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고래와의 이상한 만남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있다.
기억하지도 못하는 어릴 적부터 고아원에서 자란 나는, 아주 일찍 철이 들었다.
엄마, 형제자매, 맛있는 과자 등등...
내가 원하는 것들은 아무리 울고 보채도 주어지지 않았거든.
사실 철이 든 게 아니라 아무리 울어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기에 울지 않았던 것이다.
고아원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엔 소정의 지원금을 받고 사회로 나가야 했다. 사회에 나가면 멋지게 성공해서 맛있는 거 사들고 찾아오겠다던 고아원 형, 누나들 중 누구도 다시 찾아왔던 사람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에 새하얀 해군사관학교 생도제복을 입고 찾아온 선배들이 있었다.
‘그래 이거다!’
학비무료, 소정의 월급, 기숙사 단체생활...
거기에 장교로 임관하면 철밥통인 공무원 취업까지 된다니?
완벽하다.
그래서 달리기 시작했고, 오늘까진 좋았다. 아주 좋았다.
외로움을 느낄 틈도 없는 생도생활은 나에게 천국이었고,
그에 걸맞게 노력한 만큼 성적도 준수했다.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후엔 함정과 지상근무를 번갈아 하고, 해군에서 위탁교육으로 조선공학과 석사학위도 취득했다.
평탄한 장교생활을 이어가던 중, 위탁교육 받았던 민간대학 은사님의 추천으로 스타트업에 투신해서 초대박을 터트렸다.
참 인생 오래 살고 볼 일이다.
37억을 들인 소형 스쿠너.
17세기 중반 스타일의 날렵한 몸체로 적당히 빠른 속도에 안정성을 가미한 범선이었다. 여기에 적당한 엔진을 달아 무풍지대에 대한 패널티도 없었다.
시험운행을 해보니 제원에 맞게 더하고 덜할 것 없이 완벽했다.
카리브 해의 멋진 석양은 덤이다.
이렇게 운수 좋은 날...
항구로 돌아가 방갈로 앞에 모닥불을 피우고 친구들과 기념 맥주를 마셔줘야지.
정식 감항증명(선박의 항해가 가능함을 증명하는 관공서의 증명서)을 받으면 친구와 미녀들을 태우고 영화에서나 보던 돈지랄을 해봐야하는 거 아니겠어?
그런데 좀 멀리, 오른쪽 앞에 이상한 물체가 보였다.
시험운행 감독관인 마크가 먼저 말했다.
"우진! 오른쪽 앞에 고래 같은데?"
"아 나도 봤어. 좌현으로 피해가도록 하지."
"아니~ 고래의 움직임이 없어. 규정에 따라 근접해서 살펴보고 해안경비대에 신고해야 해."
"마크. 나도 규정은 알지만 우린 시험운행 중이야. 시험운행 중에는 신고의무가 없어."
"하지만 나에게는 있지. 조심스럽게 접근하자. 움직임이 있으면 피해가고 죽었다면 간이 Gps수신기를 부착하고 해안경비대에 신고할게."
"네네~ 감독관님 명령 잘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대신 감항증명은 시원하게 내주는 거다?"
나는 쓰게 웃는 마크에게서 시선을 돌려, 고래로 추정되는 물체로 배를 몰아갔다.
가까이 갈수록 어두운 바탕에 밝은 회색 얼룩이 인상적인 거대한 녀석이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의 거대함에 놀라 소리쳤다.
"이런 15미터는 족히 되겠는 걸?"
"우진! 저기 수면에 솟은 거 보여? 작살 같은데..."
"근처에 불법포경선이 있었나 봐."
아마도 불법포경선이 쏜 작살을 맞아 죽은 모양이었다.
마크 말대로 간이 Gps수신기만 달아놓고 신고하면 끝날 일이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다가서는데 고래의 꼬리가 미약하게 들썩이는 것 같았다.
"마크, 움직인다. 아직 살았나봐!"
"이런 그럼 너무 붙었는데? 아니... 그래도 한번 접근해서 살펴보자."
"어이쿠~ 마크! 대단한 환경운동가님 나셨구만."
나는 배의 진행방향이 바로 고래의 왼쪽 옆구리 방향이었기에 조심스럽게 속도를 줄여 접근해갔다. 가까이 붙으니 고래 왼쪽 등에 박혀있는 작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얼마나 격렬히 몸부림을 쳤는지 깊이 박혔던 작살이 커다란 살점과 함께 거의 떨어져 나갈 정도로 덜렁거리고 있었다.
고래의 움직임이 거의 없었기에, 언뜻 보면 죽은 듯 했다.
"우진! 일단 사진을 찍을 테니 고래 옆에 정지해."
마크는 사진을 찍고 잠시 살펴보다가 안타까운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우진! 작살이라도 빼주는 게 어떨까? 마지막 가는 길에 편히 보내주자고."
