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하려는 대상이 이미 준비를 하고 있다면 사냥에 실패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사람은 연약하고 겨우 3명뿐이니 호랑이도 다시 달려들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런데 두번째 화살과 첫번째 총탄에 피를 흘리고는 사냥을 단념한 것이다. 호랑이가 조총에 맞은 것은 삼십보 정도 앞인데 그 자리엔 호랑이의 피로 보이는 붉은 자욱이 고개 아래쪽 수풀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문경새재를 지난 후에는 부산까지 평탄하게 왔다. 고갯길 정상에서 돌쇠할아버지의 새로운 면모를 보게된 후, 나는 돌쇠할아버지의 가벼운데다 수다스러운 행동이 본모습이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데...
"우진아! 이 할아버지가 소싯적엔 말이지..."
그건 취소다. 돌쇠할아버지 본모습은 가볍고 수다스러운 것이다. 문경새재를 벗어난 이후 부산까지 밥먹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돌쇠할아버지는 항상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거기에 더해서 김씨 아저씨에게 깊은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다. 대구를 막 지났을때, 돌쇠할아버지의 수다에 지쳐 김씨 아저씨에게 구원요청을 했었다.
그런데 김씨 아저씨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김씨 아저씨 소매를 당겼는데, 김씨 아저씨는 나를 쳐다보더니 비싼 황촉을 깎아만든 간이 귀마개를 빼고 난 후에 나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어쩐지 김씨 아저씨가 며칠동안 돌쇠할아버지의 수다를 가만히 놔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세상사 만고불변의 진리를 잠시 잊고 있었다. 세상엔 믿을 사람이 없다. 엄마 빼고.
부산은 아늑했다.
밤늦게 부산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나는 방안에 나만 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문을 나섰다. 어제 밤 늦게 부산에 도착한 우리는 부산에서 가장 큰 저자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나름 숙박시설을 갖춘 주막에 짐을 풀었고 밥을 먹고난 후 너나할 것 없이 잠에 빠져들었었다. 아마도 내가 가장 힘들었나보다. 문을 열고 나서니 작은 툇마루 한켠에 돌쇠할아버지가 앉아서 귀지를 파고 계셨다.
"할아버지! 아저씨는요?"
"흘흘, 한 시진 전에 친우를 만나러 간다 나섰다. 식전에 온다 하였으니 기다리자꾸나."
"아저씨가 부산에 친우가 있었나요?"
"흘, 아무리 그가 무관이라해도 엄연히 당상관(堂上官)이었거늘 아는 사람 하나 없겠누?"
부산 감영.
"그대가 직접 전한 것이고, 어필(御筆 : 왕의 직접 쓴 글, 또는 필체)임이 확실하니 내 그리 따르기는 하겠소. 다만 정식 명이 아니니 밀지(密旨)를 없애지는 않으리다. 나도 내 구명줄은 마련해 두어야 하니."
"알겠소."
"혹시 서운하시오?"
"..."
"영감(令監 : 높은 벼슬아치를 부르는 말)...아니 그대가 사직소를 냈다는 소리를 듣고 놀랐다오. 하여간 내 힘을 다해 도우리다. 내년에는 조산보(6진, 두만강 하류의 국경요새)로 떠날게요. 그 전에 마무리하시는게 좋겠소."
"고맙소."
"흐흐흐, 나같은 천민도 임진년 난리를 겪고 벼슬아치가 되었는데. 어찌 그대가... 내가 언감생심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자리에 있던 사람이 이리 토사구팽된게요? 나한테야 슬쩍 말해줄 수 있지 않소?"
"이만 일어나리다."
"흠...알겠소. 내 한마디 더하리다. 내가 만력30년(1602년)부터 명과 여진을 살피는 일을 했음을 그대도 알 것이오. 명은 늙고 비루먹은 개요. 여진은 어리지만 교활한 승냥이라오. 아마 그대도 알테지. 목적지가 어딘지 몰라도 명으로 가려면 강남으로 가는게 좋을게요. 화북은 가렴주구로 폐지가 된지 오래요. 내 나가지 않으리다. 살펴가시오."
