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225)

이번 요구대로 하면 내 이익은 전혀 없고 오직 손해만 있을 뿐이다. 

"명나라 쪽의 조사를 명한 것은 어찌되었나?"

"명은 복건 장주 월항의 정식 해관을 통하는 것과 잠상을 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가격차이는 크지 않습니다. 우선 정식 해관에서는 생사1근당 은1.2냥에 거래세가 1할입니다. 하오나 해관의 관리에게 기름칠을 해야하고, 선적을 위한 인부를 부리는 비용 등을 모두 감안하면 생사1근당 은1.7냥입니다. 계절과 수급에 따라 최소 은1.4냥에서 최대 은2냥으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둘째로 잠상은 생사1근당 은1.5냥입니다. 하오나 공급량이 일정치 않고 약탈물인 경우에는 품질이 균일하지 못한 단점이 있습니다."

"모두 선을 대었는가?"

"예. 해관에는 이미 기름칠을 충분히 해두었습니다. 게다가 정식 상관은 아니지만 항구에 적당한 곳을 구매하고 창고도 완성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잠상과도 선을 이어놨습니다. 결심하신다면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그래도 상도의가 있으니 기존 거래조건을 유지하는 것으로 요청해보게."

"예 알겠습니다."

아무리 예견된 것이라고 하나, 뒤통수의 끝맛은 씁쓸했다. 이맛헬인가?

조선의 어느 기루.

"흐흐흐 무상(주인공의 상단)은 어쩔 수 없이 우리 제안을 수락할 것이오."

"하하 그렇습니다. 제깟것들이 어쩌겠습니까? 지난 두해동안 가격을 세배로 올렸는데도 군소리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일본은 명과의 교역이 불가능하니 우리 말고는 달리 구할 곳이 없습니다. 아쉬운 놈들은 그놈들입니다. 조선과 일본의 가격차이가 얼마인데 그동안 그리 배를 불렸으면 이제 제자리를 찾아야지요."

"두배로 올리고 수익배분을 5할로 해도 무상은 배가 터질정도로 이문이 남을겁니다. 우리의 관대한 처사를 저들도 이해할 겁니다."

"만약, 무상에서 우리 제안을 거절하면 어쩔 것이오?"

"그들도 머리가 있다면 어찌 거절하겠소? 그럼에도 거절한다면 거래를 끊으면 그만이오. 대마도주가 곧 세견선을 보내오는 것으로 무역이 시작되오. 이제 무상만 있는 게 아니라 이말이오."

"내말이 그말이오. 하하하!"

밤 늦게까지 이어진 그들의 술자리는 각자 별채로 기생과 함께 물러나며 끝났다.

내상의 어느 내실.

"저희 무상의 입장으로는 기존의 거래조건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귀 상에서 제시한 조건을 수용하면 저희는 큰 손해를 보게 됩니다. 그동안 거래한 의리를 생각해서 다시 검토해 주시길 요청합니다."

"크흠. 행수 어르신께서 엄히 명하신 것이라 저는 어쩔 수 없소이다. 물목의 가격이 올랐는데 우리도 손해볼 순 없지 않소이까? 우리도 그동안 큰 손해를 보면서 넘긴거요. 의리를 따지면 섭섭하오. 잘 생각해 보시오."

"그래도..."

"그만하시오. 내 바쁘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오. 여봐라 손님 돌아가신다."

"하나 둘, 하나 둘..."

신참들의 구호가 유구국의 아름다운 해변을 울리고 있었다.

유구국에 무역상단 본부를 연지 1년이 지났다. 

김씨 아저씨 말대로 나는 조선땅에 발을 붙이지 못한단다. 조선에서 노비가 속량되면 해외추방이 기본 패시브였던가? 어차피 조선의 해금령때문에 부산이든 어디든 해안에서 떨어진 곳에 배를 세우고 단정으로 이동하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었다. 

잠깐동안이야 남해안의 한적한 무인도도 괜찮긴 한데,  배의 정비는 물론이고 선원의 휴식, 물품 보충 등에 문제가 너무나 컸다. 일본의 후쿠오카항을 고려했지만 막부의 허락이 가능할지 알 수 없는 데다가 역사적으로도 기독교때문에 에도막부가 쇄국을 곧 결정하는 것을 알기에 바로 포기했다. 명의 복건성은 관리의 전횡이 심하여 고려대상이 되지 못했다.

