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똑똑한 사람은 무섭다.
내 본심을 깨달은 사람은 인사부장 한사람이다. 인사부장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인사부장 미안해. 당신은 이사회의 중역으로 고생할 사람이야. 오늘부턴 좀 편해질 거 같다. 쭈욱.
"그럼 나도 상단 주인인겨?"
"그렇지. 우리도 상단, 아니 회사 주식을 가진 어엿한 주주잖아."
"주주가 뭔데?"
"아 이 멍청아! 주주는 회사 주식을 가진 사람이잖아. 회사의 주인이 주주니까 너도 주인인거야."
"멍청이? 이게 한판 붙어볼겨?"
직원들은 점차 안정을 찾고 있다. 내가 제공한 회사 정관, 연합상단 분할계획서, 직원들의 주식투자 계획안 등을 보고 쓰나미처럼 덮쳤던 혼란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이것은 내 예상을 벗어난 파급효과를 냈는데, 당시에는 미처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단주님, 아니 회장님은 사람이 아니다.'
깊은 밤중, 자신의 사무실에 홀로 앉아있던 인사부장은 밀려드는 업무를 잠시 미뤄두고 생각에 빠졌다. 지난 한달은 폭풍처럼 지나갔다. 인사부의 직원들은 갈려나가다 못해 병가를 번갈아가면 쓰고 쉬다가 왔다.
병가를 쓰고 복귀한 직원들도 다시 초췌한 모습으로 새벽까지 일했다. 그런데 인사부 직원들은 그렇게 혹사당하며 일하면서도 크게 불평하지 않았다.
'처음엔 회장님이 일을 떠넘기려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때, 당시 인사부장의 판단은 정확했다.
오히려 지금 인사부장이 우진의 진의(眞意)를 착각 중이었다.
인사부장은 생각을 이어갔다.
상단의 사업이 확장되어 갈수록 직원들을 통제하는 것이 어려웠었다. 업무의 보고와 진행은 더디게 흘러갔고,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으니 누구든 회장님의 얼굴만 쳐다봤다. 인사부장도 그랬다.
어차피 주인은 상단주인 회장이었다.
직원들 대부분은 우진을 은인이자 주인으로 생각했다. 노비였던 그들을 면천시켜주고 돈을 벌게 해줬다. 우진이 은인이고, 사실상의 주인(우진이 주인인 상단에서 일하는 머슴정도)이다. 직원들의 생각은 그랬었다.
'나도 회장님을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회장인 우진의 시야는 넓었다.
탁월한 의사결정, 사람을 보는 안목을 넘어 여러 세력들을 이용해 엄청난 돈을 벌었다. 성리학을 좀 배웠다는 유자들이 안빈낙도를 이야기하는 식이면, 우진은 더이상 일할 필요가 없다. 인사부장도 한재산 일궜다. 인사부장의 재산은 조선으로 따지면 만석꾼에 해당하는 은5천냥에 달했다.
최근 직원들 중 일부는 자신의 월급과 성과급을 찾아서 조선에서 만석꾼으로 떵떵거리며 살기 원했다. 물론 생각으로만 하고 실행한 사람은 없었지만 언제 실행할지 몰랐다. 노비에서 벗어난 데다가 돈이 쌓였다.
이젠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안생길 수 없는 것이다. 인사부장은 생각했었다. 이러다가 직원들이 모두 흩어지면 더 많이 뽑아야겠다는 생각만 했지, 그 직원들을 붙잡을 당근을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 직원들은 회사를 떠나 살 수 없다. 사대부들이 조선이라는 나라를 떠날 수 없어 왕에게 속박된 것처럼. 아니 회장님처럼 대단한 왕이 있던가?'
인사부장은 여동생을 시집보내면서 다짐했었다.
우진을 주군으로 평생 따르며 보답하겠다고.
그것은 인간적 고마움의 발로, 그뿐이었다. 인사부장은 다시 과거를 생각했다. 사대부로 태어나 과거를 보고 성군을 모시면서 국가를 경영하는 것. 그것을 바랬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높은 이상은 있으나 현실은 시궁창.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할 처지인데 여동생의 시집을 보낼 돈이 있겠는가? 우진이 해결해 준 것은 인사부장이 했어야할 가족에 대한 의무를 다하게 했을 뿐이다. 그것은 사실 돈으로 갚으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사부장은 우진을 평생 모시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인사부장의 마음은 변하고 있었다.
