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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케이네가 밖으로 나온 건 대략 2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었고 아직도 몸은 잘게 잘게 떨리고 있지만, 아침부터 보여주던 차가운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야기 잘했어?”
굳이 물어볼 것도 없었지만, 혹시나 싶어 물어보았다.
“응.”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달빛 아래, 후련한 미소가 지어진다.
“그럼 방으로 돌아가자. 쉬어야 할 거 아니야.”
“응!”
라트가 남아있어 줘서 기뻤는지 케이네가 활기차게 대답했다.
두 남녀는 복도를 걸으면서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라트는 케이네가 글란츠 백작과 무슨 대화를 했을지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케이네가 나중에 말해주리라 생각하고 침묵을 지켰다.
“라트.”
배정된 방앞에 도착하자, 속삭이듯 조용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고마워.”
“별말씀을.”
그 말을 끝으로 케이네는 방으로 들어갔고, 라트 역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몸을 뉘었다.
‘이걸로 누나의 문제는 일단 종료.’
혹여나 루드렐과 우연히 마주칠 수도 있겠으나, 바이올런에게 맹세를 했다고 했으니 루드렐이 케이네를 건드리는 일은 없을 거다.
‘처리해두고 싶기는 한데.’
루드렐은 플레이어가 사라이 왕국을 키우고 싶다면 슈텐바흐트 공작과 함께 제거해야 하는 1순위 NPC다.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실력은 쥐뿔도 없으면서 근거 없는 자신에 가득 차 까부는 철부지다.
그를 내버려뒀다가는 후에 글란츠 백작이 물러났을 때 나라를 말아먹을 수준의 문제를 일으킨다.
‘당장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까.’
지금 당장은 흑마법사 무리를, 오미너스의 피를 처리하고 왕국 전쟁 시나리오를 마무리하는 게 급하다.
왕국 전쟁 시나리오가 마무리되는 조건은 두 가지다. 하나는 흑마법사를 전부 처리하는 거고, 하나는 더는 노르스 대륙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동맹이 성사되면 후자는 클리어.’
이제 남은 건 흑마법사를 처리하는 것뿐이다.
***
다음날 어전에서 살라딘 국왕은 간단하게 셀룬과의 동맹을 수락했고 귀족들의 반발 역시 없었다.
전날 회의가 잘 풀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라트가 최단시간에 사막의 환영식을 통과해서 귀족들이 그에게 호감을 느낀 덕분이기도 했다.
이야기가 잘 끝났으나, 핀스크 왕국을 어떻게 공략할지는 나중에 가서 할 이야기였기 때문에 라트는 그 길로 케이네와 함께 파르스로 돌아갔다.
“잘 해줬네. 엔스리드 백작.”
“황송합니다.”
라트가 사라이와의 동맹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돌아오자, 오케만 국왕은 크게 칭찬을 하였고 그 즉시 핀스크와의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누나. 부탁이 있는데.”
당연하지만, 셀룬은 현재 정예병을 상당히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우선 케이네를 비롯한 연금술사들이 장비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기본 순서였다.
“뭐니?”
“지금 만들 장비에 은을 좀 섞어줘.”
“은을?”
라트의 말에 케이네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은을 섞으면 장비의 질이 떨어지게 되는 기본적인 지식을 라트가 알지 못할 리가 없다.
“소량만 섞어주면 돼. 강도가 조금 떨어지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다른 왕국의 장비보다는 질이 좋게 만들 수 있잖아.”
“할 수는 있지만, 왜?”
“사라이 왕국에서 내가 핀스크에 흑마법사가 있다고 한 말 기억하고 있지?”
“응.”
“그거 때문이야. 그렇게만 알아두면 돼.”
은은 옛적부터 사악한 힘을 몰아내는 힘을 가졌다고 널리 알려졌으며 그 말은 사실이었다.
평범한 몬스터는 순리를 지키며 태어난 존재였기 때문에 은에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지만, 흑마법으로 만들어진 키메라는 이야기가 다르다.
‘은이 조금만 섞여도 키메라는 막대한 데미지를 받지.’
흑마법으로 몬스터를 합성해서 만든 존재가 바로 키메라다. 즉 그 근본은 흑마법에 있다.
