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225)

소녀는 후회했다. 천한 노비에 대한 동정심을 착각했음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우진에게 자신의 착각을 이야기하고 오해를 풀고 싶었다. 하지만 그 결심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사흘동안 내내 고심한 자신과 달리, 우진의 모습은 사흘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소녀가 이런 우진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소녀의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게 소녀와 우진은 멀어져갔다.

역린(逆鱗)

1608년 3월 16일, 한양 편전 앞.

뿌리 없는 인간이 어디 있을까?

지금 곡을 하며 고개를 숙인 장부에게도 마찬가지리라.

장부를 필두로 모든 사람들이 슬퍼하고 있었다. 속마음은 어떨지 알 수 없으나 말이다.

그러나 그 장부는 구슬피 곡을 할지언정 얼굴은 전혀 슬퍼보이지 않았다. 

이럴수가? 

그럼에도 그 누군들 그 자리에서 감히 고개를 들어 장부의 얼굴을 살펴볼 순 없었다. 

입으로는 구슬피 곡을 하여 타인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 장부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은 너무도 달랐다. 장부를 오랫동안 보아온 자라면, 지금 장부의 심정은 속 시원하게 일이 끝났을 때 지었던 얼굴표정임을 쉬이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어찌 이런 자가 있을까?

장부의 곡을 뒤로 하늘은 점차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한양 북촌, 형조참판 박자흥의 내실

탁!

대국에서 들여온 좋은 목재로 만든 바둑판에 돌 떨어지는 소리가 맑고 높았다. 사랑방에 붙어있는 작은 문에는 쉽게 볼 수 없는 국화문양이 양각되어 있었다. 그래서 주인은 그 방을 국실이라 불렀다.

주인의 취향을 살펴 만들어진 이 사랑방은 오직 이 집의 주인이 자신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고, 이 공간에 초대받는 이는 한해를 셈하여도 한손가락을 넘지 못했다.

사랑방 안에는 의외로 바둑판을 제외하곤 작은 서탁과 호랑이가 수놓여진 백단 병풍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시작한 지 한 시진에 이르는 바둑은 이제 종반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형조참판인 박자흥은 곧 세자 시강원을 맡을 것이 예정된 자였다.

손님으로 박자흥의 건너편에 앉은 이는 시강원 사서를 맡고 있는 이이첨이었다.

"이걸로 끝이구려."

"대마를 사석으로 판을 뒤집으시다니! 참으로 대단합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좌하귀의 작은 꼬리가 잘려나가지 않았다면 좋은 승부가 되었겠지만 제 안목으론 역부족이었을 뿐입니다."

"억울한 것입니까?"

"하하! 어찌 억울하겠습니까? 어떤 승부든 상대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았는데 이런 가르침을 주신 대감께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럼 수담은 이로 족한 듯 하니, 멀리 나가지 않겠습니다. 약조는 굳건할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 ◆ ◆

그 아이를 본 그녀의 첫 기억은 경악이었다.

그 아이는 놀랍도록 남편을 닮아있었다. 마치 어린 시절의 그가 그녀의 앞에 서있는 것처럼. 친영례를 마치고 처음 대면한 그는 신분을 떠나 여자인 그녀를 들뜨게 만들었다. 그녀는 첫눈에 운명처럼,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런 그녀에게 그 아이는 굳이 누구의 말이 아니어도 남편의 핏줄이란 것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날 밤은 그저 불장난이었는데. 그 불씨가 이렇게 커져있다니. 믿을 수 없었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한 것이 이런 것일까?

그녀는 남편을 믿었고, 그녀가 평생을 두고 보답하리라 약속했던 친구를 믿었다. 비록 노비였지만 태생은 당당한 사대부로 부친 친우의 딸이었다. 불가해의 역모에 휩쓸려 노비가 된 친구를 부친은 거둬들였다. 때가 되면 신원이 될 것이고, 혹시 신원이 되지 않더라도 속량하여 좋은 짝을 지워주겠다고 약조했었다. 그녀도 찬성했다. 단아한 외모에 걸맞은 성품은 그녀의 마음에 꼭 들었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는 진정 친구로 여겼었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했던가?

그녀는 믿을 수 없었다.

그녀가 가장 믿던 내 남편이, 그녀가 믿고 있던 친구와 그런 짓을....

그런 짓을 하고 온 그가 그날 밤, 그 더러운 몸으로 다시 그녀를 짓밟았었다.

