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227화 (227/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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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되도록 아끼고 싶었는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경화수월 같이 사용 횟수 제한이 있는 기능을 사용한 건 뼈가 아팠지만, 들키는 것보다는 나았다.

    “음?”

    “왜 그러나.”

    “아니, 뭐가 스치는 느낌이 나서 말이야.”

    “벽에 모난 돌이라도 있었나 보지.”

    “그랬으려나. 그래, 그랬겠지.”

    조심스럽게 흑마법사들의 옆을 지나가던 중 살짝 옷깃이 스치기는 했지만, 그 누구도 라트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조심하라고. 여긴 어두우니까 말이야.”

    “알았어.”

    ‘이제 조용히 뒤를 미행하면 되겠네.’

    흑마법사들의 뒤를 잡은 라트는 거리를 벌리고 그들을 따라갔다. 라트가 이미 지나온 길을 따라 걷던 흑마법사들은 이윽고 문라이트 스톤이 수놓아진 장소에 도착하자.

    ‘미친.’

    중앙에 있는 거대한 문라이트 스톤쪽으로 향하더니 주문을 외웠고, 그러자 위쪽으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바위 뒤에 숨어서 장면을 바라본 라트는 동공이 흔들린다. 만약 욕심을 부려서 저 문라이트 스톤을 챙겼더라면 분명 흑마법사들은 이상함을 눈치채고 주변을 수색했을 거다.

    그랬다면 이곳에 위로 올라가는 통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기 어려워졌을 게 분명했다.

    “옛말에 틀린 말이 없다니까.”

    흑마법사들이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바위에서 빠져나온 라트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흑마법사들이 사라진 곳 쪽으로 걸어갔다.

    “이쯤이었지?”

    흑마법사들은 주문을 외워서 입구를 만들어냈지만, 자신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바닥에 손바닥을 대고 주문을 외워 지형을 개변시켜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을 만들었고, 계단을 감추고 있는 입구를 치워버렸다.

    ‘거의 다 왔어.’

    본능적으로 올라가면 찾고 있던 것이 있으리라고 예상한 라트는 조심스럽게 계단을 밟으며 위로 향했다

    올라가는 길 역시 문 라이트 스톤으로 도배가 되어있어서 눈앞이 보이지 않아 발을 잘못 디딜 위험성은 없었다.

    다만, 은은한 빛 덕분에 지금 누군가가 계단을 통해 내려온다면 라트는 필연적으로 모습을 들키게 되는 상황이기도 했다.

    ‘누가 내려오는 낌새는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들키지 않으려면 조심해야 하는 상황이다. 가능하면 몰래 잠입해서 상황을 지켜보고 싶었다.

    다행스럽게도 계단에 끝에 도달할 때까지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은 라트는 재빨리 몸을 숨기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넓어.’

    천장도, 그리고 넓이도 어지간한 동굴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넓다.

    게다가 천장에는 문라이트 스톤과 발광석이 적절한 비율로 섞여 주변을 밝히고 있었으며 벽에 고풍스러운 문양이 더해져 있었다.

    이런 동굴은 절대로 자연적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가 바로.

    ‘용의 둥지(드래곤 레어).’

    용이 거주를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장소이자, 라트가 찾고 있던 곳이 틀림이 없었다.

    ‘이쪽으로 가면 되겠지.’

    갈림길은 없다. 혹시나 갑자기 흑마법사가 나타날 때를 대비해서 착실히 주변을 살피며 언제든 몸을 숨길 수 있게 대비하면서 전진한다.

    넓디넓은 통로를 지나자, 더욱 넓은 공간이 펼쳐졌고 여기서 처음으로 갈림길이 나타났다.

    “어.”

    그것도 두 갈래, 세 갈래 길도 아닌 무려 다섯 갈래 길이었다. 아마 다섯 길 모두 제각각 다른 곳으로 향하는 길일 거다.

    ‘25% 확률이라니.’

    운에 맡기기에는 오차 확률이 너무 높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나타나는 놈을 잡아다가 심문을 하는 방법도 있지만, 흑마법사를 상대로 심문은 통하지 않기에 기각.

    [관찰력 기능으로 인해 무언가를 발견했습니다]

    어쩌지 그냥 운에 맡기고 한 곳을 찍으려던 순간,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라트의 눈앞에 알림창이 생성되었다.