우진의 결단에 의해 직원들은 주인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단순히 우진의 상단에서 맡은 일만 하고 그 일의 댓가로 월급을 받는 것을 뛰어 넘었다.
'일을 하고 그 댓가로 돈을 받는다.'
이제는 일의 댓가에 더해서
'내 돈을 투자하고 그 이익도 함께 얻는다.'
그럼으로 해서 직원들은 회사의 주인이 되었다. 인사부장의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이것이야말로 용인술이며, 왕이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닌가. 조선의 이성계도 1천명의 군사로 시작했다.'
인사부장은 사대부 출신인 그가 조선의 태조를 아무 존칭없이 심드렁하게 생각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인사부장의 내심은 이렇게 변했다. 조선이라는 국가에 대한 기대는 사라졌다. 그런데도 인사부장은 당장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만큼 인사부장은 생각에 집중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그야말로 내가 모셔야할 왕이다.
새로운 나라의 왕!
그 누구도 날 막을 수 없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호주대륙에 나라를?
아름다운 밤이에요!
모 여배우가 했던 말이다. 유구국의 밤하늘은 참 아름답군. 은하수라는 말 그대로다. 은빛 별의 무리가 내 눈에 박혀올 듯 하다.
나는 내 능력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생도때 공부는 상위권이었지만 군생활이나 위탁교육은 평범했다. 스타트업은 그 특성상 개인의 역량에 극단적으로 의존하는데 나는 곁다리였다. 그저 은사님의 소개로 그 자리에 있었기에 돈을 벌었다. 엄청난 돈을. 그래서 나는 내 능력의 한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했을 때, 재빨리 회사의 조직을 바꿨다. 아주 좋다.
"뉴홀란트?"
"일본 상관의 네덜란드인에게 확인했습니다. 1606년 네덜란드의 두이프겐호가 그 섬을 확인했습니다. 그 후에 추가적으로 탐사했고 최소한 일본의 크기로 판단되는 땅을 가졌습니다. 네덜란드에서는 뉴홀란트라고 부르며 그 지배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뉴홀란트라... 거기가 대체 어딘지 모르겠네.
일단 대략적인 위도와 경도를 물어보면 알겠다 싶어 물어봤다.
대충 인도네시아의 큰 섬일테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물었다.
"대략적인 위치는 어떤가?"
"세부에서 정남으로 900해리로 생각됩니다. 탐사대는 9번함과 10번함을 보내려고 합니다."
오 마이 갓!
뉴홀란트는 분명 호주다.
내 기억에 호주는 과거 대항해시대 네덜란드에서 잠깐 탐사를 겸해 살펴보다가 신경을 껐고, 영국의 쿡선장이 뉴질랜드 지역을 탐사하면서 지배권을 주장했다. 그리고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게 아마도 1700년대였을거다.
그런데 저기에 정착지를 만들어서 괜찮을까?
괜히 말했다가 잘못하면 내 무식이 탄로나니까 그냥 듣고 있자.
"네덜란드 측은 섬의 지배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지배권을 넘기고, 우리의 지배를 승인하는 대신에 건조중인 클리퍼함 3척의 잔금 은3만4천냥을 탕감해 달라고 합니다."
"승인?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말하는 건가?"
"우리를 국가로 인정한다는 네덜란드의 인정입니다."
"..."
인사부장, 아니 이제는 연합상단의 부단장이다.
"이미 저희에게 지시하신 내용이고 이사회에서 의결한 사항이 아닙니까? 너무 걱정마시지요. 저희도 충분히 고려한 내용입니다."
아니 내가 지시했다고? 부단장이 미쳤나? 생각 중에 부단장의 말이 들렸다.
"우리 회사는 지금 국적이 없는 상태입니다. 조선은 해금령때문에 조선에 뿌리를 내리고 사업이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유구국, 일본, 명도 가능한 대안이 아닙니다. 적당한 정착지를 찾아보시란 지시에 이 모든 게 포함되어 있는것 아니겠습니까? 정착지를 얻어도, 유럽 각국에 적용되는 규칙을 살펴보면 각국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타국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계속하게"
"저들은 우리 회사를 독자적인 무역집단으로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상 우리 회사는 유구국 근방의 해역에서 스페인을 비롯해서 네덜란드, 영국, 포르투갈의 세력을 모두 합쳐도 압도적입니다. 세부의 스페인 총독도 저희 눈치를 봅니다. 세부의 스페인 총독이 가진 병력이 불과 600명 입니다. 스페인 본국에서 당장 우리를 공격하러 올 것도 아닙니다. 그들도 우리 회사가 단순한 무역회사가 아닌 자신들의 동인도회사처럼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세력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도 국가나 다를바 없습니다."
