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220화 (22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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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라트의 예상대로 바이스문의 영주는 흑마법사에 의해 세뇌당하지 않았기에 쉽사리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현명한 건가, 그게 아니면 겁이 많은 걸까.

    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바이스문을 점령했으니 후속 부대가 길이 막혀서 오지 못하는 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 연합 군단은 거침없이 그 행보를 이어갔다.

    다음, 그리고 또 다음.

    두 개의 성을 간단하게 점령하자 군단의 사기는 최고조로 돌입했고, 다음 목표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웨이스텔.’

    전방에 있는 성들의 보급을 위해 만들어진 도시이자, 이 근방에서 유일하게 대신전이 있는 도시였다.

    여기만 점령하면 아직 점령하지 못하고 뒤에 남겨둔 전방의 성들은 알아서 항복할 거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웨이스텔에서 큰 전투가 벌어지면 흑마법사가 귀족과 사제들을 세뇌했다는 증거를 잡지 못할 수도 있다.

    ‘어쩔 수 없지.

    슬슬 신전이 끼어들지 않으면 곤욕스러운 일이 생길 수도 있다.

    긴 시간 동안 고민을 하던 라트는 모든 걸 설명해야 할 시간이 왔다고 느끼고 야심한 밤에 루아타 공작과 브로켄 후작 그리고 미르차르드 후작 그리고 글란츠 백작을 불렀다.

    “무슨 일로 우릴 불렀나. 내일이면 공성전이 시작될 텐데”

    “그것이.”

    글란츠 백작은 라트가 이들을 부른 이유를 깨달았는지, 라트의 눈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라트는 지금까지 숨겨왔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핀스크의 왕실이 흑마법사에 세뇌를 당했고 지금쯤이면 고위 귀족과 사제들은 역시 전부 흑마법사의 마수에 당했을 거라는 그야말로 황당무계한 소리.

    “증거는?”

    헛소리하지 말라고 소리를 칠 수도 있다는 예상과는 달리 정작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세 명 모두가 라트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사실 그렇다 할 증거는 없다. 단지 알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린느탐보프에 흑마법사의 진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라트에게 설득당한 글란츠 백작이 합세하여 다른 세 명에게 설명하기 시작하니 상황이 바뀌었다.

    혼자서 그런 주장을 한다면 믿을 수 없겠으나 두 명이 같은 주장을 하면 설득력이 생긴다.

    “큰 전투가 일어나면 증거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건가.”

    증거는 없지만, 라트와 글란츠 백작이 허튼 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 루아타 공작은 침음을 삼키며 물었다.

    “예.”

    “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가.”

    “개인적으로 흑마법을 조사해본 결과.”

    조사는 무슨. 흑마법사로 플레이한 적도 있어서 그들이 사용하는 마법은 줄줄 꿰고 있다.

    라트는 속으로 웃으면서, 겉으로는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을 계속했다.

    “흑마법으로 사람을 조종하기 위해서는 ‘오미너스의 씨앗’을 신체에 심어야 합니다.”

    “그래서?”

    “허락하신다면 저 혼자 성으로 들어가서 오미너스의 씨앗이 심어진 사람을 찾아서 이리로 데려올까 합니다.”

    성에 있는 귀족은 수많은 호위병이 지키고 있어서 무리겠지만, 신전에 있을 대사제는 납치에 성공할 가능성이 컸다.

    “만약 백작의 말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브로켄 후작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으나, 그가 삼킨 뒷말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신전 쪽에서 전쟁을 멈추게 할 일은 없을 겁니다.”

    신전에 의해 강제로 전쟁이 끝나는 걸 두려워하고 있는 거겠지. 라트 역시 그런 생각 때문에 일부러 흑마법사의 존재를 알리지 않으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제 상황은 격변했다.

    “핀스크 왕국이 흑마법사의 손아귀에 쥐어졌다면 신전은 흑마법사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이뤄진 군대도 상대해야 합니다만.”

    신전의 성기사와 사제는 강하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사악한 것을 상대할 때 빛을 발하지, 인간을 상대할 때는 통용되지 않는다.

    신전에서 일반 병사들에게 당신들의 지도자가 흑마법에 의해 세뇌당했다고 주장한다고 해도 문제다.

    이미 고위 귀족이 세뇌당했으니 병사들은 동요가 된다고 해도 무기를 놓지는 않을 거다.

    “그러고 싶지는 않겠죠.”