    ‘뭘 발견했다는 거지.’

    관찰력 기능이 알려주는 데로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는 곳으로 가자 아직 신선도를 유지하고 있는 푸른색 잎이 뒹굴고 있었다.

    ‘마력초 풀잎이다.’

    흑마법사들이 들고 갔던 마력초 풀잎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 길이 조금 전 흑마법사들이 간 길이 분명했다.

    ‘체스논한테 마력초를 가져다준다고 했지.’

    이곳으로 가면 드디어 왕국 전쟁 에피소드의 최종 보스와 마주할 수 있는 건가.

    약간의 흥분, 그리고 기대감에 몸이 살짝 떨려오는 것은 플레이어의 본능 때문이리라.

    이성이 싸늘하게 식어 분노하고 있는 까닭은 그들이 저지른 추악한 행위 때문이리라.

    ‘끝을 보자.’

    라트는 굳건히 마음먹으며 발을 내디뎠다.

    ***

    잠들어있는 드래곤의 등에는 검은색 쇠기둥 하나가 박혀있었다. 평범한 쇠기둥이 아니라 흑마법 특유의 사악한 마력을 머금은 쇠기둥이었다.

    “이제 몇 할 정도 완성됐습니까, 체스논님.”

    “6할, 이다. 아니, 6할, 하고, 도 반푼이려, 나.”

    질문에 대답하는 이의 목소리는 고위 언데드 특유의 목소리처럼 뚝뚝 끊겼다.

    “코어는 괜찮으십니까?”

    “괜, 찮, 다. 마력초도 있고, 그것, 들의 생명을 빨, 아서 힘을 보충, 하고 있으, 니까.”

    “리치가 되어 한층 더 경지가 상승한 것은 좋지만, 무리한 시술 때문에 코어가 불안정한 상태 시라는 걸 항상 명심해두십시오.”

    “알았, 다. 걱, 정해줘서 고맙다. 가토.”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당연히 걱정해야죠. 리치가 되신 것도 전부 본 드래곤을 만들어서 저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셨잖습니까.”

    “그, 래. 목적을 이루기, 위, 함, 이었, 지. 그래, 서 이, 런 꼴까지 감, 수했다.”

    자조적인 말투에 가토라 불린 사내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체스논을 바라보았고.

    ‘아.’

    라트는 그제야 어떻게 흑마법사들이 본 드래곤을 만들 수 있는지 깨달았다.

    강력한 흑마법사가 리치로 부활하면 굉장히 불안정하지만, 한 써클 더 경지가 상승한다.

    리치로 부활하는 것은 굉장히 복잡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지만, 써클이 하나 더 올라간다는 점에서 굉장히 매력적인 일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흑마법사들이 리치가 되지 않고 인간인 채로 있느냐. 간단한 대답이다.

    피가 없는 존재, 오미너스에게 바칠 재물이 없는 언데드가 되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굉장히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불명예까지 감수하면서, 그리고 무리한 시술로 코어가 불안정한 상태가 되면서까지 본 드래곤을 만들고 있다니.

    ‘이쯤 되면 저 광기를 존경하고 싶어진다.’

    슬쩍, 아마도 자메오로스로 추정되는 드래곤을 살펴보았다.

    아직 본 드래곤이 되려면 멀어 보일 정도로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었지만, 쇠기둥을 통해 그 생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지금이 기회인가.’

    체스논을 필두로 흑마법사 대다수가 쇠기둥에 마력을 쏟아부은 덕분에 뻗어있는 상태다. 지금 공격을 가하면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저들을 처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력초를 섭취해서 마력을 회복하기 전에 나서는 게 베스트다. 거기까지 판단한 라트는 숨어있던 곳에서 빠져나와 인벤토리에서 파이프와 대검을 꺼내고 앞으로 나왔다.

    “이, 런. 손님, 이 오, 셨군.”

    리치가 된 덕분에 마력에 한층 더 민감해진 덕분일까. 체스논이 가장 먼저 라트의 기척을 알아차렸다.

    “누구냐!”

    “어디서 나타난 거지?”

    “알 게 뭐야. 죽여!”

    그리고 다른 흑마법사들 역시 라트의 모습을 발견하고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라, 트. 엔스, 리드.”

    그러고 보니 체스논은 라트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도논에게 라트를 주의하라고 일렀다고 했다. 도대체 어째서 그가 라트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일까.

