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건 아까 봤던...그?'
그 생각과 동시에 나는 정신을 잃었다.
그래, 나는 바람의 아들이다.
◆ ◆ ◆
그날 밤은 길었다.
천둥소리가 요란했고, 장대비가 천지사방을 들이쳤다.
"네 년도 나를 능멸하느냐?"
폐부를 쥐어짜는 듯, 신음과 함께 그는 떨었다.
번듯한 이마, 하얀 얼굴에 크고 힘있게 자리한 두 눈과 오똑한 콧날은 매우 기품있었고, 주삿빛 입술과 함께 어우러져 누가 보더라도 잘생긴 남아로 보였다. 6척에 이르는 큰 키와 단단해보이는 가슴, 넓은 어깨는 힘이 넘쳐보였다.
이런 남자를 헌헌장부라 하지 않으면 누굴 그리 부를까?
그런데 그의 두 눈은 헌헌장부의 외모와 달리 흉흉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평소와 전혀 달랐다. 소녀는 항상 그와의 보랏빛 꿈을 꾸어왔다.
그런데 그렇게 연모했던, 차마 넘볼 수 없이 빛나던 그가 아니었다.
"제발 ...님! 고정하시어요"
그는 소녀의 애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구석에 몰아붙였다.
"그래. 네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더냐? 오늘 너를 갖겠다."
소녀는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바라던 것은 비록 꿈일지언정 이런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야수의 몸짓은 폭풍처럼 소녀를 휩쓸어갔고 그 야수는 곧 떠났다.
그리고 남겨진 것은 소리없이 오열하는 소녀와 그의 것이었을 푸른 옥관자(玉貫子) 하나였다.
잠시 후, 그 자리에는 소녀도 푸른 옥관자도 남지 않았다.
그런데, 별채 밖의 구석자리 어두운 곳에서 누군가가 그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번개가 들이쳐 그 빛이 없었다면 몰랐을 사람이...
그 사람의 눈이 머물던 곳은 별채를 떠난 그와 소녀가 사라진 방향이었다.
다시 번개가 들이쳐 빛이 머문 그 자리엔 그 사람도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 ◆ ◆
1607년 어느 봄날, 조선 한양.
우라질 봄이다.
이곳의 봄은 짧다.
사실 봄이 짧은 건 아닌데 할일이 많아서 그런 거다.
"또 늦은 게냐? 이러면 경을 친다고 내 누누이 일렀거늘. 쯧쯧."
그렇다.
갑사, 아니 별시위라고 해야겠지.
별시위 김씨 아저씨는 내가 꾀를 부리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버럭 하신다.
내가 하는 일이라곤 금군 아저씨들 잔심부름하는 건데...
김씨 아저씨는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다.
이럴 때는 비장의 무기가 있다.
"네. 엄마가 찾아서 잠시 글월비자님 도와드리느라 늦었습니다."라고
우리 엄마 핑계를 대면 그만이다.
김씨 아저씨는 우리 엄마한테 아주 약하다.
아니, 엄마한테 말 한마디 제대로 섞는 걸 본 적이 없다.
한집에 살면서도 소 닭 보듯 쳐다보고 고개를 돌리고 만다.
엄마와 김씨 아저씨는 대체 무슨 관계일까?
내가 엄마한테 김씨 아저씨에 대해 물어보면 그저 작게 웃으실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돌쇠할아버지 말로는 김씨 아저씨가 우리 엄마한테 연정을 품었는데 엄마한테 대차게 차인 거 같다고 말했다.
하긴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릴 뻗어야지.
김씨 아저씨! 꿈깨세요.
엄마 외모나 내 외모를 봐도 아저씨는 아니지. 물론 이건 외모 한정이다.
하여간 나는 돌쇠할아버지 이야길 듣고 바로 납득해버렸다.
불쌍한 사람...
내가 이해해주자. 그렇다고 김씨 아저씨 불호령이 가볍지는 않다.
"이 녀석. 썩 들어가서 띠돈 정리하고 걸개 마무리 해 놓아라. 내 금새 돌아와 확인할 터이니 제대로 끝내지 못하면 밥은 없을 줄 알아라."
김씨 아저씨가 매섭게 눈을 부라려보지만 전혀 무섭진 않다. 하지만 눈을 마주치면 안 된다.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숙여 비루먹은 강아지마냥 '네'하고 있으면 끝난다.
그러면 아저씨는 ‘쯧’하면서 나간다.
나야 김씨 아저씨를 겁내지 않지만 다른 갑사 아저씨들은 달랐다. 다른 갑사 아저씨들 말에 따르면..., 믿기 어렵지만 김씨 아저씨는 '무용이 절륜하고 진법과 병법에 통달했다?'고 한다.
내 생각엔 구라다.
내가 아는 갑사 아저씨들은, 말로는 삼각산 호랑이도 맨손에 수십 마리씩 잡은 분들이다. 김씨 아저씨가 대전 별시위로 근무하긴 하지만 그건 폼만 있을 뿐 그리 대단해 보이진 않는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김씨 아저씨가 엄마한테 하는 것만 봐도 흐흐 뻔~하다.
