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225)

나는 제법 거센 바람을 맞으며 돌아왔다.

연정(戀情)

그는 우진이 자리를 뜰 때까지 몸을 드러내지 않았다. 

작년 초 평안북병사로 보임하며 그녀에게 그의 마음을 전했었다. 다시 경직(京職:한양의 관직)을 얻으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녀를 속량시키고 정처로 맞이하겠다고. 우진도 함께 속량하고 정식 양자로 삼겠다고 말했었다. 그녀는 살포시 웃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었다.

그의 마음이 녹았듯, 그녀의 마음도 이젠 녹았다. 그랬었는데...

그에게 그녀의 죽음을 알려준 것은 고씨 아저씨였다. 그가 의주로 떠난 얼마 후에 폐병이 들어 아홉달가량 고생하다 갑자기 죽었단다. 그리 웃고 떠났고, 이제 석달이면 한양으로 돌아가 그녀를 맞을텐데... 의주에서의 하루하루가 너무도 달콤했는데...

◆ ◆ ◆

"네 이 놈. 언감생심 어찌 너처럼 천한 것이 웃전을 범하려 하는거냐? 여봐라. 매우 쳐라!"

"대감마님! 소인 죽을 죄를 지었사옵니다. 제발 쇤네를 보아서라도 제 아들녀석을 살려주시옵소서. 흐흐흑..."

"어허! 멍석을 말라는 내 말이 말같지 않단 말이냐? 이 고얀 놈들..."

양인으로 마름을 하던 아비를 따라 그녀를 처음 보았다. 

그때 그는 허우대는 멀쩡했으나 세상살이 다를 것 없다는 투로 아비건 그 누구건 곱게 대하진 못했다. 이 풍진 세상. 양인으로 태어나 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그렇게 그는 막나가던 17살 소년이었다. 아비가 모시던 대갓집 마나님이 잔치를 한다고 해서 뭣 좀 얻어마실까 해서 따라간 자리였다.  

그녀는 충격이었다.

그날 이후, 그는 대갓집 주위를 뱅뱅 돌며 그녀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대갓집 작은노미를 을러대어 들어가 보기도 하고, 대갓집 문앞에서 하루종일 돌까기를 하기도 했다. 

어느 날, 대갓집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그녀의 몸종이 다가오더니 말을 전해주었다. 

"아씨께서 자꾸 맴돌지 말고 사내라면 서책을 보거나 무예를 연마하시는 게 어떠냐고 하셨어요."

그는 그 말을 듣고 벼락을 맞은 듯, 온 몸이 떨려오며 식은 땀을 흘렸다. 

그녀도 그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도 그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걸맞은 짝이 되려면 글도 배워야하고, 무예도 연마해야 한다. 그녀는 그에게 문제의 답을 제시한 것이었다.

그 길로 그는 아비에게 졸라 서당에서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머리가 나쁘진 않았는지 글을 가르치는 생원도 그를 칭찬했다. 무예도 익히기 시작했다. 착호갑사로 이름을 날렸던 고씨 아저씨한테 득달같이 달려갔다. 고씨 아저씨는 말이 많은게 유일한 단점이지만 실력만큼은 활과 창으로 혼자 호랑이를 잡았을만큼 대단한 무명을 가졌다. 아저씨 아들도 한양에서 갑사로 일한다고 했다. 고씨 아저씨는 평소 그에게 '고놈 몸이 날래고 눈썰미가 빠르니 무예를 배우면 대성하겠구나! 흘흘.'라고 말하면서 갑사를 권했었다. 

고씨 아저씨는 그에게 갑자기 무예를 배우려고 한 이유가 뭔지를 물어보셨고 그는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고씨 아저씨는 말없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고씨 아저씨가 말없이 조용했단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고씨 아저씨는 말했다.

"무예는 정, 기, 신이 일치해야 대성할 터인데 너는 정이 글러먹었으니 대성하기는 애저녁에 글렀다. 쯧쯧쯧"

"그래도 네 그릇이 아까우니 내가 단련시켜 줄 밖에! 기와 신을 닦다보면 정도 돌아올 것이 아니겠나. 마음 단단히 먹거라."

문무겸전의 인재를 천생배필로 원하는 그녀의 소원을 그는 지켜주고 싶었다.

불과 2년만에 그는 사서를 익히고 말았다. 그리고 가슴벅찬 그는 생원에게 말했다.

대갓집 아씨와 혼인하고 싶다고.

그러나 현실은 매서웠다.

"매우 쳐라! 이것들이 내 말이 들리질 않더냐?"

