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담배를 태우는 연금술사-215화 (215/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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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날카롭고 근엄한 목소리, 그러나 약간 어색한 목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고개를 들라.”

    왕의 허락이 내려지자 라트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왕좌에 앉아있는 것은 겨우 20세 중반쯤 돼 보이는 청년이었다.

    사라이의 전 국왕은 메인 퀘스트가 시작되고 한 달 안에 천수를 다하게 된다. 그런데 천수를 다한 국왕의 태자가 어째서 이렇게 어린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사라이의 공작인 슈텐바흐트가 원래 태자를 몰아내고, 후궁이자 자신의 여동생의 아들을 왕위에 올려놨다. 그게 바로 살라딘 케슈 메르아트 사라이다.

    ‘경험도 없고, 태자도 아닌 후궁의 자식이었으니 왕이 될 교육조차 받지 못했지.’

    왕의 자질이 아니다고는 함부로 평가할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은 왕으로서 적합하지 못했다. 다른 게 문제가 아니라 외삼촌이 국정을 농단하는 걸 막지 못하고 있으니까.

    ‘본인은 그게 마음이 들지 않아서 반항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서 글란츠 백작을 총애하는 거겠지. 외삼촌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여겨질 테니까.

    “경비병. 그리고 그린 자작. 전부 물러나게나.”

    “하, 하오나 전하. 그것은.”

    “걱정하지 마라, 그린 자작. 내가 전하의 옆에 있을 것이니.”

    알현실의 어두운 곳에서 한 남자가 저벅저벅 걸어 나오며 황금색 눈동자를 번뜩인다.

    묵빛의 갑옷을 입고,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으며 새하얀 머릿결을 찰랑거리는 남자는 라트와 구면인 자였다.

    “계셨군요, 글란츠 백작님.”

    그 정체는 바로 루드비히 폰 글란츠, 사라이 왕국의 유일한 오러 마스터였다.

    “그래. 오랜만이다. 이제는 엔스리드 백작이라고 불러야 하나.”

    예고도 없이 등장한 글란츠 백작의 모습에 케이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눈은 무서울 정도로 날카로워졌음을 깨달은 라트가 슬며시 그녀의 옆구리를 찔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글란츠 백작님.”

    그제야 정신을 차린 케이네가 떨리는 입술로 간신히 인사를 한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글란츠 후작님.”

    희미한 미소와 함께 딸을 글란츠 후작님이라고 부르며 정중하게 인사를 한 백작은 검을 허리춤에 찬 채로 왕좌 쪽으로 걸었다.

    “그, 글란츠 백작님 검을!”

    “짐이 허락한 일이다. 무어라 하지 말도록.”

    “……예.”

    검을 차고 있는 상태로 왕좌의 옆에 선다. 이것은 글란츠 백작이 살라딘 국왕에게 얼마나 신임을 받고 있는지 알려주는 행동이었다.

    “전부 물러나도록 해라. 긴밀히 해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

    “알겠습니다, 전하.”

    그린 자작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린 후 뒤로 돌아서자 알현실에 있던 경비병들 역시 인사를 한 후 밖으로 향했다.

    “이제야 편히 이야기할 수 있겠네. 에휴, 근엄한 척하느라 죽는 줄 알았다.”

    알현실에 4명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이 모두 나가자, 머리에 쓰고 있던 왕관을 왕좌의 팔걸이에 내려놓은 살라딘 국왕이 덥다는 듯 손부채 질을 한다.

    “전하. 체통은 조금만 지키시지요.”

    “뭐, 어때. 내가 망나니인 건 이 나라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데. 아, 엔스리드 백작은 몰랐군. 비밀로 해주겠어?”

    “물론이옵니다, 전하.”

    모르기는 무슨.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살라딘 국왕은 망나니인 게 아니라 아직 덜 여문 과일일 뿐이다.

    여물지 못하고 막중한 자리에 앉았으니 숨이 막히는 압박감을 항시 느끼고 있을 터. 그러니 저런 반동이 있는 건 당연했다.

    “국왕 전하께서는 여전하시네요.”

    “사람의 근본이 어딜 가겠어. 자리의 막중함 때문에 억누르고 있는 거지.”

    케이네의 말에 살라딘 국왕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구면이었구나.’

    게임을 할 때는 케이네라는 NPC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한 정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케이네는 묘하게 과거 이야기를 하기 싫어하는 편이라서, 물어볼 수도 없었고.

    “그럼 이야기를 좀 해볼까. 엔스리드 백작, 듣기로는 그대가 핀스크의 왕실에 흑마법사가 숨어들었다고 글란츠 백작에게 말해줬다고 했지.”

    살라딘 국왕에게 이 사실을 알린 건가. 뭐, 글란츠 백작님께서 알렸다면 분명 그럴 이유가 있었겠지. 그렇게 생각한 라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때는 마침 상황이 좋아서 설득할 수 있었으나, 약간의 거짓이 섞여 있었고 글란츠 백작 역시 그를 알아차렸었다.