그런 존재가 은으로 만든 무기에 타격을 입으면 조금씩 체내에 깃들어있는 흑마법이 조금씩 정화되고 만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그 정도로 충분해.’
은으로 만든 무기가 있다면 일반 병사들이 키메라에게 어느 정도 피해를 줄 수 있다.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은으로 만든 무기가 없는 이상 피해조차 줄 수 없다는 뜻이다.
“은이 흑마법을 상대하는데 효과적이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거 그냥 떠도는 이야기 아니었어?”
“진짜야.”
“그럼 알았어. 그렇게 해줄게. 돈도 누나가 부담해줄게.”
정확히는 케이네의 돈이 아니라 제스맹 기느투스가 일생동안 쌓아온 막대한 부로 부담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 돈이 케이네의 돈이니 결국 맞는 말이었다.
“이걸로 빚을 조금 갚은 거야.”
“빚?”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케이네의 입에서 뚱딴지 같은 말이 나오자 라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리이에서 있었던 일 말이야.”
“아, 그거.”
글란츠 백작과 화해하게 된 것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음은 당연했지만, 설마 그걸 빚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리라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 그 일은 라트가 좋아서 나선 거였다. 그러니까 빚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빚은 무슨 빚이야.”
라트와 케이네의 사이에 무슨 빚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 그건 그러네.”
케이네가 조금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케이네의 일을 돕고, 가끔은 엘리를 만나고, 미르차르드 후작과 함께 리오스의 검술을 지도해주기도 하면서 시간이 흘러갔다.
‘벌써 3주째.’
핀스크 왕국은 거짓말처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셀룬의 영토에 사라이의 군단이 들어왔으니, 동맹이 성사됐음을 알았을 텐데도 조용했다.
그리고 정말 신기한 것은 아직도 에스페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거다.
‘분명 트렌세르노와 전쟁을 하기 직전에 사라졌던 거 같은데.’
무슨 일이 있어서 리오스를 남겨두고 갑자기 사라졌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다.
‘빨리 석판 조각을 보여줘야 하는데.’
진엔딩으로 갈 조건 중 하나인 이름없는 신의 석판이 도대체 어떤 물건인지 밝혀내고 싶었지만, 숲의 현자가 사라졌기에 이를 라트의 주변에는 이를 조사해줄 사람이 없었다.
“고용주님.”
“이젠 고용주라고 부를 필요 없잖아? 계약은 트렌세르노와 싸우는 것으로 끝난 거 아니었어?”
“입에 익어서 그렇습니다.”
몰래 포탈을 타고 이곳으로 온 떨어진 별은 당연히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카르세이나 대륙으로 돌아가지 못해 연금술사 길드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바빠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
그렇지만 셀룬에 암살자 길드를 만들기 위한 초석을 닦으며 인재를 모으는 중이라 굉장히 바쁜 몸이었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만들어주신 고용주님을 위해 제 나름대로 성의를 표하려고요.”
좋은 기회라고 함은 셀룬에 암살자 길드를 설립할 수 있게 해준 것이 틀림없는데.
“성의?”
성의는 무슨 뜻인가?
“예. 이걸 보시죠.”
“이게 뭔데.”
떨어진 별이 서류를 내민 것은 서류 다발이었다.
“제 나름대로 핀스크를 염탐해봤습니다.”
“길드의 초석을 닦는 거치고는 너무 안 보인다 싶었는데, 이거 때문이었나?”
“예.”
슬그머니 고개를 내려 떨어진 별이 건넨 서류를 찬찬히 확인해봤다.
그러나 이걸 본다고 해도 그렇게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트렌세르노는 아예 정보가 없는 NPC였기 때문에 떨어진 별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핀스크의 전력은 이미 머릿속에 전부 들어있다.
‘그래도.’
이 자료를 얻으려고 그가 들인 수고를 무시할 수도 없었고, 몇 가지 랜덤으로 결정되는 전력들이 있었기에 소소한 도움은 될 것이다.
“고맙다. 나중에 회의에서 써먹어도 되겠지?”
“그렇게 써주신다면 저야 좋지요.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래. 아, 잠깐만!”
떨어진 별일 사라지려고 하기 직전, 라트는 문뜩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떨어진 별은 다크 엘프다.