아침 일찍 주막을 나와 들른 곳은 임진년에 인연이 있었던 정충신(鄭忠信)으로 올해 종5품 부산포 판관으로 있는 자였다. 천민이었으나 임진년에 권율의 휘하에 들어가 공을 세워 면천되고 무과를 급제한 인물이었다. 권율과 권율의 사위 이항복의 문하생으로 들어가는 등 총애를 받아 전도가 유망한 자였다.
"고맙소. 이 후의는 내 잊지 않으리다."
그가 떠나고 정충신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들이닥친 영감(令監), 아니 사직하였으니 그가 나를 찾아올 일이 있던가 의아했다. 안면은 있었으나 그와는 데면데면했었다.
분조에서부터 세자의 지근거리에서 호위하던 그는 호종부터 전령은 물론이고 중요한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자신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울만큼. 그런 그가 떠난다?
정충신은 고심했다. 그러나 고심은 길지 않았다. 권율과 이항복이야말로 천출인 자신의 구명줄이니 곧 떠날 그에 대한 미련은 버리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 생각만은 정충신의 머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는 내 주춧돌이네. 큰 기둥을 세울 수 있는...하하하'
그런데, 주춧돌이 빠진 집이 오래 가던가?
준비
"겻집 합! 선저판 합! 이물큰멍에 합! 한판큰멍에 합! 고물큰멍에 합! 타 합!...."
포구에 들어선 내 배.
지금 내 배에 올라 합(合)을 외치는 자들은 경상우수사 별장(종9품)이 담당하는 조선(操船:배를 만듬) 감리(監吏:감독하는 아전)다. 대국인 명의 해금령은 여전했고 조선은 그를 따랐다.
조선의 백성은 허가없이 배를 만들 수 없고, 허가없이 조선을 떠나 타국으로 갈 수 없다. 또한, 조정의 허가없이 타국의 물건을 들여올 수 없고 자국의 물건을 내갈 수 없다.
"이런 배로는 대마도 가는 것도 힘에 부치겠소. 노 10개에 수부 20인으로는 한시진도 못 버틸텐데."
"대신 선저판이 좁아 물살을 헤치는 데는 유리하니 쓸만합니다."
"이걸로는 바다를 건너기는 커녕 고기잡이도 어려울테니 하는 말이오. 나중에 날 원망하진 마시오. 합격이오."
지난 반년간 거의 모든 시간을 쏟아부은 내 역작.
2개의 마스트에 종범(돛)을 달고 있는 범선의 일종인 스쿠너다.
17세기부터 나타난 범선의 일종인데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무려 수천척의 스쿠너가 사용되었다는 자료도 남아있다. 스쿠너가 이렇게 많이 만들어진 이유는 소수의 선원으로도 돛을 조작할 수 있다는 게 최대의 특징이며 장점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역풍에서의 속도가 매우 준수해서, 연안을 오가는 상선이나 어선등에서 넓게 사용되었다. 이 점을 살려, 이후 스쿠너는 또 다른 쾌속선인 클리퍼 등으로 발전해나갔다.
허나 원양항해에서라고 스쿠너가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주로 풍향의 변동이 심하고 바람이 거센 지역을 항해하는데에는 스쿠너가 가로돛 배 보다 훨씬 유리했기 때문에 서아프리카에서 북미를 오가는 남해안의 노예 무역 루트는 스쿠너를 이용한 무역이 대부분이었다.
거기에 내가 이미 만들어봤던 배였다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부산에 내려온지 아홉달이 지났다.
그동안 나도 놀랄 정도로 키가 커졌고 몸도 굵어졌다. 현대로 따지면 150센치 정도 되는, 어른 키로도 중키는 되었다. 아마도 돌쇠할아버지한테 무예를 배우면서 많이 먹고, 많이 움직여서 그런거 같았다. 아니면 유전이거나. 엄마도 여자치고는 키가 큰 편이었다.
그리고 일본어도 열심히 배웠다.