"안돼! 이건 내 배고, 여기까지도 무리한 거야. 규정대로 간이Gps수신기를 부착하고 뜨자."
내 말에 마크는 눈살을 찌푸리고 잠시 고민하다 내게 말했다.
"우진 부탁이야. 내가 그런 사람은 아닌데 감항증명은 문제없이 내 줄게. 귀찮은 서류작업도 대신 해주지."
나는 마크의 부탁에 마음이 약해졌다.
"거기에 맥주 한잔 추가! 콜?"
"오케이!"
고래의 상처는 정말 위중해 보였다.
아까 보였던 잠시간의 떨림은 마지막 몸부림이었던 것일까?
올가미에 능숙한 선원이 카우보이처럼 밧줄을 뿌렸다. 첫 시도는 실패했지만 두 번째엔 성공했다. 마크와 밧줄을 뿌린 선원이 조심스럽게 밧줄을 끌어당겼다.
그런데 갑자기 고래의 눈꺼풀이 올라가고 그 녀석의 눈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난 너무 놀라 밧줄을 놓으라는 말도 못했다. 만약 놈이 그 거대한 몸을 돌리거나 물 속으로 들어가면 밧줄과 연결된 이 배도 온전할 수 없었다.
"마크..."
나는 신음처럼 마크를 불렀다. 하지만 아무 말도 못했다.
이를 모르는 마크와 선원은 계속 힘주어 밧줄을 당겼다. 이윽고 작살과 고래의 살덩이가 함께 붙어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고래의 움직임이 크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다들 난간을 단단히 잡아! 바로 이탈한다."
고래의 움직임에 위험을 직감한 나는 크게 소리쳤다.
내가 엔진을 작동시키는 찰나, 고래는 바다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잠시 후 배가 출발하고 나는 방향키를 항구 방향으로 고정했다.
그런데, 내 좌측에서 그 거대한 녀석이 몸을 띄우고 고개를 드는 것이 아닌가?
아까 내 눈과 마주친 것은 그저 착각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저 거대한 녀석이 나를 쳐다보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나는 온몸으로 느꼈다.
그때, 그 거대한 몸으로 갑자기 내려친 바닷물이 내 머리부터 온몸을 적셨다.
우리가 다가선 것에 화가 났을까?
고통스러웠을 작살을 빼 준 것인데... 설마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고...
나는 겁이 났다.
하지만 녀석은 아무 일 없이 배와 나란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마크는 녀석을 바라보다가 함박 웃으며 내게 말했다.
"우진! 녀석이 우리에게 고마워하나봐"
"그래 두번만 고마웠으면 아예..."
내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한 것은...
녀석의 눈이 갑자기 빛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저 눈빛... 분명 나를 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봤던 거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대체 언제 어디선지?
왠지 슬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인가? 갑자기 내 가슴이 아려왔다.
누구였을까?
잠시 상념에 빠진 나를 두고 녀석은 카리브 해 깊은 바닷 속으로 들어갔고, 다신 보이지 않았다. 난 다행이라 생각하고 속도를 높였지만 알 수 없는 오한(분명 바닷물 때문은 아니었다.)이 들었다. 혹시 녀석이 보일까 싶어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렸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그럭저럭 항구로 돌아온 나는 피곤, 갑작스런 오한과 녀석과의 이상한 기분 때문에 간단히 샤워를 하고 바로 잠을 청했다. 하지만 극심한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잠은 쉽사리 오질 않았다. 나는 한참 뒤척이다가 겨우 잠들었다.
나는 도통 꿈을 꾸지 않았다.
그런 내가 이상하게도 꿈을 꾸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질 않았는데, 어린 내가 엄마로 보이는 어떤 여자와 함께 있었다.
아빠로 생각되는 사람은 없었다.
어? 그런데 저 어린 아이가 나인가. 이런 의문을 가지고 보니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이니 저 아이는 내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저게 나일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다.
엄마!
내가 수백 수천만 번 소리죽여 불렀던 존재.
이젠 원망을 넘어 체념했던 사람인데...과연 저 여자가 내 엄마인가?
그녀를 확인하려 다가갈수록 점차 뿌옇게 시야가 흐려졌다.
더욱 오기가 생겨서 가까이 붙자마자 고개를 들어 그녀를 똑똑히 보려 눈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전혀 보이질 않고, 뿌옇던 시야가 점점 어두워지더니 그녀와의 거리도 함께 멀어져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내 몸이 붕 뜬 기분이 들어 반사적으로 아래를 내려 봤다.
이런...,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무저갱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아악!'
이것이 그저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치 사실인 듯 생생했다.
생도 시절에 막타워, 공수훈련 집단강하를 했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한참을 떨어져도 바닥은 보이질 않았다.
어느 순간 저 아래 희끄무레한 것이 보였는데 점점 다가갈수록 신비로운 색채의 빛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