머리가 띵했다.
이 인간이 일을 크게 벌리네. 어쩌면 좋지?
"지난 3년간 늘어난 직원5천4백명에 부양가족을 합치면 거의 3만명에 이릅니다. 그 직원들이야 배를 타고, 각지의 지부에서 근무하더라도 상관없는데 부양가족은 조선에 있어 문제가 큽니다. 매번 도둑고양이처럼 해안에서 단정을 타고 만나러 갑니다. 이러면 직원의 가족들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정착촌은 다른 침입자들에게서 안전한 곳이어야하고 충분한 생산력도 갖추어야 합니다. 법적, 외교적 인정을 받아야 우리의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일이 너무 커지는군?"
"어쩔 수 없습니다. 그대로 밀어붙여야 합니다. 직원들도 가족들이 조선에서 숨죽이며 사는 것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습니다. 정착촌이 결정되면 그에 따라 제대로된 도시를 만들어 그들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직원들 대다수가 찬성했습니다. 이사회에서 회장님께서도 찬성하셨습니다. 여기 이사회 회의록에 회장님의 직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습니다."
이런 씨*.
아마 내가 어떤 회의때 긴장이 풀려서 졸았나보다.
부단장이 요즘 이사회 멤버들과 짝짜꿍하며 지내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이럴 줄은 몰랐다. 네덜란드 승인이라니. 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것인지 한번 물어보야겠다.
"부단장이 생각하는 바를 자세히 말하라."
"저는 회장님의 뜻을 그대로 이행할 뿐입니다."
휴~ 그럼 그렇지. 내 상상력이 너무 컸다.
3년전 직원 혼사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토론하다가 주식회사와 연합상단으로 체제를 전환하고 인사부장한테 직원가족의 정착문제를 맡겼었다. 지금 유구국에 본사는 있지만 직원과 가족은 정말 뿔뿔이 흩어져있었다.
그것 때문에 정착촌에 대한 난상토론이 있었고, 제일 처음 1등 항해사관을 하던 지금 연합함대 제독은 '유구국을 우리가 차지하면 좋겠는데요.'라고 말했었다.
그렇게 갑론을박하다가 정착촌을 새로 구하는 것으로 결정했었다.
명나라 인근의 섬들은 너무 좁고, 명의 세력권에 가까워서 안전을 보장받지 못해서 탈락했다. 일본과 조선도 마찬가지다. 사실 유구국도 탈락이다. 먹으면 일본과 사생결단해야한다. 그건 안된다.
동남아시아는 이미 국가들이 난립하고 있고, 인도네시아도 국가들과 원주민들이 혼재한다. 남태평양의 섬들은 좁기도하고 안전하지 못하다. 태풍도 불고.
결국 호주인가? 거기 너무 넓은데.
일단 탐사대가 귀환하면 이거 찬성하는 바보는 없을거다. 3만명으로 호주를 전부 먹을 순 없고 말이지. 좀 돌아다니다가 적당한 크기의 섬을 차지하고 정착촌을 마무리하자.
이렇게 생각을 정리한 나는 싱긋 웃으며 화답했다.
"하하하! 부단장이야말로 내 복심이다. 그대로 행하게. 일임하지. 다들 부단장의 지시를 성실히 이행하라."
나는 이 날의 결정을 정말 후회한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더니.
그 짝이다.
◆ ◆ ◆
같은 시각 조선 한양, 비변사.
"이어도라니? 그건 제주 아래에 있는 섬이잖소."
"노비 몇 구(口)가 무슨 대수요. 주인이 알아서 할일이오."
"그게 그렇지 않소이다. 노비들이 고을을 떠나 몇년씩 자릴 비우고 이어도를 다녀왔다고 하오. 그 노비들은 하나같이 많은 재물을 얻고 부자가 되었다니 이상하지 않소?"
"외거노비 중에는 많은 재물을 모은 사례도 있고, 그게 법에 저촉되는 것도 아니오. 국사가 다망한데 그깟 노비문제로 아까운 시간만 지나고 있소. 그만합시다."
"어허. 이로 인해 지엄한 반상의 법도가 흔들리고 있는데 그깟이라니."
"그만하시오. 성절사를 보낼 준비만해도 벅찬데 노비라니 쯧쯧"
"그럽시다. 일에는 순서가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