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랍지만 우리 엄만 한자도, 언문도 아주 수준급이었다.
노비인 내가 천자문을 비롯한 맹자까지 알고, 언문도 제대로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엄마 덕분이었다. 그것도 수준급이라 말한 것은 엄마의 설명이 현대인인 내가 봐도 아주 논리적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어린 아이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엄마는 내가 좀 더 좋은 스승 밑에서 교육받기를 원하셨지만 노비가 그런 거 배워서 뭐할까? 속량을 바란다면 돈을 많이 버는 게 장땡이다. 아니면 김씨 아저씨한테 빌붙어서 무예를 배우거나 하면 될텐데...
참! 돌쇠할아버지 말처럼 엄마가 김씨 아저씨한테 재가하는 것은 결사반대다.
돌쇠할아버지 말로는 엄마 아기때부터 돌쇠할아버지가 돌봤다고 했다. 돌쇠형은 돌쇠형 아버지와 함께 착호갑사로 삼남지방에 나가계신다. 얼른 돌아와서 나랑 놀아줬음 좋겠다. 하여간 돌쇠할아버지는 가끔 엄마가 김씨 아저씨와 이어졌으면 하는 속내를 드러내신다.
하지만 김씨 아저씨는 누가 뭐래도 종2품 별장이었다. 당당한 무관이고 양반인데 관비인 엄마와 결혼한다고? 그럼 뻔히 첩인 소실로 들일 것이고 나는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될 거다. 엄마가 있으니 그리 무시하진 않겠지만 이부동생이라도 태어나면 어쩔까 싶다. 엄마가 낳은 이복동생은 비록 얼자일지언정 나와 신분차이가 날 것이고, 엄마 입김으로 나를 속량이라도 시켜주면 좋겠지만 그게 말처럼 될까?
하여간 엄마의 재가는 반대다. 아직은...
엄마는 평소 나와 대화를 즐겨하신다.
항상 웃으시며 말하시고, 감추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엄마의 출신가문과 아빠에 대해서만은 단 한마디도 제대로 말하지 않았다.
가끔 아빠에 대해 물으면 엄마는 언제나 이렇게 대답했다.
'우진아! 네 아버지는 바람이시다. 네 곁에 없는 것 같지만 언제나 네 곁에 머물면서 널 지켜보신단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바람이 불어오면 넌 그걸 느낄 수가 있지 않니?'
더 어릴 때는 엄마한테 짜증내면서 계속 물어본 적도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막연하지만 내가 아빠에 대해 알아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웃고 태연하게 대답을 한 엄마가...,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한 날마다 밤을 꼬박 새우며 바느질을 했고, 흐르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난 등을 돌려 자는 척 했지만 엄마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느껴지는 것처럼 아빠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다.
아빠에 대한 기억은 나보단 엄마에게 더욱 커다란 아픔일 테지.
그걸 알고 난 후에 나는 더 이상 아빠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래 난 바람의 아들이다.
맹랑한 아가씨
어제 저녁, 잔치음식 잘 먹고 푹 잤다.
어라? 일어나보니 엄마가 없었다. 문을 열고 나가 간단히 세수하니 막 김씨 아저씨가 시위복 차려입고 나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날 보더니 눈매가 사나워진다. 내가 늦게 일어나서 화가 났다보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사내가 그리 게을러서 어찌 큰일을 하겠느냐? 쯧!"
김씨 아저씨는 역시 버럭 하셨다.
'저는 노비라서 큰일하면 정말 큰 일 납니다.'
물론 이런 말은 속으로 하는 거고, 아저씨 앞에선 고개를 숙이고 고분고분 말했다.
"네 나리! 각골명심하겠습니다. 송구하나 제 어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혹시..."
"네 어미 행방을 어찌 내게 묻느냐? 어미의 문후를 여쭐 나이가 이미 지났거늘.., 비록 혼정신성(昏定晨省)은 바라지 아니하더라도....."
일각 넘게 이어진 김씨 아저씨의 잔소리는 돌쇠할아버지의 등장으로 끝났다.
"나리! 입궐하셔야 할 시간이옵니다."
"알겠네. 이만 가지. 크흠!"
가면서도 날 노려보는 건 잊지 않는구만.
김씨 아저씨가 떠나고 난 돌쇠할아버지한테 껌딱지 붙었다.
"할아버지! 엄마 어디가셨어요?"
"흘흘, 인석아. 네 어미는 요즘 박대감댁에 삯바느질하러 달포가까이 다니시거늘 그걸 나한테 물어보는 게냐?"
"북촌 박대감댁이요? 형조참판이신?"
"그래. 그동안 오리새끼마냥 꼬박꼬박 어미따라 가더니 요즘엔 왜 안따라나서누?"
"헤헤. 엄마 일하는데 옆에서 방해되고, 거기서 눈칫밥 먹기도 그래서요."
