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224화 (224/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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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이게 전부냐.”

    먹구름 사이에서 물방울이 하나둘 떨어지더니 이내 비가 사납게 퍼붓는다. 여지까지 라트의 배에 박혀있어 피가 흘러내리고 있는 창대에 물이 뒤섞인다.

    치명상을 입었다. 출혈도 극심하다. 저대로 내버려두면 알아서 죽겠지.

    그런데 어째서 저리도 당당할 수 있나. 어떻게 저리도 무심하게 똑같은 질문을 할 수 있나.

    “다시 묻지. 전부 보여줬나?”

    라트가 서서히 걸음을 옮긴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붉은색 길이 노닐다. 차가운 눈동자로 다시금 묻는다.

    이것이 전부냐고. 보여줄 수 있는 건 전부 보여줬느냐고.

    “키메라 군단! 진격해라!”

    ‘아직 끝났을 리가 없어.’

    서서히 걸어오는 저것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지금 이 감정은 도대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무용.”

    각자 괴물의 장점만을 합성해서 만든, 최강의 괴물이라고 불러 마땅한 야심작인 키메라조차 라트가 또다시 만들어낸, 분명 외견은 별것 아닌 검들이 단 몇 번의 칼질을 하자 스러진다.

    “이게 전부냐.”

    키메라의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으나 움직일 수 없기에 그저 남자의 대검 앞에 허무하게 목이 베여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완전한 종말을 맞이한다.

    “그렇다면!”

    자랑하던 키메라가 점점 죽어 나간다. 준비해왔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마음속에 응어리진 감정이 한곳에 모여 하나의 씨앗이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도론이 손을 움직이자, 브로뉴의 성벽에서 형용할 수 없는 생명체가 내려왔다.

    “죽여줘. 죽여줘, 제발!”

    “죽고 싶어, 그런데 혀를 아무리 씹어도 죽지 않아.”

    “인육, 맛있어. 왜 그걸 몰랐을까?”

    “크하하하하하!”

    팔은 트롤, 머리는 오우거, 다리는 미노타우르스. 언뜻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키메라였다. 그러나 저것은 키메라가 아니다. 수없이 많은 인간의 머리가 매달려 제각기 울고, 웃고, 분노하며, 좌절하는 저것을 무엇이라 표현해야 할까.

    ‘역겨워.’

    역겨운 괴생명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인간과 키메라를 합성한, 내 걸작이다! 네가 과연 이것도……!”

    “닥쳐.”

    인벤토리에서 코어형 골렘을 던진 후, 골렘이 완전히 생성되기 전에 공평함의 검으로 역겨운 괴물을 난도질한다.

    “치워버려. 내 눈에 보이지 않게.”

    그리고 골렘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 역겨운 괴물이 눈에 들어오지 않게 하라고.

    “제기랄! 데스 윕!”

    자신의 역작이 한순간에 쓰러졌음에도 도론을 이성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흑마법을 이용해 라트를 공격한다.

    아니 침착하지 않았다. 미스릴을 두르고 있는 상대에게 공격형 흑마법이 과연 얼마나 통할까.

    더욱이 이 자리에 있는 흑마법사들은 전부 보조 계열의 흑마법을 주로 익힌 자들이었다. 공격형 흑마법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 위력은 약하다.

    “크흡.”

    그러나 역시 공격 마법은 공격 마법인지, 검은색 무형의 기운을 내뿜는 채찍이 배를 후려치자, 라트는 침음을 삼켰다.

    ‘그러나 그뿐이야.’

    데스 윕은 맞은 부분이 썩어가야 하지만, 미스릴 갑옷은 그 신성함 덕분에 멀쩡했다.

    “뭐해, 다들 공격하지 않고! 불이든 뭐든 퍼부으라고!”

    비가 내리고 있는데 불을 퍼부으라고 한 것 자체가 이미 도론이 침착하지 않다는 증거였다.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씨앗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채 미친 듯이 공격하고 있을 뿐이다.

    “어머니 라쉐의 이름으로 명하니.”

    라트는 그 공격을 모두 받아내면서 조용히 읊조렸다.