    “흐, 흑마법사요!?”

    유일하게 이 사실을 모르던 케이네만이 경망스럽게 소리를 질렀으나, 라트가 잠시 후에 설명해주겠다고 말하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조사를 해봤는데 수상한 점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흑마법사는 굉장히 철두철미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라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킬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수상한 점을 발견하기는 굉장히 힘들 것이다.

    “단 한 가지만 제외하면 그랬다.”

    ‘한 가지 수상한 점을 발견했다고?

    이어지는 글란츠 백작의 말에 라트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번 겨울에는 주인 없는 산맥에서 몬스터가 내려온 적이 없었다.”

    주인 없는 산맥에 겨울이 찾아오면 몬스터는 필연적으로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산 아래로 내려온다. 그러나 이번 겨울에는 단 한 마리의 몬스터도 내려오지 않았다.

    “수상함을 느끼고 개인적으로 용병들과 암살자 길드에게 조사 의뢰를 했네. 그랬더니.”

    거기까지 말한 글란츠 백작은 품속에서 붕대에 묶여있는 무언가를 꺼냈다.

    “핀스크 왕국의 국경 쪽의 주인 없는 산맥에서 이런 걸 찾았다고 하더군.”

    붕대를 풀자 조잡하게 만들어진 인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인형으로부터 악독한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사제의 축복을 받은 붕대였나.’

    곧바로 붕대가 이 악독한 기운을 막아주고 있었음을 파악한 라트는 이내 글란츠 백작이 들고 있는 인형의 정체를 깨달았다.

    “……마리오네트.”

    “이 인형을 알고 있는가?”

    글란츠 백작은 인형을 가장 먼저 발견했으나, 내부 사정상 신전에 알릴 수는 없었기에 그 정체까지는 파악하지 못했는지 라트에게 물음을 던졌다.

    “흑마법 도구 중 하나입니다.”

    “그건 겉으로만 봐도 알 수 있네.”

    그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이런 사악한 기운을 내뿜고 있는 게 흑마법사의 도구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글란츠 백작이 알고 싶은 것은 이 도구의 쓰임새였다.

    “적절한 흑마법과 합쳐지면, 생명체를 마음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실에 걸린 인형처럼요.”

    마리오네트, 살아있는 생명체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마법을 사용하는 데 필요한 도구다.

    연금술에도 실을 이용해 인형을 조종하는 기술이 있기는 하지만, 저건 악질적인 도구였다.

    “그렇단 말이지.”

    대답을 들은 글란츠 백작은 다시금 인형에 붕대를 감았다.

    “핀스크의 국경 쪽에서 이런 걸 발견했으니 짐도 수상하다고 생각하는 중이긴 하다. 그렇지만 역시 증거가 부족해.”

    흑마법과 관련된 도구를 발견했다고 하나, 핀스크의 왕가가 흑마법사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다는 증거로는 한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짐은 셀룬의 동맹 제안을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핀스크 왕국에 흑마법사가 잠입해있다면, 셀룬과 싸우다가 모든 걸 잃을 수도 있으니까. 헌데.”

    ‘헌데?’

    조건이 있는 건가? 이번 동맹은 셀룬에게도 득이지만, 사라이에게도 득이 되면 득이 됐지 결코 실이 될 제안이 아닌데?

    “우리의 자세한 조건은 나중에 귀족들이 전부 모이면 이야기를 해봐야겠고 핀스크의 영토는 전쟁 이후에 나누면 되겠지만 말이야…….”

    살라딘 국왕은 묘하게 말을 끌면서, 글란츠 백작을 바라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이. 그리고 글란츠 백작이 확고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말을 마저 이었다.

    “사막은 무를 숭배한다네, 엔스리드 백작. 그리고 자네의 혁혁한 전공은 이곳까지 알려졌지.”

    ‘아아, 그런 건가.’

    살라딘 국왕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아차린 라트는 어째서 그가 말에 뜸을 들였는지 알 수 있었다.

    상식상 연금술사의 무력은 약하다. 그러나 글란츠 백작은 라트의 힘을 대략 짐작하고 있다. 린느탐보프에 있던 흑마법사들의 본거지를 습격한 게 라트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자네가 환영식을 보기 좋게 통과한다면 우리 귀족들이 셀룬의 제안을 더욱 긍정적으로 생각할 거야.”

    ‘그놈의 환영식.’

    정말이지, 무를 숭배하는 나라다운 발상이다. 자신의 힘을 증명하면 귀족들이 호의적으로 나올 거라니. 다른 왕국이라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환영식이라면 치르고 온 길입니다.”

    “뭐?”

    “헤이웨 자작이 덤벼들기에…….”