그날 그녀는 무너졌다. 굳건했던 믿음이 깨어져 꼼짝할 수 없는 그녀를 모욕하는 그에게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었다. 며칠을 앓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모두 걱정했으나 그녀는 아무 내색도 할 수 없었다. 

가까스로 몸을 추스르고 친구를 찾았다. 친구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렇다. 만약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면 아마 물고를 내었을 것이다.

그간의 정이 있었기에 고이 관비로 보냈다. 남편을 따라 공을 세웠던 무관에게 데려가도록 했다. 그 무관이 친구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음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 친구가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지면 번뇌가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번뇌는 사라졌었다. 지금까지는.

그 끔찍한 날이 지나고, 그녀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들이 태어나고 점차 그날의 기억은 사라졌다. 이제는 친구가 안쓰럽게 생각되기도 했었다. 남편처럼 멋진 사람을 연모하는 것은 누구나 그럴 것이다. 임진년의 빛나는 그를 누군들 사랑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오늘 사가에 서신을 보내려 글월비자를 불렀다가 그 아이를 보고 말았다. 아아 문밖으로 나가보질 않았어야 했다. 부른지 일각도 지나지 않았는데, 일각이 여삼추라 했던가? 문밖에서 글월비자와 이야기를 하던 그 아이를 보고만 것이다. 

남편보다는 그녀를 많이 닮은 아들과 달리, 그 아이는 남편을 쏙 빼어 닮았다. 

그 아이는 남편을 쏙 빼었지만 다른 점도 있었다. 눈의 여린 선은 아주 선해 보이고, 얼굴 선도 갸름했다. 눈빛은 오히려 깊지만 맑았고...

그녀의 두 눈에는 옅은 물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화가나서 분노해야할 이때 왜 눈물이 나는 것일까? 가까스로 눈물을 감추고 다시 들어가 앉았다. 주위를 물리고 밤이 깊도록 아무 생각도 못했다. 

그리고 그 끝은 끝없는 배신감, 말할 수 없는 치욕이었다. 온몸에 더럽고 징그러운 벌레가 기어다니는 듯 치가 떨렸다. 

사랑이 깊은 만큼, 믿음이 컸던 만큼 그 배신감이...

지금은 눈치볼 웃전이 있으니 참는다. 하지만 세월은 지나갈 것이고, 남편이 잇는다면 이 오점을 지워야하지 않을까? 일단 알아봐야겠다.

"밖에 누가 있는가? 안으로 들라."

그녀는 곧 안으로 든 사람에게 소곤소곤 몇가지를 이야기했고 잠시 후, 그 사람은 자리를 떴다. 그녀는 홀로 남았고 그렇게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 ◆ ◆

나도 이제 곧 열살이 된다. 

작은 마을 끝 좁은 골목으로 들어선 나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골목의 끝에 덩그라니 세워져있는 5칸짜리 기와집을 바라볼 때마다 내 눈빛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래 또 여길 온 것이다.

골목은 조용했다. 마치 어둠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삼켜버린 것 처럼. 언제부턴가 이 골목 입구부터 들려오던 기침소리. 처음엔 싫었다. 그 기침소리는 어느 순간부터 엄마의 생명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좋은 약을 지어먹으면 나을 거야. 그런데 차도는 없었다.

콜록! 콜록! 

조용한 골목의 어둠을 흔들어 놓는 소리. 엄마의 가슴을 쥐어짜는 그 기침소리.

'엄마.'

나는 애써 눈물을 참았다. 나는 그 기침소리를 정말 싫어했었다. 한번 시작된 기침소리는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그 기침소리가 길어질수록 오래오래 엄마를 괴롭혔다. 

혹여나 나에게 폐가 될까 그 고운 손으로 입을 막고 간신히 기침이 멎으면 엄마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손에는 짙은 핏물이 뭍어있곤 했다. 엄마가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나는 그 기침소리가 그립다. 못 견디게, 미치도록 그립다.

애써 참았던 뜨거운 눈물이 저절로 흘러나와 뺨을 적시는 것을 느꼈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손등으로는 눈물을 훔쳤다.

다신 울지 않겠다고 나 자신과 약속했었는데. 그 약속만큼 허망한 것이 없었다.

눈물이 잦아들고 잠시 골목과 작은 기와집을 바라보다가 나는 돌아섰다.

힘없이 돌아선 내 뒤엔 느끼지 못할만큼 미약한 바람이 날 쫓아오고 있었다.

엄마는 불과 두달 전에 죽었다. 아니 돌아가셨다.

