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225)

◆ ◆ ◆

조선의 여러 곳.

"이어도가 노비들의 나라라는게 참말이유?"

"자네는 아랫동네 막동이가 속량되어 윗동네 순분이랑 혼인한거 못봤나?"

"아유~ 저도 봤지유. 그런데 저같은게 어찌 그럴 수 있나유?"

"충분하네. 자네 삼촌이 거기 상단에서 일을 하고 있어. 이번에 나를 보내 자네를 만난것도 자네와 자네 가족을 데려가려고 한걸세. 자네 주인에게 노비문서도 받아왔네. 자네 삼촌은 부자고, 자네가 먹고살 방도도 이미 마련해놨어. 여기 지장을 찍게나."

"삼촌이 그렇다면 저도 가야지유. 어이쿠~ 뭔 돈을 이리 많이 준대유."

"짐 챙길것 없네. 그냥 맨몸에 옷가지만 가지고 가면 되니....."

"허허. 이거 물리기 없는거요?"

"제가 어찌 물리겠습니까? 안그래도 손이 부족해서 대감께 이리 부탁했는데..."

"알겠소. 어서 쭉 들이키시오. 내 약조대로 30구를 넘기리다."

"대금은 오늘 오후에 치르겠습니다. 대감 덕분에 한시름 놨습니다."

"순금아! 내 돈 많이 벌어서 너 데리러 오겠다. 기다려라."

"흑흑흑. 오라버니 무사히 돌아오셔야해요."

유구국, 상단 본부.

직원들의 여망(餘望 : 남은 희망 또는 앞으로의 희망)을 난 과소평가했다. 

그 여망이, 노비라는 희망이 없던 자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3만명으로 예상했던 정착민은 직원들의 경제적 사정이 좋아지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직원들도 돈이 넘치니까 가까운 친인척의 속량에 문제가 없었다. 

직원채용에는 제한이 있어 불가능하더라도 정착촌의 땅을 나눠주면 되니 아무 문제가 되질 않았다. 직원들이 자기 돈을 쓰겠다는데 말릴 이유도 없다.

정착촌에는 우리 직원만 있는게 아니라 농사지을 사람, 집짓는 사람, 옷 만들 사람 등등 수많은 직업의 사람들이 필요했다. 탐사대가 다녀오고는 보고서를 올렸다. 보고서에는 항해일지와 해도를 첨부했다. 

역시 호주였다. 

위도는 확실했고, 항해거리를 생각해보면 호주의 시드니까지 탐사하고 왔다. 탐사대장은 모든 조건을 감안할때 시드니와 브리즈번을 주된 정착지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직원들의 여망을 무시하거나 거절하는 순간 이 회사는 모래알처럼 산산이 부서질 것이다.

부단장 저 인간이 일을 너무 키웠다. 3만명을 예상했는데 벌써 7만명이다.

"그래서 네덜란드에 제시할 국호는 '한국'으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회장님의 말씀대로 그 섬의 이름은 호주로 명명하겠습니다. 스페인 총독도 승인의사를 전해왔습니다. 정식 국서를 보내오면 가승인하고 본토의 정식승인을 받겠다고 했습니다. 포르투갈과 영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신 영국은 승인의 댓가로 상호 항로의 안전보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알겠다 전하게."

"아직 허락하지 않으신 것이 있습니다."

"그건 좀 더 고민해보도록 하지."

"나라에 왕이 없다면 그것은 나라가 아닙니다. 국호가 있고, 국민과 영토가 있습니다. 그런데 형식적으로만 왕이라니요? 세상에 그런 나라는 없습니다. 저희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부단장은 또라이다. 

나 좀 가만히 내버려둬. 제발.

뜻하지 않은 개국(開國)

올해는 1618년이다. 내가 1598년생이니까 이제 21살이다. 

한국은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승인을 받은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개국한지 5년차 신생국가다. 영토는 현대에서 말하는 호주와 뉴질랜드다. 거의 모든 재산을 다 털어넣어서 만든 나라다. 

나는 쿨하게 유럽식으로 국가체계를 정했다. 