    “호오, 역시 헤이웨가 백작의 힘을 알아차렸나 보군.”

    글란츠 백작이 역시나, 라고 읊조리면서 고개를 주억였다.

    “결과는 어떻게 됐지?”

    “엔스리드 백작님의 승리죠 뭐. 헤이웨 자작을 제압하는데 걸린 시간은 으음, 5초 정도이려나?”

    5초, 그 대답에 살라딘인 입을 다물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케이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케이네의 눈이 흔들리지 않음을 보고, 그녀의 말이 사실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하하, 헤이웨를 고작 몇 초 만에 제압했다니.”

    글란츠 백작은 무엇이 낮은 웃음과 함께 당연하다는 듯이 결과를 받아들였고.

    “푸하하하하!”

    침묵을 지키고 있던 살라딘 국왕은 무릎을 치면서 폭소를 하더니 종극에는 배를 잡고 왕좌에 등을 맡겼다. 국왕치고는 꼴사나웠으나, 인간미가 느껴지는 웃음이었기에 그 누구도 뭐라 지적하지 않았다.

    “헤이웨 자작은 패배를 시인했나?”

    “그렇습니다.”

    “그럼 아무 문제 없겠네. 좋아, 좋아.”

    살라딘 국왕이 연식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다가 입을 다물자 라트가 입을 열었다.

    “질문이 있습니다. 흑마법사가 핀스크 왕국에 관련돼 있다는 건 두 분만 알고 계십니까?”

    “그건 아니야. 그래도 내가 신임하는 사람들한테만 알렸으니 손가락에 뽑을 정도밖에 몰라. 워낙 증거가 적어서 믿어줄지도 의문이잖아.”

    “확실히 그렇겠군요.”

    “신전이 나서준다면 고맙겠지만, 핀스크 왕국 쪽 신전이랑 연락을 해봤다지만,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하더라고.”

    “그렇습니까.”

    그거야 직접 만난 게 아니라 원거리 통신으로 확인했으니까 그렇겠지. 믿을 수 없겠지만, 흑마법사들이 신전에까지 손을 뻗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신전은 발칵 뒤집히게 된다.

    “그러니 내 생각은 이래. 셀룬과 연합해서 핀스크 왕국을 친다. 만약 핀스크에 진짜 흑마법사가 개입했다면 그 증거를 찾은 후 신전에 알려서 도움을 받는다.”

    신전에 보여줄 증거를 수집하는 거야 간단한 일이다. 당장 핀스크의 대도시에 있는 대신전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세뇌당한 사제들이 수두룩 할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핀스크 왕국을 멸망시키고 국토를 양분한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살라딘 국왕의 입장 상, 저런 말을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만약 흑마법사가 핀스크 왕국에 손을 대지 않았더라면 라트 역시 저렇게 말했으리라.

    “엔스리드 백작도 이런 생각으로 여기 온 거지?”

    “예.”

    “그럼 목적은 같다는 걸 확인했으니까. 이제 외삼촌만 어떻게 하면 되겠어.”

    외삼촌이라면, 슈텐바흐트 공작인데.

    “슈텐바흐트 공작님께서는 셀룬과 동맹하는 걸 반대하시는 건가요?”

    라트가 입을 열기 전에 케이네가 입을 열었다. 확실히 의문이다. 사라이는 셀룬과 싸우는 건 부담이 될 텐데, 왜 동맹을 거부하려고 하는 건가.

    “욕심이 워낙 많으신 분이라서 말이야.”

    그리고 살라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케이네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황당무계했다.

    슈텐바흐트 공작은 사라이가 노르스 대륙을 통일하길 바라고 있단다. 어찌 황당하지 않을까.

    “아뢰옵기 황송하지만, 셀룬과 사라이가 전쟁을 하면.”

    “나도 알아. 국가의 모든 걸 걸고 싸운다면 사라이가 지겠지. 그런데 그걸 이해하지 못하신단 말이야.”

    슈텐바흐트 공작은 굉장한 야심가였고, 지금 셀룬의 세력은 라트로 인해 비상식적으로 강해진 거다. 원래대로라면 사라이와 셀룬의 전쟁인 미쳐버린 루아타 공작과 글란츠 백작이라는 변수 덕분에 충분히 싸움이 됐다.

    “가끔은 내 자리를 넘보고 계시는 게 아닐까 궁금할 때도 있단 말이지.”

    “만약 슈텐바흐트 공작님이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면 제가 직접 그 목을 베겠습니다.”

    “말이라도 고마워, 글란츠 백작.”

    웃기지 않나. 외삼촌을 베겠다고 말하자 고맙다고 말하는 조카라니.

    그러나 감히 누구도 웃을 수 없었다. 허울뿐인 왕, 실제로는 외삼촌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꼭두각시이니 저런 불만을 품는 것도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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