"아버님! 오늘은 소자가 주상전하의 부름을 받은 경사스러운 날입니다. 저 아이가 어린 마음에 망령되이 내뱉은 말에 흔들리지 마시옵소서. 근일간에 내자와 함께 올라갈 터인데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아버님께서 노여움을 푸시고 저 아이에게 은전을 베풀어 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에잉! 너는 그 유한 성정이 문제니라. 자고로 사대부라면,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해야 하거늘...쯧쯧. 알았다. 오늘처럼 경사스러운 날에 이럴 순 없겠지. 네 이놈. 오늘은 운이 좋아 숨을 붙여놓았으나 다시 이런 일이 있다면 하늘 볼 일이 없을 줄 알거라."

"네가 내 여식에게 작게나마 연정을 품었다는 것을 알겠다. 연정을 품는다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나. 그로인해 세상의 올바른 도리를 어긋나게 함이 너의 잘못이다. 아직 어린 네가 불학무식하여 일어난 일이다. 내 이리 선처하니 이만 돌아가거라. 김가는 아이를 데리고 돌아가게."

"마님!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흐흑!"

그로부터 얼마 후.

"대역죄인 ㅇㅇㅇ는 명일 양화나루터에서 참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한다. 그들은 노비로 유자신에게 보내니 엄히 단속하라."

언감생심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었다. 

그녀의 집안이 거짓 역모로 풍비박산이 나는 것을 보며 그녀가 무슨 해를 입을까 두려웠다. 저 담을 넘어 그녀를 구해 심산에 숨으리라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노비로 간 댁에서 잘 지내는 듯 싶었다. 그 댁이 그녀 부친의 친우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곧이어 그 유자신의 딸이 임금의 아들인 왕자의 부인이 되었고 그 딸을 따라 그녀도 왕자의 노비가 되었다.

그녀에게 다가서려고 왕자댁의 노비로 들어갈까 고민하던 차에 왜적이 침입했다. 왕자는 세자가 되었고 왕은 북쪽으로 달아났다. 그는 세자가 된 왕자를 따라나선 그녀를 따라갔다. 세자는 근왕군을 모집하고 있었다. 

왜적이 침입하고 왕은 달아났으니 백성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세자의 행렬은 몇없이 초라하여 언제든 흩어질 모래알처럼 위태로워보였다. 이제 그녀를 데려갈 때라고 직감했다. 그녀가 혼자가 되었을때를 골라 그녀 앞에 나섰다. 

그녀에게 함께 떠나자고 권했다. 그녀는 거부했다. 

그는 그녀의 대답을 무시하고 그녀를 데리고 가려했는데.

"도와주세요. 당신이 필요합니다." 그녀가 말했다.

임진년의 싸움은 끝이 없었다. 그녀가 믿고 있는 세자는 도망간 왕과는 분명 다른 인간이었다. 그도 얼마간은 진심으로 싸웠다. 언제든 수틀리면 그녀를 데리고 숨을 생각이었지만.

싸움은 점차 끝을 보였고, 세자의 신임을 얻게된 그는 작게나마 관직도 받았다. 지긋지긋했던 전쟁이 끝나고 공신으로 책봉되어 세자의 안위를 책임지는 별시위가 되었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있단 것이 그의 행복이었다.

언젠가 넌지시 세자에게 그녀를 얻고 싶다고 말했었다. 전쟁이 끝나고 바쁜 와중에, 그것도 술을 마시며 공을 치하하던 때라 세자는 알겠다고 말했었다. 정말 뛸 듯이 기뻐, 말없이 소리지르며 그 때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날 밤 이후,

그는 세자에 대한 믿음을 버렸다.

◆ ◆ ◆

우진이 떠난 자리. 망부석이 된 듯 신새벽이 되도록 서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조용히 걸음을 옮겨 그녀의 무덤 앞에 섰다.

"내가 너무 늦었구나."

그는 왼손에 쥐었던 술병을 오른손에 고쳐쥐며 그녀의 무덤에 조금씩 붓기 시작했다. 

술병의 술이 줄어들수록 그의 심원(深怨)은 커져만 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휘스으으으

환청인 듯, 바람 소리가 들리고...

아스라하고 까마득히 먼 곳과 그의 눈이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된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타닥

그때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게 누군지 아는지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역시 그 목소리는 익히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흘흘, 오랜만이로구나."

"아저씨"

"그나저나 재주 한 번 좋구나. 대역죄인의 손으로 관노가 된 녀석을 속량시키다니?"

"나이먹어 허리아래 시리지 않은 곳이 없는 분께서 무슨 일로 신새벽부터 이 멀리까지 청승맞게 왕림하셨는지요?"