    그렇게 된다면 신전의 입장도 곤욕스러워지겠지. 인간 군대를 상대하는 건 무척이나 까다로울 테니까. 그러니 자연스럽게 핀스크와 전쟁 중인 셀룬과 사라이에게 손을 내밀 거다.

    “그럼 다녀와라.”

    루아타 공작은 시원하게 라트가 웨이스텔에 잠입하는 것을 허락했다.

    “정말로 흑마법사에 의해 핀스크 왕국이 좌지우지되고 있을지도 모르니 신전 쪽에는 내가 연락할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겠다.”

    “예.”

    “우리가 같이 가는 게 낫지 않나?”

    라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브로켄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엔스리드 백작님 혼자서 가시는 게 편하실 거다.”

    “흐음, 그래?”

    그러나 라트의 힘을 대부분 바라보았던 미르차르드 후작이 만류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자리에 앉았다.

    ***

    달빛조차 흐릿하게 내리쬐는 어두운 밤, 경화수월을 이용해서 성벽 위에 있는 경비병들의 눈을 피해 접근하고, 염동력을 이용해서 성 안으로 잠입한 라트는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경화수월의 지속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성에 숨어들자마자 경화수월의 지속 시간이 끝난 것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어쩌겠는가. 경화수월을 사용하지 않고 성벽 쪽으로 접근했다면 분명 경비병에게 들켰을 거다.

    ‘대신전은 아마 저쪽.’

    수없이 많이 한 게임이니 웨이스텔의 지리 역시 대충은 알고 있었던 라트는 곧바로 대신전의 대략적인 위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

    어둠에 몸을 녹이고 걸음을 옮긴다.

    한 번씩 횃불을 들고 다니는 경비병들이 보이기는 했으나 위험천만한 상황 없이. 대신전의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제는 지금부터인데.’

    오미너스의 씨앗은 대사제급이 정도여야 그 기운을 감지할 수 있다. 그래서 흑마법사들은 대사제급만 세뇌해 놓으면 자신들이 노출될 일은 없으리라 판단했을 거다.

    ‘대사제가 있는 곳부터 찾아야겠는데.’

    다시 말해 대사제급이 아니라면 오미너스의 씨앗에 당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순찰을 도는 성기사는 보이지 않고.’

    일단 돌아다니면서 대사제가 머무를 곳을 유추해보자고 판단한 라트가 숨을 들이 내쉬고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

    인기척이 느껴지자 재빨리 수풀 속으로 몸을 숨겼다.

    ‘누구지?’

    그리고 어둠을 이용해 고개를 살짝 내밀어 앞을 확인한다.

    화려한 의복에 은으로 만들어진 지팡이. 그 끝에 매달려있는 푸른색 수정까지.

    ‘대사제!’

    머리가 벗겨지고 등이 구부정한 노인은 분명 라트가 찾아 나설 생각이었던 대사제였다.

    그가 떡하니 이곳에 등장하자 라트는 감탄의 소리가 나올 뻔해, 급히 입을 막았다.

    ‘그런데 이런 시간에 왜?’

    순찰을 도는 성기사조차 없을 정도로 야심한 시간인데 대사제가 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 그런 의문을 가지고 있을 때 대사제는 품속에서 수정구를 꺼냈다.

    “도론님.”

    ‘아.’

    그의 입에서 알고 있는 이름이 튀어나오자, 라트는 대사제가 어째서 야심한 시각, 인기척이 없는 곳까지 왔는지를 깨달았다.

    도론, 오미너스의 피에 속한 흑마법사 중에서도 상당히 높은 지위를 가진 이로, 특기 분야는 강령술. 게임에서는 중간 보스에 해당하는 남자였다.

    “셀룬과 사라이의 군단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흑마법에 특화된 장비도, 사제와 성기사도 없습니다.”

    수정구 쪽에서 나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대사제의 말로 미루어보아 이쪽의 전력을 파악하고 있는 건가.

    ‘잘됐네.’

    적은 이쪽에 대 흑마법 전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한 방 먹여주기 편해져.

    “예. 알겠습니다.”

    수풀에 숨어 얌전히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라트는 대사제가 수정구를 다시 품속에 집어넣자 수풀에서 나왔다.

    “누구냐!”

    수풀이 뒤적이는 소리에 대사제는 곧바로 고개를 돌렸으나, 그곳에는 누구도 없었다.

    “뭐, 뭐지? 분명 소리가 들렸는데.”

    잠깐 수풀을 바라보던 대사제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바람이었나.”

    그런 것치고는 그렇게 거센 바람도 불지 않는 잔잔한 바람이었으나 시야에 누구도 보이지 않았기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바람은 무슨.”