    전쟁 영웅이라서? 아니, 그건 아니다. 그렇다면 라트보다는 글란츠 백작을 더 주의하라고 하는 게 옳다.

    “날 어떻게 알고 있지?”

    체스논이 당장은 싸울 기세를 보이지 않자, 흑마법사들의 분위기가 움츠러들었다. 그렇기에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자신을 알고 있느냐고.

    “그, 거야. 네가 훔치, 지 않았더, 냐.”

    “뭘?”

    뭘 훔쳤다는 거지?

    “이름, 없는, 신의 석판을.”

    일순 모든 것이 멈췄다. 지금 뭐라고 했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서, 체스논이 한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는 이름 없는 신의 석판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름 없는 신의 석판에 대해서 알고 있나?”

    라트야 게임 시스템을 통해서 아이템의 이름을 알았으니 알고 있다고 쳐도, 그는 도대체 어떻게 이름 없는 신의 석판이라는 걸 알고 있는 건가.

    “알고 있다, 해도 알려 줄, 이유는, 없다.”

    ‘빌어먹을 새끼가.’

    라트가 입술을 아랫입술을 씹자, 체스논은 유쾌하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러나 변덕, 이 생겼다. 네놈이, 석판을 가, 지고 있다면, 알려주마.”

    석판을 가지고 있다면? 안타깝게도 흑마법사에게서 빼앗은 석판은 에스페가 가지고 있었다.

    ‘어쩔 수 없나.’

    이름 없는 신의 석판은 진엔딩을 볼 수 있는 두 번째 조건이었다. 정보를 알 수 있는 상황에서 거리낄 것은 없었다.

    라트는 망설이지 않고 인벤토리를 열어, 트렌세르노의 집에서 찾은 이름 없는 신의 석판 조각을 보여줬다.

    “네놈이 가지고 있던 석판 조각은 나한테 없다. 그렇지만 다른 조각은 있어.”

    “다른, 조, 각도 찾은, 거냐. 뭐, 좋다. 그 정도면 충분, 해.”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 걸까.

    “이게 도대체 뭔데!”

    체스논이 침묵을 지키자, 라트는 인내하지 못하고 윽박질렀고.

    “그건, 나, 도 몰라. 크! 하! 하! 하! 하!”

    광활한 웃음소리만이 가득 메워 메아리쳤다.

    “이 새끼가.”

    “그, 러나 그 석판을 가, 진 자가 얻는 힘은 알, 고 있지.”

    당장에라도 대검을 꼬나쥐고 체스논에게 달려들 준비를 하던 라트는 이어지는 체스논의 말에 행동을 멈췄다.

    “신성이 무, 엇인지 아는가, 라트 엔스리, 드?”

    신성? 고결함과 거룩함의 상징이 아닌가. 그래서 그가 고결한 행동을 했을 때마다 신성 스탯이 올랐다. 적어도 라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보통 사, 람은 석판이 주, 는 힘이 신성(神聖). 다시 말해 고, 결한 힘이라, 고 생각하, 지.”

    “맞는 말 아니야?”

    “아, 니다.”

    체스논은 고개를 저으면서 뼈만 앙상하게 남은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석, 판이 주는 힘은 신, 성(神聖)이 아니, 라 신성(神成). 고결함을 의, 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 한없이 가까, 운 힘을 의미, 한다.”

    “하아?”

    이해가 제대로 되지 않아, 의문을 내뱉고 만다. 대충 그 의미를 이해했지만,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의문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월드 세리아의 신들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몇몇 다른 게임에서처럼 섬기는 이가 없으면 힘이 약해진다는 설정이 아니다.

    “신은 거룩하지도, 고결하지도, 완벽하지도 않다.”

    그러나 체스논은 라트의 의문을 무시하고 제 말을 계속해서 이어간다.

    “신이 그러, 한 존재였다면 나나, 신전의 개들같이 한 가지 목, 적에 맹목적인 미친 이들을 만, 들지 않겠, 지.”

    그것 역시 알고 있다.

    “신이 그러, 한 존재였다면 악신도, 선신도, 중립적인 신, 도 없었, 겠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신이 완벽했더라면 이 세상에 모순이 일어나지 않았어야 했다. 신은 태어났을 때부터 초월적인 힘을 지닌 생명체일 뿐이다. 그것이 월드 세리아의 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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