부산에는 왜관이 있는만큼 역관들이 많았다. 나는 현대인 우진임을 자각한 후부터 영어와 스페인어를 떠올리려 노력했다. 조선공학과는 영어로 된 교재를 영어로 수업했고, 스타트업도 영어, 스페인어가 주로 사용되었다. 21세기 영어, 스페인어와 17세기 영어, 스페인어는 많이 다르겠지만 내가 외국인이란 것을 감안하면 다소간의 차이를 인정할 것이고 조금 지나면 내가 익숙해질 것이니 상관없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지금 조선의 남쪽은 일본,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 각국이 은무역을 필두로 향신료 등을 실어나르고, 그 무역선을 노리는 사략선이 호시탐탐 일확천금을 노리는 대항해시대의 한복판이었다. 그곳에서 무언가를 하려면 정보가 가장 중요했다. 그 정보를 쉽게 얻기 위해서는 언어, 의사소통능력이 가장 중요했다. 조선시대에 역관들이 엄청난 치부를 한 것도 그것이며, 대마도주가 조선과 막부 사이를 오가며 이득만 취한 것도 언어, 의사소통능력을 바탕으로 한 정보였다.
일본에는 포르투갈, 스페인이 오가며 은무역을 하고 있다. 명과 조선도 일본에서 은을 들여오고 있다. 임진왜란이 지나고 불과 몇년 지나지 않아 일본과의 무역을 시작한 것만 봐도 조선에게 일본의 구리, 은, 물소뿔, 후추 등 물산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일본어 등 언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배, 항해술 및 선원이었다.
선박건조는 배의 설계, 선재준비, 건조, 시험 등의 순서로 진행되는데 설계야 내가 할 수 있지만 건조에 필요한 돈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런데. 돈문제는 너무나 쉽게 해결됐다. 김씨 아저씨가 알부자(?)였던 것이다.
내가 모르던 김씨 아저씨의 재능이 혹시 뇌물과 관련된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김씨 아저씨의 어수룩한 모습에서 탐관오리를 떠올릴 순 없는데...김씨 아저씨는 양인 출신이고, 아저씨의 부모도 양반집 마름이었으니 재산이 많을 리가 없다. 그래 고민이 길 것 없다. 돈벌어서 아저씨한테 몇배로 갚으면 되니까.
배는 이제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그 다음은 항해술인데 그건 내가 있으니 문제가 없었다. 함정근무를 통해 조선의 모든 주요항구는 위도와 경도를 모두 암기하고 있는데다, 과거 대항해시대에 통용되던 항법장치, 예를 들어 육분의 등에 대해서도 알만큼 안다.
모든 항법장치는 위도와 경도를 아는 것으로 끝인데 크로노미터가 나오기 전까지 경도를 알기는 어려우니 위도만이라도 제대로 파악하면 될 것이다. 나에게 가장 사기적인 능력은 아마도 16세기의 해상지도를 거의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것.
대항해시대는 본인의 위도만 알고 경도는 추측을 통해 목숨을 걸고 항해했다. 그런 대항해시대에 정밀한 해상지도가 있었다면 어떨까? 보물섬과 관련된 영화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마지막으로 선원을 구하는 것이 가장 힘들것이라 생각했었다.
스쿠너의 장점이 소수의 선원으로 항해가 가능하다는 것이지만 그 소수가 나, 아저씨, 할아버지라면 곤란하다. 내가 생각한 최소의 선원은 20명이고, 조금 욕심을 부린다면 30명의 선원으로 3교대 근무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조선을 떠난다는 것과 생사를 알 수 없는 바다를 향한다는 것을 설득하는 것이 쉬울까? 그런데 나의 이 고민을 보고 돌쇠할아버지는 말했다.
"흘흘, 노비를 구하면 된다."
나는 잠시 멍해졌다. 내가 얼마전까지 노비였는데 이래도 되나?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마찬가지다. 노비를 사서 밥 잘 먹이고, 다시 돌아와서 속량해준다고 하면 지옥끝까지라도 따라갈게다."
아니나 다를까.