"어이쿠! 네 혀가 이리 길어진 줄은 미처 몰랐구나. 내가 소싯적에...."

"아저씨"

"알았다. 혀가 길어진만큼 귀도 커진 줄 알았더니 네 정은 아직도 멀었구나. 알았다 알았어. 그리 무섭게 쳐다보진 말거라."

그의 얼굴에는 마치 불꽃이 일렁이듯 벌건 기운이 맴돌았고, 그의 눈 속에선 불꽃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런 그의 얼굴을 다시 물끄러미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사람의 명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 어린 것을 남기고 가버린 사람이 무슨 원망이라도 남겼다면 내가 그걸 전하지 않았겠느냐? 그 사람은 누구하나 탓하지 않고 즐거이 갔다. 내게는 뭔가 말을 해줄 법도 한데, 제 자식에게도 말한마디 하지 않은 것을 내가 어찌 아누?"

쪼로롱.

갑자기 들여온 새소리에 그는 잠시 멈칫했다.

"이젠 너도 네 갈 길을 가거라. 우진이는 내가 맡아 키울 수도 있다. 고것이 얼마나 대견한지 아누? 아마도 너 어릴..."

"그만 하시지요."

잠시 숨을 들이쉰 그가 말을 이었다.

"의주를 떠나면서 사직소를 올렸고, 어제 받아들여졌습니다. 우진이를 데리고 떠나겠습니다."

"크하하하핫"

고씨 아저씨, 아니 돌쇠할아버지는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 내 마지막까지 심심치 않겠구나."

자각(自覺)

한양 경상의 내실.

"행수어른! 밖에 우진이 왔습니다."

"그래? 안으로 들여라."

"어르신께서 도와주셔서 어미의 상을 잘 치를 수 있었습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네 어미가 이리 젊은 나이에 갔으니 어이할꼬?"

경상의 행수 김갑석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리고 과거를 떠올렸다.

◆ ◆ ◆

김갑석이 우진의 어미를 처음 본 것은 만력26년(선조31년, 1598년)이었다. 스물이 채 되지 않은 젊은 처자가 불문곡직 자신의 상점으로 찾아왔던 것이다. 일각이 넘도록 상점 한켠에 말없이 있어 답답함을 느낀 김갑석이 먼저 말을 걸었다. 

"대갓집에서 오신 듯 한데 상회에 무슨 볼 일이 있으시오?"

김갑석이 그녀에게 함부로 말하지 못하고 경어를 썼다. 옷은 비자들이 입는 일상복을 걸쳤으나 품행이 단정하고, 위로 올려 쪽진 머리에 값싼 목비녀로 단장했지만 머리칼 하나 삐짐없이 잘 정돈되어 있었으며, 언뜻 보이는 가녀린 몸에 그 아름다운 자색이 인세에 극히 드물다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크흠..."

김갑석은 다시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헛기침했다.

"...저는 궐의 비자이온데 혹여 일감이 있다면 맡아서 하고자 찾아뵈었습니다."

"..."

"바느질, 세답 등 어떤 것도 잘 할 수 있습니다."

이제서야 고개를 들어 온전히 자신의 얼굴을 보인 그녀는 참 놀라웠다. 그녀가 궐의 비자라니? 별다를 것이 없는 비자의 옷을 걸쳤으나 가지런한 하얀 피부를 가진 기품있는 처자가 앞에 있었다. 짙은 눈썹과 별을 품은 것 같은 흑요석처럼 영롱한 한쌍의 눈. 그 아래에 삼각산처럼 오뚝하게 솟아난 코를 지나쳐 더 이상 적당할 수 없을 정도로 조용히 다물려 있는 주삿빛 입술이.  

그리고 그 입술에서 나온 옥구슬같은 소리는 그녀의 자색과 어울려 그 아름다움을 완성시키고 있었다.

김갑석은 속으로 장탄식을 했다. 

김갑석은 오랜 장사를 통해 사람을 외모만으로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실없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외모는 꾸밀 수 있는 것이고, 그 꾸밈에서 사람을 흔들어 결국 속임을 당하게 되는 단초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갑석은 외모를 중시하지 않았다. 김갑석은 사람의 내면은 외모가 2할, 말이 3할, 그에 따른 행동이 5할이라 생각했다. 김갑석이 본 그녀는 외모와 말로만 5할에 가깝다 생각되었다. 기품있는 외모에 예의바른 목소리라니. 일단 말을 들어보고자 했다.

"우리 상회에서는 금(비단)을 주로 취급하고, 금에 금사를 입혀 옷을 만드오. 그걸 할 수 있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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