동네에서 용하다고 소문난 의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엄마를 위해 끊임없이 약을 지어 주었지만 엄마의 병은 차도가 없었다. 나는 한없이 자책했다. 안그래도 여린 몸으로 대궐에서, 집에서 쉴틈없이 삯바느질을 하느라 고생하신 엄마는 내가 죽인 것이다. 작년부터 갑자기 병색이 완연해지더니 1년이 지나지않아 돌아가셨다. 그 와중에도 옷을 수선하고 내내 병과 싸웠다. 

스물일곱의 나이가 엄마에게 주어진 세상의 시간이었다. 

이건 꿈이다. 꿈일거야. 나쁜 녀석! 내가 살려줬는데. 이렇게 나를...

엄마의 죽음을 끝까지 살펴본 것은 내가 유일했다.

나는 그 순간 하나하나 너무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두시진이 넘도록 기침을 하던 엄마는 격렬한 기침만큼 많은 피를 토했다. 놀란 내가 의원님을 불러오려고 몸을 일으키자 엄마는 내 손을 잡았다. 아무 힘도 없는 엄마의 손이었지만 나는 몸을 일으켜 세울 수 없었다.

"미안하다."

엄마의 기침은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피도 멈췄다. 엄마의 얼굴은 너무나 편해 보였고, 창백한 얼굴색이 아니었다면 아프기 전이나 다름없다고 느껴졌었다. 

그런데 그런 엄마의 눈빛과 얼굴에는 점차 슬픔이 번져가고 있었다. 그 슬픔은 너무나도 크고 깊어서 엄마를 바라보는 나의 가슴이 먹먹하게, 시리게 만들었다.

내 가슴을 쥐어짜듯 나는 소리질렀다.

"엄마!"

"이젠 너와 함께 할 수 없을거 같다. 미안하다."

"의원님께서 오시면 금방 나을거야."

"그래 의원님 덕분에 오늘까지 버틸 수 있었다."

엄마는 애써 웃었다.

"아니. 당장 의원님 불러올게. 그러..."

"우진아! 엄마는 마지막까지 너를 내 눈에 새기고 싶다."

나는 엄마의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엄마를 쳐다보며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우진아."

"엄마..."

"내가 줄 것이 있다."

엄마는 힘겹게 손을 움직여 품 속에서 작게 접은 황지를 꺼냈고 그걸 내 손에 쥐어주었다.

"이건 엄마가 주는 가장 소중한 것이다. 절대 잃어버려서는 안된다. 꼭 명심해라."

엄마는 말을 하면서도 내 손을 힘주어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엄마의 손은 아무 힘이 없었다. 나는 엄마를 보며 작게 접은 황지를 손에 꽉 쥐고는 엄마에게 웃어 주었다. 엄마는 내가 그것을 쥔 것을 확인하고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그것이 엄마의 마지막이었다.

청옥관자(靑玉貫子)

내 손에 올려져있는 것은 엄마가 남긴 제법 굵직한 관자였다. 청옥으로 만들어진 것인만큼 세도가 있는 사대부들이 쓰는 것일테지. 둘레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이 정교하게 양각되었고, 안쪽은 용의 발톱 4개가 튀어나올 듯 사납게 4개의 기둥처럼 새겨져 있었다. 사대부들이 망건 양옆 관자놀이에 달고 다니던 것을 봤는데 그것이 분명하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이 청옥관자가 가장 소중하다는 엄마의 유언이다. 이런 것보단 아빠가 누구인지, 엄마는 어떤 사람인지 나에게 속 시원하게 이야기 해주는게 낫지 않았을까?

나는 노비인데 이런 청옥관자를 들고 있다가 누군가에게 들키면 곱게 지나가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이 청옥관자를 엄마의 무덤에 숨겨놓고 있는 것이다.

돌쇠할아버지는 엄마 무덤이 좋은 자리에 있고, 자식이 훌륭하게 성공할 명당이라고 했다. 하지만 노비가 잘 되어봤자 양민이나 무관으로 끝나겠지.

어쨌든 난 엄마 무덤에서 가까운 나무 밑둥에 있던 돌 몇개를 헤치고 유독 노란 색을 띤 손바닥 크기의 돌을 표식으로 그 밑에 황지에 싼 청옥관자를 숨겼다. 다시 몇개의 돌을 올려놓고 주변에 풀을 정리하자 노란 색 돌도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왜 죽는 순간까지 아빠에 대해 말하지 않았을까?'

당시에는 막연하게 알아선 안된다고 이해했었지만 돌아가시기 전에는 말씀해 주시는게 좋았을건데. 

바람이고 비고 번개고 천둥이고 전부 내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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