유구국은 명의 관심에서 아예 사라진 지역이다. 일본은 사쓰마번이 호시탐탐 노리긴 하는데 조공을 받는 것으로 현재는 만족하는 것 같다. 유구국왕은 적당한 세금을 내면 된다고 시원하게 허락해줬다. 그래서 내 마음 속 '대한무역주식회사', 공식적으로는 '무역상단'의 본사 사옥이 유구국 항구의 아늑한 곳에 들어섰다.

그 남자의 사정 : 상념

그녀의 아들, 우진에 대한 그의 첫 생각은 증오였다.

그녀와의 첫 만남 이후, 그녀 외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일생의 사랑. 

우진은 그런 그녀가 지켜달라고 부탁한 사람의 씨앗이었다. 

임진년의 참혹한 세상. 

그에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오직 그녀만을 지킬 뿐이다. 그런 다짐으로 그녀를 따랐고, 왕의 파천을 따르던 그녀가 세자를 따르는 분조(分朝)의 작은 무리로 흩어지자 그녀를 강제로 끌고 도망쳐 숨으리라 결심했다. 

그런데 그녀는 나에게 부탁했다. 

세자를 도와달라고. 그래서 그 세자란 사람을 지켜주었다. 

그녀를 위한 일이라 혼신을 다했더니 세자가 무언가 큰 착각을 한 것 같았다. 

세자는 그를 가리켜 '자신의 주춧돌'이라 말하곤 했다. 

근왕군을 모은다는 세자를 따라 다니며 잔심부름 몇개 하고, 싸우라면 싸웠더니 그런다. 뭐 대단치도 않은 일이었다. 

그는 그녀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곳에 그의 자리는 따로 없었다.

그녀는 분조에서도 여전히 관비였다. 

세자는 항상 보답하겠다고 했다. 양반이란 족속 자체를 믿지 않았지만 그녀가 믿는 사람이면 기대해볼만 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승전을 축하하는 술자리에서 살짝 마음을 보였다. 그녀를 원한다고 말이다. 

세자는 잠시 눈살을 찌푸리는 듯 했지만 곧 웃으며 허락했다. 

그러나, 세자의 그 약조는 지켜지지 않았다.

천둥번개가 치고 장대비가 내리던 그날 밤.

세자는 무슨 이유인지 왕의 침전 앞에서 삼일간 석고대죄를 했다고 했었다. 

솔직히, 그 부자의 일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사실 뻔했다. 

왕 자리를 그만두고 싶지 않으면서 그만두겠다는 투정을 부리는 아버지와, 그 누구보다 빨리 왕 자리를 물려받고 싶으면서 물려받지 않겠다고 석고대죄하는 아들이었다. 

왕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말하면, 그냥 '네'하고 받으면 될 일이다.

그렇게 속마음과 다른 그들 부자의 행동에 토악질이 날 정도였다.

세자도 처음엔, 어느 정도 진심으로 아버지를 만류한 듯 했다. 

그러나 그런 양위 소동이 계속될수록 그의 얼굴은 굳어갔다. 

세자를 오랫동안 봐온 사람이라면 그의 얼굴을 보고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것은 부자사이의 정을 가진 사람의 기색이 아닌 것을. 

그것은 바로 야수(野獸)의 얼굴이었다. 

늙은 호랑이는 자식에게 자신의 영역을 빼앗기고 사람사냥을 위해 민가로 내려온다. 그 부자가 꼭 그 꼴인데 여긴 사람의 세상이고, 성리학의 나라 조선이기에 이런 우스꽝스런 촌극이 생기는 것이다.  

하여간, 천둥번개가 치고 장대비가 내리던 그날 밤.

세자가 그녀를 범했다. 

당장 죽일 수도 있었다. 사실 죽이려 했었다. 

그러나 그녀의 슬픈 몸짓과 눈빛에서 그러지 말라는 뜻이 명백했었다. 

그래서 움직일 수 없었다. 간신히 몸을 추스른 그녀는 대궐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가 예전에 세자에게 상으로 받았던 집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때 세자는 또 약조했다. 

당장은 속량할 수 없으나 부왕이 돌아가시고 왕이 되면 그녀의 속량과 동시에 혼인할 수 있도록 주선하겠다고. 거기에다 역적으로 풍비박산이 난 그녀의 집안도 완전히 신원하겠다고... 

그렇게 약조했다.

그러나, 그 약조도 결국 지켜지지 않았다. 

그녀는 세자의 약조가 지켜질 시간을 기다리지 못했다. 