오늘도 시킨 일 대충하고 밥 먹은 다음 집에 가면 된다.
나는 우진이다.
"헉헉!"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남촌을 지나쳐, 작은 아랫동리 골목길에 끝자락에 있는 아담한 기와집으로 들어섰다. 현대로 따지면 용산 남영동과 이촌동 사이 쯤인 거 같다. 지형을 살펴보면 내가 잠시 지상근무할 때, 가끔 드나들었던 국방부 청사 아래쪽이 확실하니 아마 맞을 거다.
나는 이 작은 기와집에서 엄마와 함께 곁방살이하고 있다.
엄마는 대궐에서 비자(婢子:관비)로 일하고, 남는 시간에 삯바느질로 먹고 산다.
내가 보기에 엄마 바느질 솜씨는 정말 빼어났다. 현대의 기계식 재봉틀과 비슷할 정도로, 거의 같은 간격으로 외부 바느질 자욱이 보이지 않도록 잘 하신다. 특히 관복이나 비단옷 격자무늬에 올이 돋아나온 것도 새것처럼 만들어낸다. 그래서 고정적인 일감도 많다.
엄마는 대궐의 관비다.
"헉헉! 엄마 나 왔어요."
소리치며 방문을 열었는데 엄마는 없었다.
잠시 실망했지만 다시 마당을 통해 대문을 나서려는 찰나 내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이, 잡종!"
대문을 끼고 나가려는 내 귀에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어깨를 멈칫했지만 애써 못들은 척하며 잰 걸음을 옮겼다.
순간이었다.
딱!
뒤통수에서 묵직한 아픔이 느껴졌다.
나는 애써 고통을 참으며 뒤돌아보았다.
몸을 돌려 다시 보니 손에 반질거리는 목검을 쥐고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서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나는 얼른 허리를 굽혔다.
"우진이 만호님을 뵙습니다."
우진. 여기에서도 이게 내 이름이다.
일천즉천(一賤則賤).
엄마가 노비라서 나도 노비다. 엄마는 우진이라는 이름을 지었고, 그 뜻은 말해주지 않으셨다. 노비 중에 이렇게 이름이라도 번듯한 사람은..., 나 빼곤 아마 없을 것이다.
"너같은 잡종이 이름 하나는 사람답게 지었구나."
내가 만호님이라 부른 이 왕싸가지는 김씨 아저씨 친구의 나이 어린 동생인데..., 놀라지 마시라! 이 왕싸가지는 바로 이괄이다. 흐흐흐.
이괄 이 사람은 정말 잘난 척 대마왕이었다. 다른 사람 무시하는 데는 이런 말종이 더 없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었다.
아마도 김씨 아저씨를 찾아온 모양이었다.
"그래 별장께서는 퇴궐하셨느냐?"
"제가 나올 적엔 아직 궐에 계셨습니다."
"어이 잡종! 별장께는 내가 경기감영의 ㅇㅇ현감으로 가게 되었다고 말씀드려라. 알겠느냐?"
"만호님! 감축드립니다. 꼭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괄은 목검을 들어 다시 내 이마를 톡톡 건드렸다. 그러다가 그 목검을 내 발 앞에 던졌다.
"이 목검은 검가에 올려 놓거라. 저녁에 친우들과 약속이 있어 별장나리를 뵙지 못하고 가는구나. 내가 나랏일에 메인 몸이라 시간이 없어, 너의 방자한 언행을 미처 바로잡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무리 네 신분이 천하다고 하나 네가 모시는 주인을 모심에 있어 품행이 방정해야 함은 노비의 본분이다. 헌데 너의 방자한 행실은 눈을 뜨고 볼 수가 없구나. 내가 이 만큼이나마 고쳐주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겠느냐? 내 말을 각골명심토록 하거라."
"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보자. 에헴!“
이괄 이 개xx를 보고 나니 기분이 나쁜 건 둘째치고, 기운이 쫙 빠져서 방에 들어가서 누워버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언뜻 잠이 깨고 나니 내 위에 이불이 덮여있었다.
'엄마가 왔구나.'하고 생각하며 말하려는 순간,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장하지 않니? 소반에 밥이 있으니 어서 먹어라. 오늘 잔칫집에 갔다가 얻어온 것이 있다."
역시, 우리 엄마는 천사였다.
작고 갸름한 얼굴, 커다란 두 눈에 오똑한 콧날. 나도 엄마 닮아서 한 외모 한다. 노비라서 안타깝지만 외모도 재산이지. 암 그렇고 말고.
그래 우리 엄마는 아마도 대갓집 규수로 고이 자라다가 억울하게도 역모에 휘말려 관비로 떨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나도 궁궐에서 잔심부름 하지만 사대부랍시고 엣헴거리는 사람 중에 엄마처럼 말과 행동을 예쁘게 하는 사람을 많이 보진 못했다.
나한테 이런 엄마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단아한 외모에 부드러운 성품은 나처럼 배배꼬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 봐도 감탄이 절로 나온다. 내가 뭘 물어보던 사근사근 웃으며 말씀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