입헌군주제와 의원내각제, 사법제도를 영국과 똑같이 베꼈다. 스페인은 절대왕정이니 안되고, 프랑스나 독일식은 나오지도 않았으니 베낄 원본이 없다. 영국의 제도를 따르는게 그나마 편하다. 

개국과 동시에 영국으로 100명이나 되는 직원을 파견했다. 

엄청난 자금을 투자해서 영국의 정치, 경제, 사회제도를 배우고 전문가들을 초빙하도록 했다. 

"지금까지 아국을 승인한 국가는 모두 23개국입니다. 명, 조선, 일본, 유구국을 제외하면 정식 승인은 아니라 하더라도 통교에 대한 것은 인정했습니다."

외교적으로 승인이란 '국가, 정부 등에 대하여 국제법상의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해양법을 배운 나에겐 익숙한 개념이다. 

그런데 아시아는 중국 명나라의 조공체계를 통해 외교질서의 중심이라서 명나라의 고명을 받아야 정식으로 인정받았다. 

중국중심을 벗어날 수 없으면 어쩔 수 없다. 

일본도 고명은 받지 않았지만 외교관계를 위해 노력을 많이 했었다. 

그만큼 명의 위치는 동아시아의 패권국가 같은 것이다.

우리야 호주라는 닿기 힘든 곳에 있으니 명, 조선, 일본 등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다. 이 호주까지 해군력의 투사가 가능한 나라들이 중요하다. 그래서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 유럽의 나라들에게 승인을 받아야 했고, 이제 주요국가의 승인을 다 받았다. 

나머지 나라들은 '스페인도 승인했는데 너희는 안할거야?' 식으로 나가면 된다. 

이것도 무역을 하면서 필요한 것이니 주요국가들과만 정식 외교적 관계를 맺으면 된다. 지금 아시아로 해군력을 투사할 수 있고, 무역을 하는 국가와만 정식외교를 하면 된다. 아직까지는.

내정은 그나마 편했다. 

수십만에 불과한 인구가 호주란 광활한 땅에 사는데 까탈스럽게 굴 이유가 있나? 대신 주거 및 농업 등 환경이 좋은 곳, 특히 바다를 통해 접근이 수월한 항구 주변에 주거하도록 했다. 

호주 내륙에 정착하면 이동에 걸리는 시간과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현대의 시드니와 브리즈번을 최초 정착지로 결정했다. 시드니는 서울로 브리즈번은 인천으로 명명했다. 

뉴질랜드에는 한국의 영토라는 표식으로 표지석과 표지목을 수백개 만들어서 해안가 배를 정박하기 좋은 곳을 중점으로 빙 둘러서 영역표시를 했다. 인구가 늘어서 여력이 생기면 정착촌을 만들 계획이었다. 

최근에는 현대에 퍼스라고 불리는 도시인데, 신의주로 명명하고 신 정착촌을 신설했다. 인도와의 교역에 유리한 인도양 무역거점이었다. 

호주대륙의 그 넓은 땅에 동남쪽 수도 서울, 동쪽 중간에 인천, 호주대륙 서쪽 인도양에 접한 신의주 딱 3 곳이 인구 3만을 넘기는 도시의 모습을 갖췄다. 물론 서울은 인구 10만에 가까운 대도시가 되었다. 그 외에는 중간 기항지나 토지 측량을 위한 임시 거주지를 만들어 두는 정도로 만족했다. 

이제 내년에 인구 20만을 넘을거 같다. 

처음 인구 7만으로 시작했기에 별 걱정이 없었다. 

초기엔 동남아에서 안남미를 들여와서 거의 퍼주다시피 했다. 식량이 충분해야 인구가 늘어난다더니. 서울 시내 어디를 둘러봐도 어린애들 천지다. 저 아이들이 크면 인구폭발을 경험할 거 같다. 

결국, 가장 중요한 의식주를 위해 나는 결단할 수 밖에 없었다. 

호주는 조선식 농업이 가능한 곳도 있었지만 아닌 곳이 더 많았다. 결국 영국식 낙농업을 기본으로 삼았다. 내 클리퍼를 동원해서 양과 젖소를 사고 영국의 농부들을 비싼 돈으로 고용했다. 쌀보다는 밀의 증산을 위해 노력했다. 아직은 낙농업이 초기단계이고 밀의 생산은 간신히 수요를 충족하는 선이다. 쌀은 조금씩 남고 있고. 