    수풀 쪽에서 시야를 거두려는 순간, 자신의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대사제는 재빨리 뒤로 물러서려고 했고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대사제가 라트를 발견하지 못한 이유는 그가 수풀에서 나온 즉시 순간이동으로 대사제에 뒤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이걸로 목표는 사로잡았고.”

    목표를 사로잡았으니 진지로 돌아가야겠지만, 염동력의 파생 능력 중 하나인 순간이동은 오로지 라트 혼자서만 이동할 수 있다. 이건 레벨이 올라도 똑같다.

    순간이동을 사용하지 못하면 성벽을 넘어야 하는데.

    ‘그건 무리지.’

    적이 코앞까지 와있는데 어떤 이가 신중히 경비를 서지 않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성벽을 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럼 뭐. 방법은 하나네.”

    슬며시 미소를 지은 라트는 땅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한 번 사용해본 적이 있는 방법이니, 또 사용한다고 해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

    웨이스텔은 어디까지나 전방에 보급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시다.

    그래서인지 해자가 없었고, 덕분에 이루크 성 때와 마찬가지로 무색의 연금술과 생명의 연금술을 이용해 땅굴을 파고 진지까지 돌아온 라트는 곧바로 자신의 막사로 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성공했나.”

    막사에 아직 남아있던 4명의 귀족은 라트의 등에 매여있는 대사제를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 그럼.”

    탁자에 대사제를 엎드린 상태로 눕힌 라트는 노인의 옷을 도려냈다. 언뜻 보기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는 주름진 등이었으나.

    “여기 있네요.”

    노인의 심장이 있을 부분에 조그마한 씨앗이 뿌리를 틀고 있었다.

    “이게 오미너스의 씨앗이라고 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백작의 말이 사실이었군. 바로 신전에 알려야겠다.”

    “그 전에 미르차르드 후작님, 제가 이 부분을 칼로 도려내면 바로 포션을 뿌려주세요.”

    인벤토리에서 체력 포션을 꺼내 미르차르드에게 들려준다. 본래 오미너스의 씨앗은 사제의 신법으로 처리할 수 있지만, 이곳에는 사제가 없으니 고전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했다.

    “알겠습니다.”

    인벤토리에서 단검을 꺼내 오미너스의 씨앗에 좀먹힌 부분을 칼로 째서 뜯어낸다.

    그 작업이 끝나자, 미르차르드 후작이 포션을 뿌렸고, 곧바로 노인의 몸에 새살이 돋아났다.

    “으, 여긴.”

    포션의 차가운 감촉 덕분일까. 노인은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신이 좀 드십니까?”

    “여긴 어딘가요. 저는 분명…….”

    거기까지 말한 노인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자신이 지금까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누구에게 세뇌를 당했는지 어렴풋이 기억이 난 까닭이다.

    “오오, 홀리시여. 제가, 제가 잠시!”

    “속죄는 나중에 하시고. 어쩌다가 그런 꼴을 당하셨는지 알고 계십니까?”

    “알다마다요. 제가 저 더러운 씨앗에 당한 건 연례행사 때문에 브로뉴로 갔을 때입니다.”

    브로뉴는 핀스크의 수도였고, 수도에는 당연히 한 왕국에서 가장 큰 대신전이 있었다.

    그리고 왕국에 있는 대사제들은 1년마다 한 번씩 그곳에 모이는 게 연례행사였다.

    “오, 맙소사. 이제야 좀 기억이 선명히 나는군요. 추기경께서 더러운 놈들에게 당했습니다! 분명 핀스크의 국왕도 당했을 겁니다!”

    “그 말, 다른 왕국의 신전에게 일러주실 수 있겠습니까?”

    루아타 공작이 수정구를 내밀자, 대사제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정구를 받아드렸다.

    ‘신전은 참가 확정.’

    대사제가 말을 전하면 각국의 신전에서 성전이라는 이름 아래 성기사와 사제를 파견하겠지.

    “셀룬에 계시는 로오데 추기경과 연결된 수정구입니다.”

    수정구를 받아든 대사제는 즉시 추기경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로오데 추기경님! 바렐 대사제입니다.”

    「바렐 대사제님이 왜 루아타 공작의 수정구로 연락을 하신 거죠? 혹시 셀룬군이 불경한 짓을 저질렀습니까?」

    “그게 아닙니다. 핀스크에, 핀스크에 흑마법사들의 마수가 뻗쳤습니다.”

    「자세히 설명해보세요.」

    차갑게 굳어진 추기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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