"흘흘, 맛있는 밥 얻어먹는다고 뺀질나게 드나들던 네가 갑자기 딴소릴 하누?"
돌쇠할아버지가 또 치명타 날리겠다. 빨리 화제를 돌리자.
"혹시 맘에 드는 처자라도 형조참판댁에 있는 게냐? 말이라도 붙여봤겠지?"
어이쿠, 늦었다.
"맘에 드는 처자라니요? 제가 언감생심 그럴 처지가 되나요? 생사람 잡지마세요."
"아니면 아닌 게지. 왜 화를 내고 그래. 뒷마당에 지게지고 참판댁으로 갈터이니 따라 오거라."
그래 오늘 점심도 이걸로 해결이다.
다 좋은데 돌쇠할아버지는 투머치토커다. 게다가 뻥이 너무~ 너무 심하다. 임진년에 있었던 왜란에서 돌쇠할아버지는 왜장과 왜군무사, 사무라이들을 수십 명이나 저세상으로 보냈다고 한다.
쯧쯧,,,할아버지 체격이 장대한 것은 인정하고, 할아버지 아들과 손자인 돌쇠형이 착호갑사로 유명한 것도 인정한다. 돌쇠형과 아저씨는 내가 봐도 대단했다. 근데 할아버지는 아니지.
어쨌든 할아버지 말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조선팔도를 주름잡으며 임진왜란 당시에 참전하지 않은 전투가 없다. 더 웃긴 것은 당시 분조에서 세자마마를 호종하며 공을 세웠단다. 하하하!
할아버지 그건 구라거든요. 분조에서 활약하고 왜장 수십 킬하며 공을 세웠는데 벼슬은 커녕 양인(할아버지 말로는 벼슬을 줬는데 거절했단다! 더 못믿지.)이었다. 오히려 할아버지 아들은 호랑이 잡은 걸로 종4품을 받았다. 녹봉은 없지만 품계는 있는, 이름뿐이긴 해도 아저씨와 돌쇠형은 엄연한 양반이라 해도 된다. 돌쇠형 이름도 그렇다. 돌쇠형 이름은 돌쇠형 아버지가 지은 양반이름이 있는데 할아버지는 그냥 돌쇠라고 부른다. 돌쇠형이나 아저씨는 할아버지한테 꼼짝 못하기는 한데, 아버지니까 그런거지 할아버지가 대단해서 그런 것은 분명 아닐거다.
어쨌든 분조에서 활약을 했으면 오늘 내일하는 지금 임금님(놀라지 마시라! 지금 임금은 선조다.)의 뒤를 이어 왕이 되실 세자(광해군)께서 벼슬자리 하나 챙겨주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걸 거절했다니..., 도저히 못 믿겠다.
할아버지가 우리 엄마를 어릴 때부터 봤다는데 그것도 의심스럽다.
하여간 돌쇠할아버지 말은 앞뒤가 맞질 않는다. 그래도 할아버지가 좋은 것은 좋은 거다. 매일 날 찾아와서 밥 잘 먹었는지, 잠은 잘 잤는지, 혹시 괴롭히는 놈은 없는지 물어보신다. 재작년인가 김씨 아저씨가 날 괴롭힌다고 울면서 이야기를 했을 땐 잠깐 무섭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김씨 아저씨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급히 나갔다 왔었다. 할아버지가 말한 걸 그대로 읊으면 김씨 아저씨 참교육(?)을 해주고 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도 구라다. 김씨 아저씨는 그날 저녁에도 아주 멀쩡했다!
아마도 할아버지가 김씨 아저씨한테 무릎 꿇고 사정하며 한마디 했을 순 있겠지만 어딜 감히 덤볐을려고?
"....거의 다 왔구나. 참판댁 뒷채에 가면 네 어미가 있을게다. 난 물건 전해주고 오마."
"네 천천히 오세요."
난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며 뒷채로 향했다.
같은 시각, 한양 북촌 형조참판댁 별채.
한 소녀가 알록달록 예쁜 저고리를 보면서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눈처럼 희고 투명한 피부는 소녀만의 특징이었고, 흑요석을 품은 것 같은 두 눈은 매혹적이었다. 형조참판인 부친, 밀양 박씨라는 당당한 권문세족의 후광을 지닌 그 소녀의 미래는 탄탄대로일 것이 분명했다. 누구라도 그녀의 눈부신 아름다움을 부인하지 않았고, 누구라도 그녀가 훗날 당당한 권세가의 마나님이 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 소녀가 손가락으로 저고리 앞에 놓인 작은 노리개를 톡톡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왜 저 자식만 보면 화가 나는 걸까?"
미간을 잔뜩 찌푸린 소녀는 자신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누구에게나, 천한 노비일망정, 사근사근한 웃음에 쾌활한 성격의 소녀는 형조참판 댁의 꽃이었다.