선원으로 쓸 노비는 불과 하루만에 30명을 채울 수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10년이 지났는데도 굶주리는 자는 너무도 많았다. 오죽하면 양인이 스스로 노비가 되겠다고 하겠는가? 그것을 보며 내 가슴은 먹먹해졌다. 나의 욕심으로 배를 만들고 무역에 뛰어들어 호의호식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내 계산으로는 분명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지금까지는 나를 위한 계산만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선원들을 위한 계산도 더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해군시절을 반추하며 적당한 자질을 가진 사람만 뽑으려 노력했는데도 너무 쉽게 선원을 뽑을 수 있었다. 조선의 항해술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양식 배인 스쿠너는 서양식 항해술을 가르쳐야했다.
배가 만들어지기 전에 지상교육장을 만들었다. 배가 만들어진 후에 가르치면 너무 늦는다. 미리 이론교육부터 실전교육을 해야한다. 교육을 하면서 해군의 장교, 부사관, 수병으로 나눌만한 지식과 실무능력이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언문(한글)을 가르쳤다. 언문을 깨친 후에 배의 용어를 가르쳤다. 모든 용어는 서양식 선박의 일반적인 용어를 한글화해서 외우고, 실제 선박과 연계해서 익숙하게 했다.
그 중에 장교역할을 할 3명에게는 항해술을 일부라도 가르쳤다. 그 3명은 이론교육 뿐만 아니라 실전교육에서도 나름 성과가 있었는데 차후 새로운 배를 건조하거나 사략행위를 통해 타국의 배를 빼앗는다면 그 배의 선장으로 임명할 것이었다. 그래도 그것은 아주 나중 일이고, 당장 일본으로 항해를 해보면 곡소리가 날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조선(造船)에 반년, 선원 선발과 교육까지 아홉달이 걸렸다.
다음 주에는 조선을 떠날 것이기에 항해를 위한 물품준비와 무역을 위한 상품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해금령에 따라 조선의 물산을 해외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물론 밀무역은 언제나 존재했지만 말이다. 상품준비는 내상에서 도와준 것으로 충분했다. 경상 행수어른 김갑석의 소개장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이다.
나는 내상의 도움으로 명나라 생사 3천근을 대마도주가 매입하는 가격의 반값에 구입했다. 그리고 이면계약을 맺었는데 일본 오사카에 생사를 넘기고 난 후에 매입가의 절반을 보전해주고, 추가이익의 3할을 더해주기로 하였다.
임진왜란 전에도 그렇지만 후에는 더더욱 명과 일본의 무역은 금지였기에 부산의 왜관, 정확히 대마도주는 조선을 매개로 명의 생사, 비단 등을 들여와 일본 본토에 비싸게 팔았다. 조선의 상인도 이를 알고 있었으나 해금령을 어길 수 없어 다소간의 이익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이렇게 내가 첫 항해를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난 시점은 1609년 3월 봄이었다.
이 사진에 나온 범선이 스쿠너입니다. 연안은 물론이고 대양항해도 가능합니다. 참고하세요.
약속
또 우라질 봄이다.
봄은 역시 짧았다. 지난 아홉 달의 고난이 무색하리만큼 요 앞전 아흐레(아홉 날)는 지옥행군이었다. 대양항해라는 것은 목숨을 내놓고 하는 위험한 일이고, 배라는 좁은 공간에서 항해를 하면서 불가항력적인 수많은 사건사고가 발생할 것이다.
현대의 해군에서도 물론이지만 대항해시대의 선상규율은 더욱 엄했다.
선상반란은 물론이고 사략선, 타국 전함과의 전투, 원주민과의 다툼 등 수많은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를 규율하기 위한 법령, 규칙을 미리 공지하고 교육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실제 사건사고가 발생하였을때 미리 공지한 법령과 규칙에 따라 일벌백계하는 것을 게을리해선 안된다.
대항해시대 선장에게는 타국 전함과의 전투개시, 부득이한 사략행위, 약탈 및 선원의 즉결처분 권한까지 있었다.
내 선원들은 간혹 양반출신도 있지만 대부분 노비다.
내가 보아온 조선의 노비는 대항해시대 선원보다 오히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었다. 내가 당장 선원들을 편하게 통제하고자 한다면, 그냥 조선 노비처럼 대우하면 된다. 하지만 이들도 곧 깨닫게 될 것이기에 그럴 순 없었다.