    “분노하라 대지여!”

    [대지의 분노가 발동됩니다]

    발을 힘껏 구르자 대지가 젖은 흙이 자애롭게 일어나, 잔잔한 파도가 되어 지상의 모든 것을 뒤덮었다.

    “푸흡, 푸하아아!”

    부드럽게 젖은 흙에 파묻혀 간신히 지상으로 고개를 꺼내고 숨을 들이쉬는 도론에게 그림자가 드리운다.

    “이걸로 전부 보여줬나?”

    그림자는 배에 창이 꿰뚫린 채,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 무뚝뚝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본다.

    “전부 보여줬냐고 물었다. 대답해라.”

    살아있음에도 망자보다 더 지독한 꼴을 하고 똑같은 질문을 한다.

    “끅끅끅.”

    도론에게서 사라졌을 웃음이 다시금 튀어나온다. 그러나 이전처럼 상대를 깔보는 웃음이 아니었다. 허탈함이 담겨있는 자조적인 웃음이다.

    “그래, 전부 보여줬다. 그럼 어쩔 거냐, 이 괴물아. 끅끅.”

    “그럼 됐다.”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들려오자, 라트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복부를 꿰뚫고 있던 창을 뽑았다.

    “크읍! 쿨럭, 쿨럭.”

    창을 뽑자 그동안 막혀있던 피가 한꺼번에 쏟아져 빗물을 타고 흐르자, 도론은 한껏 미소를 지었다.

    “피! 네놈의 피는 분명 오미너스께서 좋아하실 거다.”

    라트는 그 말을 무시하고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서 배에 부었다. 한 병, 두 병, 세 병. 포션을 계속 부을수록 유일하게 흑마법사들이 준 상처가 서서히 사라져 마지막에는 흉터조차 남지 않게됐다.

    “만연하라.”

    그리고 무색의 연금술로 빗물을 조종해서 빈 포션병에 피를 담고는 싸늘하게 말한다.

    “네놈들이 좋아할 짓을 할까 보냐.”

    “끅끅.”

    거기서 이해해버렸다. 자신의 패배를, 죽음을. 그리고 마음에 생긴 씨앗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깨달았다.

    마음속의 감정이 응어리져 만들어진 씨앗이 절망이라는 이름의 싹을 틔웠다.

    “체스논은 어딨지?”

    도론이 죽음 직전의 상황에 놓여있음에도 아직 체스논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생각이다.

    여기에 있던 흑마법사는 150명 전후. 그럼 약 80에 달하는 흑마법사와 체스논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걸 내가 말해줄 이유가 있나?”

    “말한다면, 지금 죽여주지.”

    그 말에 도론이 곤란하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평범한 이라면 살려준다고 말해야 협상을 해볼 수 있겠으나, 눈앞의 남자는 광기에 몸을 맡긴 자다.

    “말하지 않는다면?”

    “평생 자살할 수 없는 곳에 가둬서 일생을 마감하게 해주마.”

    땅에 피를 뿌리는 목적에 광기가 더해져 무시무시한 집념으로 승화한 자다. 그런 이에게는 살려주겠다고 말하는 것보다 죽여준다고, 너의 피를 땅에 뿌려주겠다고 말하는 것이 옳았다.

    “이건 조금 고민되는구먼.”

    생각대로 도론은 고민하기 시작했고, 라트는 얌전히 그를 기다려주었다.

    이곳에 있던 흑마법사들은 모조리 땅에 파묻혔다. 지금쯤이면 산소 부족으로 죽었을 거다. 그런데 이 남자까지 입을 다물면 체스논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어.

    흑마법사를 전부 처리하지 않는 한 왕국 전쟁 시나리오는 끝난 게 아니었다.

    “그래, 말해주지. 그렇지만 상세하게는 말 못 해줘. 그래도 날 지금 당장 죽여줄 건가?”

    “그래.”

    라트가 별다른 고민 없이 확답하자, 도론은 입꼬리를 뒤틀면서 말했다.

    “주인 없는 산맥이다. 끅끅. 이제 곧 완성되겠지.”