이 넓은 땅을 개발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결국 사람이다.

호주 서울.

"내년부터는 토지와 소득에 대한 세금을 거둬야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동의합니다. 국세청에서 세목에 대한 조사보고가 들어오는대로 심의를 하도록 합시다."

"저는 반대합니다. 지난 5년간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국민학교에서 한글과 산수를 가르쳤지만 문맹률이 절반이 넘어요. 국민들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시기상조요."

"그럼 토지에 대해서만 먼저 시작합시다. 재무부와 한국은행의 보고에 따르면 무역종사자를 제외한 국민의 평균소득이 은85냥이오. 토지세는 국민들이 납득하기 쉬운 편이니 가할 것이오."

"김의원님 말씀도 일리가 있으나 여전히 반대합니다. 우리는 조선과 달리 해외무역이 전체 소득의 5할이 넘어요. 국내생산의 소득은 농업의 비중이 2할도 채 되질 않습니다. 나머지 3할은 국내상업, 수공업 등 다양하오. 농업에 대해서만 세금을 거둔다면 균형이 맞지 않아요. 토지는 어차피 널려있고, 개간하는 비용이 드니까 세금은 당분간 면제해줍시다. 대신 토지에서 나오는 산출에 대한 소득에 세금을 부과하는게 좋다고 생각되오."

"이의원님 생각에 찬성합니다. 역시 소득세는 국민에게 설득이 중요하니 계속 홍보를 하고, 문맹률이 더 내려가면 다시 논의합시다. 교육부에서 올라온 보고에는 4년 내에 문맹률이 20% 이내로 떨어진다고 하니까요."

"그럼 토지세와 소득세는 보고서를 보고 의원님들 각자 의견을 제출해주시고 안건토의를 마칩시다. 당분간은 주민세와 부가가치세를 중심으로 운영할 수 밖에 없겠습니다. 상무부에 무역세를 무겁게 물리는 것은 양해를 구합시다. 더 의견이 없으면 이상 마치겠습니다."

수상(首相)은 따끈따끈한 의회 회의록을 확인한 다음 내각을 소집했다.

"이제 내년부터는 국내생산과 해외무역 규모가 달라질 것이라 예측되오."

"수상 각하! 내년에 바로 조세제도개혁과 국토개발계획을 실행해야합니다."

"불가합니다. 의회에서 이미 토지세와 소득세의 부과를 연기하기로 의견이 모였습니다. 국민교육이 아직 부족해요. 내각이 결정해도 의회에서 의결이 되지 않을겁니다."

"답답합니다. 재정이 부족해서 국토개발계획이 연기되면 전하를 볼 면목이 없습니다."

"상무부는 어떻소?"

"죄송하오나 무역세를 더 이상 걷기는 어렵습니다."

상무부장은 잠시 목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작년부터 전하께서 지시하신대로 유럽의 탐광꾼을 대거 풀어 신의주와 서부지역을 조사했습니다. 수상께는 이미 보고했지만 노천탄광, 사금, 철과 구리광산이 발견되었습니다. 탄광이나 철, 구리광산은 대규모 자본투자가 필요하니 국토개발계획에 따라 차분하게 진행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돈이 부족하니까요. 그런데 전하께서 사금과 은 등 광산 관련 보고를 들으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금과 은 광산의 위치를 몰래 소문내고 사금채취는 세금을 절대 부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은광산은 개인이 돈을 출자하여 개발하면 5%의 세금만 부과하라고 하셨습니다."

"허허. 세금을 걷지 않으면 죄다 신의주로 몰려가는 거 아니오?"

"전하께서는 거기에 하나 더 말씀하셨습니다. 금과 은광산을 개발하면 개발권을 정부에서 공식인정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내각 회의는 갑론을박을 거듭하다가 긴급한 안건들을 몇개 더 처리하고는 다음 회의까지 정회되었다. 

몸은 편한데 마음은 불편하다.

난 5년차 왕이다. 