나 자신이 노비제도를 혐오하기도 하기에 말이다. 항해가 순조롭다면 아무 일이 없을것이다. 그러나 항해에는 예측불가능한 상황이 항상 생긴다. 예를 들어 망망대해에서 바람이 불지 않는다면? 그래서 먹을 것이 떨어졌다면? 등등 대항해시대 수많은 선상반란, 영화에서 나오는 해적선, 바다의 유령선 등등 상상 그 이상일 것이다.
나는 노비로 뽑은 선원들에게 교육 전반기에 이미 면천을 약속했다.
그들 중 대부분은 먹고 살기 힘들어서 스스로 노비가 되길 원했다. 내가 면천을 약속하자 일부는 항의하기도 했었다. 면천을 해주는 대신 의식주를 해결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한 것이었다. 나는 거듭 약속을 재확인했다.
반드시 면천을 해주고 모두 양인과 같은 대우를 받을 것이라 했다. 선원간 계급이 우선되는 것이고 그것은 업무의 분장과 계급이지 인간으로서 신분제로서의 계급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선원간 계급은 본인의 노력에 따라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선원간 계급은 고정적인 월급과 성과에 따른 성과급을 분배하는 기준이라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장교에 해당하는 갑판장은 부사관에 해당하는 조장보다 월급이 2할 가산되어 지급된다. 또한 항해의 종료와 함께 지급되는 성과급도 조장보다 2할이 더하여 지급된다. 거기에다가 항해나 항해 외적으로 공을 세운 선원에게는 그 공의 경중에 따라 특별성과급을 받게 된다고 추가했다.
이런 설명은 항해에 앞서 규율을 정비하고, 선원을 통제하는데 있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단순히 신분때문에, 먹고 살기 힘들어서 노비가 되고 선원이 된 자들이 제대로 된 노력을 할까?
그들에게도 희망이 있어야 했다. 내 욕심이 돈을 많이 번다는 것처럼 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노비일때 부자가 되고자한 이유는, 첫번째로는 엄마와 내가 속량되고 두번째로는 부자로 호의호식하고자 함이었다. 내 설명을 들으면서 반신반의하던 선원들도 몇달째 고정적인 월급을 받고, 교육 중에 성적우수자인 3명이 장교가 되면서 월급이 오를 뿐만 아니라 성적우수자 포상으로 성과급을 받는 것을 보면서 눈빛이 달라졌다.
내가 소유한 배가 늘어나면 곧 종합무역회사를 설립할 것이고, 지금 선원 중에서 선장을 선발하여 스톡옵션을 지급할 생각도 있었지만 아직 이야기하기엔 일렀다. 이번 첫 항해를 성공시켜 짭짤한 성과급을 받고 나면 내 약속이 허황된 것이 아닌 자신들의 미래를 비춰주는 희망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종합무역회사나 선장 선발, 스톡옵션은 그때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좋으리라.
그때, 제법 길었던 상념을 깨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선장님! 두 시진 후면 출항 준비가 끝날 것입니다."
"알았다. 출항 준비가 끝난 후, 최종 검열을 실시하겠다."
나는 녹피(鹿皮 : 사슴가죽) 위에 내가 직접 그려만든 해도를 말아넣고 항해일지를 폈다.
조선 인근의 정확한 해도를 알고 있다는 것 만으로 일본, 중국, 필리핀, 동남아 여러나라의 항해는 그 누구보다 안전할 것이다. 태풍은 계절적 요인이 가장 크니까 어느 정도 대비가 될 것이고 국지적 폭풍이나 해일은 내 운명이 그뿐일 것이니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육분의(위도를 측정하는 항해용 항법장치)나 경선의(선박의 진동 및 온도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 정밀 휴대용 태엽시계, 크로노미터라고 하며 18세기 발명)가 없으나 해도가 정확하니 눈대중으로 사분의를 만들었고, 최근 시험항해를 통해 그 오차가 그리 크지 않을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앞으로 항해를 통해 오차는 수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만하면 준비는 얼추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