우진은 놀랍도록 그와 닮아가고 있었다. 

마치 어린 시절의 세자가 앞에 서있는 것처럼. 

굳이 누군가가 말하지 않더라도 세자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든 세자의 핏줄이란 것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약간의 저음이 섞여있는 뚜렷한 음성도 똑같다. 그가 증오하는 세자와 닮은 우진에 대한 그의 첫 생각은 증오 외엔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자도 우진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세자는 우진을 그의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했다. 

대신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해주겠다고 했다. 그녀와 함께 속량해주고 큰 재산을 떼어주겠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전조의 우(주:고려의 공민왕이 신돈의 여종인 반야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왕우는 공민왕의 아들이 맞는지에 대한 혈통문제가 있었음. 전조는 고려, 우는 왕우를 뜻함.)'를 범할 수 없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는 더욱 분노했다.

우진이 미운 것과 기본적인 사람의 도리는 다른 것인가?

전조의 오건 우건 그게 무슨 상관인가? 

삼강오륜, 충효를 이야기하던 성리학의 나라 조선이다. 당당한 사대부라면 그래선 안되는것이다. 그런데도 세자의 집안은 아비는 자식을 자식은 아비를 못잡아먹어 안달이다. 역시 그 아비에 그 자식인가? 우진도 세자를 닮았으니 똑같을거라 생각했었다. 

그렇게 우진을 증오했었다. 

우진이 5살 무렵.

우진에게 마마가 찾아왔을때, 너무 기뼜다. 증오하던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 그것은 기쁨이다. 그런데 그녀의 눈빛은...

모든 것을 걸고 단언컨데 그녀의 눈빛은 지극한 사랑이었다. 

그래... 질투!

처음엔 그랬다. 그런데 그녀의 처연한 눈빛과 굳은 각오는, 조선제일검이라 불리는 사람을 무릎꿇게 만들었다. 우진은 그녀의 생명이다. 그녀를 지키는 것은 숙명이다. 우진을 지키면 그녀는 행복하다. 

그때부터 우진에게 애정을 주려고 노력했다. 궐에서는 하루종일 한두마디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우진에게는 고씨 아저씨 만큼이나 많은 말을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녀에게 했던 약조는 지켜져야한다.

경직(京職 : 한양의 벼슬자리)을 얻으면 그녀를 속량시키고 정처로 맞이하겠다는 약조. 우진도 함께 속량해서 정식 양자로 삼겠다는 약조.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웃었다. 

말없는 그녀의 웃음. 

그것은 그녀의 허락이었다. 

약조는 성립했다. 

솔직히 임진년의 세자는 대단했다고 인정한다. 

그때만은 그에게 어떤 사심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세자의 분조는 조선의 그 누구도 인정했다. 그녀도 그런 세자에게서 어떤 희망을 가졌으리라. 

역시 세자의 씨인가? 아니 역시 그녀의 아들이다. 

그 대단함은 어쩔 수 없는 대물림이다. 그 대단함에 그 부자의 용렬함은 전혀 없었다. 그것은 그녀 덕분이다. 고씨 아저씨도 인정한다. '흘흘, 씨가 어디 가겠누?'하고 말이다. 

그녀가 그립다.

◆ ◆ ◆

인간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던가.

사략선 2척을 나포한 이후부터 무섭게 잘 나가던 기세에 제동이 걸렸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조선상단의 담합은 시작일 뿐이었다. 조선과 일본의 밀무역은 갈수록 순이익은 줄어들었지만 무역상단 총매출액의 3할이 조금 넘었다. 

명나라와 유구국 노선은 명의 물품을 유구국에 배달해주는, 물류사업이라 이문이 작았다. 유구국의 배는 작고 느려서 곡물수송이 어려웠다. 느린 것은 괜찮은데 선적량이 너무 적었다. 

사략선 2척은 그나마 적재량이 각각 200톤은 되는 것이라 곡물수송에 유용했다. 강남에서 유구국까지 사략선의 느린 속도(시간당 8노트 정도였다)로도 3일이면 충분했다. 가까운 거리라서 곡물수송 외의 물품을 많이 실을 필요도 없어 딱 좋았다. 

홀수선을 생각해서 한번에 쌀 1200석은 넉넉했다. 단거리 수송은 배달비가 작았다. 그래도 배를 놀릴 순 없으니 만족했다. 명과 유구국의 단거리 무역이 무역상단 총매출액의 2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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