내가 살기 위해서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사법제도를 밀어부쳤다. 영국제도를 완벽하게 베꼈다. 그걸 위해서 첫해 100명, 그 다음부터 매년 인원을 늘려가면서 여러 제도를 배워오도록 했다. 

언어는 기본이고 기술까지 다 베껴오라고 지시했다. 현대적인 제도는 내가 따로 지시했다. 의원들과 내각은 공동체나 다름없기에 가장 똑똑한 사람들을 밀어넣었다.

유럽의 유명한 학교에 유학을 보내 법, 경제, 의학, 과학기술 등을 배우도록 했다. 내가 조선의 현실을 알기에 성리학이나 한자는 아예 말도 못꺼내게 했다. 현대한글을 회사에서부터 썼기에 국민학교에서 그대로 가르쳤다. 

지난 5년은 국민계몽을 위한 시간이었다. 

아직 멀었지만. 

그동안 벌었던 모든 재산, 직원들도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전재산을 갈아 넣었다. 어떤 직원은 자기 가족은 물론이고 같은 양반의 밑에서 노비로 있던 사람들을 모두 속량시켜왔다. 놀라지마시라. 총36명을 데려왔다. 

처음 정착촌 시작할때 직원 5천여명, 가족 3만여명으로 예상했었다. 그런데 그게 첫 이주부터 2년차까지 7만명이 되더니, 이제 14만명이다. 매년 인구가 늘고 있다.

나는 수상이 된 그에게 모두 떠밀었다. 

그는 2등 항해사관으로 시작해서 함장 및 인사부장 등을 거쳐 수상이 되었다. 내가 원한게 아니라 수상 본인이 원한 것이니 원없이 일하게 해줬다. 

내가 그동안 혼신의 노력을 다한 것은 해군사관학교설립과 해군양성이었다. 난 내가 가진 해군경력을 거기에 모두 쏟아부었다. 대한무역주식회사의 직원들은 모두 배를 타고 총을 쏠 줄 안다. 어느 정도의 기본전투도 가능하다. 

그런데 정규군이냐면 그건 아니다. 무역에서는 해적이나 사략선이 공격하면 도망쳐도 된다. 그런데 정규군인 해군은 작전상 일시적 후퇴는 가능하지만 결국 싸워 이겨야 한다.

한국의 국내생산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서 한시름 놓았지만, 기본적으로 무역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이 무역을 위한 항로는 우리의 생명선이다. 그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나는 해군사관학교와 해군양성에 온 힘을 다했다. 

그 결과가 내년에 나온다. 내년에 해군사관학교 1기가 졸업하고 해군이 정규군으로 재편성된다. 지금은 영국 동인도회사처럼 사략선도 하고, 무역도 하고 그러는 이도저도 아닌 조직이다. 

이제 해군이 정규군화되면 대한무역주식회사는 전시에나 동원되는 비정규군 내지는 예비군으로 활용될 것이다. 한국해군에는 나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지금이야 겨우 2천명에 불과한 정규군이다. 

정규 전투함과 연락함 등 20척에 불과한 전력이지만 동아시아에서 우리와 대적할 적은 없다. 대한무역주식회사의 예비군을 포함하면 거의 80척의 배와 5천명의 병력이다. 절대 작지 않다. 

또한, 영토가 넓은 우리의 입장에서 국민을 예비군으로 편성하지 않으면 곤란했다. 그래서 남자들을 주방위군으로 편성해서 기본군사훈련을 시키고 비상시에 활용할 수 있게 했다. 

이제 조금 안심이다.  

내년부터는 편하게 쉴 수 있다.

골드러시

드디어 터졌다. 

이건 내가 만들어 던진 핵폭탄이다.

유럽의 탐광꾼들이 작년부터 해안가를 위주로 여기저기 헤집어가면서 지질분석을 했다. 그걸 통해서 대규모 탄광, 철광석, 구리 등등 매장이 유력한 곳을 지도에 표시하고 보고했다. 

탐광꾼들을 따라 우리 국민들도 탐광기술을 배울 겸, 국토조사에 함께 나섰다. 땅이 너무 넓어서 국토조사에는 한계가 있었고, 결국 해안가를 위주로 1년이 넘는 조사끝에 결과보고가 올라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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