그렇다면 엘프어로 영원한 희망을 뜻하는, 에스페라니티타라는 이름을 가진 숲의 현자에 대해서도 알고 있지 않을까?
“할 말이 남으셨습니까?”
“어. 혹시 말이야. 에스페라니티타라는 이름을 알고 있어?”
“지금, 지금 에스페라니티타라고 하셨습니까?”
그 순간 떨어진 별의 분위기가 변질했다. 암살자라는 본분도 잊어버리고 조용하나 날카롭고 끈적끈적한 분노를 보인다.
“알고 있는 거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슨 연유가 있든 다시는 더러운 이름을 다시는 내뱉지 말아 주십시오.”
더러운 이름?
“일족을 배신한, 역겨운 자의 이름이니까요.”
“배신했다고?”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실수를.”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떨어진 별이 고개를 휘휘 젓더니 차분하나, 아직도 분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한다.
“고용주님. 이건 저희 다크 엘프 일족의 수치스러운 과거사입니다. 어디 가서 발설하지도 마시고, 저한테 물어보시지도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설마 떨어진 별이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던 라트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다.
저 남자가 저런 반응을 보일 정도라면 평범한 다크 엘프라면 이성을 잃고 당장 라트에게 덤벼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누구에게 그 이름을 들으셨습니까?”
“숲의 현자한테.”
“아아, 그분이라면 알고 있을 법도 하군요.”
의도적으로 에스페를 숲의 현자라고 부르자, 떨어진 별이 곧바로 수긍했다. 저 반응으로 보아하니 떨어진 별은 숲의 현자의 이름이 에스페라니티타라는 걸 모르는 것 가탇.
‘하기야, 월드 세리아를 했을 때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니까.’
점점 에스페의 정체가 미궁으로 빠져든다. 떨어진 별이 하는 말을 보니 그녀의 정체는 다크 엘프인 것 같지만.
‘그건 아니야.’
정말 어처구니없지만, 월드 세리아 내의 엘프와 다크 엘프 여성은 전부 가슴이 크다는 설정이 있다.
‘남자라서 이런 설정은 안 까먹고 잘 기억하고 있다고.’
그러나 에스페의 가슴은 어떤가. 풍만하기는커녕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완벽한 절벽이었다.
마법을 사용해서 의도적으로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는 방법도 있기는 하지만, 에스페의 몸에서 마력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머릿속에서 의문이 쏟아진다. 게다가 에스페가 모습을 감춘 시기도 마음이 걸렸다.
떨어진 별이 이곳에 왔을 때 자취를 감춘 것을 이제는 이해가 갔다. 분명 떨어진 별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도망친 거다.
“그러고보니 그 숲의 현자님 말인데. 리오스 양의 요청 때문에 찾아봤습니다만.”
“어? 그랬어? 어떻게 됐는데.”
어쩌면 리오스는 본능적으로 에스페가 다크 엘프라는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크 엘프라지만, 자신의 엘프 부족이 전멸한 직후 처음으로 만난 엘프였기에 언니처럼 믿고 따랐던 거다. 그리고 언니가 사라지자 조금이지만, 쓸쓸함을 느끼고 있었다.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제가 시간이 없어서 자세히 조사하지 못한 이유도 있겠지만, 괜히 현자라는 호칭이 달린 게 아니더군요.”
“그래.”
떨어진 별, 다크 엘프, 사라진 에스페, 그리고 일족의 배신자. 퍼즐 조각이 조금씩 라트의 손에 들어왔으나 아직 정답을 찾기에는 그 수가 너무 적었다.
“알았어. 에스페라니티타 일은 다른 사람한테 절대로 발설하지 않을 테니까. 가봐.”
“믿겠습니다, 그럼.”
떨어진 별이 물러나자, 라트는 한숨을 내쉬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이 퍼즐이 상당히 흥미로움은 부정할 수 없다. 게임을 할 때 경험하지 못했던 경우였으니까.
‘궁금하기는 궁금하지만.’
만약 이게 게임이었다면 라트는 망설이지 않고 에스페와 다크 엘프의 관계에 대해서 조사했을 거다. 이미 알고 있는 일보다는 새로운 일을 알아내는 게 게임의 재미이지 않은가.
‘당장은 전쟁이 급해.’
그러나 게임이 아닌 현실이었기에 라트는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