만들면 된다. 우리 서인이 택군(擇君)한 것이다.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하리라.
요즘 저잣거리에 나도는 소문도 하늘이 노했음을 보여준다. 천한 것들이 이어도, 금적산이니 떠들어대며 반상의 법도가 흔들리고 있다. 미륵이 강림한다는 고변도 들어왔다고 한다. 서얼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이제는 더 미룰 수 없다. 이 나라와 억조창생(億兆蒼生)을 위해서.
최명길(崔鳴吉)은 그리 결심하고는 이귀(李貴)에게 쓰던 편지를 마무리했다.
이제 시작이다.
경상 행수의 사랑채.
경상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전각 주위에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엄명이 떨어졌다. 그곳에는 경상의 행수 김갑석과 한 사람이 마주앉아 있었다. 그들 앞에는 차게 식어버린 차가 놓여 있었다. 그 차는 둘 중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다. 그들의 은밀한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계속되어 온 듯 했다. 그러다 경상의 행수 김갑석이 식어버린 차를 한모금 들이키며 말했다.
"이어도에 금적산(金積山)이 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런 풍문이야 직접 가보지 못한 이들이 하는 말이지요."
"그게 간단치가 않소이다. 우리같은 천한 것들은 살랑거리는 봄바람에도 크게 흔들린다오. 미륵을 따르는 무리들은 그대들을 보고 미륵이라 하오."
"..."
김갑석의 맞은 편에 앉은 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식어버린 차를 한모금 마시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묘한 열기가 있었다.
"저희 제안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받지 못할 이유가 없소이다. 우리같은 천한 것들에게는 너무 가혹한 하늘이오. 대신 나 혼자 받겠소."
"그럼 계획대로 준비하겠습니다. 우리는 천한 것들이 아닙니다."
그 후로도 그들의 대화는 밤이 깊도록 이어졌다.
만상 행수의 사랑채.
"만상은 반대할 이유가 없소. 여진에 참패를 당하고 국경이 불안하오. 당장 사행길이 막힌다고 하는 판에 말이오. 요즘 철과 구리는 물론이고 궁궐공사에 필요한 물목을 내라고 얼마나 닥달하는지..."
"필요한 만큼, 아니 원하시는 만큼 충분히 공급하지요. 대금은 지난 번 거래보다 2할을 감하여 받겠습니다."
"내 이제부터 베게 편히 잠을 잘 것이오. 고맙소이다."
◆ ◆ ◆
"내상은 오지않고 혈서로 가(可)라 쓰고 직인을 찍었소."
"이제 되돌릴 수 없겠구려."
"돌릴 수 있다면 돌리려오?"
"난 다 산 목숨이니 미련없수다.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우리네 운명이우. 흥! 나라라고 다를까."
"난 그들이 성공할거라 굳게 믿소이다. 철과 구리 이십만근을 배 한척으로 의주 앞바다까지 쉬이 가져다주는 나라요. 배에는 기중기라는 기물이 있어 사람 수십의 힘을 내어 물건을 부린다오. 그것을 단정12척으로 6시진에 끝냈지. 그건 대국도 못하오."
"..."
그리고 그들은 아무말도 없었다.
◆ ◆ ◆
한양 인근의 어느 안가 내실.
"경상, 만상, 내상이 우리와 손을 잡았습니다. 송상은 내부다툼이 심하여 제외했습니다."
"궐과 조정에 연줄은 어떤가?"
"사대부에 고관이라는 자들이 더 밝힙니다. 오히려 환관이나 나인들이 더 깨끗합니다. 병사들 중에 급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자들이 많아 군영은 포섭이 쉬웠습니다."
"붕당은?"
"서인과 대북을 면밀히 살펴보고 있습니다. 조정의 세력분포를 확인한 후에 보고드리겠습니다."
"음...뭐니뭐니해도 군권에 대해서 신경써서 보게. 병영의 포진, 병력과 이동, 그 수장들이 어느 붕당과 연결되었는지 확실하게 파악해서 보고하도록."
"요즘 미륵을 추종하는 자들에 대한 소문이 빠르게 돌고 있습니다. 의금부에서 문초를 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미륵이 우리 ...로 보입니다."
그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다.
"흠흠. 확실치는 않으나 서인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세를 규합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최근에 배를 탄 이민자들이 한 말입니다. 확인 후에 보고드리겠습니다."
무리의 우두머리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께선 우리의 안위를 가장 먼저 살피도록 명하셨다. 각 지부장들은 조직원들의 연락망을 확인하고, 안전에 만전을 기하라. 작전명은 '여명'이다."
"네 알겠습니다."
늦은 저녁, 양화나루 근처 10칸짜리 기와집에서 나온 사람들은 바삐 움직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접선지인 양화나루 근처 기와집을 나선 우두머리 사내는 나루에 메어진 작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배에서 내린 그가 십여분을 걸어 도착한 곳에는 30칸이 넘는 기와집에 그만큼 더 큰 창고가 있었다. 그가 문을 두번 두드리고 한번 긁는 소리를 내자 소리없이 문이 열렸다. 문을 연 사람은 아무 말없이 우두머리 사내를 들이고는 문을 닫았다.
"이번 차수는 다음 주에 보내는 것으로 하게."
"알겠습니다. 이번 차수에는 저도 본토로 귀환합니다. 계속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허허허. 셋째가 태어난다는데 아비가 가보는 것이 당연하지. 이번 휴가를 마치면 본부에서 근무한다니 우리 좀 잘 도와주게나."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저같은 천것이 어르신을 모시는..."
"그 입 다물게!"
우두머리 사내는 얼굴색을 굳히고 엄히 말을 이었다.
"나는 자네와 함께하던 시절부터 귀천을 생각한 바가 없네. 우리는 같은 피가 흐르는 사람이지. 더 이상 귀천을 이야기하면 내 자네에게 실망이야."
"어르신.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니야. 수천년간 이어져 내려온 일일세. 나도 자네도 이 뼈와 살, 머리와 피에 각인되어 있을지도 모르네. 국왕전하께서는 그걸 혁파해야 한다고 하셨지. 우리는 뭉쳐야하네. 나는 국왕전하의 참 뜻을 이제야 제대로 이해했어. 국왕전하께서는 조선의 민중을 구원하시려는 것이 틀림없네. 나는 그 사명을 묵묵히 수행할 뿐이야. 나는 내 혼신을 다할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