소녀는 방금 우진이 몰래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뒷채로 향하는 것을 보고 말았다.
처음부터 우진이 싫었던 것은 아니었다.
달포 전인가 옷을 잘 짓는다는 비자가 왔다길래 찾아가서 세번 놀랐다.
그 비자의 외모가 너무 아름다워 놀랐고, 말투와 품행이 대갓집 규수와 다를 바가 없어 놀랐으며, 지은 옷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놀랐다.
그래서 소녀는 제 어미를 졸라 그 비자에게 후하게 사례하자고 했었고 흔쾌히 허락도 득했다. 그때 신이 나서 그 비자에게 달려간 소녀는 그 옆에서 우진을 처음 본 것이었다.
그래. 그때 기분이 좋아서 가슴이 콩닥거렸었다. 그 비자가 성품이 좋기도 했고, 실력도 좋았었다. 사소한 일에도 환하게 웃는 모습이 좋았고 말이다. 그런 비자의 아들이라는 우진도 성격이 좋았다.
소녀는 우진이 비자의 옆에서 심심해하는 것이 안쓰러워 잠시 정원에 들여 이야기를 나누었고, 웃어준 것 뿐이었다. 우진은 매일 뒷채를 드나들었고 소녀는 자기가 다 먹지 못하고 남긴 군것질거리를 우진에게 넘겨주었다. 그냥 그것 뿐이었다.
그런 우진이 미워진 것은 불과 5일 전이었다. 아직은 어렸지만 나도 여자라는 것을 확실히 자각하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몇년 후면 혼례를 치르고 한 사람의 부인으로 살아갈 준비를 해야하는 그때.
그런 변화의 시점에 우진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소녀는 우진이 단순히 비자의 아들, 천한 아랫것,이 아니란 것도 그때 어렵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우진과 이야기를 하고 있자면 이상하게 가슴이 뛰고, 손바닥에는 땀이 축축해졌다. 우진이 이상한 듯 쳐다보면 어쩐지 얼굴은 한껏 붉어지고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몰랐다. 막연했지만 소녀는 자신이 우진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는 안되는 것인데, 그런 금기를 범한다는 짜릿한 쾌감을 매일 밤마다 가슴저릿하게 느끼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단순한 느낌은 아니었다. 이건 운명의 끈 한 자락이 소녀와 우진을 잇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때부터 소녀는 우진을 보는 시선을 달리했다. 소녀의 행동이 달라진 것도 확연했다. 다만 우진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었다.
소녀는 며칠동안 생각을 거듭한 끝에 우진에게 다가섰다. 우진의 마음도 소녀와 다르진 않으리라 생각되었다. 소녀를 흔든 우진의 행동은 너무나 뻔했다. 이것은 그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 뿐이었다.
소녀는 몇 번이나 우진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지나치듯 말했다.
"난 네가 좋다."
"아씨 저도 아씨가 좋습니다."
그래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소녀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애써 짓누르며 우진을 외면하며 말을 이었다.
"난 너를 기다리겠다."
그런데 소녀의 두번째 말에 우진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소녀는 고개를 돌려 우진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마음과 달리 고개를 돌리진 못했다. 대신 소녀는 재촉하듯 다시 입을 열었을 뿐이다.
"너를 기다린다고."
"아씨. 안됩니다."
낮지만 단호한 우진의 대답에 소녀는 비로서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신분은 다르지만 마음을 나누었고, 서로 다르지 않은 마음을 확인했는데 감히 나를...
소녀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묘한 감정을 애써 누르며 차분하게 물었다.
"왜?"
언뜻 차분해 보이지만 잔뜩 굳어진 소녀의 모습과 달리 소녀의 내부는 세찬 파도가 넘실거렸다. 우진의 기색을 살펴보니 우진은 소녀의 말뜻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겁이 나는 것일거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한 소녀는 잔뜩 굳어졌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우진이 대답이 없는 것은 소녀를 배려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내 말뜻은 잘 알거다. 난 너를 기다릴테다."
"아씨는 참판댁 따님입니다."
소녀는 속으로 탄식했다. 우진의 태도는 너무 단호해서 소녀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소녀는 우진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녀는 한참만에 겨우 물었다.
"내가 싫은 건 아니지?"
"제가 아씨를 좋아하면 안 되는 겁니다."
"난 네 마음을 묻는 거야. 난 네가 좋다. 너도 날 좋아하는 건지 알고 싶어."
"좋아하진 않지만 그냥 좋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녀의 가슴 한 쪽이 무너지고 있었다.
'좋아하지 않지만, 좋아하지 않지만...'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돌아섰다. 그리고 자신의 별채로 돌아왔다.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소녀는 사흘동안 밥을 먹을 때를 빼고는 내내 자신의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