    주인 없는 산맥은 무려 노르스 대륙 전체 면적의 1/3을 차지할 정도로 넓다. 그런 곳에서 흑마법사의 진지를 찾으라니, 모래밭에서 바늘 찾는 수준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도론은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고 함부로 상대방의 제의에 확답한 그 멍청함을 비웃었다.

    “그런가.”

    그러나 다음 순간 분명 분개하리라 생각한 라트가 여전히 무표정으로 긍정했기에 도론의 입가에 머물던 비웃음이 사라졌다.

    “알았다.”

    “알았다고? 뭘 알았다는 거냐?”

    “그건 네가 알 바 없어.”

    대검의 옆면으로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되묻는 도론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힘을 크게 싫지 않고, 기절할 정도로 약하게.

    “멍청한 놈. 내가 약속을 지켜줄 거로 생각했어?”

    그리고 의식을 잃어가는 도론을 비웃어주었다.

    수많은 인간을 죽이고 해골 군단을 만든 이를, 저런 끔찍한 괴물을 만든 자를, 곱게 죽여줄 이유가 없으며, 하물며.

    흑마법사를 상대로 약속을 지킬 이유는 없다.

    ***

    도론이 기절하자 통제자를 잃은 언데드는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조각조각이나 사라졌다. 그렇게 전투가 끝나고 브로뉴 안으로 들어가자 성벽과 건물을 파괴되지 않았지만, 그 안은 휑한 바람만이 나부끼고 있었다.

    “역시 아까 그 언데드들은…….”

    글란츠 백작은 말을 잇지 못했고, 라트는 착잡한 마음이 들어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예.”

    슬며시 옆으로 다가온 미르차르드 후작은 너무나 무모했던 라트의 행동이 걱정스러웠는지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라트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이 자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미르차르드는 라트의 옆에 꽁꽁 묶여서 마력을 억제하는 수갑까지 달아놓은 도론을 바라보았다.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본다면 동정이 일어날 수 있으나 그가 흑마법사임을 알고 있으니 불쌍하다는 생각이 일말도 들지 않았다.

    “글쎄요.”

    “엔스리드 백작님.”

    도론의 처분을 논의하려고 할 때, 로오데 추기경이 등장하여 한껏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조아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로오데 추기경님.”

    “그, 그게…….”

    잠시 입을 다물고 우물쭈물 말을 잇지 못하던 로오데 추기경은 결심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 자의 처분은 저희에게 맡겨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야 감사하죠.”

    그렇지 않아도 도론을 어떻게 처분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잘됐다. 신전이라면 분명 흑마법사를 절대 녹록하게 죽이지 않을 거다.

    어차피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전부 얻었다.

    “감사합니다.”

    로오데 추기경은 감사하다고 인사를 한 후, 성기사들을 시켜 도론을 끌고 갔자 라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미르차르드 후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상하십니까?”

    “그것이. 심문하면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미르차르드는 라트가 검지를 들어 입술에 가져다 대자, 신전에게 흑마법사를 맡겼는지 모르겠다는 뒷말을 삼켰다. 아직 사제와 성기사는 완전히 물러나지 않았다.

    괜히 신전을 믿지 못하겠다는 발언을 해서 분쟁이 일어나봐야 좋을 게 없다.

    “심문해봤자 정보는 얻을 수 없을 겁니다.”

    “예?”

    흑마법사는 광기에 물든 자다. 목숨을 위협한다고 해도 신체 일부분을 절단한다고 해도, 그 광기를 절대로 접지 않는다.

    ‘주인 없는 산맥.’

    도론이 줬던 유일한 정보. 사실상 도움이 되지 않는 정보다. 그래서 도론도 라트를 놀리기 위해서 이 정보를 준 거겠지.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정도 정보면 충분했다.

    ‘분명 핀스크 왕국 쪽에 있는 주인 없는 산맥에서 거주하던 묘인족들이 주거지를 버렸다고 했었지.’

    떨어진 별이 물어온 정보이니 확실한 정보임이 틀림없다. 분명 흑마법사들이 그 근처에 자리 잡고 있으니까, 묘인족이 거주지를 옮기는 상황에 부닥친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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